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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139화 (139/242)
  • 139화

    “이쪽입니다.”

    안내인은 세심하고 친절했다.

    아이들의 걸음에 맞추어 느릿하게 복도를 지나, 탈의를 할 수 있는 공간까지 안내한 그녀는 불안해하는 아이들에게 웃는 얼굴로 덧붙였다.

    “문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낯선 이 앞에서 옷을 갈아입는 것을 꺼리는 어린아이들의 기분을 배려한 것이다.

    활짝 웃고 있는 안내인의 말에 마주 본 채 머뭇거리던 아이들이 갈아입을 옷을 갖고 탈의실로 들어섰다.

    두 아이가 얼추 옷을 입어 갈 즈음이었다.

    누군가의 고성이 문을 넘어 아이들의 귀로 흘러들었다.

    “여기, 내 손가락에 피가 났다니까!”

    “지금은 제가 안내를 돕고 있어 다른 안내인을 불러 드리겠…….”

    “어차피 여기 안에 있는 어린애들 이야기하는 거 아냐? 걔들한테는 다른 사람을 붙여 주면 되잖아! 난 지금 피가 나고 있다고!”

    “그렇지만…….”

    “감히 내가 그 거리의 시정잡배 출신들보다도 더 못하다는 거야? 이 파비안 벨로크가?”

    난처한 목소리와 고성이 번갈아 들리는가 싶더니 누군가의 걸음 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얼어붙은 채 밖의 소란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두 아이는 이윽고, 문을 열고 들어선 미인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경멸과 혐오를 담은 채 내려다보는 파비안 벨로크를.

    또각또각.

    그녀의 높은 구두 굽 소리에 움츠러든 아이들이 벽에 몸을 기댔다.

    “내가 오늘 너희 같은 천한 계집들 때문에 얼마나 망신을 당한 줄 알아?”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분노로 떨렸다.

    숱한 이들이 아름답다 칭송한 파비안의 푸른 두 눈에 불꽃이 튀었다.

    “예법이라고는 알지도 못 하는 천둥벌거숭이들을 이곳까지 데려온 것도 모자라서, 내 할머님의 반지까지…….”

    반지를 끼고 있는 손가락에는 옅은 피가 비쳤다.

    그래 봤자 하루 이틀이면 나을 수 있는 가벼운 상처였지만, 많은 이들 앞에서 경망스레 소리를 지르며 넘어졌으니 그녀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모욕이었으리라.

    “말해!”

    “…….”

    “그 계집이지?! 그 계집이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지?! 그 정령인가 뭔가로?”

    광기를 띤 파비안의 일그러진 얼굴은 더 이상 아름답게 비치지 않았다.

    그녀가 상처가 난 손을 두 아이에게로 뻗어, 오밀조밀하게 땋은 머리카락을 움켜쥐려던 순간이었다.

    “꺅!”

    열린 문틈으로 들어온 바람이 그녀의 드레스를 들추었다.

    그녀가 자랑하던 아름다운 실크 드레스가 바람에 휘날리며 맨다리를 드러내자 허둥지둥하던 파비안이 넘어졌다.

    그와 동시에 두 아이가 넘어진 파비안을 피해 방에서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거기 서!”

    날카롭고 새된 목소리가 아이들의 등 뒤로 흘러들었다.

    정신없이 달리는 아이들 앞에 어느새 반투명한 형체의 정령이 나타났다.

    까르르르.

    천진난만한 웃음소리와 함께 앞장서는 정령의 뒤를 의심 한 점 없이 따르던 아이들의 앞에 본 적 없는 좁은 통로가 나타났다.

    “여기가 어디야?”

    그제야 낯선 길로 접어들었음을 알아챈 미네가 당황한 얼굴로 자리에 섰다.

    어린 왕녀는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아직도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는 정령을 올려다보았다.

    “돌, 돌아가고 싶어.”

    박람회장은 기대한 것 이상으로 성대했다.

