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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111)화 (111/242)

혼술사 도로테아 111화

긴 대화를 끝으로 페른이 물었다.

“코니의 얼굴은 언제쯤 되돌려 주실 겁니까?”

“글쎄, 일이 끝나고?”

장난스레 건넨 말에 코니가 다시 한번 발끈했다.

이번에는 차분했던 페른조차도 불쾌한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도로테아는 상대가 불쾌감을 보이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듯 아무렇지 않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원래 계약이라는 게 구두 약속은 효력이 없잖아요. 언제든 말을 바꾸면 그만이니까. 내게도 끝까지 당신들을 믿을 수 있을 만한 패 정도는 있어야죠. 원한다면 얼굴은 모든 것이 끝난 뒤에.”

“말도 안 되는 소릴!”

카랑카랑한 외침에 고개를 갸웃, 하고 기울인 도로테아가 의아하다는 듯 물음을 던졌다.

“우리 사이에 신뢰가 없다는 말이, 그토록 말이 되지 않아요?”

적어도 나는 당신들에게 거짓을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건만.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것도, 경고를 무시한 것도, 늘 먼저 손을 뻗어 온 것도 그쪽이 아니었던가.

냅킨으로 입가를 꾹 눌러 닦은 도로테아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깊이 가라앉은 남색 눈을 본 코니가 움찔했다.

“아무래도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모양이에요, 여러분은.”

코제트는 최선을 다해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이 넓은 공간 어느 한곳도 소홀한 곳이 없고, 식탁에 올라온 음식 중 어느 하나도 부족함이 없었다.

‘굳이 배려할 필요는 없었지만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았으니까.’

굽히고 들어가야 할 필요도 없는데 굳이 먼저 손을 내밀었던 까닭은 단 하나였다.

도로테아는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으므로.

그녀가 어디선가 손해를 입거나 조금이라도 다치게 되면, 평판에 털끝만큼의 오물이라도 묻게 되면, 그녀를 대신해 날뛰어 줄 사람들이 있었다.

앞으로 생을 살아가며 받게 될 수많은 가시들을 몸으로 막아 주겠다며 등을 가져다 대는 미련한 이들이 있었다.

그러니 아득바득 되받아치기보다 그저 흘려보내려 했을 뿐이다.

“내가 코니의 얼굴을 ‘되돌려야 할’ 의무는 없어요. 그녀는 내게 일방적인 공격을 퍼부었고, 나는 그저 내게 쏟아진 공격을 받아쳤을 뿐이에요. 굳이 말하자면 배상을 해야 하는 건 그쪽이라는 뜻이죠.”

실책은 상대에게 있으니 애초에 도로테아가 먼저 숙이고 들어가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가 굳이 대우를 해 준 까닭이라고 한다면…….

시선을 받은 키엘이 아무 말없이 그녀와 눈을 마주한 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전했던 그의 입장을 충분히 존중했음을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것조차 모르면서 서로가 동등한 입장이라고 착각을 하며 어쭙잖은 요구를 하고 있으니, 이쪽 입장에서는 우스울 수밖에.

“나는 지금 몹시 관대한 제안을 하고 있어요. 패자에게 내가 원하는 바만 들어준다면 ‘잃어야 할 것들을 잃지 않게끔’ 해 주겠다고 제의를 했으니까요.”

페른이 침음을 흘렸다.

한순간에 변한 기세에 항의하려는 듯 벌어졌던 입술 사이에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 제안을 거절했을 때를 생각해 봐요, 코니.”

“…….”

“당신은 얼굴을 되찾지도 못할 테고, 그토록 존경하는 클라이브의 신임도 잃은 채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질 테죠. 상대에게 당한 흔적을 치욕처럼 몸에 새긴 패배자를 따를 세력은 없을 테니, 두 번 다시 일어설 수 없을지도 모르고.”

한마디 한마디 꺼낼 때마다 샛노란 눈에 그늘이 졌다.

