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사 도로테아 110화
메릴린은 혼미해져 가는 정신 줄을 애써 부여잡았다.
그녀의 접시 위로 먹기 좋게 썰린 고기 조각이 얹어졌다.
도로테아가 건넨 호의에 메릴린은 물기 어린 촉촉한 눈동자로 타인들이 공인한 자신의 ‘영혼의 짝’을 바라보았다.
“영애, 정말 저한테 왜 이러세요…….”
“맛있어요. 숙모께서 황궁 출신의 요리사를 불러왔다더니 정말 실력이 좋은 것 같아요.”
“이 분위기에서 먹을 것이 넘어가겠어요?”
심지어 저쪽은 이를 부득부득 가느라 아직 포크도 들지 않았는데.
근심이 가득한 얼굴을 본 도로테아가 생긋 웃었다.
“괜찮아요. 저들은 영애를 털끝만큼도 건드리지 못할 거예요.”
잠시 저쪽의 눈치를 살피던 메릴린이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옆방에 데인 영식이나 필립 영식, 에이든 경께서 계시는 거죠? 신호를 하면 여기로 들어오셔서 저들을 상대해 주시는 거겠죠?”
옆방에는 아무도 없는데.
미간을 잔뜩 좁힌 메릴린에게 선의의 거짓말을 해야 할까 잠시 고민해 본 도로테아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창백해져 가는 메릴린을 향해 빙긋 웃었다.
“나를 좀 믿어 줘요. 그 사람들보다는 내가 훨씬 더 저들을 잘 상대할 수 있으니까.”
메릴린은 다정한 목소리로 자신을 달래는 도로테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윽고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더니, 이내 그녀가 건네준 고기 조각을 씹기 시작했다. 마침 저쪽에서도 페른이 아직 분을 참지 못하는 제자를 타이르던 참이었다.
“네 분노는 이해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빈손으로 돌아갈 생각이더냐.”
“…….”
“내가 몇 번이나 일러 주었을 거다. 상대 앞에서 네 감정을 너무 솔직하게 드러내지 말라고.”
“……네.”
한결 얌전해진 코니움의 눈에 울적한 빛이 비쳤다.
좀 더 조바심을 내고 이성을 잃어야만 이쪽이 더 유리할 텐데.
확실히 순순히 당해 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상대의 상황을 살핀 도로테아가 목을 축이고는 입을 열었다.
“코니움 양의 스승이시라면, 페른 경께서는 그녀에게 무엇을 가르치시나요?”
예를 갖춘 도로테아의 말에 남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호칭을 높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작위도 없고 귀족 가문 출신도 아니니까요. 그저 페른이면 족합니다.”
작위도 없고 귀족 가문도 아니다라.
“보잘것없지만 약초학을 공부했고, 이 아이에게도 여러 가지 약초의 배합이나 성분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약초학을 전공하셨다고요.”
약초라.
약초라는 것이 별것인가.
용량에 따라, 쓰임새에 따라 약초는 얼마든지 독초가 될 수 있는 것인데.
흥미로웠다.
페른은 저를 두고 작위 하나 갖지 못한 변변찮은 출신이라고 했으나, 코니움도 페른도 예법을 아주 자연스레 구사하고 있었다.
급히 배운 것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자연스레 몸에 익은 것이지.
코니움의 무례 또한, 계급이 낮아 배운 것이 없는 이들의 무식한 언행이라기보다는 금지옥엽으로 자라난 귀족 아가씨의 안하무인에 더 가까웠고.
모르긴 몰라도 로헨 왕국에서 두 사람의 지위나 권세가 결코 낮지 않으리라는 건 쉽사리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분이 낮고 작위가 없다…… 라.
탐색하는 시선을 맞받아치듯 그녀를 빤히 들여다보던 페른이 웃는 얼굴로 먼저 운을 뗐다.
“저는 그 ‘살’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코니움의 상태를 살피며 한 가지 짐작이 가는 바는 있지요.”
“말씀하세요.”
“영애께서는 이 아이가 직접 찾아오길 바랐기에, 일부러 목숨을 앗아 가는 대신 얼굴에 눈에 띄는 흔적을 남기신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눈을 내리깐 도로테아의 얼굴에 미소가 짙어졌다.
“실은 그때 코니움의 목숨을 빼앗았다 하더라도 그 누구도 영애를 범인으로 의심할 수도, 밝혀낼 수도 없었을 겁니다.”
그 순간, 도버 스펜서의 몸은 도로테아에게 완벽하게 잠식당해 있었다.
또 ‘코니움’이라 불린 인물은 무방비하게 그의 앞에 노출되어 있었고.
정말 상대의 목숨을 취하려 했더라면 살(煞)을 날리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었으리라.
“찾아오길 바랐죠. 나는 꽤 오랫동안 기다렸거든요.”
“…….”
“감히 저택의 담을 넘어 내 사람들에게 해코지를 하려 들고, 내 평판을 깎아내리는 소문을 퍼뜨리며 끊임없이 수작을 거는 이들이 내게 직접 와 주기를.”
