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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122)화 (122/242)

혼술사 도로테아 122화

“후작 영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고개를 조아리며 마차로 모여든 자들의 기세가 못내 흉흉했다.

온몸을 은빛 갑옷으로 뒤덮은 기사가 그녀를 압박하듯 다가섰다. 허리춤에 찬 검은 언제든 뽑을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모두 무장을 하고 계신 것을 보니, 궁에 좋지 않은 일이 있나 봅니다. 저는 2황자 전하께서 보내신 연통을 받아 왔습니다만 경들은 어느 궁 소속이실까요?”

부드러운 목소리에도 그녀의 앞을 막아선 기사들의 얼굴에는 동요 한 점 없었다.

서늘하고 냉랭한 태도를 굳이 숨기지도 않는 이들을 훑어보던 도로테아가 여유로운 얼굴로 다시금 물었다.

“2황자 전하께서는 어디에 계시지요?”

“저희와 함께 가시지요, 영애. 저희의 말을 따라 주신다면 해가 될 일은 없을 겁니다.”

“전 협박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요.”

“…….”

지휘관으로 보이는 짙은 머리 색깔의 기사가 도로테아의 곁에 선 프리드를 바라보았다.

언제고 검을 뽑을 수 있도록 자세를 취한 그를 보는 눈에 경멸의 빛과 노여움이 동시에 서렸다.

“너였군. 스카뎀의 살아남은 쥐새끼.”

도로테아는 코니움에게 에밀리 스카뎀의 흉내를 내게끔 할 때도, 벤자민 모어를 증인으로 내세울 때에도 의도적으로 프리드의 존재를 지웠다.

존재가 알려지는 순간 위험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는 가문의 짐을 지고 싶지 않다는 그의 의사를 존중했기 때문이었다.

‘프리드의 신분은 쉽사리 알 수 있는 것이 아닐 텐데.’

고작해야 후작 영애의 호위 기사가 가진 과거를, 그것도 7황자가 직접 지워 버린 과거를 들춰 낸 자가 누구일까.

어느 쪽이든 그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것만은 확실했다.

“이미 지난 일을 가지고 타국까지 끌어들여 제국을 엉망으로 휘저어? 너 같은 매국노를 받아 줄 곳이 있으리라 믿는 거냐!”

챙, 소리와 함께 일제히 검을 든 기사들이 거리를 좁혔다.

도로테아는 그녀의 명이 없어 검을 뽑지 않은 프리드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비키십시오, 영애.”

“경들께서는 지금 큰 실수를 하고 계세요. 저는 2황자 전하의 초대를 받아 입궁하고 있습니다. 제 안위를 지키는 호위를 멋대로 데려가려 하시다니요.”

그녀의 말에 버럭 소리를 질렀던 남자의 얼굴에 옅은 비웃음이 서렸다.

“2황자 전하께서는 지금 영애와 만나실 수 없습니다.”

“…….”

“그리고 영애께서는 무언가 잘못 알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무엇을 잘못 알고 있는 걸까요?”

툭, 하고 남자가 그녀의 앞에 무엇인가를 던졌다.

도로테아는 깨알 같은 글이 가득한 양피지를 내려다보는 대신 은은한 미소로 눈앞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꼿꼿하게 들린 고개가 기사의 기분을 못내 상하게 한 걸까, 이윽고 그가 일그러진 얼굴로 한 자 한 자 말을 뱉기 시작했다.

“도로테아 하이클레어 영애는 지금부터 황족 모독죄와 더불어 타국의 사신과 내통한 죄로 심문을 받게 될 예정입니다. 제대로 협조한다면 험하게 대하지는 않을 터이니, 잠자코 따르시지요.”

그녀의 발치에 떨어진 것은 다름 아닌 소환장이었다.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린 도로테아가 제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2황자 전하의 이름을 이용해 저를 궁으로 부르신 뒤, 미리 작성해 둔 소환장을 내미시다니요. 이 무슨 장난질인지. 아무래도 경들께서는 어지간히도 제 가문의 사람들이 두려우셨나 봅니다.”

