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도로테아가 일행과 함께 박람회장 안에 들어선 순간, 수많은 이목이 그들을 향했다.
그녀의 양손을 각각 잡고 있는 작은 두 소녀는 쏠리는 시선에 지레 겁을 먹고 드레스 뒤로 숨었다.
그러나 박람회장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은 샛노란 원피스 차림의 어린 소녀들보다, 파스텔 톤의 드레스를 갖춰 입은 도로테아에게로 향해 있었다.
“저기 봐요. 하이클레어 후작가의…….”
“곁에 있는 아이들이 예의 그 거리 출신이지요? 아무리 그래도 황자님께서 개최한 박람회에 저 아이들을 데려오다니.”
“과연 기세가 아주 등등하군요.”
“후작께서 정정하시니까요. 폐하께서는 후작을 지나칠 정도로 신임하시고요.”
들으라는 듯 떠들어 대는 소리에 도로테아는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폐태자(廢太子)의 일로 제국의 그림자가 생각보다 짙었다는 게 분명해졌지만, 그것보다 더한 문제는 바로 굳건하던 후계 자리가 비었다는 것이다.
황권이 흔들리자 제국의 저력을 얕보는 주변 국가마저도 연이어 들썩였다.
그런 상황에서 황제에게 후작의 존재만큼 절실한 것이 있을까.
‘불만 있는 귀족들을 견제하는 패로도 그럴싸하고.’
대놓고 황실과 반목할 수 없으니 그의 검인 후작에게 불만이 쏠리는 것이야 당연했다.
말로만 친우라지.
황제는 본인의 가장 오랜 정치적 우방이자 지지자를 불편한 시선으로 가득한 자리에 밀어 넣고도 미안해하는 기색 하나 없었다.
‘그리 뻔뻔한 건 핏줄 내력인가.’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고.
황자들이 하나같이 덜떨어진 데에도 이유가 있겠지.
후작의 강력한 영향력을 질시하는 귀족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도로테아를 향해 내리꽂혔다.
할 줄 아는 것은 없으면서 조잘조잘 입만 산 이들의 속살거림을 모른 척, 그녀는 아이들을 이끌고 천천히 박람회장을 가로질렀다.
“와…….”
크리스털로 장식된 아름다운 내부를 보는 아이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국적인 색채가 강한 테이블보와 독특한 식기들, 아름다운 그림들이 곳곳에 즐비했다.
“에드윈 소공자가 아니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밀러 경.”
어느새 후작의 지인으로 보이는 귀족에게 잡힌 에드윈을 흘긋 바라보던 도로테아는 미련 없이 그를 버리고 돌아섰다.
애초에 에드윈의 용도는 저를 지나치게 과보호하는 집안 어르신들을 막을 방패막이였으니, 여기 와서까지 함께 있을 필요는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뜬 도로테아가 목표물을 찾아 주변을 훑었다.
딱히 윌리엄이 원한 것은 아니겠지만, 황제를 대신하여 이곳에 참석했으니 적어도 ‘개막식’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어디에 숨어 있으려나.”
행동이 굼뜨긴 해도 머리가 잘 돌아가는 편이니, 자기를 잡으러 추격꾼이 왔다는 사실 정도는 진작 눈치챘을 터.
도로테아는 구경에 여념이 없는 소녀들의 손을 잡고 넓은 회장을 한 바퀴 돌았다.
사람을 찾는 그녀의 분주한 걸음에 덩달아 아이들의 걸음이 빨라졌다.
“앗.”
늘 자신보다 월등한 신체 조건을 갖춘 사람들과 다녔던 도로테아가 두 아이의 버거움을 눈치챌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종종걸음으로 뒤를 쫓던 어린 왕녀는 그만 발을 헛디뎌 주변의 테이블보를 잡고서 넘어졌다.
와장창.
요란한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에 있던 접시와 잔들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
스스로가 친 사고에 놀란 아이가 멍하니 굳었다.
같이 넘어진 미네도 덩달아 당황해 굳은 얼굴로 눈치를 봤다.
잔에 담겨 있던 음료가 쏟아져 엉망이 된 테이블보는 물론이고, 깨진 접시들이 바닥 이곳저곳으로 흩어진 것이 보였다.
멀리서 직원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도로테아는 가만히 엉망이 된 물건들을 굽어보다 흠, 하고 아이를 살폈다.
“다친 곳은?”
“네?”
혼이 날까 움츠렸던 어린 왕녀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걱정과 염려와 같은 따뜻한 시선은 없었지만 그렇다 하여 분노나 귀찮음도 없었다.
그저 아이들의 상태를 확인하고자 하는 차분한 어조였다.
“아…….”
외마디 말만 내뱉은 채 꾹 닫힌 입을 보던 도로테아가 다시금 물으려던 차였다.
“아무리 열린 공간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손님을 받을 때에 어느 정도의 융통성은 있어야 하지 않나요?”
누군가의 뾰족한 목소리가 시끄러운 회장을 가로질러 날아들었다.
