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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131화 (131/242)

131화

대화를 귀 기울여 듣고 있던 남작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서 끼어들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영애? 서신이라니요.”

“말 그대로예요, 남작님.”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이 없는 클레어에게서 눈을 뗀 도로테아가 남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기 있는 벤슨 군은 클레어 영애와 몹시 친밀한 관계였다는데, 놀랍게도 클레어 영애는 벤슨 군을 모르시는군요. 벤슨 군 또한 그가 만났던 영애는 지금 눈앞의 인물이 아니라고 하고요.”

도로테아의 말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남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누군가가 클레어를 사칭하여 그와 대화를 나눴단 말입니까?”

“그런 것 같아요.”

“도대체 누가 그런 끔찍한 짓을!”

남작 부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클레어 파인트가 낯선 남자와 서신을 통해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라는 사실은 소문만으로도 그녀의 평판을 망쳐 버릴 수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남작가 사람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살피던 메릴린은 묘하게 침착해 보이는 클레어의 큰언니, 블레인 백작 부인에게 시선을 주었다.

‘놀란 척 입을 가리고 있긴 하지만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눈이 차분한걸.’

심지어 당사자인 클레어조차 영문을 모르는 표정을 하고 있건만.

의아함에 블레인 백작 부인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는 찰나, 도로테아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벤슨 군, 당신은 본인이 ‘클레어 파인트 남작 영애’라고 주장하는 여인을 얼마나 만나 보았나요?”

“그녀와 만난 건 단 한 번뿐입니다. 이미 기억이 가물거릴 만큼 시간이 지난 데다, 그 이후 단 한 번의 서신조차 오간 적이 없습니다.”

벤슨 데이어는 이제 와서 이런 케케묵은 이야기를 왜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드는 눈치였지만 순순히 대화에 협조했다.

“단 한 번뿐이라면 제법 강하게 기억에 남았을 법하군요.”

도로테아의 시선이 정보 제공을 해 준 시녀에게로 향했다.

“어제 클레어 영애가 착용했던 옷과 장신구들이 필요합니다만, 내주실 수 있을까요?”

남작의 손짓에 서둘러 올라간 시녀가 물건을 가지고 내려올 동안, 클레어는 몹시 혼란스러운 얼굴로 벤슨을 흘긋거리며 훔쳐보았다.

분명 그녀는 벤슨 데이어를 알아보지 못한 듯했다. 배우라 하더라도 그런 자연스러운 연기는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도로테아와 눈을 마주할 때면 묘하게 어깨를 움츠리거나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마치 숨기는 것이 있는 사람처럼.

“이것들입니다.”

시녀가 가져온 분홍빛 드레스를 바라보는 벤슨의 얼굴에 짧게나마 놀람이 스쳤다.

그를 관찰하던 도로테아가 나지막이 물었다.

“낯이 좀 익나요?”

“제가 그녀를 만나러 황도에 올라왔을 때 입고 나왔던 옷이 분명하군요. 장신구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드레스는 확실합니다.”

연분홍빛이 감도는 드레스 앞쪽에는 짙은 색의 자수가 한 땀 한 땀 새겨져 있었다.

부풀린 소매 끝에 달린 앙증맞은 리본 장식까지 모두가 솜씨 좋은 살롱에서 수제로 맞춘 물건이었으니 알아보기 수월했으리라.

“세상에…… 그 하녀 짓이에요, 아가씨!”

시녀가 호들갑스럽게 외쳤다.

“그때 아가씨의 물건을 훔쳤던 하녀 말이에요. 그 하녀가 이걸 입고서 남자를 만나러 갔던 거군요!”

그 말과 함께 클레어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고 있는 파인트 남작의 두 아들 중 인내심이 적은 차남이 입을 열어 물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 하녀라니? 하녀가 이걸 어찌 입어?”

“그건 내가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

혼란이 가득한 자리에 차분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클레어 앞으로 나선 그녀의 언니, 블레인 백작 부인이 입을 열었다.

“몇 해 전 클레어의 물건에 손을 댄 하녀가 있어 제가 저택에서 내보낸 적이 있어요. 클레어가 자신의 곁에서 여러 해 동안 고생한 아이라며 말리기에, 괘씸하긴 해도 배상은커녕 처벌도 내리지 않고 그냥 내보냈지요.”

“그럼 그 하녀가…….”

“클레어의 이름을 사칭해 서신을 쓰고, 클레어인 척 행세를 하다 들킨 것이 아닐까 싶어요.”

남작 부인이 눈을 질끈 감았다.

