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이제야 말을 꺼내는 시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물었다.
“어째서 그 이야기를 남작 부인 앞에서 꺼내지 않았죠?”
“처음에는 아예 기억하질 못했어요. 그 물건들을 본 지 너무 오래 되어서요. 그도 그럴 게, 물건들을 모두 돌려받긴 했지만 아가씨께서는 한 번도 다시 걸친 적이 없으시니까요. 모두 상자 깊숙이 보관되어 있었어요.”
그러니 눈에 익은 물건이어도 곧바로 출처를 떠올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이야기인 데다, 좋지 못한 사건과 관련되어 있으니 섣불리 입 밖에 내지 못한 것도 이해가 갔다.
조심스럽게 설명하던 시녀의 눈에 의구심이 떠올랐다.
“이런 이야기가 정말 쓸모가 있나요? 아가씨의 병증과 관련이 있을까요?”
그 의문에 맞다고도, 아니라고도 분명히 답해 주지 않은 채 침묵을 지키는 도로테아의 옆에서, 메릴린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쓰지 않을 물건들이라면 팔아 버리면 되었을 텐데.”
“아가씨께서는 본인의 물건에 애착이 강하셔서요. 본인이 쓰던 물건을 다른 사람이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세요.”
흘긋 도로테아의 표정을 살피던 시녀가 말을 꺼낼 듯 말 듯 주저하다,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혹시 말이에요. 만약에…… 정말로 이 일들이 관련 있는 거라면 쫓겨난 그 하녀의 짓일까요? 아가씨를 향해 저주 같은 것을 걸었다거나…….”
입에 올리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태도에 도로테아가 빙긋 웃었다.
“하녀를 처벌도 없이 곱게 보내 줬다면서요. 그럼 상대가 앙심을 품을 까닭이 없지 않을까요?”
“그렇죠. 당연하죠. 아가씨께서는 심지어 아끼는 물건들을 다시는 못 쓰게 되었음에도 배상도 받지 않으셨는걸요. 다만 워낙 배은망덕한 아이였으니까요.”
본분을 잃고 주인의 것을 탐한 하녀야말로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이니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투였다.
다시 그 하녀를 떠올리며 경멸을 숨기지 않고 토해 내는 말들을 담담하게 듣고 있던 도로테아가 한 번 더 물음을 던졌다.
“그 하녀의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아…….”
미간을 좁힌 채 한참을 고민하던 시녀는 끝끝내 확신하지 못한 듯, 자신 없는 말투로 겨우 답했다.
“제시? 제시 아니면 제이미였을 거예요. 아마도.”
“그렇군요.”
시녀를 돌려보낸 도로테아가 길게 침묵하자, 궁금함을 참지 못한 메릴린이 물었다.
“그 하녀의 일이 정말 이번 영애의 병과 관련 있어요?”
“메릴린은 어떻게 생각해요?”
“글쎄요, 진짜 저주를 건 게 그 하녀라면 그건 너무 잔인하잖아요. 심지어 영애는 하녀를 관대하게 보내 줬다면서요.”
“저주라는 건 말 그대로 남을 해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해요. 누군가를 미워할 때 꼭 악한 사람만 미워하라는 법 있나요?”
“그건…….”
그럴 리가.
훌륭한 인성을 가진 인물도 누군가에게는 미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한때 메릴린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저 풍문으로 떠도는 소문과 들려오는 이야기들로만 도로테아 하이클레어를 질시했듯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메릴린을 보던 도로테아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당신이 옳았어요, 메릴린.”
“네?”
“내가 클레어 영애의 ‘병’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던 것 말이에요.”
메릴린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도로테아는 분명 클레어 파인트가 죽지 않은 이상,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없으리라 단언했었다.
설마, 하는 생각이 스치자 메릴린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클레어 영애가 설마…….”
그녀가 보았던 ‘걸어 다니는 시체’처럼 이미 죽은 육신에 다른 것이 들어가 있는 것이라면.
다행히도 도로테아는 고개를 저어 그녀의 끔찍한 가정을 부정했다.
“클레어 파인트는 멀쩡히 살아 있어요.”
“그, 그럼…….”
“다만 죽은 자가 씌었을 뿐이죠.”
안도했던 가슴이 다시 불안으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또 결국 ‘죽은 자’가 얽혀 있다는 건가.
메릴린은 굳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클레어가 집착하는 보석들이 정말 예전의 ‘그’ 하녀가 훔쳐 갔던 물건들이라면.
“그 하녀, 죽은 것이로군요.”
도로테아는 몇 가지의 단서로 답을 눈치챈 메릴린을 향해 빙긋 웃었다.
