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아가씨, 어째서요……?”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는 죄인이 되어 있었다.
저택의 좁은 창고에 갇힌 하녀를 찾아온 블레인 백작 부인은 미안한 기색 한 점 없이 말했다.
“이렇게 끝내야만 네 아가씨의 평판을 지킬 수 있단다. 네 평판이야 저택을 벗어나기만 하면 어디 소문날 일 없을 것 아니니. 처벌도 없고, 배상해야 될 돈도 없단다. 그저 저택을 떠나기만 하면 돼.”
혹여 남자가 다시 파인트 남작가를 찾기라도 하면 골치 아픈 일이었다.
설령 모든 것을 아는 하녀가 저택을 나가 떠벌린대도, 다들 해고당한 그녀가 앙심을 품고 지어 낸 이야기라고 생각할 테지.
“하지만 저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네 아가씨를 위해서야. 일자리는 어디서든 구할 수 있잖니?”
네 아가씨의 평판은 한 번 망가지면 끝이지만, 하녀 자리야 어디서든 구하지 못하겠니.
그렇게 해서 쫓겨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같은 위치에 있는 ‘사용인’들의 경멸과 혐오, 멸시였다.
블레인 백작 부인의 말은 틀렸다.
하녀의 평판 또한 중요했다.
성격이 오만하다거나, 생각이 부족하다거나 하는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단 하나만큼은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주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
주인의 것을 넘본 그녀에게 일자리를 내어 줄 저택은 없었다.
진실을 떠들고 다니면 주인을 흉보는 하녀라며 더욱 몹쓸 것으로 여겼다.
그 어디에서도 고용되지 못한 하녀는 굶주림을 참다못해 멀리 떨어진 곳까지 나가 일을 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오던 어두운 밤길에 그녀를 덮친 들개에게 물려 죽으며 생각했다.
나는 언제나 당신의 개였는데.
당신의 손길에 기뻐하고, 말 한마디에 순종하고.
짖으라면 짖고, 물라면 물고.
충실히 모든 명에 다 따랐는데.
버려졌어도 죽을 때까지 당신을 거역해서는 안 되는 개로서 살아야 하는 거구나.
미워! 귀족이 미워! 아가씨가 미워!
뒤틀린 마음이 온몸을 잠식했다.
클레어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찬 메릴린의 머릿속을 누군가가 흔들어 깨웠다.
“이제 그만 일어날 시간이에요, 메릴린.”
누군가가 거세게 머리를 내려친 듯, 고통과 함께 목으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 * *
따끔거리는 목을 더듬으며 메릴린이 눈을 깜빡였다.
눈물로 흐릿해진 시야가 조금씩 선명해지면서 그녀의 앞에 선 도로테아가 보였다.
“아……?”
그녀의 두 팔은 뒤에 있던 누군가가 강하게 결박하고 있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자 도로테아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녀를 놓아줘, 우드. 이제는 정신을 차린 것 같으니까.”
멀리 침대 위에서 벌벌 떨고 있는 클레어가 보였다.
한바탕 난리가 난 듯한 방 안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엉망진창으로 뜯겨 나간 베개에서 나온 깃털들이 공중을 날아다녔다.
헐떡이는 숨을 진정시킨 메릴린이 비틀거리며 제 발로 자리에 섰다.
우드의 걱정스런 눈길이 따라붙었다.
“거짓말을, 했어요…….”
멍하니 꺼낸 메릴린의 말에 도로테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다들 거짓말을 했죠.”
채 가시지 않은 흥분에 손이 덜덜 떨렸다.
뚜벅뚜벅.
벤슨이 서 있는 제단 앞으로 걸어간 도로테아가 고이 접혀 있던 낡은 서신을 폈다.
유려하고 아름다운 글씨체로 쓰인 서정적인 문장들은 하녀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훌륭했다.
“문학을 좋아했었군요, 클레어.”
침대에서 덜덜 떨고 있던 클레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메릴린은 아직도 그녀의 육신에 들어왔던 하녀의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울먹였다.
“아가씨의, 아니, 영애의 일을 돕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기뻐했어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기꺼이 영애의 옷을 입고 나가 벤슨을 만나고 돌아왔는데…….”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서 눈을 내리깐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블레인 백작 부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쫓겨난 하녀가 비참하게 죽었다는 사실보다, 숨기고자 했던 추문이 결국 드러나 버린 것이 더 마음에 걸리는 듯 보였다.
아무 말 없이, 그저 고요한 눈빛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도로테아와 마주한 클레어가 겁을 먹은 듯 몸을 움츠렸다.
덜덜 떨리는 입술 새로 겨우겨우 말이 튀어나왔다.
“그, 그렇지만 하녀잖아요. 그냥 하녀에 불과한 아이 하나였는데. 벌을 내리지도, 배상을 요구하지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그냥 내 앞에서 사라져 주길 바랐다고요!”
