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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125)화 (125/242)

혼술사 도로테아 125화

연이어 폭풍 같은 일들이 귀족 사회를 강타했다.

무려 제국의 황태자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를 부추긴 배후가 로헨 왕국이었으며, 몇몇 귀족들은 일찍부터 그들과 교류해 오고 있었다는 사실까지.

어느 하나 놀랍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당분간 황태자의 빈자리는 2황자인 윌리엄이 대행할 것이며, 반란 진압에 공을 세운 7황자와 스펜서 백작을 치하하노라.”

황태자에게 동조했던 황후가 폐위되었으며, 제국의 황태후가 서거했다.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정치 감각이 빼어난 귀족 몇몇은 내막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황제는 ‘키엘 스펜서’의 공훈을 인정하며 그를 승작시켰다.

키엘 스펜서가 승작 후 처음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황태후의 장례식이었다.

세상을 떠난 황태후에게 바치는 추도문을 낭독하던 젊고 아름다운 백작의 생김새가 누구를 연상시키는지, 제대로 된 눈이 있다면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황제가 공적인 자리에 세웠다는 것은 제국 귀족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았다.

“스펜서 백작이 영지에서 올라와 한동안 네 저택에서 머물렀다던데.”

“예.”

후작의 물음에 콜린이 짧게 긍정했다.

“그의 신분을 알고 있었느냐?”

“연이 닿았을 때부터는 아닙니다만,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혹여 그가 너와 테아에게 접근한 까닭이…….”

“처음부터 알고 접근한 건 아니었을 겁니다. 오래된 인연입니다.”

아들의 덤덤한 얼굴을 바라보던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은 그렇게 닿게 되는 연도 있는 법이지.

이번 일을 겪으며 황제도 제법 생각이 많아진 듯하니, 공연히 그보다 앞서 걱정하는 것도 그리 좋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그래, 테아를 당분간 네 집에서 돌보겠다고? 이곳이 아니어야 하는 까닭이 있느냐?”

“너무 많은 이들이 그 아이를 걱정하지 않습니까.”

“…….”

“침대에서 일어나 물을 마시려 컵을 집어 드는 작은 움직임 하나에, 굳은 몸을 풀려고 아주 잠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수십 개의 시선이 몰리면, 제아무리 무던한 사람이라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할 말이 없어진 후작이 한숨을 쉬었다.

신전에서는 그저 정양만으로 충분하다 했지만, 한때 잃을 뻔했던 아이가 자꾸 다쳐 오니 도통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예민한 아이가 아닙니까. 저를 향한 사람들의 걱정을 모를 리 없고, 계속해서 신경을 쓰다 보면 오히려 회복이 더딜 겁니다.”

“그야 그렇겠지.”

후작이 씁쓸하게 인정했다.

“저희 저택이야 식구가 적어 사용인들이 단출하니까요.”

“그야 그렇지. 게다가 네가 뽑은 사용인들은 하나같이 너처럼…….”

말을 하던 후작이 슬쩍 입을 다물었다.

오래전, 도로테아를 처음 후작저로 데려온 뒤 한바탕 앓아누웠던 콜린은,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자마자 저택의 사용인들을 모두 교체했다.

그렇게 뽑은 이들은 일은 훌륭하게 잘 해내지만, 자기 주인을 닮아 하나같이 인간미가 없었다.

“다들 저처럼 이성적이고 담백한 태도를 지니고 있으니까요.”

진심이었다.

그는 도로테아가 눈앞에서 피를 한 움큼 쏟아도 당황하지 않고 코에 손수건을 쑤셔 박아 줄 자신이 있었다.

“그래, 그렇게 하거라.”

마지못한 후작의 허락에, 도로테아는 비로소 사람들의 걱정 가득한 시선 속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다만 콜린의 저택으로 향해야 할 그녀의 마차는 엉뚱한 곳을 향했다.

이번 사태에 연루된 이들이 갇혀 있는, 황궁의 지하 감옥으로.

*   *   *

“제인과 우드는 이곳에 있도록 해.”

“하지만…….”

“괜찮아. 잠시 이야기만 하고 나올 테니까.”