“입을 함부로 놀리는 영애를 보호해 줄 이는 이곳에 없습니다. 말을 삼가시지요.”

으르렁대던 남자가 도로테아의 목에 검을 겨눴다.

그와 동시에 검을 뽑아 든 프리드가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겨누어진 검을 쳐 냈다.

깡!

제법 큰 소리와 함께 그의 검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검을 놓친 기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곁에 있는 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두 사람을 포위했다.

팽팽한 긴장감을 깨뜨린 건 멀리서 다가온 한 무리의 시녀들이었다.

“부디 멈춰 주십시오, 벨트린 경.”

시녀들을 통솔하는 인물로 보이는 귀부인이 그렇게 말하며 살짝 허리를 굽혔다.

“부인께서 나설 자리가 아닙니다. 저는 반역 죄인을 심문하고자 이 자리에…….”

“적법한 절차도 없이 궁에서 검을 뽑아 들다니, 놀라운 일이로구나.”

까랑까랑한 목소리에 벨트린 경이라 불린 기사가 흠칫했다.

목소리의 주인이 시녀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섰다.

화려한 반지를 낀 주름진 손과, 머리 위에 씌워진 아름다운 티아라.

도로테아를 알 수 없는 눈으로 응시하던 황태후는 웃음기 한 점 없는 얼굴로 고개를 돌려, 골치 아픈 듯 살짝 찡그리고 있는 기사를 훑었다.

“황궁은 황제께서 명하시거나 그분의 호위 기사 외에는 그 어떤 무장도 허가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너희는 이미 근신 중인 황태자의 궁에 소속된 이들이 아니냐.”

“황태후 폐하.”

남자가 마지못해 고개를 조아리긴 했지만, 수그러들지 않는 눈빛으로 보건대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근신 중에 남몰래 귀족 영애를 궁에 끌어들이는 것은 황태자로서 올바른 행동이라 보기 어렵구나. 아직 어린 황태손을 생각해야지.”

“…….”

“황실의 큰 어른으로서, 또 할미 된 몸으로서 이 일을 어찌 그냥 넘기랴. 내가 직접 영애를 잘 타일러 돌려보낼 테니 경들은 이제 물러가는 것이 좋겠군.”

눈앞에서 다 잡은 고기를 놓치게 생긴 기사가 이를 부득 갈았다.

황태후는 여유로운 눈으로 시녀들을 대동한 채 기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각자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는 첨예한 대립 끝에 기사가 입을 열었다.

“그럴 수는 없겠습니다. 저희는 공무를 집행 중입니다.”

“그 아이에게는 이제 할미조차도 하찮게 보이는 모양이로구나. 실로 우군(愚君)이 되려 할 모양이야.”

“아무래도 좋습니다. 실상이 모두 밝혀진 후에는 황태후 폐하께서도 저희를 이해하실 겁니다.”

바짝 다가선 기사가 도로테아에게로 손을 뻗으려던 그때였다.

황태후는 깡마른 몸으로 검 앞에 뛰어들었다.

검을 들고 있던 기사가 기겁하며 검을 물리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몸에 상처를 입혔을 수도 있었다.

“이 아이는 내가 데려갈 걸세, 벨트린 경.”

“전하!”

“이성이 나가 황태후를 살해한 기사로 역사에 길이 기억되고 싶지 않다면 검을 물리시게.”

조그마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에 다들 반쯤 압도된 분위기였다.

이대로 황태후가 죽으면 블라디미르 공작이 다스리는 공국과도 등을 돌리게 되는 셈인 데다가, 즉위 후에도 두고두고 말이 나오리라.

“자네들은 하이클레어 후작가가 두려운 것이겠지. 원한다면 이 아이를 내 궁으로 데려간 뒤 주변을 지켜도 좋네. 그 누구도 나가지 못하게끔 말이야.”

