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사 도로테아 121화
이튿날.
3황자 리처드를 요양차 변방으로 보낸다는 발표와 함께, 황태자 또한 이례적으로 ‘일신의 이유’를 들어 직무를 멈췄다.
그에 따라 당분간 남은 황자들이 돌아가며 자리를 대신하도록 한다는 말에 귀족들이 또 한 번 술렁였다.
이미 독립하여 나간 황자들까지 죄다 궁으로 불러 모으는 황제의 행보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개중 눈치가 빠른 이들은 머지않은 미래에 3황자가 ‘잊힐’ 거라는 것도, 제국에 또 다른 ‘경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알아차린 듯했다.
“그나저나 스카뎀 가문의 영애는요?”
“그러고 보니 그녀의 행방이…… “
리처드와 함께 제국 황실을 뒤집어 놓았던 에밀리 스카뎀은 이미 궁을 빠져나온 지 오래였다.
“약속을 진짜 지킬 줄은 몰랐는데요.”
말끔하게 회복된 얼굴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며 코니움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곁을 지키던 페른이 그녀에게 거듭 당부했다.
“클라이브 님께 말조심하거라. 그 어떤 말도 함부로 꺼내서는 안 돼.”
제 얼굴을 되찾은 코니움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 알렉세이처럼 어리석지 않다고요. 스승님의 모든 것을 전수받기 전까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거예요.”
혹여라도 제가 꿈을 꾸는 것은 아닌지 연신 얼굴을 만지작대던 그녀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못돼 처먹은 계집에게 받은 치욕을 돌려주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죠.”
방심한 틈을 타 날린 공격에 당하지만 않았더라도 도로테아 와 손을 잡을 일은 없었을 텐데.
분해하는 코니움의 얼굴을 바라본 페른이 그녀를 짤막하게 나무랐다.
“내 가르침이 부족했구나, 코니.”
“…….”
“세상에는 절대 건드려선 안 되는 존재들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보통 그런 존재들은 가만히 놔두면 나에게 손해는 없기 마련이지.”
“…….”
페른은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코니움을 보며 쓴웃음과 함께 입을 닫았다.
약속된 장소에 나와 있는 클라이브는 ‘정령’이 든 수정구를 손에 쥔 채 불편한 심기를 있는 대로 드러냈다.
“알렉세이는 도대체 왜 3황자의 치기 어린 행동에 불을 지폈단 말이냐? 분명 지금의 황태자와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 않았어!”
그토록 아끼던 제자를 잃은 스승의 얼굴이라기에는 애달픔은커녕 아쉬움 한 점 없어 보였다.
코니움은 그런 스승에게 가까이 다가가 미리 맞춰 둔 답을 건넸다.
“알렉 딴에는 3황자를 끌어들여 황태자를 치는 척하고, 그를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 주며 가까워질 생각이었나 봐요. 예상외로 중간에 7황자가 끼어들면서 황태자가 무너진 데다, 알렉세이 본인도 주술에 실패하는 통에…….”
“덜떨어진 놈 같으니라고. 기껏 기회를 주었건만 하라는 일은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엉뚱한 일만 벌였구나.”
페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제국에 더 머무르는 것은 위험할 듯싶습니다. 우선은 귀국한 뒤 상황을 살피시지요.”
클라이브가 말없이 혀를 찼다.
턱을 매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가 침묵을 깨고 코니움을 향해 명을 내렸다.
“그자, 제르망 자작이라던가. 그자에게 연락을 넣어라.”
“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 오는 코니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준 클라이브가 미소 지었다.
“기껏 뿌려 놓은 돈이 아깝지도 않으냐. 갈 때 가더라도 계획을 망치는 데 일조한 맹랑한 아이에게, 제자가 주지 못한 선물은 마저 주어야지.”
설령 손해를 보고 자리를 떠나게 되어도, 마지막으로 이 제국을 한 번 휘저어야 들인 노력과 시간이 아깝지 않을 터이니.
