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사 도로테아 123화
“아이란 원래 어머니의 바람대로 크지 않는 법이지요.”
“그렇다더구나. 나는 나를 너무 높이 샀어. 완벽한 부모와 가정을 만들어 주면 아이는 당연하게도 잘 자랄 거라고, 이 황궁에서 자라나는 비뚤어진 아이들보다는 훨씬 더 건강한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이를 보호하며, 지지해 주었다.
그 과정에서 단 한 가지 실수가 있었다면…….
아이가 잘 지내고 있기를 바라며 자신의 눈과 손이 되어 줄 이를 유모로 골랐던 것이 패착이었을까.
영민한 아이는 자라나며 유독 저를 어려워하고 ‘받들고 싶어 하는’ 유모의 태도에서 이상함을 느꼈다.
저를 사랑하는 듯하면서도 묘하게 어려워하는 부모.
그를 향해 지나치게 공손한 사용인들.
한 달에 한 번이면 늘 긴 외출을 하고 돌아오는 유모까지.
“어느 날인가, 내게 그 아이의 이야기를 전해 주던 유모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백작은 이 기회에 한 번쯤 아이를 만나 보라 권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지.”
겁이 났으니까.
보고 나면 곁에 두고 싶어질지도 모르니까.
현 황제의 눈에 띄지 않게끔 숨겨 왔던 그 모든 것들이 수포로 돌아가게 될 테니까.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스펜서 백작이 타계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제야 새로운 백작이 되어 황제를 알현하러 온 그 아이를 먼발치에서나마 보게 되었지.”
처음으로 보게 된 제 아이의 눈은 마치 굶주린 짐승처럼 탐욕으로 가득했다.
맑고 순수하며, 마냥 행복에 들뜬 모습을 꿈꾸었던 그녀의 바람과는 전혀 다르게.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던 아이는 제 아버지와 비슷한 눈을 하고 있었지.”
눈앞에 있는 자들을 제 발치에 꿇게 만들 수 있는 군주의 눈을.
그렇지만 이미 군주가 존재하는 제국에 또 다른 군주가 존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이 있는 것만큼 세상을 혼란케 하는 일은 없으리라는 것을 황태후인 그녀는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 애를 괴물로 만든 건 나야. 처음 비뚤어진 길로 걸어갈 때, 단호하게 막아섰어야 했는데…….”
단 한 번도 얼굴을 보지 않았던 죄책감이 그녀를 망설이게끔 만들었다.
스펜서령을 꼼꼼히 에워싸고, 그가 그곳에서나마 마치 왕처럼 떵떵거릴 수 있게끔 만들어 준 것 또한 그녀였다.
자잘한 사고가 황궁까지 들려오지 않게끔 덮어 주고, 무마해 주면서.
스펜서 가문이 황실과 인척 관계가 되는 것에도 암암리에 관여한 건 덤이었다.
한두 번 일이 반복된 후에야 욕심 많은 아이가 제가 누구인지 몰라 발버둥 치는,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스러운 괴물이 되어 가고 있음을 뒤늦게서야 알았다.
“차라리 그 아이의 숨통을 끊어 놓는 것이 옳을지도 몰랐겠지만, 나는 끝까지 망설였다.”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았어.
그렇기에 지금의 결과에 이르게 된 것이겠지.
“스펜서 백작님께서는 아직 ‘선택’하지 않으셨어요.”
도로테아의 말에 황태후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잔인하고 냉혹한 면이 있는가 하면, 제 사람을 아끼고자 하는 마음도 분명 존재했다.
어린 그녀가 처음으로 그를 만나 도움을 청했을 때, 도로테아는 하이클레어 후작가의 금지옥엽이 아니라 깡마르고 못난 데다 추레하기까지 한 어린아이였다.
선뜻 손을 내밀었던 남자는 비록 영혼에 금이 갔을지언정 빛을 잃지 않았다.
