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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134화 (134/242)

134화

에이든이 끔찍이 아끼는 조카를 위해 손수 빵을 사러 마을로 내려가 줄을 선 그 시각, 메릴린은 평온함과는 거리가 먼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오래전 남편과 사별 후 홀로 아들을 키워 왔다는 어머니는 깐깐한 얼굴로 메릴린을 훑었다.

“아무리 서로 뜻이 통했다고는 하나 절차가 있는 법이지요. 만남을 가진 지 하루 만에 저택을 방문하다니요.”

메릴린은 저를 향한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말투에도 기가 죽기는커녕 여유롭게 웃었다.

어느 정도 예상한 반응이었다.

제아무리 한미한 가문이라고는 하나, 혼인이라는 중대사를 누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해결하려 들겠는가.

만일 사정이 급하지 않았더라면 당일 방문 통보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리라.

아무 생각 없는 얼굴로 눈을 끔뻑이는 아들과는 달리, 못 미덥게 그녀를 바라보던 부인이 짧게 한숨을 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저도 핀치 부인께서 아주 능력 있는 분이라는 걸 알아요. 사교계에서 명망 있는 분이 직접 추천한 영애라면 분명 훌륭한 신붓감이겠지요.”

“무어라 말씀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진 재주가 미미하고 외모가 특출하지도 않아 부끄러울 따름이에요.”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여 보인 메릴린의 태도에 눈초리가 조금이나마 누그러들었다.

어찌 되었건 이쪽에서 먼저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었으니 어느 정도 굽혀 주는 게 옳았다.

최근 몇 년간 겪고 배우며 ‘처세술’이 눈에 띄게 발전한 메릴린의 화법은 손색이 없었다.

“대관절 영애는 어째서 이토록 혼인을 서두르…….”

콜록, 콜록.

말을 하다 말고 기침 세례를 뱉어 낸 중년의 부인이 민망한 듯 손수건으로 입을 가렸다.

“미안하군요. 요즘 감기 기운이 유독 심해져서.”

옆에 있던 남자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살폈다.

“그러게 난로에 불을 때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날씨가 이렇게 따뜻한데 벽난로를 피울 수는 없지. 그건 우리 집안 사정에 너무 사치스러워. 안 그래도 네가 곧 내려가고 나면 나 홀로 지낼 텐데 아껴야 할 것이 아니니.”

“어머니.”

애틋한 모자(母子)를 바라보며 눈을 끔뻑이던 메릴린이 슬쩍 주변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바깥은 제법 따뜻한데 집 안 공기는 이상할 정도로 서늘했다.

‘이상하네.’

외벽이 두꺼운 것도 아닌데, 넓은 창으로 햇볕이 드는 실내가 어찌 이리 서늘하지?

“어머니, 역시 사람을 쓰는 것이 좋겠어요. 홀로 계시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제가 바로 올 수도 없잖아요.”

“사람을 고용하려면 또 돈이 들 텐데 어찌 그럴 수가 있겠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노부인의 말에 세상에 둘도 없는 효자의 눈빛이 더욱 촉촉해졌다.

“제 월급의 일부를 어머니께 보내 드리면 되지요.”

“아서라. 아직 자식에게 의지할 정도로 약해지진 않았다.”

“제게는 함께할 사람이 있지만 어머니께는 없잖아요.”

오늘 처음 만난 사람과 곧바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부담스럽다더니.

이미 메릴린이 그와 함께하는 것은 기정사실화된 모양이었다.

‘게다가 아직 혼인하기도 전에 상대 앞에서 월급의 일부를 어머니께 드리겠다 선언하기까지.’

메릴린의 조건을 충족하는 남자를 찾았음에도 핀치 부인이 연신 고개를 내저은 까닭이 여기 있었던 모양이다.

두 사람을 말없이 관찰하던 메릴린이 속으로나마 조건을 비교했다.

‘한쪽은 먼 타지에서 서신으로 안부를 주고받을 시어머니, 다소 성급한 아들…… 한쪽은 도로테아 하이클레어.’

무게 추가 자연스레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녀가 겪은 악몽들은 아직도 뇌리 속에 선연히 못 박힌 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이 정도쯤이야.’

메릴린은 굳은 결심과 함께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부인의 손을 꼭 감싸 쥐었다.

“제이콥의 말이 옳아요, 어머님. 먼 타지로 떠나면서 어머님 홀로 두고 가는 마음이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고용할 사람은 제가 소개해 드릴 수 있어요.”

메릴린의 적극적인 공세에 노부인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내 아들의 이름은 제럴드…….”

“제럴드, 물 좀 가져다주세요. 어머님의 목소리가 갈라지잖아요.”

제이콥, 아니, 제럴드가 메릴린에게 허둥지둥 물병을 건넸다.

자연스레 물을 따른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컵을 내밀었다.