도로테아의 ‘패배자’라는 단어가 코니움의 현실을 자각시키기라도 한 것인지, 좀 전까지의 살기등등한 기세는 가라앉은 지 오래였다.

페른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제가 당신을 잘못 파악했군요. 줄곧 몇 번이고 이어진 공격 속에서도 웅크린 채 물밑에서 일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며, 어쩌면 평화주의자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일이 커지는 것을 바라지 않기에 굳이 꼬리를 찾지 않는 거라고.

사람을 죽이거나 수단을 가리지 않고 이쪽의 공격을 되받아치지 않는 거라고.

그 누구보다 조용히 일을 처리하고 정리하는 것은, 모두 주변이 동요하고 공포에 떨지 않게끔 배려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던 생각은 완벽히 틀렸다.

“당신에게 우선순위가 명확했기 때문이라는 걸.”

선악이 아니라, 내 사람들의 안위가 위협받은 것이 더 문제였다.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눈에 비치는 어둠은, 상대를 씹어 먹을 듯한 맹수의 살기는 거짓이 아니었다.

지금의 코니움으로는, 아니, 지금의 페른으로서도 상대할 수 없는 인물이다.

‘게다가…….’

페른의 눈이 힐끗, 옆에 자리한 키엘을 바라보았다.

이 의뭉스러운 남자는 그 누구의 편도 아닌 것처럼 이쪽저쪽을 오가는 전령 노릇을 하고 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설령 코니움이 궁지에 몰린다 하더라도 키엘 스펜서는 결코 나서 주지 않을 것임을.

“걱정하지 말아요. 나는 말의 중요성을 제법 잘 알고 있고, 지키지 못할 약속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으니까.”

우리의 동맹이 굳건한 이상, 당신이 나를 배신하고 또 뒤통수치지 않는 이상.

“당신의 얼굴은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결국 얻은 것은 하나도 없이, 도로테아의 지시대로 움직여야만 품에 있는 것이나마 챙길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한 코니움이 제 두 눈을 깜빡였다.

우아한 미소를 머금은 채 차를 음미하고 있는 도로테아 하이클레어를 바라보는 눈에 짙은 패배감이 서렸다.

*   *   *

메릴린은 상처 입은 야수 같은 눈을 하고 달아나듯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코니의 뒷모습을 몹시 복잡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도로테아는 실로 가차 없이 그녀를 몰아붙였다.

결국 저 소녀는 아무런 이득도 없이, 그저 더 이상 잃지 않은 것에 만족하고 자신의 적수를 견제할 수 있음에 안도하는 것으로 그쳐야 할 것이다.

“그런데.”

메릴린이 입을 열자 쿠키를 오물거리던 도로테아가 고개를 돌렸다.

불과 조금 전까지 제 아버지뻘 되는 남자를 무자비하게 몰아붙여 입도 뻥긋 못 하게 만든 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매우 무해한 얼굴을 하고서.

“저는 왜 이 자리에 부른 거예요?”

“아아…….”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톡톡 가볍게 털어 낸 도로테아는, 손님들이 떠난 자리를 치우던 시녀를 향해 손뼉을 쳤다.

그러자 시선을 주고받은 이들이 총총 자리를 벗어났다.

“저들이 제게 걸리적거린 이유가 있었잖아요. 제가 가진 힘이나 제 배경인 가문 때문에 벌인 일들이죠. 딱히 원했던 관심은 아니지만, 여하튼 간에.”

“…….”

“그렇지만 영애는 정말 아무런 이유도, 까닭도 없이 그저 ‘휘말렸던’ 것뿐이에요.”

죽은 레이몬드의 시체와 조우했을 때에도, 주드 부녀를 만나 스펜서 영지로 내려오게 된 것도.

또 납치를 당할 뻔하게 되거나, 청문회에 불려 가 귀족들의 앞에서 심문을 받았던 것까지도.

그 어느 것 하나 메릴린의 의지와 생각이 반영된 부분은 없었다.