쥐새끼 하나도 나가지 못하도록 감시한다면 당초의 계획과 그리 틀어지지 않으리라.

약간의 양보를 담은 제안에 깊은 한숨을 쉰 기사가 한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그들을 향해 들이밀어졌던 날카로운 검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프리드, 너도 그만 검을 넣어야지.”

도로테아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프리드가 말없이 뽑아 들었던 검을 도로 검집에 채워 넣었다.

황태후가 손을 내밀자 도로테아는 자연스레 팔짱을 끼고서 그녀를 부축한 채 궁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시녀들이 두 사람을 마치 보호라도 하듯 에워싸고 궁으로 들어가는 것을, 벨트린을 포함한 기사들이 형형한 눈으로 끝까지 지켜보았다.

이제 황태후의 궁은 사방이 모두 완벽하게 차단된 셈이었다.

*   *   *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방으로 들어온 도로테아는, 마치 제 집이라도 되는 양 자연스레 의자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궁으로 오지 않는 것이 차라리 편했을 것이다. 너를 지켜 줄 사람은 이곳에 아무도 없으니.”

“황태후 폐하께서 지켜 주셨는걸요.”

“나는 네게 물어볼 것이 있었을 뿐이야. 언제든 벨트린 경에게 널 넘겨도 상관없는 사람이란다.”

뼈 있는 말에 도로테아는 그저 웃었다.

무뚝뚝한 말 속에 온기를 찾아보기란 힘들었지만, 실제로 황태후는 제 생명을 인질 삼아 그녀를 지켜 주었다.

‘거짓말에 능한 것만큼은 아들이나 어머니나 크게 다를 것이 없네.’

한쪽은 늘 웃으며 서늘한 속내를 감추고, 다른 한쪽은 늘 딱딱한 가면을 써서 제 속내를 감춘다는 것이 다를 뿐.

“배가 고픈데, 요깃거리는 없나요?”

“안타깝게도 영애의 배를 채워 줄 만한 식재료는 없어. 어제부터 궁으로 들어오는 모든 자원들이 끊겼으니까.”

식재료를 상납하는 상인이 출입하지 못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도로테아가 탄식했다.

“확실히 그냥 저택에 있을 걸 그랬나 봐요. 이건 생각지 못했는데.”

좀 전까지 검을 든 기사에게 위협을 받으면서도 아무렇지 않던 얼굴이 시무룩해지자, 황태후의 곁에서 시중을 들던 시녀 하나가 저도 모르게 풋, 하고 웃었다.

“경망스럽구나.”

“소, 송구합니다.”

재빠르게 무릎을 꿇고서 용서를 비는 시녀를 내려다본 황태후가 나직하게 축객령을 내렸다.

“모두 물러가 있거라.”

사용인들이 물러간 방의 적막을 깬 것은 도로테아였다.

“무엇이 알고 싶어 저를 부르셨나요?”

“…….”

황태후는 말없이 물끄러미 도로테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좀처럼 입을 떼지 못했다.

어딘가 메마르고 체념한 눈동자는 빛을 잃은 지 오래였지만, 그럼에도 그녀에게서 풍기는 고아한 분위기만큼은 그 누구도 따라가기 힘들어 보였다.

“7황자는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너와 말장난하고 싶지 않구나.”

고개를 젓는 황태후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하여간 이 집안사람들은 내게 참으로 바라는 것은 많으면서 주는 것에는 인색하다니까.

수수께끼 같은 질문만 던져 놓고 저더러 모든 내용을 파악하라는 불친절한 황태후를 보며 속으로나마 투덜거리던 도로테아가 순순히 답했다.

“제게 7황자 전하께서 ‘그분’의 신분을 알게 되었냐고 물으신 거라면…… 아마도 지금쯤은 파악이 끝났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스펜서 백작령에 내려갔을 때 이미 의심은 시작되었을 것이다.