* * *
“약이 너무 쓰구나.”
“그래도 드셔야 해요. 저와 함께 오래 사시겠다면서요.”
“그래, 그랬지.”
후작 부인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도로테아의 성화에 못 이겨 약을 다시금 입으로 가져다 댔다.
그녀의 곁에 놓인 슈가볼(각설탕을 담는 그릇)에는 정교한 무늬가 새겨진 알록달록한 색깔의 각설탕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손을 뻗어 초록색 설탕 덩어리를 입에 넣는 도로테아를 본 데인이 결국 한마디 했다.
“네가 쓴 약을 마시는 것도 아닌데, 그걸 먹으면 어떻게 해?”
오도독 오도독 입안에서 달콤한 설탕 덩어리를 굴리던 도로테아는 못 들은 척, 다 비워 낸 약그릇을 확인하고야 설탕 하나를 후작 부인의 입에 물려 주었다.
요즘 부쩍 제 할머니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키는 도로테아는 모처럼 평화롭고 잔잔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사교 모임은커녕, 친구들을 초대하는 일도 없이 저택에 틀어박혀 매일같이 할머니와 하하 호호 하는 일이하루 일과의 전부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상처가 될 만하긴 하지.’
설마 구애하던 남자가 엉뚱한 마음을 품고 접근했을 줄 알았겠냐.
사촌을 바라보는 데인의 눈에 안쓰러움이 서렸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고를 치는 것이 좋다는 건 아니지만…….’
기가 죽어 저택 안에만 머무르는 도로테아를 보는 마음도 영 편한 것은 아니었다.
결국 그는 진지하게 고민을 한 끝에 믿음직스러운 형, 에드윈을 찾아 상의했다.
“내가 보기엔 말이야 형, 걔가 그 알렉세이인가 하는 약골을 많이 좋아했던 것 같아.”
“그래?”
눈치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데인의 진지한 고민에, 에드윈은 진실을 말해 주는 대신 그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어차피 말해 준다고 한들, 스스로가 보고 느낀 것만을 진실이라고 여기는 데인이 그의 말을 믿을 리도 없었다.
“솔직히 그놈, 좋아하진 않았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 나서 테아가 저택에 틀어박혀 있는 걸 보니까 마음이 좀 짠하더라고.”
“…….”
틀어박혀 있어야지.
제아무리 황제가 도로테아에게 관대하다 하더라도, 황실의 체면에 금이 간 상황에서 그녀가 사교 활동을 하며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할 리 없었다.
괜스레 트집이 잡히는 것보다야 차라리 비련의 여주인공 역할을 하는 것이 도로테아에게는 훨씬 좋은 일이니까.
“그, 친구를 좀 초대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발레리 영애 말이야? 아니면 메릴린 영애?”
“두 사람 다 괜찮지. 누구든 간에 지금은 상처 입고 괴로워하는 테아를 잘 달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야.”
상처를 입긴 누가 상처를 입었다는 건가.
에드윈은 매일 같이 잘 먹고 잘 놀고 있는 도로테아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데인이 새삼스럽게 신기했다.
“내 눈에는 괴로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형이 몰라서 그래. 지금 걔는 말이야, 뭐랄까. 모든 일에 의욕을 잃어버리고 하루 종일 빈둥빈둥 먹고 놀기만 한다니까.”
“그냥 그렇게 빈둥거리는 걸 즐거워하는 게 아니고?”
에드윈이 아는 도로테아는 애초에 엄청 성실하거나 의욕이 넘치는 인물은 아니었다.
근래 열심히 움직인 것도, 누군가가 본인이 그어 놓은 선 안에 발을 들여놓으려고 하는 것도 모자라 해하려 했기에 그리한 것이지.
다 오늘날의 평화를 누리고자 숨 가쁘게 이런저런 일들을 하고 다녔던 것인데…….
