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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137화 (137/242)

137화

모처럼 외출복을 차려입은 도로테아가 호위를 대동한 채 극장을 찾았다.

극장의 분위기는 여전히 화기애애했다.

찾는 이들 또한 적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다만 전과 같이 빽빽 들어찬 관객들의 열광적인 성화는 보기 힘들었다.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극에도 이제 다들 익숙해진 것이다.

도로테아의 곁에 선 우드는 드문드문 보이는 빈 좌석들이 신경 쓰이는 듯 흘끗거리고 있었다.

“극이 재미없어?”

“……딱히 재미있지도, 없지도 않다. 그저 극이 극이지.”

우드의 무뚝뚝한 말에 도로테아가 싱긋 웃었다.

좀 전부터 사람들의 얼굴을 살펴 가며 반응을 확인하고 있던 이 무뚝뚝한 남자는, 곧 죽어도 제가 이 극단의 흥망을 신경 쓰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터였다.

도로테아가 언제나처럼 그를 놀리려 몇 마디 던지려던 찰나, 근처에 앉은 나이 지긋한 노부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며칠 전부터 셰런이 박람회에 가고 싶다고 조르던데요.”

“아아, 4황자 전하께서 개최하시는 것 말이지.”

“먼 타국에서 가져온 희귀한 물건들이 가득하다더군요. 아이들 모두 기대에 찬 눈치예요.”

은근한 목소리가 긍정의 답을 종용했지만, 듣고 있는 노신사는 불편한 기색으로 망설이고 있었다.

“볼거리가 많을 수는 있겠지. 다만 4황자 전하께서 요즘 보이시는 행보가…….”

“박람회에는 많은 귀족들이 참석할 거예요. 정치적인 입장을 표명하라 강요받은 것도 아닌데, 그저 구경하고 즐기는 것으로 꼬투리가 잡히겠어요?”

“값비싸고 진귀한 것들을 모은 것도 모두 4황자비의 집안 덕분이 아니오. 수단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버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는 치들이니, 어울리기에 격이 맞지 않소.”

내키지 않는 기색의 까닭은 4황자비의 출신으로부터 기인한 모양이었다.

지금의 폐태자가 공고한 후계자로서 굳건했을 때만 하더라도, 4황자는 정치적 기반 없이 타국을 떠돌 뿐인 세력 없는 황자였다.

그러나 황태자가 폐위되고, 제국의 정세가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황제는 황자들을 불러들였다.

그렇게 들어온 4황자는 그동안 쌓아 온 타국 상인들과의 ‘인맥’으로 황도를 연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중이고.

“황자 전하께서는 황실의 일원이라는 자각이 없으신 게 아닌가.”

노신사의 말이 지나치다 여겼는지 부인이 팔을 툭 치며 눈을 흘겼다.

“당신도 참. 후작가의 영애가 운영하는 극단에 오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고요?”

어이없다는 그녀의 물음에 신사는 헛기침과 함께 빠르게 반박했다.

“이 또한 문제 될 여지야 많지. 하나 이건 어디까지나 자선 사업의 일환이니…….”

엄연히 황제가 재가한 사업이었다.

“빈민들에게 기회를 준다는 취지도 있고, 수입의 일부를 변경의 군에 지원한다 들었소.”

“그도 그러네요.”

“그에 비해 박람회는 어디까지나 희귀한 물건들을 구해다 파는 상인들의 난전이 아니겠소? 4황자씩이나 되는 인물이 벌일 일이 아니지. 격이 다르오.”

제법 조목조목 근거를 드는 남편의 말에 반박할 생각이 없는지 부인은 다시 공연이 이어지는 무대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도로테아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주가 촘촘하게 박힌 레이스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사륵사륵 소리를 냈다.

미끄러지듯 자연스러운 걸음걸이는 일체의 과함이 없이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 뒤를 따르며 호위 중인 우드의 기분이 묘했다.

‘격이라.’

조금 전의 대화 탓일까.

새삼스럽게 눈앞의 종잡을 수 없는 소녀가 귀족 영애, 그중에서도 상류층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렇게 보면 확실히 또 다르단 말이지.’

예전이었다면 타고난 품격이니, 종자가 다르니 하는 신사의 말에 코웃음 쳤을 터였다.

출생 신분 따위로 사람의 격이 결정될 리 없다고 여기면서.

그러나 도로테아를 만나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어쩌면 그 인간의 품격이라는 것이…….

상념에 잠긴 우드보다 한 걸음 앞서가던 도로테아가 대기실의 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를 발견한 단원 일부가 쪼르르 달려와 앞에 넙죽 엎드렸다.

“오셨습니까, 아가씨!”

“…….”

인간의 품격이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저기에 ‘아가씨’ 대신 ‘누님’이라는 글자만 들어가면, 어디 골목길 왈패들 사이에서나 볼 법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데도.

‘귀족’의 격이라고?