    난생 처음 보는 것들로 가득한 화려한 모양새에 취해 있던 아이들은, 파비안의 일방적인 적의를 받고서야 꿈에서 깨듯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

    “극장으로 돌아가고 싶어.”

    그곳에서는 차림새로 출신을 평가받지 않았고, 예법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짐승 취급을 받지도 않았다.

    “리리.”

    두 아이의 시무룩한 얼굴을 보면서도 정령은 여전히 그들을 도로테아에게 데려다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우린 돌아가고 싶어.”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데다, 넓은 건물 안은 미로 같아서 도무지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두 아이는 반쯤 체념한 얼굴로 좀 전부터 깊숙이 들어가고 있는 정령의 뒤를 따랐다.

    실컷 놀다 싫증 나면 그때는 돌아가겠지.

    그렇게 걷고 걸어 이윽고 인기척 하나 없는 깊숙한 통로 어귀에 다다른 정령은, 독특한 이음새로 연결된 문에 다다랐다.

    끼이이, 정령의 손짓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리리?”

    이내 쏙, 문 안쪽으로 사라진 정령을 따라 들어선 순간이었다.

    “우와…….”

    “……!”

    오색찬란한 색의 진귀한 물건들이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박람회장에 전시되어 있던 물건들만큼이나 놀랍고 신기한 볼거리들에 아이들의 입이 자연스럽게 벌어졌다.

    황금빛을 내는 아름다운 왕관. 눈을 뗄 수 없는 섬세한 그림. 신비로운 빛을 뿜어내는 구슬.

    그 외에도 다양한 물건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 어, 어?”

    어느새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조차 잊고 두리번거리기에 바쁜 아이들의 몸이 두둥실, 공중에 가볍게 떠올랐다.

    당황한 듯 버둥거리는 아이들을 띄운 정령은 방 한구석에 있는 작은 철제 상자 안에 아이들을 내려놓았다.

    어안이 벙벙한 듯 고개를 내민 아이들의 위로 두터운 뚜껑이 비스듬히 덮였다.

    반쯤 가린 상자 바깥으로 손을 내미려던 찰나였다.

    “어디 갔지? 분명 여기로 오는 걸 봤는데!”

    짜증이 가득 담긴 낯익은 목소리에 미네가 멈칫 손을 내렸다.

    두 아이를 필사적으로 도망치게 만들었던 파비안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정령의 힘을 사사로이 쓰는 것은 재판에 회부될 만한 중죄야. 두고 봐. 제아무리 하이클레어 후작이라 하더라도 이런 일까지 덮을 수 있을지. 폐하께서도 생각이 있으시다면…….”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여긴 뭐야?”

    열려 있는 문을 발견한 듯 의아하게 중얼거리던 그녀가 이내 방 안으로 들어섰다.

    “……!”

    아이들은 비스듬히 열린 상자의 틈으로, 무엇에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다물지 못하는 파비안을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의아한 기색으로, 그다음에는 놀라운 듯한 얼굴로 방 안의 물건을 살피던 그녀의 안색이 점차 창백하게 굳었다.

    당황한 듯 뒷걸음질 치는 그녀의 입에서 횡설수설 알 수 없는 말들이 튀어나왔다.

    “말도 안 돼. 여기 있는 물건들은 설마……!”

    바로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의 우악스러운 손이 창백해진 파비안의 입을 틀어막은 것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입이 틀어막힌 파비안의 몸이 이내 축, 늘어졌다.

    숨을 죽인 채 그녀를 관찰하고 있던 아이들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복도에 사람들을 더 세워 둬. 이곳까지 들어오다니. 귀찮게 됐군.”

    냉랭한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짧게 네, 하고 답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문밖으로 질질 끌려 나가는 파비안의 모습을 확인한 아이들은 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창고로 들어선 남자가 매서운 눈으로 방 안을 꼼꼼히 살폈다.

    혹시 사라진 물건이나 그녀와 동행한 인물은 없는지 확인하는 듯했다.

    뚜벅뚜벅, 방 안을 거니는 발걸음이 두 아이의 귀를 위협적으로 두드렸다.

