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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133화 (133/242)

133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두문불출하던 클레어 파인트의 병세가 호전되었다.

신전에서조차 손을 놓았던 그녀의 쾌차 소식에 다들 신기해할 무렵, 메릴린 레어는 일체의 사교 활동을 그만두고서 저택에 틀어박혔다.

한동안 멍하니 넋을 놓은 채 먹고 자는 일만 반복하던 그녀는, 어느 날 아침 해가 뜨는 것을 바라보며 결심한 듯 누군가를 향해 긴 서신을 보냈다.

그다음 날, 얼굴이 가려질 만큼 커다란 모자를 쓴 그녀는 황도에서 제법 떨어진 거리의 티 하우스를 방문했다.

“오늘 티룸을 예약했는데요.”

속삭이듯 건넨 말에 직원이 재빠르게 예약부를 확인했다.

간혹 이렇게 신분이 노출되지 않기를 원하는 손님들이 있었던 모양인지 대처가 훌륭했다.

예약한 룸을 향해 안내받는 동안 메릴린은 연신 초조한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이곳입니다, 손님.”

안내를 마친 점원이 공손한 태도로 문을 열어 주었다.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통통한 부인이 룸으로 들어서는 메릴린을 보고 미소 지었다.

“어서 와요, 메릴린.”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에 화답한 메릴린이 쓰고 온 모자를 벗고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아기자기한 티 세트를 보자 허기가 몰려들었다.

자연스레 음식을 향해 손을 뻗던 그녀가 그제야 눈앞의 인물을 인식하고서 멈칫했다.

‘이런.’

도로테아와 함께 다니다 보면 늘 손이 닿는 자리에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식사를 할 때 눈치를 살피거나 양해를 구해 본 적 없는 일행들과 어울리다 보니 저도 모르게 식사 매너를 잊을 뻔했다.

“제가 이 샌드위치를 먹어도 괜찮을까요, 부인?”

“그럼요. 영애를 위해 준비된 음식인 것을요.”

관대한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커다란 샌드위치 조각이 그녀의 입안으로 자취를 감췄다.

목이 메지 않게끔 식은 차를 들이부어 삼킨 그녀가 입맛을 다셨다.

테이블 위의 접시를 비우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신기하게 바라보는 부인의 시선을 모른 척 흘린 메릴린은 곧장 본론을 꺼냈다.

“분명 오늘 답을 주시겠다고 하셨지요?”

조심스럽게 건넨 물음에 중년의 부인은 빠르게 답을 주는 대신 물끄러미 메릴린을 훑었다.

새 모이만큼씩 먹고 잘 움직이지 않는 귀족 영애들은 대개 하나같이 창백한 안색을 지녔다.

무엇을 보아도 흥미보다는 무기력한 경우가 더 많고, 의욕 있게 먼저 나서는 일도 없었다.

어쩌다 원하는 것이 생겨도 곧장 집어 들기보다는 그것이 손에 굴러떨어지는 걸 바라지, 직접 움직이는 것을 귀찮아하기 일쑤.

하녀들을 부리는 데에 익숙해져 그 무엇도 자신의 손으로 하지 않는 게 당연한 것이 바로, 흔히 볼 수 있는 귀족가 영애들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확실히 달라.’

수많은 영애들을 만나 온 부인의 눈에는 메릴린의 ‘남다름’이 더욱 분명하게 느껴졌다.

우선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혈색 좋은 얼굴에, 거침없지만 야만적이지 않은 진취적인 태도.

곱슬거리는 붉은 머리카락, 뺨에 옅게 난 주근깨, 지나치게 마르지 않되 보기 좋을 만큼 호리호리한 몸매.

전형적인 귀족 영애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지 몰라도, 그녀만의 독특한 매력이 부인으로 하여금 호감을 갖게 만들었다.

그러니 더더욱 아쉬울 수밖에.

“저는 정말 영애를 알 수가 없군요.”

핀치 부인은 몹시 떨떠름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메릴린 레어는 혼인 적령기를 맞이한 영애들 가운데에서도 꽤 좋은 입지를 갖고 있었다.

