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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117)화 (117/242)
  • 혼술사 도로테아 117화

    잠시 시야에서 사라졌던 도로테아의 손에 커다란 붉은 다이아몬드 반지가 끼워져 있는 것을 본 사람들의 표정은 다채로웠다.

    반지의 의미를,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몇몇 아가씨들은 그토록 귀한 물건을 받고도 여전히 ‘왼쪽’이 아닌 ‘오른쪽’에 반지를 낀 도로테아를 향해 혀를 내둘렀다.

    보통이 아닌 아가씨인 줄은 알았지만, 그 정도의 예물을 받고도 여전히 상대의 마음을 받아 주지 않다니.

    어쩌면 저 젊은 정령사는 그녀에게 농락당하는 것뿐일지도 몰랐다.

    ‘또 모르지.’

    몇몇 아가씨들이 눈을 가늘게 뜨고서 알렉세이를 훑었다.

    저런 보석을 선물할 수 있는 재력을 가진 데다, 그를 아끼는 스승은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정령사로 수많은 이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로헨 왕국에서는 그를 국빈과 같은 급으로 대우하고 있으며, 이곳 제국에서도 황제가 직접 그를 접견할 정도로 훌륭한 입지를 갖고 있지 않은가.

    만일 도로테아 하이클레어가 그와의 관계를 이 이상으로 발전시킬 생각이 없는 거라면……

    그건 어쩌면 누군가에게 또 다른 기회가 되지 않을까.

    탐욕스럽게 입맛을 다시는 이들을 뒤로한 채 도로테아는 황제에게 다가가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테아.”

    “오늘따라 한층 더 영명해 보이십니다, 폐하.”

    복잡한 빛을 띤 황제의 눈이 도로테아의 손가락에 끼워진 다이아몬드 반지에 머물렀다.

    도로테아와 같이 영민한 인물이 손가락의 의미를 모를 리 만무하니, ‘로헨 왕국’으로 갈 일은 없다며 선언한 것과 같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제껏 그녀에게 따라붙는 관심과 시선들을 모르쇠하고 알렉세이와 어울렸단 말인가?’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고 무릎을 굽혀 우아하게 건네는 인사는 흠잡을 곳 하나 없었다.

    곁에 있던 황후가 그녀를 보고 미세하게 눈을 찡그렸지만, 그뿐이었다.

    황태자조차 몸을 삼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녀가 도로테아에게 날을 세우는 것은 자신의 입지만 좁히는 꼴이 될 테니까.

    “그럼 소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할아버님과 첫 춤을 추겠다고 약속을 드렸거든요.”

    기다리고 있던 후작의 손을 잡은 도로테아가 연회장 중앙으로 향했다.

    시작은 경쾌한 왈츠였다.

    “꽤 귀한 물건을 받았구나.”

    “그만큼 제게 바라는 것이 크다는 뜻인가 봐요.”

    고개를 끄덕인 후작이 담담하게 물었다.

    “그렇겠지. 너는 어찌할 생각이냐? 선물을 받았으니 보답을 할 생각이야?”

    함께 지내 온 시간이 무르익으면서, 그도 이제는 이 알 수 없는 손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도로테아는 언제나 주고받는 것에 계산이 확실한 편이었다.

    이유 없는 선물은 받지 아니하고, 상대가 바라는 것이 제가 이루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어도 굳이 받지 않았다.

    제 사람들에게는 격이 없으나, 선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결코 곁을 내주는 법이 없는 서늘한 면은 오히려 후작을 안심시켰다.

    적어도 그의 손녀가 어중이떠중이들의 수작에 넘어갈 리 없을 만큼 강단을 갖추고 있다는 뜻일 터이니.

    “할아버지.”

    “음?”

    손녀의 손을 잡고서 능숙하게 턴과 스텝을 밟아 나가던 후작이 답했다.

    지긋한 나이와는 다르게 그의 몸놀림은 그 어느 신사들보다도 절도 있었고, 제법 빠른 박자와 복잡한 스텝에서도 여느 젊은이 못지않은 여유를 보였다.