    상자 안에 웅크린 아이들은 차마 남자의 얼굴을 확인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숨을 참고 웅크리고 있었다.

    “오라버니.”

    숨어 있는 상자 지척까지 왔던 발걸음이 누군가의 가냘픈 부름에 멈췄다.

    “이곳에 오지 말라 하지 않았더냐.”

    “좀 전에 사람들이 벨로크 영애를 데려가는 걸 봤어요.”

    “아아, 쓸데없이 호기심이 왕성해서는. 이곳까지 들어올 줄이야. 일이 귀찮게 되었어.”

    “그녀는 백작의 하나뿐인 딸이에요.”

    “이곳을 봤으니 그대로 돌려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냐.”

    냉정한 목소리에 여자가 침묵했다.

    불안 가득한 여인을 달랠 생각이었는지 남자가 그녀의 어깨를 잡고 다독였다.

    “괜찮아. 만일의 경우에는 덮어씌울 만한 적당한 인물이 있으니.”

    “…….”

    “옷이 흐트러졌구나. 감정을 가라앉히고 나오너라. 네가 불안해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면 곤란해.”

    남자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여인을 챙기고는 누군가에게 지시를 내리려는지 빠르게 사라졌다.

    문이 닫히고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긴장이 풀린 어린 왕녀는 저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한 번에 내쉬었다.

    뒤늦게 미네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소녀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소용없었다.

    비스듬하게 열려 있던 상자의 덮개가 활짝 열렸다.

    “너희는 후작 영애의…….”

    청초한 분위기의 여인이 창백한 낯빛으로 아이들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두 아이가 누군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여인은 우울한 눈으로 아이들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인지 한참을 바라보던 그녀가 상자 안으로 손을 뻗었다.

    순간 있는 힘껏 몸을 웅크린 미네는 제 머리 위로 느껴지는 온기에 당황해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

    여인은 손을 뻗어, 도망치느라 엉망이 된 아이들의 머리를 다정하게 쓸어 주고 있었다.

    “겁먹을 것 없어. 이리 나오렴.”

    천천히 고개를 든 미네와 달리 어린 왕녀는 여전히 웅크린 몸을 펴지 못했다.

    잠시 아이를 바라보던 여인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단단히 닫힌 문을 살피고는, 잘근잘근 씹느라 엉망이 된 입술을 뗐다.

    겁을 잔뜩 먹은 채 어쩔 줄 모르는 아이를 진정시키려는 듯 나지막한 흥얼거림이 이어졌다.

    처음 들어 보는 언어와 멜로디에 미네가 어느새 초롱초롱해진 눈으로 여인을 응시했다.

    울지 마라, 나의 작은 꽃아.

    오늘은 너를 위해 달님이 노래를 준비했단다.

    해가 다시 나올 때까지 네 친구가 되어 줄 거야.

    나지막한 목소리에 웅크리고 있던 왕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동그래진 눈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듣기 힘든, 모국의 언어로 된 노래였다.

    잠투정이 심하던 그녀에게 유모가 불러 주었던 자장가.

    침대 맡에 함께 누워 흥얼거리고는 했던 오래된 기억이 새록새록 솟아올랐다.

    그러나 희미하고 가늘게 이어지던 노래는 금세 끊겼다.

    상자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민 두 아이는, 창백한 여인의 시선이 방 한가운데에 걸린 커다란 그림을 향해 꽂혀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벽을 가득 채울 정도로 커다란 그림 안에는, 아들을 품에 안은 채 자애로운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여인이 그려져 있었다.

    그 자리에 한참을 서서 그림을 바라보던 여인이 나지막이 물었다.

    “나가는 길을 알 수 있겠니?”

    귓가로 흘러드는 미미한 바람이 느껴지자 미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으로 몸을 피하게끔 도와준 리리가 다시 그녀들을 박람회장으로 돌려보내 주리라.

    “그래, 밖에서 문을 지키고 있는 이들은 내가 다른 곳으로 보낼 테니 최대한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 너희의 보호자를 찾아가렴.”