그와 함께 어수선하던 회장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사르륵, 드레스 자락이 끌리는 소리와 함께 나타난 화려한 미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못마땅한 듯 도로테아와 아이들을 흘겼다.
“하긴. 애초에 본인들이 어울리는 장소인지 아닌지 판단조차 하지 못한 채 들어온 이들이 문제일지도.”
차륵.
얇은 부채를 펴는 소리에 미네의 몸이 움찔했다.
도로테아는 어린 왕녀를 살피기 위해 굽혔던 몸을 천천히 펴고 일어섰다.
그러고는 뒤를 돌아 제게 시비를 걸어오는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보았다.
‘전 재상의 조카였던가.’
가장 큰 세력을 갖고 있던 황태자와 3황자가 동시에 불명예스럽게 황실에서 퇴출되며, 그녀가 적으로 돌린 귀족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특히 상류 계급이라 불리는 가문들 가운데에서도 명망 있고 평판 좋은 귀족들이라면 더더욱.
적의에 불타는 시선을 마주한 도로테아가 느릿하게 물었다.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다라. 저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신가요?”
“글쎄요, 저는 정론을 말한 것뿐이라서요. 다만 후작 영애께서 제 말에 신경이 쓰이신다면 그럴 까닭이 있으신 거겠지요.”
비꼬는 목소리에 아이들은 더욱더 움츠러들었다.
도로테아는 제 드레스 뒤로 숨는 소녀들을 모른 척 입을 열었다.
“영애는 참으로 아름다운 실크 드레스를 입으셨군요.”
대놓고 시비를 거는 이에게 뜬금없는 칭찬이었다.
그녀가 건넨 뜻밖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것도 잠시였다.
아름다운 외모와 훌륭한 가문만큼이나 높은 자부심을 가져 사교계의 꽃으로 군림하는 파비안 벨로크의 눈에 경계심이 어렸다.
‘무슨 뜻이지?’
설마 트집 잡을 거리라도 찾아낸 건가.
‘그럴 리가.’
이 실크 드레스는 외국의 상인에게 사들여 이름 있는 장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이다.
문제가 있을 리 없었다.
고개를 더욱 꼿꼿하게 든 파비안이 한층 맹렬하게 상대를 비난했다.
“그에 비해 영애가 데려온 아이들의 옷차림에는 문제가 많아 보이는군요.”
아름다운 조명보다도 더 튀는 샛노란 빛깔은 둘째치고, 꽉 조이기는커녕 헐렁하게 늘어진 허리선하며 부풀림 하나 없는 소매라니.
민가에서나 볼 법한 차림새였다.
아이들의 신분이야 그렇다 쳐도 차림새 정도는 갖춰 데려와야 할 것이 아닌가.
“황실이 지불한 배상금이 제법 크다 들었는데요. 벌써 그 돈을 다 써 버린 건지, 아니면 써 본 적이 없어 돈을 쓰는 법을 모르는 건지.”
적나라한 말에 누군가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흔히 볼 수 없는 광경이니 다들 숨을 죽인 채 그들의 대화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도로테아는 딱히 불쾌한 기색 없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돈이라면 차고 넘치게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오늘 저와 일행의 차림은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해요.”
그녀의 시선이 파비안의 검지에 끼워진 에메랄드 반지로 향했다.
영롱한 초록빛의 반지에 쏠린 시선에 파비안이 주춤했다.
“뭐, 뭐죠?”
“저라면 그 반지를 계속 하고 있지 않을 것 같아서요.”
“이건 제 외조모께서 물려주신 물건입니다. 당치도 않아요!”
“그렇다면야.”
싱긋 웃는 얼굴에서 어쩐지 불길함이 느껴졌다.
파비안은 도로테아가 웃을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한 걸음씩 물러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꽤 오래전부터 도로테아의 주변에 돌던 소문들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모욕을 주거나 잘못을 저지른 이들에게는 이상할 정도로 가혹한 일이 일어나곤 한다던 괴담을…….
‘뭐, 뭐야.’
도로테아는 어느새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아이들을 향해 말을 건네고 있었다.
“저런. 옷에 음료가 살짝 묻었구나.”
“죄송해요.”
“아냐, 이건 모두 윌리엄의 잘못이야. 내가 찾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숨어 버렸으니, 내가 그를 찾아 헤매느라 걸음이 빨라졌잖니.”
그러니 2황자를 찾기만 한다면 이 모든 것들을 갚으라고 1년 치 외궁 유지비 정도는 뜯어 볼까.
오늘도 황자를 등칠 생각을 하며 도로테아가 관대하게 입을 열었다.
“옷을 갈아입고 오는 것이 좋겠다. 비록 조금이지만, 묻은 채로 다니면 찜찜할 테니.”
아이들은 이미 시무룩해져 있었다.
좀 전에 들었던 폭언 때문임을 안 도로테아가 살짝 고개를 기울여 파비안 쪽을 바라보았다.
