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식사를 마치고 뉘엿뉘엿 해가 저물어 갈 무렵이 되자, 도로테아는 우선 ‘괜찮은 상태’의 클레어와 대화를 하러 2층으로 향했다.
퀭한 얼굴의 클레어는 짙은 색깔의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하룻밤도 편히 잠에 들어 본 적 없다는 말이 사실이었던지, 그녀의 안색은 창백하기 짝이 없었고 눈 밑은 시커멨다.
“저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이 도로테아를 향했다.
“저는 왜 이러는 걸까요?”
“글쎄요, 아직은 알 수 없네요.”
차분한 답을 건넨 도로테아가, 안절부절못한 채 손을 덜덜 떨고 있는 어린 영애를 향해 다가섰다.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내리자 귀엽고 앳된 소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어린 소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살피던 도로테아가 다시금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만일 내가 영애의 ‘병’을 고칠 방도를 찾았고, 낫게 해 주고자 했을 때, 어쩌면 영애가 괴로울지도 모르겠네요.”
“괜찮아요. 무엇이 됐든 낫기만 하면 돼요!”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은 퍽 절박해 보였다.
소녀가 간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럴 수 있을까요?”
저를 올려다보는 젖은 눈망울을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고개를 끄덕여 답해 주었다.
“아마도요.”
증상은 나을 수 있겠지.
과연 그것이 지금의 상황보다 더 ‘나은 선택’일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도로테아의 눈이 소녀의 몸에 잠시 머물렀다.
천천히 해가 저물어 가면서 클레어 파인트의 몸에 깃든 무엇인가가 꿈틀, 하며 막 기지개를 펴는 것이 느껴졌다.
남작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증상이 시작되면 아이의 힘이 몹시 강해집니다. 발버둥을 치면 영애께서도 다칠 수 있으니 하인들을 미리 불러 두는 것이…….”
“괜찮아요. 제가 데려온 호위 한 사람이면 충분해요. 영애의 증상이 처음 시작된 곳이 그녀의 방이었으니, 우선 방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지 지켜보고 싶어요.”
도로테아의 목소리는 몹시 단호했다.
그 분명한 지시에 어린 소녀가 잠시 멈칫하다 오히려 다행이라는 듯 걸음을 옮겨 침실로 향했다.
이제까지 클레어를 찾아왔던 이들은 모두 ‘불확실하고 자신 없는 시선으로 불분명한 답’을 내어놓곤 했다.
그런데 도로테아 하이클레어만큼은.
‘나를 보고도 한 번도 이상하다는 듯 훑어보지도, 어쩔 줄 모르고 답을 망설이지도 않으셨어.’
그런 그녀라면, 정말 자신의 병에 대해 아는 것이 있을 지도 몰랐다.
희망에 젖은 소녀의 걸음이 한층 더 가벼워졌다.
클레어 파인트는 자신의 방 안쪽으로 들어가, 처음 증상이 시작되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이윽고 해가 저물고 어두운 밤이 찾아왔다.
* * *
“그르릉.”
소녀의 입에서 차마 귀족 영애의 것이라고는 말하기 힘든 독특한 으르렁거림이 새어 나왔다.
목을 긁어서 내는 듯한 몹시 굵은 소리였다.
“크, 클레어. 아가야.”
눈물에 젖은 남작 부인을 볼 새도 없이 도로테아는 등을 꼿꼿이 세운 채, 엎드린 자세로 저를 노려보는 ‘개’를 물끄러미 관찰했다.
“왈, 왈! 크르릉……!”
입에서 거친 울음이 나올 때마다 그녀의 목에 걸린 붉은 목걸이가 찰랑거리며 반짝였다.
“어떻게 생각해?”
뜬금없는 물음에 우드가 움찔했다.
이런 기괴한 광경은 도로테아와 줄곧 붙어 있었던 그조차 본 적 없었다.
‘나는 이런 것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단 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잔뜩 기대에 찬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데다, 주인이 물었으니 답을 하긴 해야 했다.
“그, 아무래도 성견처럼 보이는군. 어린 강아지는 아니야.”
“…….”
횡설수설 꺼낸 말에 메릴린이 우드를 지그시 바라봤다.
마치 지금 그것이 꺼낼 말이냐는 듯이.
그 대답에 도로테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성견이라고?”
“아니냐?”
한층 더 자신감 없어진 목소리에 도로테아가 고개를 돌려, 차마 딸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고 있는 남작에게 물었다.
