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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136화 (136/242)

136화

“…….”

깊은 침묵이 흘렀다.

머리끝까지 화가 났던 노부인도 이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분명 처음 대화를 나눌 때에만 하더라도 주도권은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은 이쪽에 있었건만, 말 몇 마디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못 할 말을 한 건 아니지.’

입술을 꾹 깨문 노부인이 고집스레 고개를 꼿꼿하게 들었다.

도로테아는 애써 이 길고 무거운 침묵을 견뎌 내고 있는 고집 센 노파와 그녀의 저택을 하나하나 눈여겨보았다.

낡긴 했지만 괜찮은 품질의 숄.

보관한 지 오래되어 향이 부족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구색을 모두 갖추고 있는 찻잎.

벽난로에는 최상급 활엽수로 된 장작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저 양으로는 겨울을 나기에 부족할 텐데.

그럼에도 값싼 침엽수 대신 활엽수로 된 장작을 쓰는 집이라…….

그럼에도 숄을 매만지는 부인의 손은 고생 한 번 한 적 없는 듯 곱디고왔다.

“지금 내 말을 듣고 있는 건가?”

제아무리 한미한 가문이라 해도 고작해야 사용인에게 무시당하고 싶지는 않다는 듯 그녀가 목을 꼿꼿하게 세웠다.

옅은 미소와 함께 도로테아가 천천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듣고 있었습니다, 부인. 주옥같은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요.”

“폐하께서 후작가를 중히 쓰신다 하여 하늘 높은 줄 모르면, 언젠가 대가를 치르게 되는 법일세.”

“그렇군요.”

“지금이야 국외 정세가 흔들리는 만큼 멋대로 날뛰어도 다들 모른 체해 주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의기양양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게야.”

마치 후작가가 지금의 상황에 기대어 자신들의 세를 믿고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투였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이클레어 후작에게 주어진 황실의 기대와 신임은 확실히 독보적이었다.

뒤가 구린 구석 하나씩을 달고 있는 귀족들에게 강력한 군권을 행사할 수 있는 후작가는 눈엣가시나 다름없을 테고.

가문 사람들이 가진 눈부신 재능과 혼란스러운 정세가 아니었다면 후작가는 진작 정치적으로 고립되었을 것이다.

곁에 있는 메릴린의 몸이 굳는 것이 느껴졌다.

도로테아는 표정 변화 한 점 없이 그저 가만히 노부인을 바라보다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제국의 안위가 위협받는 상황에 검을 들어야 하는 이들이 높이 평가받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지요. 부인의 말씀대로 ‘제멋대로 날뛸 수 있는 위세’는, 그 누구보다 앞서서 성을 방어하고 국가를 지켜야 하는 그들의 의무에서 나오는걸요.”

노부인의 눈썹이 꿈틀했다.

도로테아는 눈앞의 부인을 마치 어린아이 가르치듯 차근차근 알려 주고 있었다.

“부인의 부채는 저 멀리 타국에서 들여온 수입 깃털로 꾸며졌군요. 제국의 수입 관세는 비교적 저렴한 편입니다. 그 까닭은 타국과의 교역에서 제국이 우위에 있기 때문이고요.”

“지금, 사용인 주제에 이 나를…….”

“그 국력은 언제든 제국을 위해 검을 들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에게서 나오지요, 부인.”

불쾌한 듯 입을 연 부인의 말을 끊어 낸 도로테아가 싱긋 미소 지었다.

“…….”

“제 숙부님께서 성급하셨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에 따라 후작가는 마땅히 배상을 할 예정이고요. 그럼에도 그분께서 하신 일에 제가 떳떳할 수 있는 까닭은, 그분은 언제나 그렇듯 가진 바 신념에 따라 불의를 외면하지 않고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숙부, 라는 호칭을 들은 노부인의 몸이 움찔했다.

메릴린은 아무 말 없이 복잡한 표정으로, 조곤조곤 말을 이어 가고 있는 도로테아를 바라보았다.

“약자를 보호하고자 하는 그분의 신념만큼은 잘못되었다 말씀드리기 어려우니, 사과는 오로지 성급했던 행동에 대해서만 드릴게요.”

비록 사교 활동에 능하지 않아도 도로테아는 귀족으로서 살아온 오랜 세월이 있었다.

하녀복을 입고, 머리색을 바꾸는 것으로는 감추어지지 않은 도로테아의 ‘진면목’을 본 부인의 손끝이 떨렸다.

“그러니 부인께서도 아드님과 함께 여러 영애들을 동시에 만나 품평하며 저울질한 것을 사과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뭐?

메릴린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얼얼해진 얼굴로, 뜨끔한 얼굴을 한 노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부인이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여러 영애? 동시에 만나? 저울질?’