“사람들은 누구나 선택을 하고 살아요. 어떤 선택은 생의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요.”
그는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있지만 아직 어느 쪽으로든 마음을 분명하게 정하지 않았다.
도로테아의 말을 듣던 황태후가 몸을 일으켜 천천히 장식품처럼 놓여 있던 비싼 찻잔을 꺼내 들었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찻주전자 안의 차는 이미 식은 지 오래일 텐데.
찻잔에 차를 따르는 동작은 마치 예법 교과서에나 볼 법한 완벽한 자세를 유지했다.
퐁, 하는 소리와 함께 각설탕 하나를 넣고 티스푼으로 차를 젓는 빠르고 간결한 손과는 달리, 느릿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알을 깨고 나오려 만반의 준비가 된 아이를 더 이상은 돌아가라 밀어 넣을 수는 없겠지.”
설탕이 모두 녹은 것인지 그녀가 젓고 있던 티스푼을 꺼내어 가볍게 찻잔 위로 두드렸다.
팅, 하고 맑은 소리가 고요한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찻물 위로 생겨나는 파동이 잠잠해지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황태후가 입을 열었다.
“무엇보다 네 움직임으로 벌어진 소동 탓에 현 황제가 잃은 것이 적지 않으니…… 내가 ‘구실’을 만들어 준다면 황제는 굳이 무리해서 손에 피를 묻히려 들지는 않을 터.”
황실의 비사는 역사로 기록되는 만큼 적을수록 좋은 것이니.
손잡이를 쥐고 천천히 차를 입가로 가져가는 황태후에게 도로테아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저도 목이 말라요.”
그 순간 늘 텅 빈 듯한 눈을 하고서 메마른 표정만을 짓고 있던 황태후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천천히 차를 한 모금씩 목으로 넘긴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귀한 차란다. 네게는 줄 수 없을 만큼 귀하고 특별한 차야.”
흔들림 없는 황태후의 눈을 본 도로테아가 손을 내렸다.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은 것은 찻잔 안의 내용물이 모두 목으로 넘어간 뒤였다.
깔끔하게 비워진 빈 찻잔을 내려다보는 도로테아에게 황태후가 다시금 물었다.
“누군가 그러더구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몹시 중한 죄라고.”
“저도 그렇게 들은 기억이 있어요.”
“그렇다면 다음 생애에는 분명 편히 살게 되진 않겠구나. 이제껏 지은 많은 죄를 모두 갚으려면 아주 혹독한 삶을 살게 되겠어.”
“글쎄요, 더 깊은 죄를 지은 이들이 많다면 꼭 그렇지만도 않을 거예요.”
도로테아의 말이 끝난 순간이었다.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여러 발소리가 동시에 우르르 들려왔다.
황태후의 궁을 누비는 자들이 누구이든 간에 시녀들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문이 열린 순간 익숙한 얼굴이 내비쳤다.
“너는 어째 내가 만날 때마다 곤궁한 상황에 처해 있구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를 다정하게 타박했다.
도로테아는 웃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드레스 자락을 쥐고 가볍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네요, 키엘 백작님. 이곳까지는 어쩐 일이세요?”
그는 이 방에 있는 가장 높고 고귀한 신분의 여인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도로테아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너를 데리러 왔단다.”
웃음기 어린 상냥한 목소리에 도로테아가 망설임 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키엘 스펜서는 황태후의 궁을 빠져나가면서 단 한 번도 그녀가 있는 곳을 쳐다보지 않았다.
황태후 또한 단 한 번도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음은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의 존재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무시했다.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도로테아는 제 손을 이끄는 키엘의 손에서 느껴지는 미적지근한 온기에 그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득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했다.
* * *
“이곳에 있으면 네 가족들이 널 데리러 올 거다.”
“은인께서 또 한 번 제 목숨을 구해 주셨나 봅니다.”
“그러게 말이다.”
키엘 스펜서가 빙긋 웃었다.