“남작님께서는 영애의 저 모습이 어떻게 보이세요? 개의 흉내를 낸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정말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클레어는 어렸을 때부터 목이 약해 저택에서 털 있는 동물을 키워 본 적도 없습니다.”
“다들 정말로 영애가 ‘개’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계신가 봐요.”
도로테아는 손을 마치 발처럼 쓰면서 벅벅 바닥을 긁고 있는 클레어를 바라보다, 좀 전에 소녀가 뒤집어쓰고 있던 우중충한 후드와는 다른 투명하고 예쁜 실크 베일을 바라봤다.
“예쁜 목걸이에 예쁜 베일이로군요. 손에 낀 반지 또한 고가의 물품이고요.”
“아이가 이상하게 된 뒤로 저렇게 반짝이는 것들을 쓰더군요.”
남작가의 장남이 덧붙인 이야기에 도로테아가 은은한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어 나갔다.
“이상한 일이네요. 다들 영애가 지금 흉내 내는 것이 ‘개’라고 했는데.”
“네?”
“개가 반짝이는 물건을 갖고 싶어 하진 않잖아요?”
“……!”
아름다운 실크 베일, 붉은 루비가 박힌 목걸이, 멀리 해안에서 들여온 진주로 만든 상앗빛 반지까지.
하나같이 값비싼 물건들이었다.
“개가 보석을 좋아하던가요? 아름다운 옷을 걸치고 싶어 하던가요?”
오히려 치렁치렁한 것들을 걸치는 걸 싫어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 말에 방에 있던 사람들이 한순간 주춤했다.
도로테아는, 개처럼 몸을 한껏 낮춘 채 그녀를 노려보며 목이 터져라 짖고 있는 영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그럼 저건 대체 무슨…….”
남작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자, 도로테아는 이번에도 이해할 수 없을 엉뚱한 요구를 입에 올렸다.
“평소 영애의 시중을 들던 시녀를 데려와 주세요. 증상이 나타나기 이전부터 일해 온 충실한 인물이라면 더 좋을 것 같네요.”
* * *
갑작스레 불려 온 시녀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이내 방구석에서 들려오는 짐승의 울음소리에 고개를 푹 숙였다.
차마 제가 모시는 아가씨의 흉한 모습을 보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질끈 감는 하녀를 본 도로테아가, 주변을 빙 둘러 대기 중인 다른 사용인들을 관찰했다.
도로테아가 식사를 하면서 클레어의 병증에 대해 물었을 때, 곁에 선 하인과 하녀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듣지 못한 척 귀를 막고 공손히 고개를 숙여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이다.
주인의 흠에 대해 아랫사람은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댈 수도, 알고자 해서도 안 되니까.
‘그러니 이제껏 제 아가씨의 모습을 자세히 바라본 적이 한 번도 없었겠지.’
어째서 본인이 이곳에 불려 와 있는지 모르는 시녀는 가엾게도 겁을 잔뜩 먹고 있었다.
공손하게 모으고 있는 두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낭랑한 도로테아의 목소리가 방에 울려 퍼졌다.
“고개를 들어서 네 아가씨를 보렴.”
“저,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제가 감히…….”
고개를 저으며 맹렬히 거부하는 시녀를 보던 남작 부인이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니 그렇게 해. 영애의 말에 따르렴.”
시녀는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제 아가씨의 ‘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두고두고 누군가의 입에 흠으로 오르내릴 수 있는 추한 모습을.
혀를 빼물고서 헥헥거리는 클레어 파인트의 모습이 상상 그 이상으로 충격적이었는지 시녀의 눈이 다시 질끈 감겼다.
“눈을 뜨고 자세히 봐. 네 아가씨가 걸치고 있는 옷과 물건들을.”
이해할 수 없는 지시가 다시 이어졌다.
섬기는 주인에게 불경을 저질러야 한다는 사실에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동시에 그녀는 ‘내려진 명에 복종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눈을 뜬 시녀가 천천히 클레어 파인트의 차림새를 살폈다.
그녀가 걸치고 있는 보석 장신구들, 쓰고 있는 베일과 원피스까지.
우중충한 후드를 뒤집어쓴 ‘낮’보다 훨씬 화려하고 귀족 영애다운 차림새를 갖추고서 개처럼 짖어 대는 클레어 파인트를.