멍하니 제가 들은 말을 곱씹은 메릴린의 얼굴이 구겨졌다.

묵직한 주머니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도로테아가 말을 이어 나갔다.

“먼 지방에서 올라온 순진한 영애들이라 하여 마음대로 대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지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제 귀에까지 들어올 정도라면, 이미 사실을 확인한 여러 영애들이 아드님과 부인께 이를 갈고 있다는 뜻일 거예요.”

“…….”

“제 생각에는 아드님의 일신을 끔찍이도 위하는 부인이야말로, 아드님과 함께 내려가시기에 가장 적합한 분이 아닌가 사료됩니다만.”

정착 비용으로는 충분하리만큼 과한 액수임을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후작가의 미래를 걱정하기보다는 본인들의 평판을 걱정하는 것이 좋으리라는 덕담에 부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침묵을 지키던 노부인이 이윽고 허리를 굽힌 채 연신 마른기침을 뱉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제 할 말을 끝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디 건강하시길.”

미련 없이 밖으로 나가는 도로테아의 뒤를 쫓던 메릴린은 문을 닫기 직전, 기침으로 여념이 없는 노부인을 바라보았다.

비록 썩 좋은 감정은 없었지만, 오랜 시간 기침에 시달린 왜소하고 비쩍 바른 굽은 몸을 보며 한마디 덧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기왕이면 빠르게 저택을 비우시는 것이 좋을 거예요, 부인. 이곳은 터가 좋지 않으니까요.”

나름으로는 진심을 담은 조언이었다.

그러나 막 치부가 드러난 부인에게 그녀의 말은, ‘얼른 지방으로 꺼지지 않으면 당신들의 만행을 만천하에 알리겠다.’라는 협박으로 들렸으리라.

저택을 뒤지고 다니던 피피가 때맞춰 도로테아의 어깨 위에 안착했다.

흙이 잔뜩 묻은 앞발에 도로테아가 입은 옷이 지저분해졌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수고했어.”

어디서 들고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작은 쥘부채를 떨어뜨린 다람쥐는 제 할 일을 마쳤다는 듯 다시 쪼르르 내려갔다.

독특한 향이 묻어나는 부채를 펼치자 흔히 보기 힘든 이국의 그림이 나타났다.

물끄러미 부채를 바라보는 도로테아의 얼굴은 좀처럼 읽어 내기가 힘들었다.

“그, 그게 뭐예요?”

“글쎄, 이 물건이 어디서 났을까요.”

클레어 파인트의 방에서 느꼈던 희미한 기운.

아주 짧은 시간 그녀의 신경을 건드렸던 미미한 파동.

“읽히지가 않는 물건이라.”

사람의 손을 탄 물건에 어찌 내력이 존재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주인의 원념은커녕, 스치고 간 이의 내음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피피가 꽤 재미난 물건을 주워 왔네요.”

“주워 온 거 확실해요? 그 저택에서 가져왔으면 그건…….”

훔쳐 온 거잖아요?

메릴린이 말을 끝내지 못하고 흐리자 도로테아가 생긋 웃었다.

“대가라면 충분히 건넨 것 같으니 교환한 것으로 치죠.”

그 말에 메릴린은 좀 전에 감정이 격해진 부인이 꺼낸 힐난이 떠오른 듯 조심스레 눈을 굴렸다.

“후작가에 대한 평판이라면 이미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요. 메릴린도 알고 있었잖아요.”

“…….”

황제의 절대적인 신임과 그들이 가진 눈부신 재능.

모두가 눈여겨보고 탐을 내지만, 그럼에도 허울 좋은 가문이라는 비웃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위선적이지 않은 것은 야만적인 것으로, 허영과 사치를 부리지 않는 것은 멋을 모르고 무식하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졌다.

권력을 탐하지 않기에 오히려 그 진의를 의심받을 수밖에.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의연하게 답하는 도로테아의 태도에 메릴린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다시금 물었다.

“그, 아까 그거 진짜예요?”

“어떤 거요?”

“그러니까, 그, 제럴드가…….”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메릴린을 본 도로테아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영애가 그자의 네 번째 맞선 상대라는 것? 아니면 오전에 만난 아가씨를 더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는 것? 다음 날에 또 다른 인물과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

“이런 씨…….”

진짜였냐.

부들거리던 메릴린이 못내 자존심 상한 얼굴로 침묵하다 다시금 물었다.

“저기…… 그럼 그, 오전에 만난 영애는 누구인데요?”

“원한다면 우드에게 깔끔하게 처리하라 이를게요.”

“처, 처, 처리라니? 내, 내가 뭘 하겠대요?! 나는 그냥…….”