그녀의 개인 무술 사범은 창술가로 이름 높은 ‘그’ 에이든 하이클레어로, 얼마 전 시합에서 실력을 인정받을 정도였다.

어디까지나 귀족가 ‘영애’치고는, 이라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어지간한 지휘관급이 상대라고 해도 몇 합 정도는 버틸 거라나?

가장 친한 친구는 하이클레어 가문의 금지옥엽인 ‘그’ 도로테아 하이클레어였으며, 그 외에도 2황자인 윌리엄 등 황족들과 돈독한 친분을 자랑했다.

매일 그녀에게 날아드는 초대장만 해도 수십 장이 넘고, 그녀와 말을 섞고자 하는 어린 영애들도 넘쳐 났다.

“영애 정도라면, 만일 영애가 욕심만 낸다면 황실과도 연을 맺을 수 있을 텐데요.”

“황실은 안 돼요.”

메릴린이 딱 잘라 말했다.

재고의 여지조차 없는 단호한 거절에 부인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메릴린을 살폈다.

남들은 가지 못해서 안달인 자리를 이 아가씨는 어째서 이토록 싫어하는 걸까.

메릴린 입장에서야 합당한 이유가 있었지만 핀치 부인이 그걸 알 리는 없었다.

‘그 집안에 멀쩡한 종자가 있을 리가 있나.’

폐태자부터 시작해서, 7황자까지.

어느 하나 멀쩡한 인간이 없건만.

‘게다가 황실로 시집가면 ‘그’ 7황자와 인척이 된다는 거잖아.’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마주쳐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끔찍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얼굴을 굳힌 메릴린이 어느새 비워진 접시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부인. 제 조건은 아주 간단하다고요.”

되도록이면 황도와 멀리 떨어져서, 사교계 활동일랑 관심 없고, 그저 상속받은 재산이나 조금씩 갉아먹으며, 적당히 소박한 삶을 사는 소인배.

특히 시골 출신으로 외부의 소식과 완벽하게 단절되어 이쪽을 모르는 이라면 더욱 좋았다.

“야망 같은 것도 없고, 그냥 태어났으니 살아가는, 숨만 쉬는 종자면 된다고요.”

“…….”

핀치 부인의 얼굴이 구겨졌다.

적령기를 맞이하여 저마다의 매력을 뽐내는 어린 영애들에게 적절한 운명의 짝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하는 것은 그녀의 보람 중 하나였다.

수십 년 동안 그 보람을 통해 많은 커플들을 성사시키는 것으로 명망을 쌓아 온 부인으로서는 도저히 메릴린의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제 명예를 걸고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그런 조건의 남자와 결혼했다가는 큰코다칠 거예요, 영애.”

“저는 이미 매일같이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걸요. 더 다칠 것도 없어요.”

핀치 부인이 한숨을 쉬었다.

요즘 젊은이들이란 현실이 조금만 힘들어도 도망가고 싶어 한단 말이지.

“현실이 어렵다고 해서 도망치듯 하는 결혼은…….”

“도망 좀 치면 어떤가요!”

메릴린이 울컥한 얼굴로 소리를 높였다.

“현실이 얼마나 거지 같은데!”

“세상에…… 영애.”

절박한 얼굴을 본 핀치 부인이 놀란 얼굴로 손을 들어 본인의 입을 가렸다.

도대체 무엇이 이 어린 영애를 이토록 괴롭게 만드는 걸까.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덜덜 떨리는 손을 보니 단순한 일이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다.

마음씨 좋은 중년 부인은 안쓰러운 시선을 보내며 조심스럽게 권했다.

“괴로운 것이 있다면 주변 사람들과 털어놓고 나누는 것이 좋아요. 영애의 가장 친한 친구인 하이클레어 후작 영애에게라도요. 그녀는 분명 영애를 도와줄 거예요.”

“그럴까요?”

도로테아야말로 도망쳐야 할 가장 큰 이유이자 원흉이었다.