남작과 아들들의 얼굴에 분노가 서렸다.

당장이라도 그 하녀를 잡아다 족칠 기세였다.

자신의 생각을 차분하게 털어놓은 블레인 백작 부인이 다시 도로테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다만 영애. 이것이 지금 클레어의 병증과 무슨 상관이지요?”

“클레어 영애에게는 지금 누군가의 ‘혼’이 씐 상태거든요. 처음에는 개의 혼령인가 했었는데, 이상하게도 클레어 영애가 이상한 행동을 하면서 입고 있던 옷과 장신구가 마음에 걸렸어요. 분명 ‘낮’의 그녀는 이토록 예쁜 드레스를 입고 있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개처럼 짖어 대는 밤의 그녀는 성가신 장신구들을 걸치고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개라면 결코 그리하지 않았겠죠.”

다들 클레어의 추태를 보지 않으려 애썼기에 미처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그녀가 늘 비슷한 옷과 장신구에 집착한 채로 ‘개의 흉내’를 내고 있음을.

“그럼, 그건…… 정, 정령과는 관계가 없는 겁니까?”

더듬거리며 묻는 차남의 질문에 도로테아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안타깝게도 그렇군요. 클레어 영애를 괴롭히는 건 죽은 하녀인 것 같아요.”

헉,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시선을 주고받는 이들 모두 감정을 쉬이 가라앉히지 못했다.

특히 남작 부부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파렴치한 행위를 저질러 내쫓기고도, 죽은 후 다시 클레어를 찾아와 괴롭히는 하녀의 시신이라도 파낼 태세였다.

“그럼 어찌해야 하나요?”

블레인 백작 부인의 물음에 도로테아는 잠시 말이 없다가, 멍하니 선 클레어를 바라봤다.

시선을 받은 클레어 파인트가 움찔, 하고 몸을 떨었다.

“클레어 영애께서는 정녕 이 서신을 주고받은 사실과, 그 하녀가 영애의 이름을 달고서 벤슨 군을 만나려던 사실 모두 모르셨던 건가요?”

“아…….”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으셨어요?”

“네, 네!”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클레어가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황으로 점철된 커다란 목소리는 귀족 영애의 품위에 걸맞지 않았지만, 그녀의 상황을 감안해 보았을 때 그 부분까지 고려하지 못한 것이야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확답을 들은 도로테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애의 말대로라면 오늘 밤 그 하녀를 영애의 육신에서 떼어 낼 수 있도록 ‘의식’을 치르는 것이 좋겠어요. 다행히도 그 정도의 일이라면 저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정말이요?”

클레어의 얼굴이 환해졌다.

도로테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고통에서 해방된다는 사실에 기뻐 어쩔 줄 모르는 클레어 와, 그런 그녀를 안아 주는 가족들을 보고 있는 이들 모두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벤슨 경이 도움을 주셔야 할 테지만요. 위험하진 않을 거예요.”

“수고비라면 내가 드리겠소!”

남작의 말에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던 벤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서는 오래전 단 한 번의 만남으로 끝이 났던 인연에 이런 사연이 엮여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한 눈치였다.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이던 벤슨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퍼즐 조각처럼 각각의 이야기들이 딱 맞아 들어가고 있었다.

“정령사란 이런 일도 할 수 있었군요!”

“과연.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하시니 다들 영애를 높이 보는 거였어요!”

환희에 차서 꺼내는 칭송에 도로테아는 부정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그리고 메릴린과 우드는 그 광경을 떨떠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한 편의 잘 짜인 사기극을 보는 기분이로군.’

‘누가 봐도 정령사의 일이 아니잖아.’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클레어 파인트가 고통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남작가로서는 도로테아가 정령사이든 아니든 하는 문제는 상관없을 터였다.

*   *   *

좀 전까지 살아 있었던 닭의 피가 클레어의 침대 주변을 빙 둘러 흩뿌려졌다.

침대 위에 누운 클레어는 참으로 오랜만에 ‘맨정신으로’ 드레스와 장신구를 걸친 채 가만히 누워 있었다.

잔뜩 긴장한 눈이 천장을 바라봤다.

“영애, 괜찮아요. 조금만 있으면 모든 것이 끝날 테니까.”

불길해 보이는 붉은빛 글자가 아로새겨진 노란 종이가 이곳저곳에 붙었다.

도로테아의 만류로 들어오지 못한 채 문 앞에 선 남작가 사람들이 걱정스런 시선을 보냈다.

클레어는 자신을 걱정하는 가족들을 위해 애써 의연한 척 웃으려 노력했다.