걱정이 담긴 시선을 받으며 도로테아는 그리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고요한 감옥 안쪽으로 들어섰다.

“흐으으…….”

신음을 흘리는 자들 중에는 낯익은 얼굴들도 꽤 있었다.

고개를 들 힘조차 없는 이들은 축 늘어진 채 죄의 대가를 치를 최후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양옆으로 줄줄이 늘어선 죄인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도로테아의 걸음이 어느 한군데에서 멈춰 섰다.

가만히 눈을 감고 앉아 있던 발레리가 천천히 눈을 떴다.

무의식중에 마치 습관처럼 도로테아의 뒤를 살피던 그녀가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늘 있던 자리에 존재감 없이 서 있던 그림자의 부재에도 딱히 실망한 기색은 아니었다.

그저 그렇구나, 하고 그녀의 안에서 무언가를 납득한 눈치였을 뿐.

내려앉은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것은 도로테아였다.

“큰 고초를 겪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네.”

“후작님께서 내 뒤를 봐주신 덕분이지. 마지막 순간의 선택이 널 위한 거라고 생각하셨던 모양이야. 덕분에 먹는 것도 입는 것도 그리 곤란하지 않았어. 고맙다고 전해 드리렴.”

“응.”

등 뒤로 몸을 기댄 발레리는 그제야 도로테아의 안색을 살폈다.

일견 창백해 보이긴 했지만 그날보다는 혈색이 좋았다.

피를 흘리고 휘청거리던 것을 생각해 보면 몰라볼 정도로 빠른 회복력이었다.

발레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스펜서 영지에서 올라올 때만 하더라도 이 정도로 빠르게 상태가 좋아지진 않았던 것 같은데.

적당히 살이 올라 보기 좋은 도로테아의 발그레한 뺨을 바라보던 발레리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너, 스펜서 영지에서 돌아올 때는 일부러 회복 속도를 늦췄구나.”

도로테아는 빙그레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에 쥐 죽은 듯이 틀어박혀 고이고이 모아 둔 혼력을 몽땅 갈취당한 콜린이 저를 대신해 끙끙 앓고 있다는 설명까지 해 줄 필요는 없으니까.

도로테아에게 완벽하게 속았음에도 발레리는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알고 있었구나. 내가 줄곧 네 빈틈을 찾고 있었다는 것.”

“내 약점을 찾고 있는 사람들은 아주 많으니까. 그중에 너도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래…… 그렇구나.”

발레리가 허탈한 듯 웃으며 도로테아를 올려다보았다.

“처음부터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네.”

“네가 황태자를 버리지 않았더라면 충분히 이겼을 거야.”

“…….”

“네가 그날 나를 구하지 않았더라면.”

그날…… 필립은 클라이브가 보낸 암살자들에게 잠시 발이 묶였고, 데인과 에드윈은 병사들을 이끌고 황궁 밖에 있는 황자들을 보호해야만 했다.

도로테아를 지키기로 했던 에이든이 반란군의 격렬한 저항에 시간을 지체하게 된 것 또한 예상 밖의 일이었다.

“나라고 모든 것을 다 염두에 두고 일을 하는 건 아니야. 나도 충분히 도박이라는 걸 한다고.”

도로테아가 투덜대듯 말했다.

“난 내 몸이 가장 귀한 사람인데, 몇 번이고 이 몸을 갈아 쓰게 되잖아. 그건 내가 가장 꺼리는 일인걸.”

그 말을 듣고 있던 발레리가 물끄러미 도로테아를 바라보다 웃었다.

“아주 조금은 위로가 되네.”

내가 널 위협할 수도, 구할 수도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

처음으로 느낀 패배감이었다.

솟아나는 애정만큼이나 호승심이 함께 자라났다.

나는 할 수 없었던 것을 너무나도 쉽게 할 수 있는 아이.

나는 가지지 못한 것을 아주 손쉽게 손에 넣는 아이.

눈앞에 있는 도로테아 하이클레어의 뒤를 밟을 때면 한 번쯤이라도 저 조그마한 아이를,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 없는 저 아이를 한 번만 앞질러 갔으면 좋겠다고.