“어쩌면 저들이 누구인지 알게 되는 것이나, 영애가 어째서 일에 휘말리게 되었는지를 아는 것이 의미가 없을지도 몰라요. 어차피 과거는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니. 그렇지만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도로테아의 말에 메릴린은 무언가 곰곰이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는 메릴린을 보고 있던 도로테아의 뒤로, 슬쩍 자리를 피해 주는 우드의 기척이 느껴졌다.

비로소 오묘한 표정을 한 메릴린이 입을 열었다.

“이 모든 것들을 알고서 제가 영애를 싫어하게 되면 어쩌려고요? 결국 이 모든 일에 영애가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제가 겁을 먹고 멀어질 수도 있는데요.”

“그렇겠죠?”

확실히 도로테아는 이 아가씨가 꽤 마음에 들었다.

겁이 많고, 쓸데없이 동정심과 연민이 넘치는 데다, 무모한 것에 비해 부족한 능력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도로테아의 주변에 있는 이들 중 가장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인물이었다.

물끄러미 메릴린의 얼굴을 바라보던 도로테아는 말이 나온 김에 숨기고 있던 것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한 가지 더 고백할 게 있는데요.”

“아직 뭐가 더 남았어요?”

“저는 정령사가 아니에요.”

이미 그녀의 ‘힘’을 목격한 이들이라면 어렴풋이 알고 있는 사실이긴 하지만 입 밖에 내뱉는 것은 처음이었다.

반쯤은 충동적으로 꺼낸 말에 충격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멍하니 있던 메릴린이 눈을 끔뻑였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다시금 물었다.

“고백이라는 게, 그거예요?”

“네, 제가 다루는 건 정령이 아니라…….”

“난 또 뭐라고.”

몹시도 태연한 대답에 말을 멈춘 건 도로테아 쪽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메릴린이 손을 휘휘 저었다.

“새삼스럽게 이제 와서요?”

“…….”

“있잖아요, 영애. 제가 아무리 무지해도 정령사가 한밤중에 살아 움직이는 시체를 봉인하거나, 사람의 기억을 조작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아요.”

메릴린이 차분한 얼굴로 손을 내밀어 도로테아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리리를 가리켰다.

“정령이 인간한테 가운뎃손가락을 날린다는 말도 들어 본 적 없고요.”

다섯 살 즈음 되는 어린아이의 형태를 띤 정령이 싱글거리며 배운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 또다시 중지를 내밀었다.

어디서 배워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보는 사람마다 다채로운 표정을 지으니 새롭게 배운 행동이 몹시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저러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요. 저러는데.”

중얼거리는 말에 도로테아가 시선을 주자 리리가 까르르 웃으며 멀어졌다.

우드의 어깨를 타고 노는 것을 좋아하니, 그에게 향했겠지.

“그럼 이제 제가 알아야 할 부분은 대충 다 알게 된 건가요?”

“아마도.”

그녀에게는 아직 수많은 비밀이 남아 있지만 모든 것을 다 공유할 수는 없었다. 그중에서는 모르는 것이 더 나을 법한 것들도 있었고.

그렇지만 적어도 도로테아의 입장에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솔직해진 것만은 틀림없었다.

어딘가 마음이 가벼워진 듯한 얼굴을 한 메릴린을 먼저 보낸 후, 저택으로 돌아가려는 도로테아의 앞에 누군가가 불쑥 팔을 내밀었다.

“숙녀분, 부디 제게 마차까지 에스코트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실 수 있을까요?”

잠시 팔의 주인을 올려다본 도로테아가 순순히 팔짱을 끼고 마차가 있는 곳을 향해 걸었다.

느릿하게 발을 맞춰 걷던 도로테아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짐짓 추궁하는 흉내를 냈다.

“그래서, 당신은 코니와 그녀의 오라버니 사이를 오고 가며 간을 보고 계셨다?”

“저쪽도 만만찮게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으니 ‘배상’을 받아야지.”

눈을 찡긋하는 그에게 도로테아가 부드럽게 눈을 흘겼다.