언제 봐도 적응되지 않는 장면에 찜찜한 기색을 지우지 못한 우드의 시야로 멀리서 달려오는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우렁찬 인사를 건네는 이들을 헤치고서 다가온 레번이 무릎을 꿇은 채 장부를 내밀었다.

“이달에 들어온 금액입니다.”

“응.”

적당히 장부를 훑는 사이, 긴장한 듯 이마에 땀을 단 레번이 침울하게 고개를 숙였다.

“면목이 없습니다. 최근 여기저기서 흘러든 상인들의 공세에 극장에 드나드는 손님들이 줄었습니다.”

“응.”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님들의 발길을 다시 돌리겠습니다.”

결연한 표정을 한 레번의 말에, 마지막 장에 기입된 총 수입을 확인한 도로테아가 장부를 덮었다.

“신경 쓰지 마.”

“그렇지만…….”

“애초에 그럴 목적으로 만든 것만은 아니었어. 내가 그랬잖아.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해 주겠다고.”

그녀의 말에 곳곳에서 감동 어린 시선들이 쏟아졌다.

묘하다.

그녀를 둘러싼 이 분위기는 여전히 묘했다.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풍경 속에서 장부를 가볍게 내려놓은 도로테아가 자리에 앉았다.

“공연은 지금이 좋아. 하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과하지 않을 만큼.”

의욕이 지나쳐 자극적인 요소만을 늘어놓는다 한들 오히려 반감을 끌어내기 마련이었다.

체면치레에 연연하는 귀족들로서는 흥미로우면서도 그들만의 ‘선’을 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니까.

“그,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레번이 고개를 끄덕이자, 도로테아는 어느새 곁에 앉은 미네를 쓰다듬으며 보이지 않는 이의 행방을 물었다.

“그 아이는?”

나지막한 물음에 멀리서 쭈뼛쭈뼛 다가오는 조그마한 인영이 보였다.

벌떡 일어난 미네가 소녀의 손을 잡아끌고 도로테아 앞으로 데려왔다.

“…….”

입술을 달싹이는 모양새가 저도 뭐라 말을 꺼낼지 몰라 어쩔 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여전히 이곳에서 겉돌고 있는 건가.

그도 그럴 것이, 극단에서 아이의 위치는 묘했다.

무려 황자가 뒤에 있는 데다, 극성맞은 아버지를 두고 있는 아이는 누가 봐도 물 한 방울 묻혀 본 적 없이 귀하게 자란 티가 역력했다.

말투부터 행동거지, 입고 먹는 것까지.

모든 것이 차이가 나는데 어찌 쉬이 어울릴 수 있을까.

함께 생활한 지 몇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제 방에 틀어박혀 지내는 모양이었다.

‘좀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라 이곳에 데려다 놓았건만.’

강요해서 될 문제가 아님을 알지만 계속 이렇게 두는 것도 아이의 장래에 좋지 못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아이에게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 ‘아버지’가 보였다.

‘진즉에 떼어 놓을 것을 그랬나.’

저의 충심 가득한 보호가 아이를 더욱 고립시키고 주눅 들게 한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물끄러미 소녀의 상태를 관찰한 도로테아는, 생글거리는 미네와 아이를 번갈아 보다 입을 뗐다.

“곧 근처에서 성대한 박람회가 열린단다.”

고개를 드는 아이의 눈에 의아한 빛이 어렸다.

“4황자비께서 직접 주최하는 박람회인지라 많은 볼거리들로 가득할 거야.”

도로테아가 제 손을 펴 반질반질한 조개껍데기를 엮은 팔찌를 보여 주었다.

바다가 없는 내륙에서는 보기 드문 팔찌에 두 소녀 모두 눈이 동그래졌다.

“구경하러 가지 않으련?”

머뭇거리던 아이가 홀린 듯 팔찌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윽고 한참 후, 머뭇거리던 입에서 조그마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   *   *

“생각보다 그 아이를 많이 신경 쓰는군.”

“응?”

툭, 던진 우드의 말에 앞서가던 도로테아가 고개를 돌려 제 호위를 바라보았다.

“망명한 왕녀라고는 하나 세력 하나 없는 데다 너를 곤란하게 만들 뻔한 아이가 아니냐.”

심지어 제 신분을 속이고 기만하기까지 했지.

물론 호위 기사의 과잉 충정이 원인이었다고는 하나, 목숨을 구해 준 이에게 자신의 정체조차 말하지 않은 탓에 아무것도 모르는 메릴린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았던가.

“이름을 빌려 갔잖아. 적어도 그것을 사용하고 있는 이상, 그 값은 치러야지.”

지금쯤 활발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을 ‘가짜 헤일런’을 떠올린 도로테아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가끔은 저 아이에게서 나를 봐.”

“뭐?”

이제는 기억에서조차 흐릿해져 버린 나의 옛 모습.

새까만 눈동자로 하나뿐인 오라비를 맹목적으로 따랐던 어린 명재신.