다시 여유로워진 그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도로테아에게 가까이 다가서서 물었다.
“도대체 이 은혜를 언제쯤이면 다 갚겠느냐?”
“종전의 일은 은혜로 치지 않을 거예요.”
“맹랑하기는.”
“은인께서는 저를 핑계 삼아 마지막 배웅을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
핑계 없이는 서로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는 사이라니.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애달픈 일이건만, 당사자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인사로 이미 충분히 족한 듯 보였다.
도로테아의 말에 침묵하던 키엘이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부드러운 볼을 힘주어 꼬집었다.
말랑한 볼을 사정없이 늘어뜨린 그는, 새하얀 볼이 붉어진 것을 보고서야 흡족한 얼굴로 손을 내리며 당부했다.
“움직이지 않는 편이 안전할 것이다.”
“어디론가 가시나요?”
도로테아의 물음에 키엘이 픽, 하고 웃었다.
“네가 부추기지 않았느냐.”
“…….”
“모르는 척하지 말거라. 그 연극, 주인공이 아직 무대에 뛰어들지 않아 끝맺지 못한 극을 괜히 극장에 올렸다고 말하진 않겠지.”
자신의 인생임에도 그 인생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 이름 없는 아이.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늘 왠지 모를 허기와 갈증에 방황할 수밖에 없던 아이.
무대 위, 쓸쓸해하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는 내내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리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키엘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해 보인 도로테아가 물었다.
“그래서 이제 무대 위로 올라가 스스로의 ‘역할’을 얻고자 하시나요?”
“네 생각에는 내가 어떤 역할에 어울릴 것 같으냐?”
“그걸 왜 제게 물으세요?”
도로테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의뭉스럽게 되물었다.
키엘의 눈이 가늘어지는 것을 본 그녀가 미소 지었다.
“본인의 ‘역할’은 본인의 선택과 생각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선한 면을 지녔을 수도, 악한 면을 지녔을 수도, 또 그 두 가지를 모두 가졌을 수도.
누군가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를 고민해 본다면 다음 선택 또한 은인이 직접 하셔야지요.
가늘게 눈을 휘며 웃는 도로테아를 바라보던 키엘이 허탈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돌렸다.
“참 사는 것이란 어렵구나.”
“그래도 기왕 올라서신 거.”
도로테아의 말에 걸음을 옮기려던 그가 멈칫했다.
“제게 도움 되는 사람이 되어 주세요.”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그가 웃고 있음은 분명하게 느껴졌다.
키엘이 멀어지고 나서야 도로테아는 그가 사라진 자리에서 눈을 떼고, 여전히 제 곁에 딱 붙어 있는 프리드를 향해 고개를 살짝 기울여 보였다.
“너는 아직도 무대 위로 올라설 생각이 없으려나?”
“…….”
“스카뎀 가문의 이름을 물려받기도 싫고, 기껏 루크의 노예가 된 처지에서 해방시켜 주었는데도 여전히 그림자로 살겠다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도로테아를 흘끗 바라본 프리드는 침묵을 택했다.
멀리서 소란스러운 소리들이 가득 들려왔다.
궁을 가득 메우는 병사들의 함성 소리와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
흥분해서 날뛰는 말들의 발굽 소리와 더불어 무언가로 성벽을 가격하는 듯한 소리까지.
폐궁(閉宮)의 후원으로 옮겨진 도로테아는 가만히 앉아, 수없이 많은 혼들이 하늘 위로 솟아오른 길을 따라 먼 여행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멀리서 사신들의 아득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도로테아의 품에 있던 피피가 쏙 튀어나와, 한때 자신의 주인이었던 콜린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신들을 경계하듯 찍찍거렸다.
이윽고 폐궁 근처에까지 눈 먼 화살이 하나둘 꽂히기 시작했다.
도로테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목숨이 지는 오늘, 날은 유독 청명하고 따뜻했다.