발레리는 창살 너머로 비치는 도로테아를 향해 뻗었던 손을 힘없이 내렸다.

“다 이긴 게임을 뒤엎어 버린 건 너야.”

“이긴 게임이라고?”

발레리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창살 아래로 비친 도로테아의 붉은색 구두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뗐다.

“내가 그날 너를 황태자에게 넘기고, 프리드까지 버려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그 남자의 옆자리 하나였을 뿐.”

그리고 더 쓸모 있는 가문의 여성이 나타나면 가차 없이 내쳐졌을 테고.

예전의 누군가가 그랬듯이.

“나는 아버지와 황태자 사이의 거래에 놓인 인장 같은 거야.”

계약서에 찍는 도장을 대신하는 물건에 불과하지.

그 종이 위에 새겨진 자국처럼, 두 사람의 사이가 멀어지지 않는 한 그 자리에 머물러야만 하는 상징 같은 존재.

바라지도, 원하지도 않는 그 ‘자리’에 너를 끌어내려야 할 이유가…… 있을까?

“테아, 나는 네가 그렇게 끌어내려지는 게 싫었어.”

네 빛에 눈이 부셔 질투가 났어도.

네가 가진 것들이 제아무리 탐이 났어도.

‘발레리 제르망’은 결코 ‘도로테아 하이클레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있지, 발레리.”

고개를 든 발레리의 얼굴은 핼쑥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가진 고아한 매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도로테아의 눈빛을 피하지도, 흔들리지도 않고 곧게 바라보는 맑은 갈색 눈.

“나는 늘 네 눈빛이 좋았어.”

“…….”

“너는 내가 만난 이들 중 가장 흥미롭고 재미있는 친구인걸.”

메릴린이나 제 귀여운 외사촌들, 성가시지만 동시에 챙겨 주는 두 황족들과는 다른 의미로.

소중한 것을 딱 하나만 꼽을 수 없듯이, 그 소중한 것을 다루는 방식 또한 하나가 아니었다.

뜬금없는 애정을 풀어낸 도로테아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창살 안쪽에 있는 제 친구를 향해 나직하게 물었다.

“내가 만일 네게 도와 달라 청한다면?”

호수처럼 잔잔하던 갈색 눈동자에 처음으로 파문이 일었다.

발레리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천천히 물었다.

“도움이라니?”

도로테아가 창살을 쥔 손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었다.

“너는 가끔 나를 지나치게 전지전능한 존재로 생각하는 것 같아. 내가 볼 수 있는 건…….”

그녀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구석에 도사리고 있던 삿된 기운이 그녀와 마주친 순간 스르르 모습을 감췄다.

“나는 그저 우리의 세상을 기웃거리는 경계 너머의 존재들을 엿볼 뿐. 네 생각보다 하찮고 평범해.”

“…….”

축복이라 여길 때도 있었고 저주라 여길 때도 있었던 그녀의 재능.

이미 타고난 것을 되돌릴 수 없다면, 가진 것을 있는 힘껏 쓰는 것 외에 그녀가 할 수 있는 발버둥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욕심이 많아서 지키고 싶은 것들은 한가득하고.”

파괴하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원래 더 힘든 법이니까.

도로테아의 애매모호한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발레리가 마주한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마치 진심을 가늠이라도 하려는 듯이.

“이승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 손을 뻗어 왔어.”

단순히 일회성으로 그칠 만한 일이 아니었다.

클라이브를 경계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욕망에 달라붙어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존재들을 가볍게 볼 수 없을 뿐.

“조만간 재미난 일들이 벌어질 거야. ‘그들’도 이제는 나를 봤을 테니까.”

웅크리고 숨어 제 존재감을 숨길 수도 있었다.

그러지 않았던 것은 제가 숨는 동안 흘러야 할 피가 소중한 이들의 것임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기에.

“너는 이미 내가 ‘어떤’ 공격을 받을지 알고 있잖아.”

발레리가 한결 차분해진 눈으로 도로테아를 향해 짧게 뱉었다.