“신경 쓸 것 없어. 좀 전에도 말했듯,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은 너희나 내가 아니라 그녀거든.”
“그렇지만…….”
그때였다.
막 자리를 떠나려던 그들의 뒤로 여자의 새된 비명 소리가 울렸다.
“말도 안 돼. 내 반지!”
웅성거리는 소리와 동시에 주저앉은 파비안에게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동시에 도로테아에게도 쏠리는 꺼림칙한 시선들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뒤돌아보지 않았다.
어리석기는.
오늘같이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날, 실내에 크리스털로 조각된 샹들리에가 있는 박람회장에 에메랄드 반지라.
열과 빛에 약한 보석이 온통 반사판으로 가득한 실내에서 견딜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균열이 가는 것으로 그치면 다행이지만 보석의 품질이 좋은 만큼 아마도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심지어 몸에 딱 달라붙는 실크 드레스까지.’
사람들로 가득 차 열기 가득한 곳에서 통풍조차 되지 않는 실크 드레스는 피부를 고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반나절만 지나도 빨갛게 달아오른 피부로 며칠은 고생할 테지.
‘귀족들이란.’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알 수 있는 사실을 허영에 눈이 멀어 보지 못한단 말이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아이들의 손을 잡아끈 도로테아가 직원을 불렀다.
“옷을 갈아입히고 싶은데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막 회장을 나서려던 그때였다.
그녀의 시야에 익숙한 머리통이 사람들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아하.”
안 보인다 했더니 오늘따라 주변에 잔뜩 날파리를 데리고 오셨겠다?
목표물을 찾아낸 도로테아가 환하게 웃고는 두 아이를 향해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미안하지만 할 일이 생겨서 그런데 둘이서 옷을 갈아입고 올 수 있을까? 여기 직원의 안내를 따라가면 금방일 거야.”
보호자가 있는 편이 좋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하이클레어 후작가에서 후원하는 아이들에게 손을 댈 만큼 간 큰 사람이 있으랴.
파비안의 꼴을 본 귀족이라면 오히려 슬금슬금 피할 테지.
여차하면 쓸 패도 있고.
도로테아의 말에 눈을 깜빡이던 미네가 이내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 수 있어요.”
“좋아, 다녀오렴.”
손을 잡은 두 아이가 직원의 뒤를 따라 복도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도로테아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색한 듯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있는 윌리엄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가 손을 들어 살랑살랑 흔들었다.
‘또 내 앞에서 도망가면.’
곤란해질 거야.
웃는 얼굴에서 들려오는 무언의 경고에 윌리엄이 굳었다.
어느새 제 곁으로 다가와 있는 에드윈이 그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저래 보여도 황자님을 꽤 아끼는 편입니다.”
“그것참, 고마운 말이로군.”
“제국에서 가장 별난 두 사람의 사랑을 듬뿍 받고 계시잖습니까.”
전장의 미친개로 소문난 7황자와 하이클레어 가문의 금지옥엽.
윌리엄은 오늘따라 더욱 창백한 안색으로 제 어깨를 다독이는 에드윈을 향해 조용히 물었다.
“그 사랑, 자네가 대신 받는 것은 어떤가?”
“안타깝게도 저는 황위 계승이 불가능합니다, 전하.”
웃고 있는 에드윈의 얼굴을 본 윌리엄은 처음으로 병약한 몸을 핑계로 주먹을 휘두를 수 있는 근육을 기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홍해와 같이 갈라지는 사람들 사이로 도로테아가 사뿐사뿐 걸어오고 있었다.
“벡 영식, 에크만 자작님. 두 분께서 오붓한 대화를 나눌 수 있게끔 저희는 자리를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만.”
부드러운 에드윈의 권유에 곁에 있던 이들이 소리 없이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좀 전까지만 해도 그의 곁에 붙어 있으려 안달이던 귀족들의 태세 전환에 윌리엄은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이윽고 도로테아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에, 그의 주변에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방금 전 괜스레 몇 마디 시비를 걸었다가 결국 울면서 뛰쳐나간 파비안의 모습을 본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허망하군.’
제 한 몸 희생하여 나를 지켜 줄 지인 하나 없다니.
윌리엄은 얕고 좁은 본인의 인간관계에 회의를 느끼며 제게 내밀어진 곱고 하얀 손을 잡고 가볍게 키스했다.
그러고는 체념 어린 웃음기와 함께 가볍게 소녀를 타박했다.
“평판 관리는 안 할 생각이야, 이 아가씨야?”
“하고 있잖아. 이렇게 사람들이 알아서 자리도 피해 줄 만큼 존경받고 있는걸.”
“…….”
하기야 제가 편하면 남들이 무어라 말을 하든 상관하지 않을 녀석이니.
결국 쓴웃음과 함께 두 손을 든 건 윌리엄 쪽이었다.
“하아…… 그래서, 이번에 날 찾은 이유는 뭐야?”
보나마나 생각하고 싶지도 않을 골치 아픈 일을 가지고 왔을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