“형은 진짜 걔를 모르는구나.”
“…….”
“이제 좀 알 때도 됐는데. 사람이 어느 정도 눈치가 있어야 하는데 말이야.”
에드윈은 하나뿐인 남동생이 저를 몹시 안쓰럽게 바라보며 혀를 차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제 시간을 들여 저 착각을 고쳐 주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좋아, 적당한 핑계를 찾아서 두 사람에게 도로테아와 어울려 달라고 부탁해 봐야겠다.”
“그래, 힘내. 테아를 생각하는 건 너뿐인 것 같다.”
“그러니까. 나도 형처럼 테아에게 관심 한 점 주지 않고 냉정하게 굴고 싶은데, 내 따뜻한 마음이 그렇게 두지를 않네.”
그냥 연무장으로 불러서 대련을 빙자해 몇 대만 좀 팰까.
늘 이성적이고 차분하며 동생을 몹시 아껴 왔던 에드윈의 마음속에 몹쓸 충동이 일었지만, 늘 어른스러웠던 그는 훌륭하게도 충동을 이겨 냈다.
“어차피 테아가 내 몫까지 쟬 두들겨 패 주겠지.”
그가 나설 필요도 없을 만큼.
* * *
데인이 보낸 서신을 받은 발레리는 곧바로 긍정적인 답변을 보냈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더욱 반가운 소식까지 함께 전해 주었다.
“발레리가 메릴린과 함께?”
“워낙 뒤숭숭한 일이 있었으니까. 사교 모임에 나가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해서 저택에 틀어박혀 있기에도 마음이 불편했나 보지.”
“흐음.”
데인은 알 수 없는 콧소리를 내며 턱을 괸 채 밖을 내다보는 도로테아를 타박했다.
“그러게 너도 너무 그 알렉세이 그놈한테만 신경 쓰지 말라고 했잖아. 보석 몇 개 쥐어 줬다고 좋아하기는.”
“그 보석 다 비싼 거야.”
“아무리 비싼 보석이라고 해 봤자 친구에 비하겠냐. 평생을 가도 그런 친구들은 사귀기가 어려워.”
“내 친구들에 대해 잘 아나 봐?”
“그렇다기보다 옆에서 본 게 있으니까.”
메릴린 영애처럼 용감하고, 친구를 위해 마음을 쓰고, 진정한 귀족으로서의 기품이 흘러넘치는 우아한 인물이 어디 많은 줄 아냐.
“아무튼 네가 남자에 빠져 있는 사이 두 사람은 소외된 기분이 들었을 거 아니야. 그러니 너만 빼고서 서로의 집을 오가며 지내는 거고.”
“흐응, 그렇구나아.”
아무래도 좋다는 듯 대답하는 도로테아의 옆에서 간식을 챙겨 주던 제인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고는 존경해 마지않는 아가씨를 변호하기 위해 데인을 타박하기 시작했다.
“우리 아가씨는 말이에요, 그분께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고 허우적대신 게 아니에요!”
“읏.”
“그저 보석을 색깔별로 맞추려고 적당히 만나 준 거지! 애초에 받을 것만 받고 나면 연을 끊으시려 했다고요.”
“…….”
맹렬한 제인의 기세에 잠시 움츠렸던 데인이 그녀의 말을 곱씹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상심했다기에는 눈물 한 방울 비치지 않는 도로테아의 얼굴을 보면 설득력 있는 주장이긴 했다.
“그래도 그건 좀.”
원하는 보석만 받아 낸 뒤 연을 끊는 게 더 악질 아닌가.
“최근 저택에 머물러 계셨던 건 그냥 요즘 들어 부쩍 식욕이 돌아 그러신 거죠. 요즘 아가씨께서 얼마나 잘 드시는데요.”
“그…….”