순간 무엇인가를 알아챈 듯 시녀의 눈이 일순 커졌다가 금세 작아졌다.
“뭔가 짐작 가는 것이 있니? 저 보석들, 저 옷. 혹시 무엇인가 떠오르는 건 없어?”
입술을 꾹 깨물고 있던 시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녀의 태도를 본 도로테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 그렇구나.”
집요하게 물었던 것이 허무해질 만큼이나 깔끔한 태도였다.
시녀에게서 고개를 돌린 도로테아가 남작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돌려보내셔도 괜찮아요. 아무래도 아는 것이 없어 보이네요.”
도로테아의 의도를 알 수 없는 요구들을 듣고만 있던 앳된 인상의 차남은, 결국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는지 불쑥 입을 열었다.
“정령을 불러 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영애? 어쩌면 저 아이가 반응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제 정령은.”
도로테아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차분하게 이어 나갔다.
“저 영애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아요.”
그건 내가 부리는 권속일 뿐이니까.
이미 도로테아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는 령(靈)이 산 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건, 오로지 주인의 명에 따라 상대를 해할 때 뿐.
도로테아의 단호한 답에 차남이 주춤하며 입을 닫았다.
“그렇지만 무엇인가 알아내시지 않으셨습니까? 개가 보석을 탐할 리 없다고…….”
장남이 용기를 내어 꺼낸 말에 도로테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저 실마리일 뿐이에요. 까닭을 알아내기에는 아직 한참 모자란, 아주 작은 실마리요.”
그것에서 시작하여 다시금 되감아 가려면 꽤 많은 정성과 시간이 필요할진대, 그 노력을 바쳐야 할 만큼 클레어 파인트가 도로테아에게 중요한 인물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군요.”
그나마 가장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던 남작이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애써 가라앉힌 채, 그녀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걸음 하여 클레어를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애.”
적어도 도로테아는 클레어 파인트를 보고 경악하지도, 혐오스런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달아나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그녀의 상태를 확인해 보았을 뿐.
그것만으로도 남작가는 충분히 존중받은 셈이었다.
* * *
“아까 그 시녀 말이다. 분명 무엇인가를 알아낸 눈치였다.”
남작 가문의 저택을 빠져나오는 길, 우드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제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때는 왜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시녀가 말을 아끼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어쩌면 남작가의 사람들이 보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어.”
만일 시녀가 알고 있는 ‘무엇인가’가 남작 영애에게 아주 치명적인 것이거나, 그녀의 일신에 해가 될 만한 것이라서 모른 척했다면 추궁한다 해도 의미는 없었겠지.
미련이 가득한 눈으로 뒤를 힐끔거리던 메릴린이 멈춰 섰다.
“잠깐만요.”
그녀의 부름을 듣고 뒤를 돌아본 이들의 눈에 창백한 낯빛의 시녀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숨을 헉헉거리며 겨우 도로테아 앞에 선 시녀는 불안한 듯 연신 손톱을 매만지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 질문하신 것이요. 무엇인가 떠오르는 게 있으면 말해 보라 하셨잖아요. 아주 사소한 거라도 상관없나요?”
“네.”
“그, 그것이 정말 아가씨의 병을 고치는 데 도움이 될까요?”
“그럴 수 있을지도 몰라요.”
도로테아가 미소를 띤 채 답하자 시녀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건 아가씨의 병과는 전혀 상관이…… 이미 몇 해 전의 이야기고…….”
“별것 아니라 해도 괜찮아요.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침을 꿀꺽 삼킨 시녀가 결심한 듯,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몇 해 전에, 아가씨의 방을 청소하던 하녀가 몇몇 물건들을 몰래 빼돌려서는, 본인이 마치 아가씨인 양 그것을 걸쳐 입고 나갔다가 걸린 적이 있어요. 아가씨께서는 주인의 물건을 탐한 그 몹쓸 하녀를 오히려 안타까워하셨죠.”
그때의 일을 꺼내는 시녀의 얼굴에 옅은 혐오감이 내비쳤다.
감히 하녀의 신분으로 모시는 영애의 물건을 훔쳐다 되도 않는 귀족 행세를 하고 다니다니.
다른 귀족이었더라면 죽을 때까지 매질을 당할 수도 있었을 일이었다.
“결국 하녀는 저택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죠. 오늘 아가씨가 걸친 장신구와 옷은…….”
“그때 하녀가 도둑질해 갔던 물건들인가요?”
시녀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