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어디선가 나는 고소한 내음으로 눈을 뜬 메릴린의 시야에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에이든에게 훈련을 받기 시작할 무렵, 늘 기절로 하루를 마무리했던 그녀가 자주 보았던 풍경이었다.
‘그리고 이 냄새는 분명…….’
고개를 돌리자 따끈따끈하게 데운 바게트 위에 물소 젖으로 만든 버터를 듬뿍 발라 한 입 가득 베어 무는 도로테아가 눈에 들어왔다.
한숨을 삼킨 그녀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결국 이렇게 될 일이었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쏟아부은 노력과 시간이 아까워 속이 쓰렸다.
분노보다도 체념에 가까운 감정을 품은 채 부스스 몸을 일으킨 메릴린이 자리에 앉았다.
도로테아는 막 깨어난 메릴린에게 막 우려낸 차를 건넸다.
노란빛을 띠고 있는 차에서는 독특한 향이 났다.
“마셔요.”
“전 끝났어요.”
메릴린이 음울하게 중얼거리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오늘 에이든 님의 선언으로 제 인생은 완벽하게 끝났다고요.”
“끝나지 않았어요. 그저 메릴린의 혼사 조건이 까다로워진 것뿐이죠. 그만큼 얼토당토않은 구혼자들이 걸러진다는 소리고요.”
잘못된 결혼으로 불행에 빠지는 여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조건이 까다롭다는 것은, 그만큼 훌륭한 구혼자를 맞이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다른 귀족 여인들에 비해 월등히 ‘안전한’ 혼사를 하게 되는 셈이었다.
“걸러도 너무 거르잖아요! 애초에 그 조건에 맞는 구혼자가 존재하기는 해요?!”
순수한 무력만으로 따지자면 에이든은 이미 막 성인을 지난 나이에 기사의 정점을 찍었다.
어디서 소드마스터가 하나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 이상 그녀가 누군가와 혼인할 수 있는 확률은 희박했다.
게다가 제국의 황녀도, 절세미인도 아닌 메릴린을 위해 수많은 난관을 이겨 낼 만큼 그녀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 또한 당연히 포함된 이야기고.
“그 조건이 어디가 잘못된 거죠?”
메릴린의 말에 도로테아는 도리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그보다 낮은 조건에 우리 메릴린을 보낼 생각은 없는데요.”
“뭘 보내고 말고 해요! 영애가 내 아버지예요?!”
발끈한 목소리로 따지던 메릴린은 제 눈앞에 보이는 바게트를 쥐고서 거칠게 물어뜯었다.
시장이 반찬이라더니.
고소하고 짭짤한, 겉은 바삭하면서도 속은 촉촉한 바게트의 맛은 환상적이었다.
“여기.”
도로테아는 산발이 된 머리를 뒤로 넘기며 식사에 열중하는 메릴린에게 고소한 버터를 바게트 위에 듬뿍 발라 주었다.
“체하지 않게끔 천천히 먹어요.”
등을 두드려 주는 손은 몹시 다정했다.
손의 주인이 불과 몇 시간 전 제 앞날을 망쳐 놓은 원흉이라는 사실을 잊고, 하마터면 감사의 인사를 건넬 뻔한 메릴린이 한숨을 삼켰다.
이 악마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정녕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차도 더 마실래요?”
“됐어요. 식사 중에 차를 너무 많이 마시면 소화가 잘 안 되잖아요.”
입을 삐죽이며 열심히 빵을 뜯는 메릴린의 말에 도로테아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빠르고 신속하게, 그리고 먹음직스럽게 음식을 음미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몹시 닮아 있었다.
비록 메릴린은 인정하지 않을지 몰라도 두 사람은 충분히 친밀해 보였다.
* * *
고요하지만 폭풍 같았던 식사가 끝이 나고 찻잔까지 비워 낸 뒤, 이윽고 메릴린이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것이 한 가지 있어요.”
“네.”
“오늘 일은 영애가 꾸민 건가요?”
“어떤 일이요?”
“그러니까…….”
당신의 곁에서 벗어날 요량으로 만난 남자의 저택에서 마주하게 된 이상 현상 말입니다만.
제 입으로 설명하기 민망한 듯 메릴린이 고개를 돌리자 도로테아가 답했다.
“영애가 묻혀 온 ‘부정한 것들’을 말하는 거라면 나와는 상관없어요.”
“부정한 것들이요?”
도로테아는 재빠르게 제 몸을 이리저리 훑어보는 메릴린을 안심시키듯 덧붙였다.
“지금은 괜찮아요. 털어 냈으니까.”
“…….”
찜찜한 얼굴로 제 드레스를 내려다보던 메릴린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결국 그곳에 ‘뭔가 있다는 것’은 확실한 거네요.”