    그런 그의 리드를 따라 가볍게 몸을 움직이면서 도로테아가 물었다.

    “애초에 제게 바라는 것이 있어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접근한 이에게 신의를 지키지 않는다 하여 문제가 될까요?”

    “글쎄다.”

    뱅그르르 돌아 다시 후작의 손을 맞잡은 도로테아의 시선이 슬쩍 연회장 구석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오랜만의 외출에 지치기라도 한 듯 막간의 휴식을 취하고 있는 후작 부인이 있었다.

    드물게 의견을 물어 오는 손녀의 태도가 뜻밖이라고 여기면서도 후작은 제법 진지하게 답을 고민했다.

    “애초에 상대의 목적이 불순했다면 네가 신의를 지킬 필요는 없겠지.”

    “할아버지께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저를 우선으로 생각하라 하셨지만, 설령 제 평판에 손해를 입게 된다 하더라도 상대의 뜻을 꺾어 주고 싶어요.”

    몹시도 강경한 말이었다.

    도로테아가 먼저 나서서 상대를 ‘벌하겠다.’라고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늘 수동적으로 누군가의 공격을 받아치거나, 차선으로 상대를 역이용하는 것이 전부였는데.

    뜻밖의 말에 잠시 뜸을 들이던 후작이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거라. 모든 건 이 할아비가 다 막아 줄 터이니.”

    간단한 답이었다.

    처음 황실과 엮일 때만 해도 경계하고 걱정을 늘어놓던 후작이 담담한 얼굴로 답했다.

    “네가 하고픈 일이 있다면 해야겠지. 다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한 것이지, 사람들의 시선이나 가문의 명예 따위를 신경 쓰느라 하고픈 일에 앞서 주저할 필요는 없다.”

    “…….”

    “너는 가치 없는 일에 신경을 쏟아부을 만큼 어리석은 아이가 아니잖니. 네 행동이 그러하다면, 네가 옳다고 믿고 있는 일을 하는 거겠지.”

    그걸 나는 지지해 줄 생각이란다.

    오래전, 고집스레 외면했던 딸이 마지막으로 남긴 아이는 충분히 잘 성장해 주었다.

    태어난 순간조차 제대로 축복해 주지 못했건만, 아이가 하고자 하는 옳은 일조차 마다하게끔 할 수는 없었다.

    “펠릭스가 그러더구나. 네가 누군가를 향해 이를 드러낸다면, 너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서일 거라고.”

    “…….”

    “위험하다고 해도 듣지 않으니 어쩌겠니. 너도 하이클레어 후작 가문의 일원이라는 것을 이 할아비가 참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탓이지.”

    잔잔한 미소와 함께 손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준 그가 손을 놓고 부인을 향해 다가갔다.

    두 번째 춤을 약속했던 아버지, 벤이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   *   *

    “알렉.”

    도로테아의 낭랑한 목소리가 연회장을 가로질러 창백한 안색의 청년에게 닿았다.

    그토록 오랫동안 공을 들여 구애한 여인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는데도, 왠지 알렉세이는 다정한 미소 대신 묘한 얼굴로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언제나 그러하듯 함께 있는 두 사람에게로 여러 시선들이 따라붙었다.

    “세상에…….”

    “너무 긴장했나 봐요.”

    곳곳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개는 순진한 청년의 순애보를 귀엽게 여기거나, 더 나아가서는 조금 우습다고 여기는 이들.

    도로테아는 여전히 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는 알렉세이에게 보드라운 손을 내밀었다.

    “선약이 모두 끝났으니 약속대로 알렉과 춤을 추러 왔어요.”

    내밀어진 손을 보면서도 좀처럼 잡지 않고 주저하는 알렉을 본 도로테아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에게로 고개를 숙인 도로테아가 그에게만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충고했다.