막내딸의 착한 심성을 아는 부인이 다시금 눈물을 훔쳤다.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예요.”

단상 앞에 선 벤슨에게 도로테아가 다정하게 말했다.

“클레어 영애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그녀는 벤슨 군이 쓴 이 애정 어린 서신을 결코 무시하지 못할 테니까요.”

오래전 그들이 주고받은 서신의 일부가 임시로 만들어진 제단 위에 제물처럼 올려져 있었다.

“걱정할 것은 전혀 없답니다. 영애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은근한 목소리가 누워 있는 클레어 파인트의 귓가에 닿았다.

멍하니 부적이 붙은 천장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머릿속에 한 가지 불안이 떠올랐다.

만일 그녀가 아직 꺼내지 않은 진실이 남아 있다면?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런 생각에 사로잡힌 것도 잠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엇인가 다른 존재가 그녀의 육신을 점령하듯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도로테아가 읊기 시작한 경(經)소리에 따라 육신에 달라붙어 있던 ‘령’이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닭의 피에서 나는 비린한 내음에 코를 움켜쥐고 있던 차남이, 클레어의 몸에서 무엇인가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오르는 것을 목격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 옆에 있던 메릴린은 짐짓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도로테아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상해.’

왠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원인을 알아냈고, 그 해결법도 알았으니, 아무런 문제없이 일이 흘러갈 터인데.

어째서 이토록 불안한 걸까.

고개를 돌린 메릴린의 눈에 블레인 백작 부인이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뜬 채 막냇동생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에는 알 수 없는 초조함이 깃들어 있었다.

“끼이이잉……!”

개의 비명 소리 비슷한 것이 클레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자연스레 다시금 침대 쪽을 바라본 메릴린은, 클레어의 몸에서 나온 불길해 보이는 새까만 연기가 제물이 있는 제단을 대신해 자신에게로 향하고 있음을 목격했다.

훅,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안으로 스며든 순간 블레인 백작 부인과 눈이 마주쳤다.

달싹이는 입술을 보며 메릴린은 제가 간과한 것을 떠올렸다.

귀족들은 그네들의 명예를 지킬 수만 있다면 아주 천연덕스럽게 거짓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   *   *

흐려졌던 시야가 천천히 다시 분명해졌다.

메릴린은 난생처음 와 보는 생경한 장소에 와 있었다.

잔뜩 긴장한 듯 진득하게 땀으로 달라붙은 손바닥이 신경 쓰였다.

눈앞에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 우아하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미소 지었다.

블레인 백작 부인.

익숙한 얼굴이었지만 지금보다 더 앳된 나이의 모습이었다.

“네 아가씨의 평판을 위해서란다. 엘리,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네.”

“설마 그 뻔뻔한 남자가 클레어를 만나겠답시고 황도까지 쫓아오다니. 참으로 골치가 아프구나.”

“아가씨께서는 일이 이리될 줄 모르셨을 거예요.”

“그래, 그 아이는 아직 철이 없으니. 네가 참 고생이 많구나.”

따뜻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그녀’를 치하했다.

아니, 메릴린이 아니라…….

지금 메릴린의 육신에 들어온 그녀를 치하하고 있었다.

“네 아가씨를 위해 대신 그 남자를 만나 단념시키렴. 그거면 돼.”

“그럼요. 할 수 있어요.”

“고맙기도 하지.”

그녀는 몹시 들떠 있었다.

자신의 주인을 위해 큰일을 하러 간다는 생각 때문에.

어린 나이에 철없이 주고받은 서신 몇 장이 어린 아가씨의 앞날을 막아서는 안 되겠지.

막상 만나 본 남자는 그리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소중한 아가씨와는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인물이었다.

“그렇군요. 잠시나마 기대했었건만.”

“인연은 여기까지였으니, 부디 주고받은 서신들은 모두 버려 주세요.”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잘 타일러 남자를 보내고 돌아온 그날, 아가씨의 옷을 돌려주러 저택으로 향한 그녀를 붙든 것은 함께 일하는 시녀들이었다.

“감히 아가씨의 물건을 훔치다니!”

“세상에, 파렴치하기도 하지!”

뺨에 화끈한 고통과 함께 그녀의 몸이 형편없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경멸 어린 시선들과 원색적인 욕, 삿대질, 모욕적인 말들이 쏟아졌다.

그 모든 것들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는 그녀를, 어린 아가씨는 높은 계단 위에서 빤히 훔쳐보고 있었다.

마치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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