미심쩍은 시선을 던진 노부인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나는 됐단다. 좋은 사람을 구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도 아니고 말이다.”

물을 한 모금 삼킨 그녀가 한결 나아진 얼굴로 컵을 내려놓았다.

“사람을 고용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에요. 요즘은 일을 쉽게 하려 드니까. 예전에 고용하려 했던 하녀도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하면서 도망가 버리더군요.”

메릴린이 부인의 이마에 진 주름을 보며 물었다.

“얼토당토않은 소리요?”

“밤마다 뜰에서 울음소리가 들린다나.”

못마땅해하는 불평을 들어 주고 있던 그녀의 손이 멈칫했다.

노부인은 꼬장꼬장한 얼굴로 과거의 일들을 털어놓으며 분통을 터뜨렸다.

“제럴드가 종일 바깥에 나가 있는 데다, 연수원에서 지낼 때가 많아 이 집에는 저랑 나밖에 없는데, 자꾸만 젊은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다나 뭐라나.”

아냐, 그럴 리 없는데.

메릴린이 조용히 두 손을 기도하듯 모았다.

“뜰에서요?”

“그뿐일까요. 모처럼 정원을 가꾸어 보려고 꽃을 좀 심으랬더니 흙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질 않나. 뭐라더라, 비린내가 난다고 했던가.”

“…….”

불안감이 엄습했다.

지나치게 서늘한 집 안의 공기.

밤마다 들려오는 사람의 울음소리.

흙에서 올라오는 정체불명의 비린내.

제 드레스 자락이 꾸깃꾸깃하게 접힐 만큼 손에 힘을 준 메릴린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이상할 정도로 대문 안쪽 화단이 휑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애써 가라앉힌 그녀가 나지막이 물었다.

“화단에 꽃을 좀 심어 두면 부인께서도 위안이 되지 않을까요?”

“아아, 몇 번 시도해 본 적은 있지만 이상하게 싹이 잘 트지를 않더군요. 집을 지을 때 인부들이 가져온 흙이 그리 좋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이럴 줄 알았더라면 좀 더 웃돈을 주고서라도 괜찮은 상회에 맡겼을 텐데.”

터가 문제였을까. 아니면 가져온 흙이 문제였을까.

그제야 지나치게 비쩍 마른 노부인의 왜소한 몸집이 눈에 들어왔다.

산발적으로 이어지는 기침을 오래전부터 달고 살았는지 아들인 제럴드도 그러려니 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그저 우연이 겹쳤다고 넘기기에는 짚이는 바가 너무 컸다.

그녀의 오랜 경험들이 이 문제가 결코 단순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하고 있었다.

“영애?”

왠지 창백해진 메릴린의 안색을 본 노부인이 의아함을 드러냈다.

좀 전까지만 하더라도 꿀처럼 달콤한 말들을 건네며 자신의 환심을 사려던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영애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입술을 짓씹던 메릴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기침은 얼마나 오래되셨나요?”

“……글쎄, 한 삼 년 남짓 되었을까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망자(亡者)를 때려잡는 인간에게서 도망치려고 택한 곳이 망자의 소굴이라니.

메릴린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해요. 제, 제가 정말 급한 볼일이 생겨서 아무래도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영애?”

갑작스레 바뀐 태도에 노부인이 몹시 당황스럽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

메릴린은 급하게 꺼낸 양해의 말에 상대가 답을 하기도 전에 바람처럼 저택을 빠져나왔다.

혹여 무엇인가 ‘목격’이라도 하게 될까 잔뜩 겁이 나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   *   *

한참을 달렸을까.

“레어 양!”

뒤에서 제럴드가 그녀의 성을 애타게 부르며 따라붙었다.

“괜찮으십니까? 도대체 무슨 일로 이러는 겁니까?”

입을 꾹 다문 채 집이 보이지 않는 장소까지 멀리 달음질친 그녀가 헐떡대는 숨을 골랐다.

메릴린을 따라잡은 제럴드가 핏줄이 오른 여인의 눈을 보고 흠칫했다.

몸을 홱 돌려 마주한 눈동자에 날이 서 있었다.

“어떻게든 벗어나 보려 애썼더니 만난 게 하필이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움츠러든 제럴드가 소심하게 어깨를 움찔했다.

“왜, 왜 그러십니까?”

그를 보는 메릴린의 눈동자가 서서히 촉촉해지기 시작했다.

당황한 제럴드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메릴린이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이콥.”

“제 이름은 제럴…….”

“지금 저는 인생의 기로에 서 있어요.”

“예?”

앞뒤 자르고 불쑥 꺼낸 말에 제럴드가 제 귀를 의심했다.

멀쩡해 보이던 아가씨였건만, 저택에 들어와 대화를 나눈 몇 분 남짓한 시간 사이에 무슨 문제가 생겼단 말인가?