그녀는 사랑받아야 마땅할 존재였다.
자신의 치부를 알고 있는 하녀를 곁에 둘 수는 없었다.
안심하라며 그녀를 향해 짓는 미소는, 꼭 그녀의 철없는 행동을 비웃는 것 같았다.
신경이 거슬리니 눈앞에서 사라져 주길 바랐을 뿐인데.
“그녀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있어요. 없는 죄를 만들어 손가락질당하게 만들고 남들의 시선에 시달리도록 놓아두었으니까요.”
“그래서 제게 이런 짓을 했다고요?”
일그러진 얼굴을 보던 도로테아가 궁금한 듯 물었다.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나요?”
이제 와 그것이 무슨 상관이냐는 듯 멈칫한 클레어를 향해 도로테아가 조곤조곤 말했다.
“제인도, 제시도 아니에요. 하녀의 이름은 엘리. 엘리였답니다.”
가만히 서서 모든 것들을 지켜보고 있던 벤슨이,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제단 위에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물었다.
“아가씨께서도 원래대로 돌아오셨고, 더 이상 제가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면 이만 가 봐도 괜찮겠습니까?”
“그럼요. 수고하셨어요, 벤슨 군.”
그때까지 멍하니 광경을 지켜만 보고 있던 남작이 무엇인가 말하려는 듯한 낌새를 보이자, 벤슨 다이어가 선수 치듯 입을 열었다.
“수고비라면 괜찮습니다. 저는 그저 여기 와서 옛 기억을 떠올렸던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오히려 대가라면 충분히 받은 기분입니다.”
그의 차분한 눈동자가 클레어를 향했다.
한때 서신 속의 낭만 가득한 문장과 아름다운 이야기에 취해 사랑한다 믿었던, 얼굴도 모르는 아가씨의 본모습이 들어왔다.
이내 고개를 돌린 그가 도로테아를 향해 허리를 꾸벅, 숙여 보였다.
“덕분에 눈이 뜨였으니까요.”
남자가 문을 벗어나 사라지고 나서 내려앉은 침묵을 깨뜨린 것은 블레인 백작 부인이었다.
“이제 클레어에게는 더 이상 문제가 없는 건가요?”
고개를 끄덕인 도로테아가 훌쩍이는 클레어의 손을 잡고서 가족에게 인도했다.
다들 안도하는 얼굴로 클레어를 끌어안는 와중에도, 블레인 백작 부인이 하인들 입단속을 시키는 소리가 들렸다.
막 정문을 나서려는 순간, 달려 나온 것은 남작 부인이었다.
오랜 마음고생으로 초췌해진 얼굴에 불안감이 가득했다.
“영애, 오늘의 일은…….”
“치안대를 불러 성문 근처를 돌아다니는 들개들을 처리해 달라고 요구하세요. 피해자들이 여럿이니 마땅히 응할 겁니다.”
피해자들이 여럿임에도 들개 소탕이 지지부진했던 까닭은, 물려 죽은 이들의 신분이 낮은 탓이었다.
귀족 부인이 직접 부탁한다면 미적지근한 태도도 달라질 테지.
도로테아의 말에 머뭇거리던 남작 부인이 조심스레 딸을 변호했다.
“클레어는 심성이 나쁜 아이는 아니에요.”
여전히 딸아이를 옹호하는 태도에 발끈한 메릴린이 입을 열려던 찰나, 그런 메릴린의 손을 잡고 있던 도로테아는 자신의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혹여 클레어의 평판이 이번 일로 망가질까 두려워 보이는 남작 부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말을 꺼냈다.
“빙의라는 것은 결국 타인의 혼이 육신을 침범하는 일이에요.”
뜬금없는 말에 남작 부인이 눈을 껌뻑였다.
도로테아는 느릿하지만 그녀답지 않은 친절함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아무리 한이 맺혀 이승을 떠도는 령이라도 아무런 연이 없는 육신에 발을 디디기란 쉽지 않지요.”
“영애, 무슨 말인지 도통…….”
“육신까지 집어삼킬 만큼 강하게 연결되려면 같은 피를 타고난 이복 자매 정도일까요.”
“…….”
“부인은 그 하녀의 출신이 어디인지 알고 계신가요? 누가 그녀를 고용하기로 결정했었나요?”
도로테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작 부인의 낯빛이 변했다.
부들부들 떠는 남작 부인을 지나친 도로테아가 다시 걷기 시작하자, 일행들이 재빠르게 그녀를 뒤따랐다.
힐긋 도로테아를 본 우드가 나직이 말했다.
“내가 아는 너라면 굳이 없는 이야기로 상대를 괴롭히진 않지.”
“…….”
그러니 아마도 엘리는 파인트 남작의…….