그렇지만 상대는 오랜 시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다른 이들을 통해 계속해서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나는 그게 내 관심을 받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는 구애의 발버둥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매번 그렇게 두 배, 세 배로 손해를 보면서도 끊임없이 이쪽을 향해 손을 뻗어 올 리가.
“그러니 초대한 거예요. 도대체 왜 그리도 내 주변을 맴도는지 이야기나 들어 보려고요.”
* * *
코니움은 저도 모르게 두 번째 접시를 제 앞으로 끌어오다 얼굴을 붉혔다.
적의 소굴로 들어와 태연하게 식사에 몰두하다니. 이게 무슨 어리석은 짓이란 말인가.
‘그렇지만…… ‘
만찬회의 음식들은 하나같이 극찬을 받을 만큼 맛이 좋았던 데다, 바로 눈앞에서 태연하게 수많은 접시들을 비워 나가는 도로테아를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음식에 손을 댈 수밖에 없었다.
이미 위가 한계치에 다다른 것 같지만, 볶은 해산물 위에 소스를 듬뿍 올려 야채와 함께 한입 가득 넣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저도 모르게 식탐이 솟아났다.
‘저게 다 어디로 가는 거야?’
배가 부르지도 않은지 끝도 없이 들어가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쟨 체통 같은 것도 신경 쓰지 않는 건가.’
곁에 있는 메릴린 남작 영애는 그런 도로테아가 익숙한 듯 제 몫을 먹고 포크를 내려놓은 지 오래였다.
“음식이 비었네요. 잠시 쉬는 동안 이야기를 좀 나눠 볼까요?”
도로테아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든 코니움은, 어느새 상에 올라온 음식들이 싹 비워져 있는 것을 보고서 경악했다.
‘어느새?!’
“오랜 시간을 거쳐 우리가 드디어 만났으니, 서로 원하는 바에 대해 말해 봐야겠네요.”
먼저 운을 뗀 도로테아는 여전히 흥미로운 눈으로 저를 관찰하고 있는 키엘을, 흘끔 보고는 이내 손님들을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두 사람이 로헨 왕국에서 왔다는 것도, 사절단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어요. 그럼에도 이번에 방문하게 될 사절단보다 한발 앞서 따로 저를 만나러 왔죠.”
“…….”
“그건 어쩌면 당신의 상태를 다른 이들에게 숨기고 있고, 또 숨겨야 할 이유가 있다는 뜻이 아닐까, 하고.”
도로테아는 여유로운 얼굴로 코니움을 살폈다.
붕대로 온 얼굴을 칭칭 감고 있어도 눈에 드러나는 당혹감을 숨길 수는 없었다.
잠시 말을 기다리고 있던 도로테아가 생긋 웃었다.
“얼굴이 망가지지 않았더라면 사절단 일행에 포함된 것은 당신이었을지도 모르죠.”
“어쩌면이 아니라 확정이었지. 클라이브 님께서는 늘 오라버니보다 나를 중히 여기셨으니까!”
기분이 상한 듯 쉰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다.
클라이브라면, 대정령사 클라이브를 뜻하는 건가.
도로테아는 손가락으로 톡톡 식탁을 두드리며 상황을 정리했다.
그녀가 방금 언급한 ‘오라버니’와 코니움이 클라이브의 총애를 두고 다툼을 벌이던 중이었다면, 결국 하이클레어 가문을 향해 마수를 뻗은 사람은 클라이브라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클라이브도 제대로 된 정령사가 아니라는 뜻인가.”
“그분께서는 진짜 정령을 다루셔! 그분이 다루는 정령은 조잡하게 만들어진 다른 정령들과는 다르다!”
페른이 만류하기도 전에 코니움이 왈칵 말을 받아쳤다.
마치 제가 모욕이라도 당한 듯한 모양새였다.
페른이 손을 들어 흥분한 코니움을 진정시켰다.
모노클 너머로 비치는 눈은 몹시 차분했다.
식사 내내 그는 코니움과 도로테아의 대화를 들으며 그녀가 자신의 제자를 어떻게 일방적으로 몰아세우는지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분명 무엇인가를 속으로 가늠하는 듯했다.
“분명하게 말씀드리지만, 저희는 애초에 스펜서 영지에서 일을 크게 벌일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요란했죠. 3황자 전하께서 아무리 무능하다 한들, 황자 전하이신걸요. 그분을 끌어들였을 때부터 이미 작은 일은 아니게 되었으니까요.”
“별수 없었지요. 영애가 뜻밖에도 저희가 필요로 하는 이들을 품으셨으니.”
필요로 하는 자들.
스펜서 영지로 처음 내려갈 때에는 그녀에게 손을 댈 생각이 없었지만, 후에 생각이 바뀌어 급습하게끔 만들 만큼 달라진 것이 무엇이 있었지?
순간 옆에 있던 메릴린의 표정이 변했다.
“그 딸과 아버지요. 제가 데려온 사람들.”