    “당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내가 춤을 권하고 있잖아요. 지금 내 권유를 무시하거나 거절한다면 사람들이 몹시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까요?”

    그 말에 줄곧 말이 없던 알렉세이가 굳은 얼굴로 제게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

    마지못해 겹쳐진 그의 손은 마치 사람의 것이 아닌 것처럼 서늘하게 온기 한 점 없었다.

    춤을 추는 이들의 한가운데로 들어선 젊은 남녀가 천천히 음악에 맞춰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도로테아는 반쯤 넋을 놓은 얼굴을 하고서도 능숙하게 제 박자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 남자를 보며 싱긋 웃었다.

    맞잡은 손의 세기, 서로의 몸의 거리, 늘어진 옷자락을 피해 가볍게 움직이는 발까지.

    오랜 시간 몸에 익힌 듯 자연스러운 몸짓이었다.

    코니움의 테이블 매너처럼.

    춤을 신청할 때와 같이 은은한 미소를 띤 도로테아가 알렉세이를 향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선물 고마워요. 이제껏 받았던 것들 중에 가장 마음에 들어요.”

    가장 값이 많이 나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얼마나 정성을 들여 준비했을지, 다른 그 누구보다도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줄곧 딱딱한 태도를 보이던 알렉세이가 영혼 없이 그녀의 감사에 화답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영애의 기쁨이 곧 제 영광일 따름이지요.”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건조한 답변에도 도로테아는 그리 마음이 상한 기색이 아니었다.

    “알렉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진심으로 즐거웠답니다.”

    맞잡은 손을 바라보던 알렉세이가 뻣뻣한 고개를 돌려 도로테아와 눈을 맞췄다.

    도로테아는 그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금 생긋 웃었다.

    “알렉이 직접 제게 다가와 주어 정말 다행이에요.”

    진심을 듬뿍 담아 건넸음에도 알렉세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이렇게 제 앞에 먼저 나타나 주지 않았더라면 저는 결코 알렉을 찾아내지 못했을 테니까요.”

    “……저를, 찾아내다니요?”

    도로테아가 즐겁다는 듯 까르르 웃었다.

    그녀의 웃음소리에 옆에서 함께 춤을 추고 있던 커플들이 흘끗흘끗 바라봤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였다.

    웃음기가 채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도로테아가 말을 이어 나갔다.

    “설마 모른다 하시지는 않겠지요. 알렉과 저는 아주 오래전부터 인연이 있었다는 사실을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평온을 가장한 목소리의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긴장 탓인지 아니면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난 것인지, 스텝을 밟던 중에 알렉세이가 먼저 붙잡고 있던 손을 놓쳤다.

    도로테아는 그의 실수에도 관대하게 춤을 이어 나갔다.

    흥얼흥얼 노래의 박자에 맞춰 건넨 말에도 음이 달라붙었다.

    “우리 사이에 깊은 연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저 또한 알렉에게 흥미가 생겼답니다. 알렉이 제게 보여 준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좀 더 당신에 대해 알아보려 노력했고요.”

    권세 높은 가문의 금지옥엽으로 살아가며 가장 편리한 것은, 사회에서 금기시되는 정보라 하더라도 그녀가 원한다면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금지된 숭배와 그들의 상징에 대해서도.

    신전의 성기사들조차 멋대로 출입할 수 없는 하이클레어 후작가의 서재에는 국법으로 금지된 술법이 담긴 서적들이 버젓하게 꽂혀 있었다.

    “당신이 내게 선물한 보석은 이것까지 합해 모두 다섯 개.”

    각각의 보석들은 모두 오망성(pentagram)의 다섯 가지 요소를 상징한다.

    공기, 물, 불, 흙.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으로서 가지는 에테르(영혼).

    붉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끝으로 완성되는 오망성을 통해 그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은 아주 단순했다.

    도로테아가 생긋 웃었다.

    어느새 맞잡은 손은 식은땀으로 끈적했다.