도로테아는 그저 은은한 미소를 띤 채 아무 말이 없었다.
멀어져 가는 남작가의 저택을 보는 메릴린의 눈이 착잡함으로 물들었다.
모두에게 칭송받는 이상적인 귀족 가문.
심성 곱고 사랑스러운 딸들과 듬직한 아들들. 화목한 부부.
완벽에 가까운 아름다운 그림이었건만.
여러 번 붓 칠을 더하고 더하는 사이, 안쪽의 캔버스는 너덜너덜하게 해져 있음을 아무도 몰랐다.
“사람이 죽어 나가도 저들만의 세계는 여전히 굳건하군요.”
“글쎄요.”
저택을 빠져나오는 길에 보지 않았던가.
자신의 일에 자부심이 가득하던, 주인을 향한 충심으로 무장해 있던 하인들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엘리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지만, 이로써 그들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주인이 누리는 영광과 칭송 아래 희생되는 것은 바로, 주인의 ‘충성스런 개’들이라는 것을.
* * *
“곤란한 경험을 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부드럽게 건네는 사과에 메릴린이 고개를 들었다.
“실은 알고 있었던 거죠? 클레어 영애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요.”
메릴린은 아직도 떨림이 멎지 않은 손을 만지작거리며 불퉁하게 말했다.
낯선 이가 가진 생의 기억이 온전하게 스며든 감각은 여전히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요.”
도로테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인정했다.
“하지만 메릴린에게로 불똥이 튈 줄은 몰랐어요. 만에 하나 령이 튕겨 나간다고 한들 붙잡을 수 있게끔 일부러 제인을 동행시켰고요.”
제인이 여전히 제 손에 들린,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녀의 이름이 쓰여 있는 ‘임시 육신’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럼 어쩌다 그 혼령이 제게 씐 거죠?”
조심스러운 물음 속에는 어쩌면 제게도 도로테아와 비슷한 ‘능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옅은 두려움이 내비쳤다.
“당신이 그녀에게 연민을 가졌기 때문일 거예요.”
뜻밖의 답에 메릴린이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저택에서 쫓겨나 내내 원망했던 것은 클레어 파인트였지만, 죽는 순간 그녀의 가장 강렬한 염원은 살고 싶다는 것이었으니까요. 본능적으로 당신을 택한 거죠.”
아주 드문 일이지만 정신력이 약한 이를 밀어내고 육신을 차지하는 일이 없지 않으니까.
“살고 싶다니.”
“가야 할 곳으로 갈 수 없는 령들의 목적은 대부분 그래요. 육신을 얻어 미련 가득한 생의 기회를 다시 한번 얻는 거죠.”
메릴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녀와 동화되었던 순간의 기억과 느낌이 지나치게 강력해서 좀처럼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죽기 직전까지 그녀가 올려다본 것은 높디높은 저택가의 담벼락, 그 안에서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는 사랑받는 아가씨.
그건 정말이지 불공평한 일이었다.
그 후 메릴린은 정신을 다른 곳에 놓고 온 듯 넋이 빠진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그녀를 바래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우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꺼내서 두려움을 키우지? 게다가 휘말릴 가능성이 있는 위험한 일이라면 애초에 그녀를 대동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네 생각보다 그녀를 아끼거든. 누군가의 입장을 대변하고 공감하는 것은 생각보다 대단한 능력이야.”
“그렇게 생각한다면 배려라는 것을 좀 해라.”
“지금도 배려하고 있어. 그녀는 좀 더 강해져야 해. 지금의 모습을 잃지 않되, 좀 더 단단하고 여유로워져야지. 장점인 연민이 약점이 되지 않게끔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곤란하지.
늘 그렇듯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 도로테아에게 우드가 물었다.
“대체 뭘 준비하고 있길래 그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다.”
“클레어 파인트가 철없이 저지른 일이 나비 효과가 되어 누군가 죽었다 하더라도, 령이 육신에 빙의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야.”
엉망으로 더렵혀진 방 안에서 특별한 것을 찾기란 쉽지 않았지만, 분명 무엇인가가 그녀의 ‘상태’를 촉발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루크가 그러더라.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전장에서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분명 어제 그의 검을 맞고 쓰러져 미동도 없이 끌려 나간 인간이, 다음 날 다시 두 발로 걸어와 덤벼들더라는 이야기는 확실히 그녀의 흥미를 끌었다.
클레어 파인트의 방에서 느낀 이질감이 좀 더 선명했더라면 쫓으려 애써 보았을 텐데.
제아무리 그녀라도 타인의 영역을 헤집고 다니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시선을 아래로 내린 도로테아가 나직하게 결론지었다.
“그러니 그녀는 강해져야 해. 지금보다도 훨씬.”
다가올 시간들을 생각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