한숨을 쉰 메릴린이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죽은 자가 얽힌 일에는 관여하고 싶지 않다더니.
이미 꽤 적극적으로 사건에 개입해서 해결해 보려 애쓰는 모습이 기특했다.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던 우드가 물음을 던졌다.
“그게 원인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왜 개의 흉내를 내는 거지?”
“내가 어찌 알겠어.”
어깨를 으쓱해 보인 도로테아가 멀어지는 남작가 저택을 흘끗 보고는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알아봐야겠지. 어째서 죽은 자가 ‘개의 흉내’를 내고 있는 건지 말이야.”
* * *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인다 했던가.
웬만하면 도로테아와 엮이고 싶지 않은 메릴린이라 하더라도, 일이 이 지경이 되고 보니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 하녀는 도대체 왜 클레어 영애를 괴롭히는 거지? 어쩌다가 죽었을까? 도로테아 영애는 그걸 어떻게 해결한다는 이야기야?
결국 뜬눈으로 밤을 새운 메릴린은 피곤이 서린 얼굴을 하고서 하이클레어 후작가를 찾았다.
서재에서 서신을 쓰던 도로테아가 그녀를 반가이 맞이했다.
“어서 와요, 메릴린.”
마치 기다렸다는 듯한 태도에 메릴린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하얀 종이를 채워 가는 거침없는 손놀림을 흘끗 바라보던 메릴린이 물었다.
“서신을 쓰시나 봐요?”
“아아, 루크한테서 모처럼 전보가 와서요.”
7황자의 이름이 들려오는 순간 마치 본능처럼 메릴린이 몸을 움츠렸다.
도로테아는 그런 그녀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는 듯 말을 이었다.
“아마 상황이 그리 녹록치 않은가 봐요. 상대의 끈질긴 농성에 생각했던 것보다 대치 상황이 길어진다네요.”
그런 상황을 일일이 보고할 만큼 섬세한 인간이 아닐 텐데.
메릴린의 마음속에 의구심이 샘솟기가 무섭게 그 까닭이 드러났다.
“그래서 군비를 내놓으라는군요.”
그럼 그렇지,
그제야 7황자가 도로테아에게 손수 서신을 써서 보낸 까닭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앵두같이 붉은 도로테아의 입술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대체 내게 돈이 어디 있다고 이러는 걸까요?”
순간 메릴린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꼬박꼬박 극장에서 수금하는 수익금을 제외하고서라도, 3황자의 보물 창고를 털었던 것, 본인이 위험해졌다는 이유로 황실로부터 받았던 배상금, 외가 친척들이 쏟아붓는 선물들까지.
심지어 상속받은 재산이 아니라 본인이 벌어들인 재산이라는 점에서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황도에서 그녀보다 더 부유한 미혼의 영애를 꼽으래도 쉽게 떠오르지 않을 정도인데.
“그래서 주지 않으시려고요?”
“글쎄, 고민 중이에요. 사람들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 함부로 거절하기에도 그렇고.”
몹시 짤막한 전보를 보아하니 내용도 대강 짐작이 갔다.
‘돈을 내놓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살벌한 협박이겠지.’
펜을 놀리는 도로테아의 유려한 필체가 간단하지만 상당히 곤란한 답을 적어 냈다.
돈을 받고 싶으면 대가를 치르렴.
아무것도 내어놓지 않고 받기만 원하는 것은 너무 파렴치한 일이 아니니.
도로테아 하이클레어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흐린 눈으로 창밖에 시선을 둔 우드와 달리, 보고도 못 본 척하는 요령은 없는 메릴린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 적어도 경어를 쓰세요.”
보다 못한 충고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도로테아가 진지한 얼굴로 서신을 고쳤다.
군비가 필요하시다면 대가를 내어놓으세요
도로테아 하이클레어
“이 정도면 괜찮을까요?”
“괜찮을 리가 없죠. 말투는 그렇다 치고 내용이요. 그렇게 보내면 다시 반송되어 오지 않을까요?”
그 성질머리에 저택까지 찾아와 당장 죽이겠다고 하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메릴린이 질린 얼굴로 한숨을 쉬자, 모른 척하던 우드가 무뚝뚝한 어조로 한마디 보탰다.
“차라리 거래를 해라. 대가를 내어놓으라는 추상적인 말보다, 그 황자에게 네가 필요한 것을 요구하고 돈을 건네주면 되잖냐.”
“흠.”
황자를 상대로 금전 거래를 한다는 자체가 불경한 일이지만, 확실히 7황자 입장에서도 그쪽이 한결 더 편하리라는 것은 명확했다.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도로테아가 무엇인가 떠올랐는지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음, 좋아요. 보내야겠다.”