* * *
한가롭게 폐궁 후원에 몸을 뉘인 채 가족들을 기다리던 도로테아를 찾아낸 것은 황태자였다.
‘찾았다’기보다는, 생각보다 강한 세력들에 밀려 폐궁까지 숨어 들어오게 된 것뿐이지만.
칼에 쓸린 상처를 부여잡은 채 비틀거리며 폐궁을 찾았던 황태자가 도로테아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상대를 보고 부스스하게 몸을 일으킨 도로테아가 한숨을 쉬었다.
“이런.”
과장된 한숨에 자신감을 얻은 황태자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도로테아를 손가락질했다.
“저 계집을 잡아라! 저 계집을 손에 넣어!”
괘씸한 것도 괘씸한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도로테아를 손에 넣으면 후작가를 좌지우지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그의 눈이 번들거렸다.
황태자의 명에 그의 곁을 지키던 기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프리드가 재빠르게 앞을 막아섰지만 황태자의 근위 기사들을 홀로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프리드가 점차 한 걸음씩 뒤로 밀려나기 시작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손을 들었다.
그녀의 손 위로 푸른색을 띠는 정령이 튀어나와 기사들을 매섭게 덮쳤다.
“으아아악!”
“크흑!”
“거, 거리를 띄워!”
“정령이다! 정령을 쓰고 있어!”
리리가 개구지게 기사들을 놀려 먹기 시작했다.
‘정령’과의 전투에 익숙하지 않은 기사들이 헤매는 사이 프리드가 도로테아를 뒤로 물렸다.
황태자의 희게 질린 얼굴이 어딘가 익숙했다.
‘아, 동복형제랬지.’
두 사람 모두 궁지에 몰릴 때가 되면 얼굴이 추해진다는 점에서 닮았네.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기사들을 휘젓는 정령을 바라보고 있던 도로테아가, 저 멀리서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다가오는 인영을 발견했다.
“…….”
호리호리한 체구가 어딘가 익숙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황태자 가까이로 다가서서 후드를 벗은 이는 그녀가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었으니까.
순간 그녀의 앞에서 잘 버티고 있던 프리드가 주춤했다.
“제르망 자작은 어디 있지?!”
“아버님이라면 황태후의 신변을 확보하기 위해 궁으로 향했습니다. 황제를 협박하기에 그보다 더 좋은 패는 없으니까요.”
“제길, 아버님은 아직도 고집을 부리고 계신 게냐! 나 외에 그분께 어떤 선택지가 남아 있다고! 윌리엄, 그 반푼이는 1년도 채 되지 않아 뒈질 거다!”
그나마 이성적이던 면모조차도 날려 버린 듯, 잔뜩 흥분한 황태자가 도로테아를 삿대질했다.
“너, 분명 저 아이가 당분간 정령을 다루기 힘들 거라 하지 않았느냐! 하지만 보거라. 지금 저리도 멀쩡하게 휘젓고 다니는 정령을!”
도로테아를 표정 없이 물끄러미 바라본 발레리가 나지막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전하.”
이미 한차례 무리하여 ‘살’을 날린 뒤 그 저주를 해주한 데다, 알렉세이의 주술을 받아쳐 고스란히 클라이브에게 보내기까지.
산 자를 향해 ‘악의’를 담아 행한 술법들은 고스란히 도로테아의 육신에 커다란 반동을 남겼다.
“그녀는 더 이상 정령의 힘을 사용해서는 안 돼요.”
나지막한 발레리의 말처럼, 어느새 도로테아의 코에서 한 줄기의 선혈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게 할머니의 복수 정도는 다른 자들에게 맡겨도 충분했잖아, 테아.
왜 굳이 네가 위험해지는 길을 택했니.
물음을 목구멍 아래로 삼키는 기분이 묘했다.
저 멀리, 한때 자신과 가장 가까웠던 소꿉친구가 죽음을 무릅쓰고 도로테아를 지키고 있었다.
그녀가 겨우 이곳까지 몰아넣은 도로테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