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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124)화 (124/242)

혼술사 도로테아 124화

휘청, 하고 발을 헛디디는 도로테아를 뒤돌아보던 프리드가 검을 놓쳤다.

상대는 황태자를 보필하는 근위 기사.

그가 제아무리 대단한 실력을 지녔더라도 한눈을 팔 수 있을 만큼 녹록한 상대는 아니었다.

“하늘이 나를 돕는군. 더욱 몰아붙여라! 잘난 정령만 믿고 날뛰더니 아주 꼴이 좋구나.”

희열에 가득 찬 목소리가 폐궁을 가득 울렸다.

그를 찾아 헤매고 있을 황제의 근위대가 두렵지 않은 모양이었다.

도로테아는 검을 놓친 프리드를 흘끗 바라보다 다시금 손을 휘저었다.

빈틈을 노려 검을 찔러 넣으려던 기사들이 리리의 움직임에 뒤로 밀려났지만, 그것이 한계였다.

피가 멎지 않고 뚝뚝 떨어져 내리는 틈을 타 다른 기사들이 도로테아에게로 접근했다.

새하얀 목 아래에 검이 드리워진 순간이었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폐궁의 후원을 갈랐다.

“이쯤 하죠. 모두 검을 내리세요.”

“무, 무슨……!”

당황한 듯 더듬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황태자였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린 기사들의 눈에 황태자의 목 아래 잘 벼려진 비수를 들이밀고 있는 발레리가 보였다.

일의 성사를 코앞에 두고 있던 황태자가 저를 겨눈 발레리를 경악스럽게 바라봤다.

여인의 손은 억세진 않았지만 비수의 날카로운 감촉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발레리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움직이지 않으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전하. 검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어설픈 구석이 많으니까요.”

무슨 생각인지 가늠할 수 없는 평온한 얼굴을 보며 희게 질린 황태자가 다그쳤다.

“이건 제르망 자작의 뜻인가? 그가 나를 해하라던가?!”

“아니요, 아버지와는 상관없지요.”

황태자에게서 고개를 돌린 발레리가 여전히 검을 쥐고 있는 기사들에게 다시금 일렀다.

“검을 내리세요, 경들.”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황태자의 목에 붉은 선혈이 비쳤다.

흉조차 남지 않을 옅은 상처에 불과했지만, 황태자의 안위를 지켜야 할 기사들을 위협하기에는 충분했다.

기사들이 검을 내리기가 무섭게 도로테아가 다시 한 번 휘청했다.

재빠르게 그녀를 부축한 프리드가 손수건으로 피가 흘러나오는 코를 막았다.

발레리는 그런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이 조금만 더 유능했더라도.”

이윽고 열린 입술로 흘러나온 나직한 목소리가 황태자의 귓속을 스몄다.

“이런 선택을 하진 않았을지도.”

“어째서……?”

얼굴을 잔뜩 찡그린 황태자는 자신의 목에 날붙이를 들이댄 발레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연신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발레리는 혈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도로테아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 온 마당에 황태자로서의 마음가짐을 내세우며 도덕이니 윤리관이 어쩌니 운운할 마음은 없어요.”

그건 좀 고리타분하죠.

죽은 후의 평판 따위야 살아남은 이의 손톱 하나만큼의 가치만도 못한 법이니까.

역사서에 어찌 기록될지 연연하는 건, 오로지 명분과 명예에 목숨을 거는 귀하신 분들이나 할 법한 생각이고.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당신 따위가 테아를 꺾는 건 좀 기분이 더러워서요.”

“그런 게 다 뭔 상관이더냐! 도대체 뭐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

“조금만 더 기다린다면 눈부신 미래가 있었을 거다. 너는 차기 황후가 될 수도 있었어!”

“황태자비께서 멀쩡히 계시는데, 제가 장차 차기 황후가 되다니요. 절더러 황족 시해에 가담하라 하시는 건가요?”

발레리가 픽, 하고 웃었다.

이 남자는 도대체가.

자신의 옆자리가 정말 그토록 대단한 가치를 지녔다고 생각하는 걸까.

하긴 제 아버지가 황태자의 말 한마디에 눈이 뒤집혀 그의 발을 핥아 댔으니, 확실히 영 먹히지 않는 미끼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자신은 에밀리 스카뎀이 아니었다.

글쎄, 그가 차라리 도로테아 하이클레어를 상대할 수나 있는 남자였다면.

그에 준하는 사람이었더라면 좀 나았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끊어 낸 발레리가 무미건조하게 속삭였다.