기실 어떻게 보자면 키엘이 먼저 알아 달라고 시위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네가 루크를 선택할 줄 알았다.”

“누군가를 다스리는 것보다는 목줄에 매여 움직이는 것이 어울리는 사람에게 군주의 자리를 내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뻔뻔하게도 여전히 가축론을 주장하고 있는 도로테아의 말에, 황태후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녀의 눈을 깊이 들여다봤다.

“그렇다면 내 아들을 선택했어야 옳은 것이 아니냐?”

그 어떤 감정도 실리지 않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는 좀처럼 질문의 의도를 알아채기 어려웠다.

시종일관 덤덤한 얼굴로 던지는 질문 하나하나가 몹시도 무거웠다.

“글쎄요, 저는 고작해야 성년도 채 되지 않은 일개 후작 영애에 불과합니다. 그런 제가 어찌 국가의 중대사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말장난은 그만두라 하지 않았느냐.”

“황태후 폐하 본인조차 지지하지 않는 아들을 어찌 제게 지지하라 하십니까?”

태어나자마자 그녀의 품에서 떠나보낸 후,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아들이었다.

황태후는 궁금한 듯 묻는 도로테아의 얼굴을 보며, 그녀가 처음으로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던 날을 떠올렸다.

*   *   *

그날은 현 황제의 즉위식이 거행되던 날이었다.

무려 반나절 이상 이어진 긴 즉위식 동안 내내 자리를 지켜야 했던 그녀는 결국 식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현기증을 느꼈고, 서둘러 궁으로 돌아왔다.

그저 무리한 탓에 어지럼증이 재발한 것이리라, 여겼던 것과는 달리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감축드립니다, 황태후 폐하. 회임하셨습니다.”

선황의 곁을 꽤 오랜 시간 지켰지만, 말년의 그는 건강이 몹시 좋지 않아 아이를 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시절 궁으로 들어와 황태후가 되기까지 평생을 궁에서 살아왔기에 알았다.

그녀의 임신이 가져다줄 후폭풍을.

막 황태자에서 황제가 된 이에게 새로이 생긴 ‘적통’ 선황자의 존재가 어떤 위협을 가져올지.

‘이 아이는 존재만으로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길 것이다.’

특히 제 뒤에 있는 공국이라면 충분히 야심을 가져 볼 만하지 않던가.

황제는 온화한 사람이었지만, 제국의 황제로서 자신의 입장과 역할을 우선시하는 인물이다.

황위가 흔들릴 수 있는 일 앞에서는 얼마든지 비정해질 수 있는 인물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이 바로 황태후 본인이었다.

비록 제 배 아파 낳은 아이는 아닐지라도 황제의 적모(嫡母)는 바로 그녀였으니까.

이성으로는 아이를 쥐도 새도 모르게 임신 초기에 죽여 버려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으나…….

“황태후 폐하? 이 사실을 공표하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궁에 들어온 뒤 무엇 하나 제 것이라 여길 수 없는 숨 막히는 삶 속에서, 배 안의 작은 생명은 놓을 수 없는 끈이었다.

자유로운 적이 없었던 삶이기에 그녀가 꿈꾸는 자유를 대신 누려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녀에게 아이는 자신의 대리자인 동시에,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은밀히 로헨 왕국에 연통을 보내 이 아이를 키울 가문을 수배하도록 해라. 내 가문도 알아선 안 되느니.”

임신 사실을 알아챈 의원을 황태후 본인의 전속 어의로 두어 감시 겸 몸조리를 하고, 믿을 만한 심복과 로헨 왕국의 지원 아래 아이의 신분을 세탁했다.

아이를 데려가게 된 스펜서 백작에게 그녀가 청한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이 아이가 그 누구보다 행복하고 평온하게 살 수 있도록.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살아가기를.

내가 꿈꾸던 세상의 모든 것을 이 아이가 대신 누려 주기를.

어리석은 어미의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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