차마 이 사실을 말할 수 없는 메릴린은 지친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만일 부인께서 제 부탁을 들어주시지 않으실 거라면 그냥 그렇게 말씀해 주시면 돼요. 저도 제가 무슨 일을 부탁드리고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요.”

단단히 결심한 듯 굳은 얼굴을 바라보던 핀치 부인이 짤막한 한숨과 함께 품에서 작은 쪽지를 꺼내어 내밀었다.

“이틀 후, 이곳 티룸이에요. 상대는 먼 지방 소영지에 행정관으로 부임하게 된 아카데미 졸업생이라더군요. 외지 발령을 받아서 혼인을 서두르는 눈치예요.”

“지방 행정관. 아주 좋네요.”

메릴린이 밝은 얼굴로 쪽지를 받아들었다.

“영애가 누군지는 일부러 비밀로 했어요. 그저 빨리 혼인을 하고 싶어 하는 변방 가문의 영애라고요.”

“감사합니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한 핀치 부인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내 중매 인생에 가장 기이하고, 말도 안 되는 요건이라는 것만 알아 둬요.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이런 일에 나서지 않을 거라는 것도.”

“부인께 누를 끼치지 않도록 열심히 해 볼게요.”

메릴린이 결연한 얼굴로 드레스 자락이 구겨질 만큼 꽉 쥐며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도로테아 하이클레어의 마수에서 벗어나야지.

굳은 결의를 다짐하며 주먹 쥔 손에 들고 있던 과자가 가루가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떨떠름하게 그녀를 바라보던 핀치 부인이 한숨과 함께 덧붙였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영애의 몫이지만, 되도록이면 이 일이 성사되었을 때 내 덕이라는 말만 하지 말아 줘요.”

그녀가 주선한 만남 중에 가장 기이하고 별난 일인 동시에, 성사되어도 자랑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   *   *

정확히 이틀 후 같은 시각, 같은 룸에서 메릴린은 그토록 원하던 조건의 상대를 만났다.

남자는 순한 인상의 어딘가 특징 없는 밋밋한 외모를 갖고 있었다.

“사실 조금 걱정했습니다.”

“네?”

“어머니의 성화로 나오긴 했지만, 상대가 어떠한 분인지 크게 들은 바가 없어서…….”

단정한 차림새의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흐렸다.

메릴린은 마음이 못내 흐뭇했다.

한적한 시골 땅에, 말단 행정 관리직이면 따박따박 월급을 받으며 영주의 비호 아래 적당히 살 수 있으리라.

“아시다시피 제 사정이 급하고, 혼인 후에는 외지로 함께 내려가야 한다는 조건을 듣고도 함께하겠다 원하는 분이시라면 무언가 사정이 있지 않을까 해서요.”

세상에.

본인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을 보니, 분수에 맞지 않는 꿈을 꾸다 엉뚱한 일에 엮일 일도 없을 것 같았다.

‘훌륭해. 부인께서는 정말 조건에 딱 맞는 남자를 골라 주셨구나.’

메릴린은 저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리려 애쓰며 재빠르게 답했다.

“저는 그 조건이 마음에 들어요.”

“예?”

“대도시는 흥미롭고 자극적인 것들이 많지만 그만큼 시골의 여유로움이 없잖아요.”

“…….”

“가진 것은 많을지 몰라도 그 소중함을 아는 이들은 적죠. 그럴 바에야 적게 지니더라도 그 가치를 분명히 알 수 있는 삶이 좋은 거예요.”

빙긋 웃으며 담담한 목소리로 진정한 ‘행복의 가치’를 논하는 그녀의 말에 남자의 눈동자에 감탄이 어렸다.

암, 그렇고말고.

가진 것이 많으면 원한을 사기 마련이고.

가진 것이 적으면 원한을 갖기 마련이고.

적당한 것이 최고였다.

메릴린은 고지가 눈앞임을 깨닫자 조급해지는 제 마음을 꾹꾹 누르며 타일렀다.

‘침착하자. 아직은 끝난 게 아니야.’