“애까지 딸린 남자의 후처로 들어가느니, 차라리 황태자 시해범이 되는 것이 낫지요.”

황태자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혈색으로 따지자면 피를 잔뜩 쏟은 도로테아와 황태자, 둘 중에서 누가 더 창백한지 알 수 없을 만큼이나.

그녀의 모욕적인 말에 솟아난 분노가 그의 머릿속을 새하얗게 비워 낸 것 같았다.

“하이클레어의 계집이 살아 돌아가면, 너도 무사할 듯싶은가? 그 계집의 뒤에는 후작이 있다!”

후작가가 이끄는 기사단이 황궁으로 와 합류한다면 황태자에게 승산이 있을 리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황위를 놓고 시작한 반역.

도중에 죄를 뉘우치고 항복을 한다손 치더라도 그 죄가 사면될 리 없었다.

더군다나 제르망 자작은 황태자를 지지한답시고 클라이브의 힘을 빌리지 않았던가.

“네 아비가 나를 따르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너는 내 사람이었다. 아비의 죄는 딸아이의 죄인즉!”

제르망 자작처럼 신중한 이가 군을 일으킨 까닭도 너무나 명료했다.

이미 지나치게 깊숙이 발을 들인 그로서는 황태자가 황위를 잇는 것 외에는 살아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으르렁대는 황태자의 말에 발레리가, 조용히 도로테아를 부축하고 선 프리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서로 재회한 뒤, 그가 푸르디푸른 눈에 발레리를 온전하게 담아 바라보는 것은 지금이 처음 아니었던가.

그녀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게요. 아비의 죄는 그 딸에게로. 그러니 대가를 치를 때가 온 거예요.”

대치 상태가 길어지자 검을 내려놓았던 근위 기사 중 하나가 이를 악물고 결단을 내렸다.

지금 이대로 시간을 끌면 7황자의 병사가 언제 이곳에 도달하게 될지 모르는 일.

‘아무리 강인한 척해도 고작 귀족 영애가 아닌가.’

기사에 비할 바가 못 된다 하더라도 황태자 또한 어린 시절부터 검술을 교양으로 익혀 왔으니, 조금이라도 버텨 주리라는 계산속에서 비롯된 판단이었다.

그가 내렸던 검을 고쳐 쥐고 도로테아에게 달려들려던 그 순간이었다.

“으아아아아!”

처절한 비명 소리가 기사의 발목을 잡았다.

폐궁을 뒤흔들 듯 소리 지른 황태자가 제 손을 쥔 채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쓰러진 황태자를 밟고 검을 겨눈 발레리가 태연하게 고개를 들었다.

검 끝으로 핏방울이 똑, 하고 떨어져 황태자의 목을 적셨다.

검을 쥔 기사의 눈이 커졌다.

“실성한 겐가!”

“일개 자작 영애 따위가!”

황망하게 외치는 소리에 발레리는 얼굴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담담하게 답했다.

“아무래도 경께서는 듣지 못하셨나 봐요.”

난생처음 겪는 모욕과 아픔에 땅에 누워 바르작대는 황태자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망설임 하나 없었다.

“제가 이미 사람을 죽인 전적이 있다는 것을.”

황태자의 비명 소리 덕분일까.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이들의 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우리 테아, 테아를 찾아야지!”

다급한 에이든의 목소리는 언제나 그렇듯 우렁찼고, 이곳에 있는 이들을 공포에 휩싸이게끔 만들기에 적합했다.

이윽고 후원으로 들어선 에이든의 눈이 커졌다.

“테아야! 피가 나지 않느냐!”

허둥지둥 달려오는 그의 눈에는 검을 쥐고 있는 발레리도, 그녀의 발아래 깔린 황태자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

“어찌 저자가 벌써 궁으로 들어올 수 있단 말이냐.”

피가 철철 흐르는 손을 부여 쥔 황태자가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중얼거렸다.

“황궁의 문이란 문은 전부 틀어막았거늘…….”

“언제나 그렇듯, 아주 높이 계신 분들은 아래를 잘 못 보시더라고요.”

‘위’에서 군림만 해 왔던 이들은 그 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모른다.

“그리고 제 ‘시녀’는 제법 유능해서요.”

모두가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제르망 자작이 황태자에게 충성을 맹세한 이상, 그의 딸 또한 당연하게 그러하리라 여긴 이들의 오만이 역설적으로 발레리를 자유롭게 만들어 주었다.

따라서 그녀의 곁을 그림자처럼 따르는 붉은 머리의 ‘시녀’가 누군지 의심하는 자는 없었다.

