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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120)화 (120/242)
  • 혼술사 도로테아 120화

    어수선해진 연회에서, 로헨 왕국의 사절단은 어디론가 사라진 알렉세이를 제외하고 모두 궁에 연금되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황태자를 향한 저격에 힘을 보탰다는 정황이 드러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와중에 이 일의 중심에 있는 알렉세이의 실종은 황제를 더욱 분노케 만들었다.

    “이 모든 것들이 저들이 만들어 낸 흉계렸다?”

    황자들 사이를 이간질하여 3황자가 직접 친형을 고발하도록 도운 것은 물론이요, 제국의 손꼽히는 인재를 데려갈 요량으로 미남계를 쓰기까지.

    노골적으로 제국을 향해 야욕을 드러낸 저들의 야료로 입게 된 타격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가엾게도 저들의 수작에 놀아난 꼴이 되어 버린 하이클레어 후작가의 촉망받는 어린 천재 정령사, 도로테아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오늘따라 창백한 얼굴이 그녀를 더욱 안쓰럽게 만들었다.

    “테아야,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깝구나.”

    사촌의 부축에 기대어 선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폐하의 허물이 아니지요. 소녀가 어리석어 상대를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접근한 이들의 음흉한 계략에 넘어가 혼란스러워하는 어린 영애의 모습에 다들 안쓰러워 어쩔 줄 몰랐다.

    “저는 그저 할머님의 건강이 염려될 뿐입니다. 모처럼의 연회를 즐기고자 하는 저를 위해, 편찮으신 몸으로도 직접 이곳까지 오셨음에도 더욱 아프게 해 드린 것만 같아서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 도로테아가 이내 조심스럽게 청했다.

    “할머님의 건강도 걱정스러운 데다, 앞선 일로 소녀의 마음이 몹시 번잡합니다. 부디 저희 가문의 사람들이 먼저 귀가할 수 있도록 간청드립니다.”

    미약하게 떨리는 목소리를 듣던 황제는 좀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다이아몬드 반지가 사라졌음을 확인했다.

    그의 얼굴에 미미하게나마 만족스런 기색이 스쳤다.

    황제는 도로테아의 간청에 비교적 너그러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심려가 크겠지만 너무 걱정 말거라. 감히 너를 욕보일 뻔하고 우리를 기만한 이들 모두 그에 걸맞은 벌을 받게 될 터이니.”

    “폐하의 다정하신 마음 씀씀이에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고개를 조아린 도로테아가 몸을 돌렸다.

    알렉세이는 그녀를 욕보이기는커녕 진귀한 보석과 재물들을 가져다 바치고, 달콤한 말과 행동들을 건넸으며,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녀를 대신해 희생해 주었다.

    그러니 오래전의 빚은 충분히 갚은 셈이었다.

    *   *   *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만.”

    돌아가는 길.

    마차 안에서 후작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3황자 뒤에 로헨이 있었다는 건 쉬이 믿기가 힘들구나.”

    “애초에 3황자를 들쑤신 것이 로헨 측이었더라면 클라이브 경이 오늘 자리에 없었을 리 없지요.”

    후작의 말에 장남인 펠릭스가 가볍게 대꾸했다.

    이미 두 사람 다 오늘의 소란이 정확히 어떤 과정을 거쳐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으나, ‘누가’ 설계한 것인지는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그 아이는 지나치게 영민해. 어린 시절부터 그랬지.”

    “…….”

    “황태자가 실각한다고 하더라도 2황자가 자리를 메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황제가 지금의 황태자를 내세운 것은 그가 성군의 자질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야.”

    2황자의 건강이 회복되기 힘든 상태임을 알기 때문이지.

    몸이 약한 황제는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유지하기 쉽지 않고, 황제의 이른 죽음은 중앙 정치에 부담을 줄 수밖에 없다.

    겨우 치세가 안정된 지금, 불안정한 후계자를 세울 수는 없었다.

    “게다가 황후 측도 가만히 있지 않겠지요.”

    다만 지금의 황태자가 실각하는 것이 하이클레어 후작가 입장에서는 그리 나쁜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가 후작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것도 모두 군비 횡령을 먼저 눈치채고서 고발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후작은 ‘제국의 앞날’을 생각해 황태자의 작은 오점을 덮고 넘어갔지만, 황태자에게 그 작은 ‘오점’을 알고 있는 후작은 치워 버려야 할 존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으리라.

    “가만히 당해 줄 생각은 없었다만, 이리되고 나니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구나.”