“괜찮아요. 지박령(地縛靈)은 제 영역을 휘젓고 다니지 않는 이상 객(客)을 쫓아오진 않으니까요.”
그곳을 다시 방문하지 않는다면 메릴린에게 큰 해가 오는 일은 없으리라.
도로테아의 친절한 설명에도 메릴린의 안색은 밝아지지 않았다.
“저한테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더라도…….”
그 저택에는 아직 사람이 살고 있었다.
머뭇거리면서도 정체 모를 ‘존재’에 대한 생각을 떨치지 못하는 메릴린을 보는 도로테아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위험한 건 싫다고, 스스로에게 곤란한 건 하지 않겠다더니.’
망자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이 싫기에 도로테아의 곁에서 벗어나려 아등바등해 놓고서는, 어느새 그녀와는 크게 상관도 없는 이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또 깊숙이 발을 들일 태세다.
쓸데없는 호기심과 어설픈 연민은 이매망량(魑魅魍魎)의 사랑을 받는 이들의 특징인가.
그런 도로테아의 속내를 모르는 메릴린은 곁에서 보고 들은 어설픈 지식으로 이런저런 추측을 늘어놓았다.
“아무래도 그 저택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정확히는 저택이 들어선 집터요. 전에 그랬었잖아요. 흙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생명을 품을 수 있는 그릇이라고. 그 안에서 생명이 나지 않는다면 그건 죽은 기운을 머금고 있기 때문이라고요.”
나른하게 눈을 깜빡이던 도로테아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메릴린의 생각에 방향을 잡아 주었다.
“죽음의 기운을 머금은 터가 의미하는 건 한 가지. 그곳을 지키는 터주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망자와 산 자들의 사이에 결계를 만들어야 할 신이 자리를 비운 땅을 차지하는 것은 온갖 부정한 잡귀들이죠.”
“저택 안이 유독 바깥과 달리 서늘했어요. 때때로 밤에 울음소리가 들린다는데, 이상하게도 외부인의 귀에는 들리는데 저택의 주인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고 했고요.”
심각한 얼굴을 한 메릴린의 말에 도로테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원하는 답을 알려 주었다.
“둘 중 하나겠네요. 그녀가 망자의 기운을 쫓을 만큼 영력을 타고났거나, 이미 망자의 영향력에 침식되어 있거나.”
“후자겠죠. 전자라면 그녀가 살고 있는 저택의 흙에서 비린내가 날 리 없으니까요.”
도로테아는 기대에 찬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메릴린이 필요로 하는 ‘답’을 건네주었다.
“터를 옮겨야 할 거예요. 당장 그곳에 무엇이 자리 잡은 것인지는 몰라도, 죽은 땅에는 또 다른 부정한 존재가 들어올 수 있으니까.”
산 자가 살고 있는 죽음의 땅이라니.
그만큼 먹음직스러운 것이 또 있으랴.
“역시 그렇군요.”
본인의 감이 옳았음을 알게 된 메릴린의 얼굴이 밝아졌다가 한순간 다시 어두워졌다.
터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과 별개로, 깐깐한 부인을 어찌 설득한다?
화려한 저택은 아니었지만 집 안의 가구들 중 허투루 배치되어 있는 것이 없었다.
그건 노부인이 직접 애정을 갖고 저택을 관리하고 있다는 뜻일 터.
“메릴린, 거기 시집가게요?”
“그럴 리 있겠어요? 에이든 님이 그 사람한테 어떻게 했는데요.”
이미 글러먹었다는 것쯤은 눈치 없는 데인조차도 알 수 있으리라.
음울한 기색으로 답하는 메릴린을 물끄러미 보던 도로테아가 다시금 물었다.
“이제 메릴린과는 관련 없는 일에 굳이 끼어들 필요가 있을까요?”
“그, 그래도 문제가 있다는 걸 아는데 외면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 문제에 엮이는 것이 싫어서 나와 멀어지려던 것 아닌가요?”
도로테아의 말이 메릴린의 정곡을 찔렀다.
누군가의 혼이 강제로 씌었던 경험은 여전히 끔찍한 악몽처럼 그녀를 괴롭혔다.
그것이 싫어 도망치려 했건만,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대를 위해 또 일에 끼어들어야 하는 걸까.
도로테아는 고민에 빠진 그녀의 상태를 모른 척 빈 찻잔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만일 메릴린이 그들을 돕기를 원한다면 몇 가지 해야 할 일이 있어요.”
도로테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구석에 있던 피피가 메릴린의 다리를 타고 무릎 위로 올라왔다.
깜찍한 생명체는 통통하게 가득 찬 볼에 있던 씨앗 하나를 퉤, 하고 그녀의 손바닥에 뱉었다.
“괴각(槐角 : 회화나무의 열매)이에요. 부정한 것을 쫓는 정화의 기운을 갖고 있죠.”