그 덕에 발레리 곁에서 모든 상황을 보고 들은, 참으로 ‘유능’한 메릴린은 그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은 채 궁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적절한 때에, 적절한 순간에 날뛰는 황태자를 제압할 수 있게끔.

“비로소 끝이 났네요.”

발레리가 에이든의 품에 안긴 도로테아를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제르망 자작가가 회생할 가능성은 이로써 완벽하게 사라졌다.

그것 하나만큼은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   *   *

“이제 그만 포기하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

“고집 부리지 말고 그 아이에게 황위를 넘겨주세요, 폐하.”

황후의 목소리는 어딘가 모를 불안함에 젖어있었다.

그에 반해 황태자에 의해 집무실에 구금된 채 선위하라는 협박을 받은 황제는 약간 착잡해 보였을 뿐, 비교적 평온했다.

“그 아이는 괜찮은 황제가 될 겁니다. 비록 리처드가 독을 품고 달려드는 통에 흠이 좀 드러났다고는 하나,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황후는 애타는 얼굴로 꿈쩍도 하지 않는 황제를 설득하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원래 그 아이의 자리였습니다! 그 아이가 마땅히 앉게 될 자리예요. 조금 일찍 부여받는다고 크게 달라질 것도 없습니다. 폐하께서 직접 세운 황태자가 아닙니까!”

그제야 앉아 있던 황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뒷짐을 진 채 밖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자 하니 바깥의 상황이 제법 치열하게 돌아가는 듯했다.

하기야 그렇지 않으면 굳이 그를 찾아와 선위를 하라는 협박을 하진 않았겠지.

어지간히 속이 탄 모양이었다.

“내가 직접 세운 아이라 망설였던 거요. 그 아이보다 나은 재목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오.”

“폐하.”

“내가 잘못된 결정을 했음을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지.”

언제부터였을까.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랐다는 이유로 완전무결한 인간이 되고자 한 것이.

그도 때때로 실수를 하고,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도 있으며, 그로 인해 또 다른 희생자들이 생겨날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

“나의 한마디에 다치는 이들이 수십, 수백, 수천, 수만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오.”

그 생명의 무게가 너무나도 무겁고 버거웠기 때문이다.

꾸역꾸역 그것을 짊어질 수 있었던 젊은 날처럼 객기를 부리기에 자신은 너무 늙어 버렸다.

“그 탓에 결국 이런 사달이 생겼구려.”

씁쓸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둔 그가 파랗게 질려 있는 황후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다 끝났소. 저 아이는 마지막 기회마저도 놓쳐 버린 거요.”

드레스 자락을 움켜쥔 황후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고여 있던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제국의 황태자입니다. 폐하께서 직접 인정하셨잖습니까.”

“내 그대가 저 아이들에게 독이 되리라는 것을 진작 생각했어야 했는데. 이 지경에 와서도 그대는 배우는 것이 없구려.”

“…….”

“무지한 어미가 차라리 나을 줄 알았소.”

지나치게 영민한 인물이면 쓸데없는 바람을 불어넣을 것 같기에, 지나치게 온화하고 욕심이 없으면 그 또한 황위 싸움을 견디지 못할 것 같기에.

적당한 조건이라 여겼기에 눈앞의 여인을 받아들였다.

그때, 어쩌면 황태후의 충고 아닌 충고를 받아들였어야 했을지도.

제국의 ‘황후’는 황제와 같은 눈높이에서 그림을 그릴 줄 알아야 한다던 그녀의 말을.

눈앞의 여인은 자신의 자리가 가진 무게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황후만 탓할 수는 없나…….’

자식 문제로 오랜 세월 속을 끓인 친우의 모습을 떠올리던 그때였다.

“폐하.”

시종이 침통한 얼굴로 소식을 전했다.

“황태후 폐하께서 서거하셨습니다.”

“…….”

“그게 무슨…….”

짤막한 소식에 황후의 입이 벌어졌다.

황제는 뒷걸음질 치는 황후를 보지 못한 것처럼 담담하게 시종을 향해 물었다.

“그녀가 어찌 죽음을 맞이했느냐?”

“그것이…….”

얼굴을 흐린 시종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던 순간이었다.

고요하던 문밖이 난데없이 소란스러워졌다.

챙, 챙! 챙!

쇠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연이어 귀를 아프게 만들었다.

외마디 비명조차 없이 우르르 달려드는 군화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황제를 구금하던 기사들을 손쉽게 제압한 것을 보면 새로 나타난 이들의 실력이 꽤 훌륭하다는 뜻일 터.