“이단.”

인간은 언제나 ‘이제껏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미지의 힘을 배척해 왔다.

도로테아의 힘은 언제든 불길한 것으로 오인받을 여지가 충분했다.

물끄러미 도로테아를 바라보던 발레리의 꾹 다문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물음이 튀어나왔다.

“내가 너를 돕길 바라?”

예쁜 미소를 짓는 도로테아를 보며 발레리가 푸석해진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폐하께서는 나를 내보내지 않으실 텐데?”

아무리 어리석은 죄인이라 할지라도 폐태자는 황가의 피가 흐르는 인물이다.

일개 귀족 영애가 황족의 신체를 상하게 만든 셈이니 쉽게 용서될 사안이 아니었다.

“괜찮아.”

도로테아가 언제나 그래 왔듯이 가볍게 제국의 황제를 무시했다.

“내가 이겨.”

그리고 그런 도로테아를 바라보던 발레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레리가 머무르던 지하 감옥이 관리 부실로 벽이 무너지는 커다란 사고가 벌어졌다.

벽이 허물어진 자리에 머무르고 있던 발레리 제르망은 시체조차 찾지 못했다.

그날 그 시간, 그 장소.

발레리 제르망은 공식적으로 사망했다.

그녀는 이제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 되었다.

*   *   *

황태자의 폭주로 제국은 여전히 혼란에 빠져 있었다.

황태자에게 줄을 댔던 귀족들은 줄줄이 조사를 받았고, 황태자가 이전에 처리했던 일들 또한 모조리 재조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하루가 멀다 하고 불어오는 혈향에 혹여 꼬투리를 잡힐까 우려한 귀족들은, 모두 경거망동하지 않고 저택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했다.

하늘을 우러러 거리낄 것이 없는 이들만이 자유로웠으나, 소수였다.

“큰일이에요, 진짜. 아무도 극을 보러 오지 않는걸요.”

“자칫하면 광장에 목이 걸리게 생겼는데 연극이 문제겠어? 3황자도 조용히 정리된 마당에.”

깊게 한숨을 쉰 레번이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 직업이 이래서 안 좋다는 거야. 수입이 일정하지가 않으니까.”

“벌어 놓은 거 있잖아요. 그거 쓰면서 버텨야죠.”

단원들의 위로에 레번이 울먹였다.

“내가 보기엔 극본이 문제였어. 이야기는 무조건 막장 통속극이 최고지. 되도 않게 이상한 철학 같은 걸 담으니까…….”

옆에 모여들었던 단원들이 하나둘 슬금슬금 그를 피해 뒷걸음질 쳤다.

제 생각을 늘어놓는 데에 정신이 팔린 레번은 그의 뒤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무대는 말이야, 무조건 화려해야 한다고.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을 만한 요소가 있어야 하잖아. 뭔가 획기적인 거 말이야!”

“그래?”

“당연하지!”

“그렇구나. 뭔가 생각하는 게 있나 봐?”

뒤에서 들려오는 느릿한 목소리가 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듯하자, 레번이 더욱 신이 나 말을 이었다.

“관객들이 확 몰입할 수 있는 스토리! 복수 끝에 피어나는 치정!”

“흐음.”

“금지된 사랑! 그 와중에 주인공이 병에 걸려 시한부! 아름다운 사랑의 도피!”

“생각 많이 했구나?”

“장부도 다 쓰고 할 일이 없으니까 남는 시간에 글을 좀 쓰다 보니…….”

쑥스러운 듯 코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돌렸던 레번이 제 말에 귀 기울여 주던 이의 얼굴을 확인하고 굳었다.

도로테아가 환하게 웃으며 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열심히 하네. 장하다.”

“응, 아니, 네…….”

다정한 손길에 레번의 몸은 사시나무 떨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추위를 많이 타는 듯한 레번에게, 도로테아는 제가 쥐고 있던 반짝이는 금빛 숄을 어깨에 둘러 주고는 등을 토닥였다.

“따뜻하게 지내.”

“고, 고맙습니다.”

오늘따라 답하는 그의 목소리가 물기에 젖어 먹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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