“상심한 사람이라면 결코 이렇게 먹고 자는 데에 심혈을 기울이지는 않으실 걸요! 매일 아침마다 갓 만든 정성스런 요리를 음미하는 데 아가씨만큼 진심이신 분이 어디 있다고요. 이런 아가씨의 마음을 모욕하시다니…….”
“아니, 얘는 원래부터가 먹는 일에 진심이던 애니까.”
반론을 꺼내던 데인이 제인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피해 부리나케 자리를 떴다.
재빠르게 문 밖으로 사라지는 그를 보던 제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도로테아는, 간식이 가득 든 트레이 위로 손을 뻗어 가장 큼지막한 스콘 하나를 손에 쥐고서 입을 열었다.
“제인, 외출복을 준비해 줘.”
“데인 도련님 말에 신경 쓰실 거 없어요, 아가씨. 조금 더 쉬셔도 괜찮은걸요.”
“아냐, 아까 윌리엄에게 서신이 왔었어.”
“2황자 전하께서요?”
고개를 끄덕인 도로테아가 황실의 인장이 박혀 있는 고급스런 종이를 내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재밌는 일에 나를 초대해 주겠다는데 기꺼이 가야지.”
유려한 필기체를 내려다보는 도로테아의 눈이 반짝거렸다.
고소한 버터 냄새가 나는 스콘을 한 입 크게 베어 문 그녀가 우물거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일찍이 입궁한 후작은 어쩐 일인지 저택의 경계에 사병들을 배치해 둔 상태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도로테아가 그들을 뚫고 가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었지만.
* * *
미끄러지듯 달리는 마차의 안에, 언제나 그러하듯 가만히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프리드가 입을 열었다.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에이든 경을 부르시지요.”
“숙부께서는 다른 해야 할 일이 있어. 지금쯤 황도로 들어오고 있을 황자들을 ‘무사히’ 데려와야지.”
기껏 벌여 놓은 판인데 말이 모두 죽으면 무슨 소용인가.
애초에 멀쩡한 황자가 있었더라면 그런 물건을 황태자로 세우지는 않았겠거니 싶기도 하지만.
“혹시 누가 알아? 갈고닦으면 괜찮은 보석이 될 만한 원석이 있을지.”
변방으로 내쫓긴 황자들이라면 대개 별 볼 일 없는 외가를 가졌다거나 하는 모종의 이유로 황궁에 남아 있을 수 없게 된 이들일 터.
지금의 황후가 명분과 세력을 모두 잃은 상황에서 기회를 잡을 수 있을 만한 인물이 새로이 나타날지도 몰랐다.
“뛰어난 황자가 있었다면 애초에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나지막한 프리드의 말에 도로테아의 입가에 웃음이 서렸다.
“그렇기에 내가 지금 황궁에 가는 거잖니.”
몇 걸음 가지 않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약한 몸을 가졌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윌리엄이 가진 재질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눈치가 기민한 데다, 문제가 생겼을 때 갈등을 중재하고 해결책을 이끌어 내는 능력도 그런대로 쓸 만했다.
“아가씨를 이용하고자 하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동아줄을 잡고자 혈안이 된 이들이 아직 황궁에 머무르고 있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자칫하면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경고를 받으면서도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던 도로테아가 프리드를 보고 키득거렸다.
“말이 많아졌네, 우리 그림자께서.”
“…….”
“한결 가벼워진 어깨 덕분이려나?”
프리드의 눈이 자연스레 그의 어깨로 향했다.
무겁다느니, 가볍다느니 말을 들어도 잘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날 이후 누님은 더 이상 꿈에 나타나 울면서 동생을 찾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것이 어머니였든, 아니면 누님이었든 간에.
증오와 괴로움의 고리에서 해방될 수 있다면, 그가 도로테아를 섬길 이유로는 충분했다.
끼익.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 마차가 멈춰 섰다.
문을 열자, 따사로운 햇살 아래 눈부시게 번쩍이는 궁의 전경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