다급한 속삭임에 도로테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보자. 아이의 아버지, 주드가 그때 두 사람이 쫓기는 이유를 뭐라고 말했더라.
로헨 왕국의 사람들이 수상한 ‘의식’을 벌이는 것을 봤다고 했었지.
그러다 아이가 무엇에 홀렸는지 갑자기 이상해졌다고.
도로테아가 아이에게 행했던 것은 ‘별상거리’.
정기를 빼앗기고 기가 상한 육체를 회복시키기 위해 손님을 부르는 제(祭)였다.
‘그저 아이가 술법이 이루어지는 자리에 있었기에 정기를 빼앗긴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면?
만일 처음부터 아이에게 술법을 행했던 것이었다면?
도로테아가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여 느릿하게 물었다.
“필요로…… 하는 이들이라고요?”
“그 두 사람을 부디 저희에게 넘겨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건 좀 어렵겠는데요.”
그 둘은 분명 단순한 목격자 그 이상이었다.
도대체 주드가 무엇을 숨긴 것인지는 좀 더 확인해 봐야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미 소득은 생긴 셈이다.
“곤란하군요. 저희도 이곳까지 온 이상 손해만 보고 돌아갈 수는 없는데.”
도로테아가 빙긋 웃었다.
“한 가지 더 여쭤봐야 할 것이 있죠. 저를 납치하려고 시도하셨을 때 사용했던 수단.”
그녀의 말에 코니움이 얼어붙었다. 페른은 그런 제자를 바라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 일은 실수였습니다. 코니움은 손대어서는 안 되는 힘에 손을 댔고, 그 대가로 클라이브 님께 꽤 큰 처벌을 받게 되었으니까요.”
혼을 변형시켜 곁에 묶어 두는 조잡한 술법 두어 개를 아는 것과, 명계의 문을 여는 것은 확실히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영애께서도 그 힘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힘이 아닙니다. 감히 물어서도, 탐을 내어서도 안 되는 힘이지요.”
으음.
드물게 감정을 드러낸 페른의 단호한 말에 도로테아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런가요?”
페른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곤조곤하게 설명하듯 말해 주었다.
“인간의 생과 사를 결정하며 목숨을 거두어 가는 죽음의 사신(死神)에게만 허락되는 힘이니까요.”
“그렇군요.”
그런 사신을 무려 인간의 육신에다 처넣고 부려 먹고 있는 도로테아는 시침을 뚝 뗀 채 심오한 이야기를 듣는 양 고개를 주억거렸다.
페른은 몹시도 열정적이었다.
“영혼과 육신을 단절하는 힘이라니. 고작해야 계약을 통해 혼을 끌어올 뿐인 저희의 조잡한 수법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룩하고 성스러운 일입니다.”
“대단하네요.”
그런 콜린을 부리는 나는 더 대단한 셈이고.
저이의 말을 듣고도 그리 배알이 꼴리지 않는 것은, 들으면 들을수록 그 사신을 제압한 그녀를 향한 존경과 찬양으로 치환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언제나 찬양을 듣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이제 와서 열렬한 추종자가 하나 더 있든 없든 그리 큰 상관이 없었다.
시큰둥한 속내와 달리 인내심을 발휘해 사신을 향한 페른의 찬양을 들어 준 도로테아가 본론을 꺼냈다.
“나는 폐하께서 로헨 왕국의 ‘문제’들을 적절하게 아셔야 한다고 생각해요. 마냥 아군이 될 수 없다는 경각심 정도는 가지셔야 하죠.”
“날더러 제국이 우리를 경계하도록 만들라는 건가?”
코웃음을 치는 코니움의 물음에 도로테아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코니움은 이번 사절단 일행에서도 제외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토록 존경하는 ‘대정령사 클라이브 님’의 눈 밖에 났으니, 그녀의 자리를 차지한 ‘적’을 처리하고 싶었을 테고요.”
도로테아는 접시 위의 반숙 노른자를 나이프로 갈랐다.
살짝 설익은 노른자가 영롱한 색을 내며 흘러내려 요리에 촉촉이 코팅되었다.
“생각해 봐요, 코니. 나는 어차피 먼 제국에 있고, 당신이 다시 로헨 왕국으로 돌아가면 내부의 적은 당신의 목 아래에다 검을 들이밀고 있을 거예요.”
촉촉한 노른자의 고소함과 짭조름하게 조리된 햄의 훈제 향이 더해졌다.
“당신도 나도 손해 보지 않는 방법을 찾아야죠. 만일 당신의 ‘오라버니’가 중요한 일을 계속해서 그르친다면, 당신의 클라이브 님께서도 다시 당신을 찾으시지 않으실까요?”
코니움의 얼굴에 갈등이 어렸다.
도로테아를 향한 적의보다도 태어나는 순간부터 늘 자리다툼을 해 왔던 형제에 대한 시기와 질투,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 그녀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도로테아는 여유롭게 그녀의 답을 기다렸다.
“나는…….”
이윽고 침묵을 깬 코니움이 입을 열었다.
답을 듣는 도로테아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걸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