    줄곧 그녀의 앞에서 견고하던 가면은 자신만만했던 그의 ‘주술’이 발동하지 않으면서 깨어졌다.

    “당신이 존경해 마지않는 클라이브 님께서는 지금쯤 육신을 벗어난 제 혼이 자신에게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계실 테지요?”

    이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인간의 혼 위에 정령의 기운을 덧씌워 또 다른 ‘정령’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그리고 그가 지목한 누군가를 정령사로 만들어 주기 위해서.

    “설마 아끼는 애제자의 주술이 해주(解呪)되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계실 테죠.”

    클라이브는 어쩌면 일부러 자신의 제자들을 서로 경쟁시켜 왔을지도 모른다.

    서로를 물어뜯으며 빠르게 성장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그러나 스승의 총애를 얻고자 치열한 경쟁을 이어 나가며 생길 문제는 간과했던 걸까.

    “아마 클라이브 님께서는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잘 모르셨던 것 같아요.”

    이전의 실패들을 자세히 보고하지 않았다는 뜻이겠지.

    뜻밖에도 그들이 자신의 실패를 감추고자 한 행위들이 도로테아의 ‘특출함’을 가려 준 덕분에, 클라이브는 그녀를 단순히 자질 있는 정령사 정도로 생각하게 된 셈일 것이고.

    “제가 어찌 알렉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이토록 어리석고 욕심 많은 불나방을.

    굳은 표정의 알렉세이와 거리를 좁힌 도로테아가 속삭였다.

    “사실 나는 알렉을 처음 본 순간부터 알아봤어요.”

    마주하고서 느꼈던 기시감은 그녀가 잊고 있었던 과거의 기억을 이끌어 냈다.

    도로테아가 알렉세이를 향해 상냥하게 물었다.

    “존경하는 스승님께서 알렉에게 가르쳐 주지 않던가요?”

    “……무엇을 말입니까?”

    “주술은 말이에요. 반드시 흔적을 남겨요. 왜냐하면 술법 그 자체에 쓰이는 것은 술사의 고유한 ‘혼력’이니까.”

    맞잡은 손에 순간 힘이 들어갔다.

    잠시 음악이 멈추는가 싶더니 이내 새로운 곡으로 바뀌었다.

    젊은 연인들을 위한 화려하고 유쾌한 곡이었다.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알렉세이를 제외한 이 연회장에 자리한 모든 이들이 웃음 짓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한참을 찾았어요, 알렉세이. 5년 전, 힘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내가 채 막아 내지 못했던, 할머님을 향한 살(煞)의 주인.”

    그녀가 이 몸에 들어오고 처음으로 분노하게끔 만든 술사이기도 했다.

    “그때에는 아직 내 육신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았기에.”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힘으로는 저택 밖에 떠도는 불온한 소문들을 ‘사실’로 만들려는, 악의로 가득한 주술을 깨트리는 것이 어려웠기에.

    “결국 할머님의 건강을 해칠 수밖에 없었죠.”

    중독과 저주를 받아 쓰러졌을 때에도, 고작 주술을 비틀어 노부인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으니까.

    “영애는 도대체…….”

    메마른 입술 사이로 무슨 말을 뱉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알렉세이를 향해, 도로테아는 그저 웃기만 했다.

    “이토록 제게 큰 선물을 안겨 주셨으니, 저 또한 그 성의에 맞는 보답을 해야겠지요.”

    음악이 끝이 났다.

    아쉬운 얼굴로 손을 떼는 남녀들 사이로 도로테아가 천천히 그의 손을 놓았다.

    “곧 재미난 공연을 볼 수 있을 거예요, 알렉.”

    내가 준비한 선물이 부디 당신 기대에 어긋나지 않아야 할 텐데.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도로테아가 사람들의 틈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알렉세이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때, 화기애애하던 연회장의 문이 열리고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고개를 내밀었다.

    “3, 3황자 전하!”

    양옆에 호위들을 대동한 채, 형형한 눈빛을 빛내고 있는 리처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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