아군일지, 혹은 어부지리를 노리는 또 다른 인물일지 모르는 황제의 눈에 슬쩍 경계의 빛이 서렸다.

“늦어서 송구합니다, 폐하.”

상황을 종료시키고 황제에게 예를 차리고 있는 기사들을 양옆에 둔 채 걸어오는 한 사내를, 황제가 지긋이 응시했다.

끝까지 저항하던 상대를 자비 없이 쓰러트리던 얼굴이…… 왜인지 낯익었다.

“스펜서 백작이 아닌가.”

한 걸음 한 걸음 제 이복형에게로 다가선 키엘 스펜서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의 미간이 좁혀졌다.

키엘 스펜서가 갑자기 이곳을 어찌 알고 찾았단 말인가.

아니, 설령 알았다고 하더라고 그의 입장상 황태자 쪽에 서야 맞을 터.

의아해하며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던 황제가 점차 표정을 굳혔다.

뚜렷한 이목구비가 어딘가 익숙했다.

설마, 하면서도 속으로 드는 심증에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대는 어찌 이 사달을 알고 황궁에 왔는가?”

“조금 전 몇몇 일행들과 함께 궁을 빠져나가려던 제르망 자작의 신원을 확보했습니다. 그에게 받아 낸 자백서와, 그 자백을 뒷받침하는 증거 자료들입니다.”

“…….”

“오래전부터 로헨 왕국은 황자들의 후계 다툼을 지원하여 제국의 분열을 조장했을 뿐만 아니라, 제국의 영토를 수시로 드나들며 귀족들을 포섭해 왔습니다.”

스펜서 영지에서부터 3황자에 이르기까지.

교묘한 접근로와 그 과정이 낱낱이 담겨 있는 증거 자료를 훑는 황제의 얼굴이 서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제 영지에도 손을 뻗었고, 조사 결과 몇몇 행정관들을 비롯하여 영지를 관리하는 자들에게서 부정한 증거를 발견했습니다.”

물론 키엘 자신과 관련된 내용은 쏙 빠진 채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내용을 살피던 황제가 물음을 던졌다.

“어째서 하이클레어 후작 영애의 청문회에서 이를 밝히지 않았던 겐가?”

“명확한 증거가 부족했고, 무엇보다 황자님들이 관련되었기에 따로 아뢸 기회를 노리던 차였습니다.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당황하는 기색 한 번 내비치지 않은 키엘이 곤란한 미소와 함께 말을 흐렸다.

“그렇군.”

황제가 탁, 소리가 나도록 보고서를 덮어 옆으로 밀어냈다.

키엘 스펜서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순간 느꼈던 기시감은 황태후의 죽음과 함께 엮여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황태후의 죽음은 황제를 향한 부탁이자 경고의 메시지였다.

“2황자 전하께서 다행히도 저와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셨고, 하이클레어 후작가와 협력하여 황궁 밖의 황자님들은 모두 무탈하십니다.”

“윌리엄이…….”

“황태자 전하의 신변 또한 지금쯤 에이든 경께서 확보하셨을 것입니다.”

황제는 흘끗, 황후를 바라보다 다시금 키엘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황태후의 죽음에 대해서는 알고 있나?”

“예.”

“그렇군.”

황제인 저보다도 더 선황의 젊은 시절을 닮은 백작을 내려다본 황제의 표정이 묘했다.

“오늘 내 오판의 결과물을 여럿 보게 되는 것 같군.”

황태자가 언젠가는 제 알을 깨고 나올 수 있으리라 믿으며 욕심을 부린 것이 첫 번째 오판이라면, 두 번째는 황태후가 지금까지 침묵하고 또 죽음으로써 아이를 지킬 만한 모성애가 있으리라 믿지 않았던 것.

‘나이를 헤아려 보면 내 즉위와 맞물려.’

황태후는 똑똑한 인물이었다.

지나치게 똑똑한 나머지 한평생 선황의 의심과 견제를 받아야 했지만.

제가 잃은 젊음을 가진, 선황과 닮은 눈을 가진 동생을 바라보는 황제의 눈에 순간 많은 감정들이 스쳤다.

꾹 닫혀 있던 입이 이윽고 열렸다.

“윌리엄에게 전하게. 지금부터 임시로 황태자의 직무 대행을 맡아, 궁의 소란을 정리하고 관련자들을 잡아 조사하라고.”

“예, 폐하.”

키엘 스펜서가 고개를 숙였다.

황제의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시선이 이제 막 무대 위로 올라선 이를 향해 쏟아졌다.

비로소 스스로를 증명할 순간이 온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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