발레리가 떠나고 도로테아의 마수에서 벗어나고자 애쓴 지난 시간 동안, 그녀가 겪어 온 무수히 많은 고난들이 눈앞을 스쳤다.

그 역경들은 메릴린에게 때가 올 때까지 몸을 바짝 엎드려 기다리는 법을 가르쳤다.

우아하게 찻잔을 내려놓은 그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홀로 남아 계실 어머님께서 혹여 마음 졸이실까 봐 혼인을 서두른다는 말에, 분명 가정적인 분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어요. 아드님을 이렇게 잘 키우신 어머님은 얼마나 좋은 분이실까요?”

다다다다 쏟아지는 칭찬에 눈을 깜빡이던 남자가 머쓱한 듯 답했다.

“그렇게 봐주신다니 감사합니다만, 저희 어머님께서 깐깐한 구석이 있으셔서…….”

“그만큼 일 처리에 실수가 없으시다는 거군요.”

“저를 지나치게 아끼시는 만큼 고려하는 것들이 많으십니다.”

“그만큼이나 아드님이 소중하고 또 훌륭한 분이라는 증거로군요.”

“…….”

몹시도 적극적인 메릴린의 태도에 남자가 어쩔 줄 모르고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메릴린은 환한 웃음과 함께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어필했다.

“만일 어머님의 까다로운 기준이 염려되신다면, 제가 그분을 한번 만나 뵈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메릴린의 적극적인 태도에 다소 마음을 놓은 남자는, 제 어머니가 어떠한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메릴린이 남자의 말을 들으며 시어머니 될 분이 어떠한 사람인지 분석하는 사이, 문밖을 얼쩡대던 다람쥐 한 마리가 재빠르게 모습을 감췄다.

*   *   *

창틀을 넘어 쪼르르 달려든 다람쥐가 누군가의 무릎 위에 안착했다.

눈처럼 새하얀 손이 피피의 부드러운 털을 매만졌다.

“수고했어.”

꼬리를 동그랗게 만 피피는 의기양양한 기색으로 다리를 타고 내려가 옆에 마련된 근사한 간식을 볼에 집어넣었다.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도로테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윤기가 흐르는 아름다운 은빛 머리카락이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잔잔하게 물결쳤다.

창가로 다가가 연무장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무엇인가를 가늠하던 그녀가 고개를 돌려, 방 청소에 여념이 없는 충실한 하녀를 불렀다.

“제인.”

“네, 아가씨.”

“에이든 외숙부께서는 지금도 데인과 함께 연무장에 계시니?”

“아마 그러실 거예요. 지난번 일로 폐하께 자숙을 명받은 이후 줄곧 연무장에서 살고 계시잖아요.”

근신이라는 형태를 띠고 있긴 했으나, 실상은 하이클레어 가문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강대해짐을 우려하는 이들을 달래려는 조치였다.

에이든의 지나치게 솔직한 면면은 위선적인 사교계 인사들과는 맞지 않았다.

그가 종종 일으키는 사고들에 비하면 오히려 처벌의 강도가 가볍다는 말이 나올 수준이었다.

“연무장에 내려가 보시려고요?”

“아니, 그보다는…….”

도로테아가 눈을 끔뻑이며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웨이버드 거리에 있는 빵집의 갓 만든 따끈따끈한 바게트가 먹고 싶어. 우유로 만든 진한 버터를 발라서 말이야.”

아가씨의 요청에 쫑긋, 귀를 기울인 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우유 버터를 만드는 사이 에이든 님께서 바게트를 사 오시면 되겠어요!”

“응.”

할 일이 생긴 제인의 손이 청소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마지막으로 문틀을 박박 닦고 일어서는 야무진 하녀를 지켜보던 도로테아가 다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제인.”

“네?”

“되도록 저녁 시간 전에 다녀오시도록 숙부님께 가장 빠른 지름길을 안내해 드리렴.”

번화가를 자주 드나들어 골목에 빠삭한 하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쏜살같이 달려 나가는 제인을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하품을 하고는 다시 꾸물꾸물 침대 위로 올라갔다.

낮잠 자기에 딱 좋은 평온한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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