안구 가득 습기를 머금은 그녀가 촉촉한 눈망울로 그를 올려다보며 서글프게 물었다.

“살아 있는 존재 가운데 가장 두렵고 무서운 인간, 이미 죽어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원혼. 둘 중 하나와 함께해야 한다면 무엇을 택하실 건가요?”

한눈에 보아도 제정신이 아닌 여인을 계속해서 상대해야 할지 헷갈린 듯 침묵하던 제럴드가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답했다.

“그래도 살아 있는 사람이 낫지 않겠습니까? 이미 죽은 자를 상대하는 것보다는요.”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겠죠. 근데 살아 있는 인간이 더 무서울 때가 있더라고요.”

걘 죽은 사람을 잡아먹는 산 사람이라고.

별안간 흑, 하고 입을 가린 메릴린이 고개를 숙인 채 온몸을 들썩였다.

제 박복한 인생은 어떻게 삶의 작은 탈출구조차 허락하지 않는단 말인가.

생각하면 할수록 기가 막혔다.

“저, 영애…….”

제럴드는 몹시 난처한 얼굴로 제 앞에서 흐느끼기 시작한 메릴린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가 조심스레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려는 그때였다.

아닌 척 그들을 흘끗대고 있던 거리의 수많은 인파들 사이에서 무엇인가가 몹시 빠른 속도로 쌩, 하니 날아와 그의 머리를 가격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감히 내 제자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게냐!”

침몰하는 배처럼 가라앉는 제럴드를 멍하니 바라보던 메릴린이 흐느끼던 것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귀에 익은 목소리를 들은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지금 이 시간에? 분명 연무장에 계셔야 할 분이 왜?’

“메릴린! 괜찮으냐?”

조카를 사랑하는 만큼이나 그 조카의 절친한 친구 또한 아끼는 에이든이 허겁지겁 달려와 그녀를 살폈다.

“너란 녀석도 참. 근육을 붙이는 훈련을 시작한 지 어언 5개월이 지났건만 아직도 사람 하나 제압하는 것이 어렵다니.”

“스, 스승님.”

메릴린이 공포에 가득 물든 눈으로 그녀의 ‘호신술’ 스승을 올려다보았다.

만일 그녀가 휘하에 있는 기사 나부랭이였더라면 진즉 쫓겨났겠지만, 에이든은 제 조카에게 관대한 만큼이나 이 제자에게도 다정한 스승이었다.

방패처럼 커다란 손이 메릴린의 어깨를 뒤덮었다.

“걱정 말거라. 될 때까지 공들여서 굴려 줄 터이니.”

스승인 나는 결코 너를 포기하지 않는단다.

에이든의 다정한 말에 메릴린이 별안간 딸꾹질을 시작했다.

그와 함께 그녀의 몸이 마치 감전이라도 당한 것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아니, 저 비실비실한 놈이 그렇게 무서웠던 게냐?”

설마하니 제자가 그 정도로 담이 작을 줄은 몰랐던 에이든이 머리를 긁적이다, 이내 쓰러진 채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제럴드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한때 기사를 지망했지만, 소질이 없어 행정 관리관이 되었다던 남자는 에이든의 억센 손아귀에 잡힌 채 나뭇잎처럼 팔랑거렸다.

“대낮에, 그것도 거리에서 감히 이 에이든 하이클레어의 애제자에게 손을 대려 했겠다?!”

얼얼한 통증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제럴드가 저를 잡아 흔드는 과격한 손길에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오,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저는 레어 양과 혼약이 오고 가는…….”

“뭐? 네놈이 감히 우리 메릴린에게 구혼을 해?!”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거리의 수많은 이들의 이목이 그들에게로 쏠렸다.

정신을 반쯤 놓고 있던 메릴린이 그제야 제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려 애썼지만, 이미 몇몇 사람들은 그녀를 알아본 듯 수군거리기 바빴다.

거기에 더해 에이든의 우렁찬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있는 힘껏 힘주어 불렀다.

“우리 메릴린은!”

“…….”

“나를 꺾을 수 있는 강자가 아니라면 보내지 않을 게다!”

메릴린의 입이 턱이 빠질 듯 벌어졌다.

“…….”

실시간으로 제 혼삿길이 일말의 가능성 하나 남기지 않고 닫히는 꼴을 본 그녀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쓰러졌다.

“저런, 메릴린!”

에이든이 손에 쥐고 있던 남자를 내동댕이치고 재빠르게 제자를 제 한쪽 어깨에 둘러업었다.

그러고는 단단히 포장된 바게트를 주워 반대쪽 옆구리에 끼고서 위풍당당하게 거리를 가로질러 저택으로 향했다.

“세상이 험난하니 참으로 큰일이구나. 큰일이야.”

연신 중얼거리면서.

덕분에 실컷 낮잠을 자고 일어난 도로테아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서 기절한 메릴린과 맛있는 바게트를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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