    문을 향해 가려던 걸음을 멈춘 여인이 아이들을 돌아보며 당부했다.

    “이곳에 들어왔던 일을 그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 돼. 알았니?”

    “…….”

    “후작 영애가 위험해질 수도 있단다.”

    이 세상에 ‘아가씨’를 위험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

    두 아이들 모두 여인의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창백한 얼굴에 아주 잠깐이나마 미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천천히 문을 열고 나간 여인이 밖에 있던 이들을 향해 말을 거는 것이 들렸다.

    목소리는 아주 작고 희미했기에 그들 사이에 오고 가는 대화를 듣기는 힘들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문 앞의 인기척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리리.”

    주변을 맴돌고 있었는지 금세 모습을 드러낸 정령은 두 아이를 상자에서 꺼내어 주었다.

    “돌아가야 해.”

    “아가씨가 기다리실 거야.”

    장난스런 웃음을 얼굴에 가득 매단 채 주위를 뱅뱅 맴돈 정령은, 두 아이를 방으로 인도했을 때처럼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은 옷을 갈아입었던 탈의실의 문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   *   *

    옷을 갈아입으라며 아이들을 보낸 도로테아는, 체념한 듯한 눈을 한 윌리엄과 함께 박람회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확실히 보기 힘든 물건들이 많긴 하네. 꽤 먼 곳까지 다녔나 봐.”

    “그는 좋은 물건들을 수집하는 욕구가 있으니까. 한곳에 오래 머무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오래 머무는 걸 싫어하는 인간이라면 굳이 귀족들의 환심을 사려 수집한 물건들을 내보일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동대륙에서 흘러든 것으로 보이는 익숙한 양식의 장식을 유심히 바라보는 도로테아를 힐끗 바라본 윌리엄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사람들이 너무 거리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은 좋지 않아.”

    “응?”

    “너는 이미 충분히 눈에 띄어. 신분으로도, 외관으로도. 지금까지는 후작가라는 배경이 있으니 괜찮았을지 모르겠지만…….”

    “지나치게 ‘다른 존재’로 보이게끔 하지 말라?”

    웃음기 어린 물음에 윌리엄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나와 동급이거나 그 이하로 여길 수 있는 ‘존재’라면 상관없을 일이다.

    언제든 공격할 수 있고, 내가 무너뜨릴 수 있는 존재에게 위협을 느끼진 않을 테니까.

    하늘하늘, 가냘프기 짝이 없는 몸을 가진 소녀는 이상하리만큼 상대를 주눅 들게 만드는 묘한 위엄을 지녔다.

    황제의 앞에 설 때 자연스레 숙여지는 고개처럼.

    ‘그렇기에 미움을 사게 되는 것이지만.’

    도로테아라는 어린 영애가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정령사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 힘의 위력을 직접 목격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조심스런 충고에 붉은 자기 그릇에서 눈을 뗀 도로테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파비안 영애의 일이라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설령 네가 한 일이 아니라도 그렇게 보이게끔 만들었잖아.”

    미리 충고해 주거나 그 사실을 다른 이를 통해서라도 귀띔해 주었으면 오히려 감사의 인사를 받았을지도 모를 텐데.

    “글쎄, 감사했을까?”

    어딘가 서늘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에 윌리엄이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도로테아 하이클레어는 감정 없는 인형 같은 얼굴로 대나무 젓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병을 앓느라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는 하나, 그녀의 아버지인 벤은 그녀를 끔찍이 여겼다.

    그녀의 전속 시녀인 제인 또한 오래전부터 도로테아를 성실히 모셔 왔고.

    그뿐만 아니라 그녀의 외조모, 외조부를 필두로 후작가의 식솔들 모두가 그녀를 끔찍이도 위하지 않는가.

    그토록 사랑받고 자랐음에도 인간을 향한 그녀의 냉소적인 시선은 도대체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병약하기는 하나 명석하기로 유명한 황자는 그 이유를 끝내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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