    그때 모든 것을 밝히고 썩은 물을 파내어 버려야 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어떤 선택을 했더라도 후회는 남았을 겁니다. 그때에는 일을 덮는 것이 저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습니다.”

    오랜 전쟁으로 병사들의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다.

    황실이 흔들린다는 것은 제국의 구심점이자 근본이 흔들리는 것.

    황태자의 잘못을 드러내는 것보다, 그를 더욱 단단하게 망치질하여 두 번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끔 만드는 것이 모두를 위하는 일이라 여겼다.

    “그렇기에 덮었건만…….”

    마차 안에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버지와 아들은 각자의 생각에 잠긴 채 먼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자가 탄 마차의 뒤를 바짝 따르는 또 다른 마차 안에는 도로테아가 있었다.

    그녀는 할머니의 무릎에 머리를 기댄 채로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도로테아의 앞을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는 후작 부인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났다.

    “자는 모습이 꼭 천사 같구나.”

    “그러게 말이에요. 너무 예뻐서 다른 이들에게 섣불리 보이고 싶지 않을 만큼 아까워요. 마음 같아서는 조금 느리게 성장했으면 좋으련만.”

    언젠가는 이 아이도 날개 달린 새처럼 품에서 멀리 날아가 버리겠지요.

    숙모인 다이애나가 잔잔한 미소를 띤 채 후작 부인의 말에 맞장구쳤다.

    남자아이만 둘을 길러 낸 그녀는 진심으로 도로테아를 몹시 아꼈다.

    손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후작 부인이 작게 기침하자, 다이애나가 재빠르게 들고 있던 숄을 노부인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역시 어머님께서 연회에 참석하시는 건 무리였던 것 같아요.”

    “늙은이가 살면 얼마나 살겠니. 건강이 염려된다며 하고픈 것들을 참기에는 남은 시간이 너무 빠듯하구나.”

    “어머님.”

    “하다못해 이 아이가 좋은 인연을 만날 때까지만이라도 버텨 주면 좋으련만.”

    조곤조곤한 말에 다이애나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후작 부인의 손은 연신 손녀의 보드라운 뺨을 매만지고 있었다.

    “어느 어리석은 것들은 이 아이를 들여 내 명이 짧아졌다는 소리를 한다지만, 참으로 바보 같은 이야기가 아니겠니.”

    애정이 담뿍 담긴 눈 주변으로 자글자글한 주름이 그녀가 살아온 세월을 말해 주었다.

    “이 아이가 있어 오늘의 내가 얼마나 기쁘고, 내일의 내가 얼마나 행복할지가 더 중요한 일이지.”

    얼마 남지 않은 생을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찬 날들로 채울 수 있다면, 도로테아 없이 지내야 할 수많은 날들이야 기꺼이 버릴 수 있는 것인데 말이야.

    한가로운 잠결에 저를 향한 다정한 말을 들은 도로테아가 살짝 눈을 떴다가 이내 다시 감았다.

    뒤숭숭하게 끝난 연회였지만, 오로지 하이클레어 후작가의 사람들만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귀가했다.

    *   *   *

    “폐하, 리처드는 지금 일전의 일로 앙심을 품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얼굴이 망가진 영애 하나를 데려와 수많은 이들 앞에서 저를 망가뜨리겠다는 심산이겠지요.”

    독이 서린 황태자의 눈이 저를 훑었음에도 형님을 보며 코웃음을 치는 3황자의 얼굴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후우…….’

    드러난 정황만 보더라도 상황은 명백했다.

    벤자민 모어가 건넨 자료들과, 에밀리 스카뎀의 이름이 나온 순간 황태자가 보였던 반응까지.

    노련한 황제는 이미 상황의 처음과 끝을 마치 그림을 그리듯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어리석은 것.’

    인간으로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것이야 군주로서 필요하다면 해야 하는 것이니 억지로 납득한다손 치더라도, 깔끔하게 일을 처리하지 못해 만인이 보는 앞에서 저의 모자람을 드러냈다.

    황태자를 한심하다는 듯 노려보던 눈이 이내 3황자에게로 향했다.

    “그래, 제국의 황자씩이나 돼서 타국의 도움을 받아 그리하니 속이 시원하더냐?”

    말투는 나직했으나 3황자를 보는 눈에는 살기가 그득했다.

    그에 리처드는 기가 죽기는커녕 더욱 악에 받친 채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 댔다.

    “어차피 이리하나 저리하나 형님의 손에 죽을 것이 아닙니까! 그럼 적어도 위선의 가면을 쓴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제국의 귀족들이 후에 어쩐 이를 군주로 모셔야 되는지 정도는 알아야지요!”