“아무것도 모르고 순진하게, 그저 내게 잘해 주는 이에게 사랑받고 싶어 순종적이기만 했던, 서투르고 바보 같았던 내가 보여.”

“……?!”

순간 듣고 있던 우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어딘가 아련한 분위기를 품은 채 먼 산을 바라보는 도로테아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그 뻔뻔함에 경악했다.

별 해괴망측한 소리를 다 들어 보는군.

제가 살아오며 들은 말들 중에 가장 가당치도 않은 말이었다.

대체 뭘 먹어야 낯짝이 이토록 두꺼울 수 있는 건가.

사랑을 받고 싶어 순종적? 아무것도 모르고 순진해?

도대체 그런 인물이 여기에 어디 있단 말인가.

한참 어두운 밖을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무거운 침묵을 깨고 싱긋 웃었다.

“뭐, 옛일이지.”

본인이 고작해야 열일곱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기나 하는 걸까.

적어도 쉰 이상은 먹어야 할 법한 말을 전혀 위화감 없이 뱉어 낸 소녀를 보다, 우드는 그저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주억거린 도로테아가 말을 돌렸다.

“그래도 참 다행이지 뭐야.”

“무엇이 말이냐?”

“작년에 리처드가 그런 몹쓸 결말을 맞이했을 때, 사실 속으로 많이 아쉽고 안타까웠거든.”

“네가?”

그를 마지막 불구덩이로 집어넣은 것은 네가 아니었던가.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도로테아를 바라보는 우드의 시선에 그녀가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행이잖아. 족칠 황자가 남아 있어서.”

“…….”

“폐하께서는 자식 복이 있으셔.”

“그 자식 복이라는 게, 네게 족쳐질 황자가 많다는 의미인 거냐?”

이미 네 손으로 황태자부터 시작해서 황족들을 무려 몇이나 골로 보냈는데.

그러니까 너는 아직 저금통으로 쓸 만한 황자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다행스럽게 여긴다는 거로군.

좀 전까지 스스로의 아픈 과거를 회상하던 아련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저 새롭게 나타난 호구를 먹음직스럽게 바라보며 어떻게 족쳐야 할지 입맛을 다시는, 욕심 많은 도로테아 하이클레어만이 있을 뿐.

그런 도로테아를 보며 우드는 오히려 안도했다.

‘그래, 이게 도로테아 하이클레어지.’

좀 전에는 그의 눈에 뭐가 씐 것이 틀림없었다.

*   *   *

박람회 당일, 최근 바삐 궁을 드나드는 후작과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후작 부인을 대신해 도로테아를 에스코트하게 된 에드윈은 근사한 정장 차림으로 그녀에게 팔을 내밀었다.

외사촌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 오른 도로테아가 드레스를 매만졌다.

“무슨 바람이 불어 박람회에 참석하겠다는 거야?”

“여러 가지가 있지. 우선은 이렇게 와 달라고 돈을 퍼부어 사람들을 향해 손짓하는데 굳이 가지 않을 까닭이 없기 때문이고.”

“그리고?”

“최근 자꾸만 도망 다니는 윌리엄을 잡아야 해서.”

2황자의 이름이 나온 순간 에드윈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도로테아와 루크가 그를 차기 황제로 점찍은 이후 2황자의 일상은 두 사람의 마수에서 벗어나는 데에 집중되어 있었다.

루크가 없는 요즈음은 거의 도로테아가 쫓고 있는 중이고.

만나기만 하면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두 사람이 이런 일에서는 어찌 이리 마음이 잘 맞을 수 있는지.

궁에 처박혀 있으면 그 궁으로 찾아가 사람을 괴롭히니, 요즘의 2황자는 정해진 거처도 없이 이곳저곳 옮겨 다니기 바빴다.

“이번에는 확실히 도망갈 수 없을 테니까.”

황실의 일원으로서 초대받은 자리에 가지 않았다가는 윌리엄뿐만 아니라 황실 전체에 불화설이 돌게 된다.

제아무리 사소한 소문이라 하더라도 황제가 그 꼴을 두고 볼 리 만무했다.

지금과 같이 영주들의 지지가 필요한 상황에서 황실의 위엄이 떨어지는 것만큼 그가 염려하는 것이 또 있을까.

“2황자 전하께서도 이제 슬슬 깨달으셔야 할 텐데.”

도로테아는 상대가 도망칠수록 의욕이 솟구쳐 오른다는 걸 말이야.

말을 속으로 삼킨 에드윈이 싱긋 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아리처럼 샛노란 빛깔의 나들이옷을 입은 어린 소녀 둘이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꼭 쌍둥이처럼 닮은 두 소녀는 자리에 얌전히 앉아 조용히 침묵을 지켰지만, 기대를 숨기지 못한 듯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이윽고 후작가의 마차가 사람들이 가득 모여든 박람회 앞에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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