뿌듯한 얼굴로 서신을 접어 봉투에 담은 도로테아가 곁에서 대기 중이던 시녀에게 건넸다.
물끄러미 그 광경을 지켜보던 메릴린은, 황도의 영애들에게서 심심찮게 듣게 되는 도로테아와 7황자 간의 염문을 떠올렸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전장에서조차도 황자 전하께서는 영애를 잊지 않고, 하루가 멀다 하고 전보를 보내신다고 하더군요!”
“영애께서도 늘 그런 황자 전하의 무사 귀환을 위해, 사교 활동을 자중한 채 저택에서 기도를 드리고 계신다면서요.”
사람들은 언제쯤 두 사람 사이에 돈을 뜯는 황자와, 대가를 받으려는 귀족 영애 간의 살벌한 협박만이 오고 간다는 것을 알게 되려나.
“그래서 우리 메릴린은 어쩐 일로 약속도 없이 저를 찾아 주셨을까요?”
짜게 식은 눈으로 도로테아를 바라보던 메릴린은 갑작스런 물음에 어색한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클레어 영애의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어서요.”
“아아…….”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도로테아가 부드럽게 답했다.
“안 그래도 필립에게 부탁해 두었어요. 이런 일들은 흔히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가장 시작점이 되는 부분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거든요. 운 좋게도 제 능력 좋은 외사촌이 꽤 중요한 열쇠가 될 사람을 찾아낸 것 같더군요.”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묻기도 전에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도로테아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 * *
도로테아가 다시 한번 저택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은 남작가의 식솔들은 초조한 얼굴로 달려 나와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영애.”
무엇인가 알아낸 것이 있는지 물으려던 남작은, 그녀의 뒤에 어제는 보지 못한 남자가 한 사람 더 추가된 것을 보고 의아한 빛을 띠었다.
“저 공자는 누굽니까?”
“어쩌면 영애의 증상이 발병한 까닭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옅은 갈색 머리에 살짝 색이 바랜 옷을 입은 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차림새를 보아도 상류 계급은 아닌 것이 분명한데.’
클레어의 병과 어떤 관련이 있다는 걸까.
혹시 그녀와 비슷한 형태의 증상을 겪은 사람일까? 혹은 그런 증상을 겪은 이를 알고 있는 사람일까?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남작은 주저하지 않고 길을 터 주었다.
사랑하는 막내딸에게 도로테아 하이클레어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만일 그녀가 클레어를 낫게 해 준다면,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 정도를 저택에 들이는 일로 왈가왈부할 까닭이 없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후드를 푹 뒤집어쓴 클레어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증상이 나타날 때 걸쳤던 옷가지들은 보이지 않았다.
관리를 하지 않아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그녀는, 장신구 하나 걸치지 않은 수수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어떤가요, 벤슨?”
창백한 안색의 클레어를 꼼꼼히 올려다보던 벤슨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도로테아에게나 겨우 들릴 만큼 나직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닙니다.”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봐요. 얼굴이 낯익지 않나요?”
“예, 제가 만난 ‘클레어 파인트’는 저 영애가 아닙니다.”
이윽고 계단을 내려온 클레어가 도로테아 앞에 서자, 그녀는 은은한 미소와 함께 뒤에 있던 남자를 앞에 세웠다.
클레어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클레어 영애, 혹시 이분을 뵌 적 있나요?”
제 기억을 더듬어 보려는 듯 한참을 고민하던 클레어가 이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잘 모르겠어요. 낯이 전혀 익지 않은 분이에요. 처음 뵙는 것 같은데요.”
“그렇군요.”
머뭇거리던 클레어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이분이 누구신가요?”
비록 오랜 병증으로 앓아누운 탓에 수척해지기는 했지만, 소녀는 여전히 사랑스러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영롱히 반짝이는 초록빛 눈동자를 마주한 도로테아가 그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그의 이름은 벤슨이에요. 벤슨 데이어. 아카데미에서 작은 행정직을 맡고 있죠.”
처음에는 그저 눈을 끔뻑이며 소개를 듣고 있던 소녀는, 남자의 직책을 들은 순간 무엇인가 기억해 낸 것인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로테아는 친절한 목소리로 그와 클레어 사이의 인연을 설명해 주었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그는 몇 해 전 클레어 영애와 친밀한 대화를 서신으로 나눈 적이 있었다더군요. 반년 가까이 되는 긴 시간을요.”
“……!”
병마에 지쳐 있던 소녀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서 남자를 바라봤다.
수척해져 쩍쩍 갈라진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