    “…….”

    그 모습을 그저 말없이 바라보던 황제는 고개를 돌려, 언제나 제 새끼를 감싸고돌았던 황후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황후께서는 이 광경을 보시고 감상이 어떠하시오?”

    서로 죽이고자 악다구니를 쓰는 아들들을 바라보는 황후의 얼굴에는 참담함이 고스란히 담겼다.

    미우나 고우나 제 새끼들이라 여기니 마음이 아팠고,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낸 아들들의 만행에 치가 떨리기도 했다.

    불안한 분위기를 읽어 낸 황태자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일개 귀족 영애가 꺼낸 일입니다. 그것도 이미 끝난 사건을 끌어온 것이 아닙니까. 로헨 사절단의 만행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항의하고, 증언한 이들을 모두 정리하지요.”

    “3황자는 어찌할 생각이냐?”

    “제국의 황자라는 입장을 잊고 사사로운 원한으로 타국과 결탁했습니다. 국가의 안위를 위험케 했으니 그 대가를 치러야겠지요.”

    “개새끼가!”

    양팔을 제압당한 상태에서 버둥거리던 리처드가 고개를 내밀어 황태자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분에 못 이긴 황태자가 호위의 검을 뽑아 들기가 무섭게 황제가 손을 들어 그를 저지했다.

    “그만. 됐다. 조금이나마 나을 줄 알고 택한 놈이 아주 똑같이 구는구나.”

    실망이 가득 어린 목소리에 황태자가 들고 있던 검을 저도 모르게 놓쳤다.

    어느새 냉정을 되찾은 황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벤자민 모어가 스카뎀 가문에서 일을 한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군 내부 사정을 상세히 아는 것은 불가능할 터. 스카뎀 백작은 예산을 담당했지 종군하며 군을 통솔한 게 아니야.”

    그렇다고 해서 로헨 왕국에서 군 내부 정보, 그것도 기밀을 취급할 수 있었을 리 없었다.

    “로헨 외에 너를 도운 것이 누구냐.”

    “그건…….”

    “폐하, 7황자 들었사옵니다.”

    황제의 추궁에 리처드가 입을 열려던 찰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저벅저벅 걸어 들어오는 걸음걸이는 노련한 군사처럼 일사불란하고 정연했다.

    궁에서 살아온 귀족과는 다르게 차갑고 냉랭한, 살기 어린 잿빛 눈동자가 샹들리에의 화려한 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회랑을 가로질러 온 루크가 굶주린 맹수의 눈을 하고 황태자 앞에 섰다.

    출신이 천하여 어린 시절부터 손에 피를 묻혀 생을 연명한 천박한 황자.

    저와 같은 황실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조차 수치스럽게 생각했던 동생의 살기에 눌린 황태자의 낯빛이 창백했다.

    “고발을 도운 것은 로헨이 아니라 접니다.”

    물기 한 점 없이 건조한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오랜 시간을 인내하며 먹잇감을 천천히 죄고 있던 그로서는 조금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중간에 로헨이 끼어들지만 않았더라면, 당초의 계획대로 그는 황태자에게 숨통이 트일 만한 아주 조그마한 빈틈도 주지 않고 서서히 굶겨 죽였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계획을 앞당기는 통에 일이 지나치게 소란스러워지기는 했으나, 단단히 체면을 구긴 꼴을 직접 보니 그것도 그런대로 괜찮았다.

    “루크.”

    황제는 제 발로 걸어 들어와 자백하는 아들을 보며 탄식했고, 황후는 경멸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7황자의 눈이 황후의 곁에 선 이를 곁눈질하며 말했다.

    “기욤 후작께서는 일신의 사정으로 연회에도 불참하시더니, 형님의 일이 터지기가 무섭게 득달같이 달려오셨군요.”

    “7황자 전하, 정녕 전하께서 이 모든 일들의 배후란 말씀이십니까?”

    무거운 목소리로 묻는 황후의 오라비를 향해 루크가 던진 것은 두꺼운 서류 더미였다.

    “수십의 기마병이 우리 군을 유린하던 날, 제가 공께 드렸던 서신을 기억하십니까?”

    “…….”

    “중앙으로 보낸 충원 요청은 모종의 이유로 모조리 반려되고, 희망이랍시고 내려온 지원 물품은 써먹지도 못하도록 녹이 슬었으며, 온다던 군마는 소식이 없더군요.”

    성이 함락되지 않게끔 지켜 내는 사이 죽어 간 병사의 숫자만 하더라도 수백, 수천이 넘건만.