메릴린이 찜찜한 얼굴로 제 손바닥에 뱉어진 작은 씨를 바라보는 사이 도로테아가 덧붙였다.
“마침 저택을 방문할 좋은 핑계도 있으니 내일 함께 출발하죠.”
“핑계요?”
도로테아는 의아한 얼굴을 하고서 저를 바라보는 메릴린에게 싱긋 웃어 주었다.
“애지중지 기른 아들이 난데없이 길거리에서 수모를 당하고 돌아왔으니 부인의 심기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실 거예요. 외숙부께서 무례를 범했으니 조카인 제가 사과를 해야 하지 않겠어요?”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지만 메릴린은 불안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활짝 웃으며 옷장을 여는 도로테아는, 사과를 준비하는 사람치고는 몹시 신나 보였기 때문이었다.
* * *
도로테아의 말처럼 노부인은 아들의 일에 몹시 분노했고, 그 분노를 남김없이 쏟아 냈다.
자랑스러운 아들이 아무런 잘못도 없이 길거리에서 괴한으로 내몰린 데다, 둔기(실상은 포장된 바게트)에 얻어맞기까지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군요. 요즘 영애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거죠?!”
메릴린은 침착하게 부인의 분노를 달래려 애썼다.
“송구합니다, 부인. 신분을 숨겼던 것은 부인과 아드님을 기만해서가 아니었어요. 좋은 인연을 만나고 싶은 치기에 철없이 저지른 일입니다.”
공손히 숙이는 메릴린의 곁에 함께 자리한 도로테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저희 후작가에서도 오해 때문에 빚어진 마찰에서 손속이 과했음을 인정하고 충분한 사과와 배상을 해 드릴 거예요.”
부인이 콧방귀를 끼었다.
“그럼 뭘 하나요. 정작 일을 저지른 본인은 오지도 않고서. 후작가에서 보낸 것은 달랑 사용인 한 사람뿐인데.”
제인의 옷을 입은 채 저택을 방문한 도로테아는 연이은 힐난에도 자세를 최대한 낮췄다.
“부인께서 원하신다면 직접 방문하시라 전달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아드님이 겪으셨을 정신적인 충격을 고려해 보았을 때 가해자인 에이든 경께서 이곳에 오지 않는 것이 더 나으리라 판단되어서요.”
“…….”
도로테아의 조리 있는 말에 부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부인께서는 충분히 아시리라 믿습니다만, 귀족 영애에게 중요한 것은 평판입니다. 미혼의 여성이 인파가 북적이는 거리에서 남성과 단둘이 걷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소문에 시달릴 수 있는데, 하물며 아드님께서는 가볍다고는 하나 메릴린 영애의 팔을 쥐셨습니다.”
“…….”
듣고 있던 메릴린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녀는 사건을 그렇게까지 자세히 묘사하거나 설명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도로테아는 지금 마치 그 장면을 직접 목격한 사람처럼 세세한 상황까지 모두 묘사하고 있지 않은가.
꼭 숨어서 지켜보기라도 한 사람처럼.
“과하기는 했으나 충분히 빚어질 수 있는 오해라 사료됩니다.”
부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사과를 하러 왔다던 상대는, 아들이 경솔하게도 길거리의 수많은 이목에도 아랑곳 않고 메릴린을 잡아끌었다며 원인 제공자로 몰아가고 있었다.
“후작가는 참으로 후안무치하군요.”
부인의 손에 든 부채가 파들거렸다.
“부인…….”
메릴린이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그녀를 불렀음에도, 창백하고 야윈 안색에 가득 찬 노기를 가라앉힐 생각이 없는 부인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하기야 말이 통하는 작자였으면 길거리에서 그런 짓을 했을까. 전쟁을 통해 쌓아 올린 명성이 전부인 가문이니 상식을 기대하기는 어렵겠지.”
“……!”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날카롭게 비난의 화살을 던졌다.
수수한 복장으로 태연히 가문의 욕을 듣고 있는 도로테아와는 달리, 곁에 있던 메릴린은 눈을 끔뻑이며 생각에 잠겼다.
‘어디선가 많이 보던 장면인데?’
그녀는 그제야 오래전, 그녀가 처음 도로테아를 만나던 순간을 떠올렸다.
말 몇 마디로 인생이 송두리째 뒤바뀔 수밖에 없었던 그 순간을.
그녀가 다급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부인.”
심정은 이해가 가나, 더 이상 말씀하시면 안 될 것 같아요.
필사적인 메릴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부인은 기어코 선을 넘고야 말았다.
“후작가가 명예라는 것을 생각했더라면 상인의 핏줄 따위를 받아들이지는 않았겠지.”
헉, 하고 숨을 들이켠 메릴린이 차마 볼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느릿하게 고개를 든 도로테아는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 대신,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