빙긋 웃은 도로테아가 말을 이었다.

“저택에 깃든 부정한 것들을 내쫓아야 하니까요.”

그럼 그 처리라고 말하란 말이야.

입을 뻐끔거리는 메릴린을 보던 도로테아가 이내 다시 앞서 걷기 시작했다.

*   *   *

늦은 저녁, 누군가가 도로테아의 방문을 두드렸다.

미처 답을 하기도 전에 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자색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친구분은?”

“본가로. 충격이 조금 컸나 봐.”

“왜 그렇게 레어 양을 괴롭히는 거야?”

“괴롭히지 않았어.”

차분한 답에 픽 웃은 필립이 손을 뻗어 사촌 누이의 하얀 볼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녀를 매번 곤란한 선택으로 밀어 넣고 있잖아.”

“선택의 권리는 그 누구에게나 있어. 나는 그저 그녀가 가진 선택의 가능성을 보여 준 거지. 선택권을 떠넘긴 게 아니야.”

“굳이 에이든 숙부를 부추겨 레어 양의 구혼 조건을 만천하에 알린 것도? 네 수완이라면 그렇게까지 일을 키우지 않아도 해결할 수 있었잖아.”

“…….”

“거봐, 심술이지.”

볼을 잡아당기던 손을 뗀 아름다운 사촌이 도로테아의 이마를 가볍게 튕겼다.

손끝으로 이마를 매만지던 소녀는 필립의 장난스런 트집에 더 변명하는 대신 말을 돌렸다.

“다녀온 일은?”

저 조그마한 머릿속에 도대체 무슨 생각들을 담고 있는 걸까.

차분한 남색 눈동자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읽어 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볼 수 있는 세계가 다르기 때문일까?’

낯선 ‘아버지’의 존재를 받아들인 그날 이후, 필립이 속한 세계 또한 달라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와 같은 눈높이를 가질 수는 없었다.

“필립?”

도로테아가 상념에 잠긴 외사촌의 이름을 재차 불렀다.

“네 예상대로야. 최근 들어 곳곳에서 이상 현상들이 발생하고 있어.”

“폐하께서 좋아하지 않으시겠네.”

문제가 생겨도 쉬쉬하는 귀족들의 습성이 일을 키우고 있었다.

그나마 클레어 파인트의 경우가 예외적이었을 뿐, 설령 문제가 생겨도 다들 입 다물고 모른 척하기 바쁠 테지.

“그나마 신고한 이들은 대부분 하층민들이고.”

“귀찮게 됐네.”

신관의 정화 능력이라면 확산 속도를 더디게 만들 수 있겠지만, 황제는 신전의 영향력이 높아지는 것을 원하지 않을 테니.

“덕분에 아카데미의 예비 마법사들까지 끌어모아 조사단을 꾸린 모양이던데.”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이 없는 자들로는 진상의 파악은커녕 흔적도 잡기 어려울걸.”

필립은 황실의 조치에 박한 평가를 내린 도로테아의 머리 위로 손을 얹었다.

“어쩐지 기분이 별로인 것 같은데?”

“다들 지나치게 평화로워서.”

거리를 걷는 신사 숙녀들은 여전히 제 모자의 깃이 얼마나 예쁜지, 드레스에 달린 레이스가 화려한지, 걸음걸이가 매혹적인지 따위를 신경 쓰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 치 앞을 모르는 하루살이들이, 여전히 본인들이 이 세계의 주인이라 믿고 있으니 어리석기 짝이 없지.”

보이지 않는 전쟁은 이미 물밑에서 시작된 지 오래였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 행세를 하며 신이라도 되는 양 모든 것을 누리고 있는 사이, 그들에게서 파생된 어둠은 느리지만 은밀하게 이미 이 땅을 전장으로 바꾸어 놓았다.

“다들 머잖아 진짜 ‘전쟁’을 겪게 되면…….”

지금 누리고 있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하고 대단한 것인지 모르는 이들을 보는 소녀의 눈이 몹시 서늘했다.

밝게 켜진 가로등 아래를 거니는 사람들을 지켜보던 도로테아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최근 귀족들 사이에 타국에서 들여온 장신구들이 늘었지?”

머나먼 이국의 정서를 담은 쥘부채를 만지작거리며 묻는 말에 필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4황자가 생각보다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어서. 황도 밖에서 떠돌며 쌓은 인맥을 적극적으로 이용 중이거든.”

“수완이 좋네.”

중얼거리던 도로테아가 이윽고 창밖의 풍경에서 시선을 뗐다.

“레번이 울겠는걸.”

새로운 흥밋거리를 찾은 귀족들은 이전처럼 ‘극장 나들이’에 관심을 쏟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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