    이곳에서는 제 이득을 불리고자, 또는 제 살을 깎아 먹고 싶지 않아 남의 살을 깎아 제 것처럼 쓰는 이들이 아옹다옹 땅 가르기 놀이를 하기에 바빴다.

    “그때 공께서는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를 대며 기마병 몇 기로 알량한 죄책감을 덜어 내셨습니다.”

    수없이 죽어 나간 병사들의 목숨에 기대어 얻은 기마병이 15기.

    “그런데 아직 그 누구도 죽지 않은 이 자리에 공께서는 꼬박 반나절 말을 달려 직접 오신 모양입니다.”

    “황자 전하.”

    기욤 후작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루크의 담담한 목소리에는 슬픔이나 분노와 같은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 깊숙한 곳에 박혀 있던 감정은 오랜 시간 동안 풍화되고 깎여 나갔다.

    황량한 감정 안에 넣을 것을 찾지 못한 황자는 텅 빈 눈으로 제 아버지이자, 제국의 군주인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폐하.”

    “…….”

    “저는 스카뎀 백작에게 약속했었습니다. 그가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오만하게도.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면서 당연히 일이 순리대로 되리라 여겼던 그해에 스카뎀 가문이 무너졌다. 루크는 변경에서도 가장 격렬한 분쟁이 일어나는 전장으로 내몰렸다.

    그 치열한 전장에서 아직 어리던 황자의 치기는 점차 독기가 되었다.

    버틴 시간만큼이나 얻은 것은 곁에 있는 이들의 죽음이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죽음이 제 앞에서, 옆에서, 때로는 뒤에서 일어났다.

    매년, 매월, 때로는 매일…… 죽은 병사들을 대신할 새로운 병사들이 다시 끌려왔다.

    “죽은 자들의 목숨값으로 주어져야 할 금화조차도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개죽음을 당한 이들 모두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가족이었다.

    “군비를 횡령해 귀족들의 주머니를 채웠던 황태자의 죄를 고한 것이 제국을 팔아먹은 짓이라 하신다면, 수도 없이 많은 병사의 목숨을 앗아 간 황태자의 죄는 뭐라고 해야 할지요.”

    “네가 정말 죽으려 작정을 했구나!”

    제가 처한 상황을 읽어 내지 못하고 분기 어린 목소리를 내는 어리석음에 황제가 직접 황태자를 밀어냈다.

    단단한 손에 밀려난 아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아버지를 바라봤다.

    굳은 얼굴을 한 황제는 오롯이 루크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버티고 선 이를 설득했다.

    “황태자의 아래에 엮인 이들이 너무 많다. 모두 처벌할 수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하여 당장 황태자의 자리를 비울 수도 없어.”

    “폐하께는 아들이 많습니다. 지금의 황태자가 내려오면 다른 이가 그 자리를 메우면 됩니다.”

    죽어 간 병사들의 자리를 새로운 병사가 채웠듯이.

    그 말뜻을 알아들은 황태자의 뺨이 파르르 떨렸다.

    황제가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제국의 후계는 그리 쉽게 결정되지 않는다. 후계가 불안정하면 변경의 병사들은 더 큰 곤욕을 치르게 되어 있어.”

    “이미 곤욕이라면 치렀습니다. 적절한 자격을 갖춘 자가 자리에 앉기까지 위태로운 변경에는 제가 있을 겁니다.”

    루크의 말에 황제가 멈칫하더니 입을 열었다.

    “황태자위를 노리려던 것이 아니었더냐?”

    “당연히 저놈은 그럴 생각으로 저를 이리도 폄하하는 것입니다! 폐하, 저 뻔뻔한 것의 말을……!”

    “닥치거라.”

    황제의 목소리가 한층 단호하게 황태자의 말을 잘라 냈다.

    루크는 여전히 예리하게 날이 선 눈을 하고 제 아버지를 향해 말을 되풀이했다.

    “분쟁이 생긴다면 그곳에 제가 있겠습니다. 지키겠습니다. 그러니 자격이 되는 이를 군주로 세우십시오.”

    몇 년이 걸리더라도. 비록 위태롭다 하더라도.

    당장의 흔들림을 걱정하여 썩은 뿌리를 그대로 내버려 두는 짓만큼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기에.

    황제가 조용히 고개를 들어 깊은 한숨을 내쉬자 황후가 눈을 질끈 감았다.

    득달같이 달려온 기욤 후작조차도 앞에 놓인, 참담한 전장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황자의 일지(日誌) 앞에서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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