“은인께서는 참으로 수단이 좋으세요.”

“그리 평가해 주다니, 열심히 뛰어다닌 보람이 있구나.”

잠시 대화가 끊긴 뒤, 마차 앞에 당도할 때까지 팔짱을 끼고 걷는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도로테아가 마차에 오를 수 있게끔 손을 내준 키엘이 흘러나온 머리카락을 그녀의 귀 뒤로 넘겨주자, 바른 자세로 자리에 앉은 그녀가 인사를 건넸다.

“감사해요.”

“별말씀을.”

싱긋 웃어 보인 그가 마차에서 손을 떼고 멀어지려다 그대로 멈춰 입을 열었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내게 물으리라 생각했었는데.”

웃음기를 띤 말에 도로테아가 눈을 끔뻑였다.

“어째서 저들과 교류하고 있었는지, 무엇을 위해 스펜서 영지에 타국의 사람들을 들였는지.”

“…….”

“오래전 우리의 인연이 닿았던 밤, 내게 찾아온 밤손님에 대해 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구나.”

“물어봐 주길 원하세요?”

곤란한데.

눈앞의 이 ‘맹수’는 지금 저를 향해 무방비한 목을 내밀고 있었다.

마치 목줄을 채워 달라는 듯이.

그렇지만 이미 울타리 안에 양을 들이기로 했는데 늑대마저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본 도로테아가 고개를 저었다.

“은인께서는 그걸 원하지 않으실걸요.”

“……내가?”

“여기까지 왔으니 적어도 ‘끝’을 보고 싶으신 게 아니었나요?”

“…….”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와서, 지금에야 키엘 스펜서는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평생 염원해 왔던 속내를 내보일 수 있는 유일한 기회 앞에서.

드물게 약한 소리를 하는 키엘의 눈을 깊숙이 들여다본 도로테아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은인께서는 아직 무대 위에 서 보지도 않으셨어요.”

“…….”

“적어도 그 위에서 한마디 대사라도 하고 그 뒤에 내려올지, 말지를 결정하시는 게 어때요?”

애초에 모든 것을 털어놓거나 이제 와서 포기할 생각도 없었으면서.

괜히 약한 소리로 사람을 들었다 놓는 것은, 이 사람이 평소에 자주 하던 습관 때문일까.

거짓된 모습과 말과 행동을 보이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고 숨 쉬는 것처럼 편안한 인생이라는 건 그리 행복한 삶은 아니었겠지.

조각조각 난 혼을 이어 놓은 것은 그의 의지였다.

마지막을, 끝을, 그리고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고자 하는 욕망을 들여다본 도로테아의 말에 픽 웃은 키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역시 네가 마음에 들어. 그간 내가 만난 이들 중 가장 나를 유쾌하게 만들거든.”

“그것참, 영광이네요.”

다정한 말을 받아친 도로테아는 이내 자세를 바로 하고 등을 기댔다.

문에서 손을 떼려던 키엘은, 그토록 많은 식사를 끝내고도 밥 한 끼 제대로 먹지 못한 사람처럼 핏기 한 점 없는 얼굴을 바라보다 말을 꺼냈다.

“네 친구의 이름이 발레리 제르망이었던가.”

“아아, 발레리. 그녀 또한 좋은 친구죠.”

도로테아가 빙긋 웃자 키엘이 제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 애를 얼마나 믿지?”

발레리 제르망을 얼마나 믿느냐고? 글쎄.

도로테아의 얼굴에 웃음기가 짙어졌다.

아무 말없이 웃고 있던 그녀가 키엘을 향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제 친구와 저는 원만히 잘 지내고 있으니까요.”

“흠.”

“발레리는 착하고 다정하고…….”

키엘이 손을 떼자 마차의 문이 천천히 닫혔다.

이윽고 문이 완전히 닫히고 나서, 도로테아가 미처 끝내지 못한 말을 마무리했다.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친구죠.”

메릴린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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