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사 도로테아 108화
눈 뜨고 돈을 빼앗겼음을 알게 된 뒤 침울해진 우드와는 달리, 밝은 얼굴로 거리를 구경하던 미네가 별안간 폴짝폴짝 뛰었다.
조그마한 소녀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티 하우스였다.
튼튼한 철제문 너머로, 신경을 많이 쓴 듯 깔끔한 정원과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화려하고 비싼 구조물이나 희귀한 식물 따위는 없었지만 그럭저럭 차를 마실 수 있는 분위기는 갖춘 셈이다.
귀족 문화에서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대중적인 형태의 티 하우스로 보였다.
도로테아의 시선이 담쟁이덩굴이 얽힌 담에서 단번에 입구를 찾아 안내하는 미네를 향했다.
“자주 왔었니?”
어린 그녀 홀로 이곳까지 왔을 리는 없고, 누군가가 소녀를 이곳에 데려왔었다는 뜻이겠지.
문을 두드리자 자연스레 나온 안내인이 일행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이곳에서 차를 마시고 싶은데.”
“따로 방을 내어 드리면 되겠습니까?”
도로테아의 눈길을 받은 미네가 벙긋벙긋 입을 벌리며 손짓했다.
“저 애가 원하는 방이 있는 것 같은데, 그리로 가지.”
건물 안으로 들어서 곧장 계단을 올라간 미네의 걸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도로테아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그저 아이가 안내하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이는 이윽고 복도 끝자락에 위치한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검은색의 기이한 문양이 새겨진 문 너머는 몹시도 고요했다.
“차를 마시는 장소치고는 몹시도 비밀스럽구나.”
보통 티타임은 주로 채광이 좋은 방이나 혹은 야외에서 진행하기 마련인 것을.
끼이이.
굳게 닫혀 있던 문은 아이가 힘을 주는 것만으로도 쉬이 열렸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방 안 테이블 위에는 근사한 티 세트가 차려져 있었다.
“어머, 내가 좋아하는 차네.”
테이블 위의 배려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티타임에도 거나한 식사를 하는 도로테아를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옆에 간이 테이블 하나를 더 만들어 요깃거리들을 가득 채워 두었다.
“미네, 배고플 텐데 뭐라도 먹지 않으련?”
도로테아의 제안에 눈을 반짝인 미네가 가까이 다가왔다.
조그마한 손이 익숙하게 테이블 위 슈가 보울로 향하는가 싶더니, 이내 알록달록 색을 입힌 각설탕 하나가 미네의 입으로 쏙 들어갔다.
불룩한 볼을 본 도로테아가 웃었다.
“그걸 먹고 싶어서 그리 신이 났었구나.”
마치 동화의 한 장면처럼 따뜻하고 아름다운 광경을 바라보는 우드의 얼굴에 왠지 모를 떨떠름함이 묻어났다.
‘티 하우스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골목 끝에 위치해 있다고는 하나 티 하우스는 그리 값싼 공간이 아니었다.
낯을 몹시 가리는 아이는 안내인의 등장에도 놀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앞장서서 방으로 안내하기까지 했다.
그건 미네가 이 장소에 몹시 익숙하다는 이야기겠지.
거리를 떠돌며 잡일을 하던 아이가 도대체 무슨 수로 이곳을 드나들었단 말인가.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찜찜함을 마음 한구석으로 몰아넣은 우드가 막 테이블 맞은편에 앉으려던 순간이었다.
도로테아의 목소리가 그의 행동을 저지했다.
“미안하지만 우드, 거긴 네 자리가 아니니, 비켜.”
“뭐?”
그가 황당하다는 듯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두 개의 찻잔을 훑었다.
“저 꼬마는 설탕 외에 차를 마실 것 같지는 않고, 네 호위는 너랑 겸상한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럼 남은 이 차는 누구의 몫인데?”
식탐이 많은 줄이야 알고 있었다만, 하다하다 이제는 마실 것까지 욕심을 내나.
어이없다는 듯 던진 물음에 도로테아가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야. 네 앞에 놓인 찻잔은 이 방의 주인 몫이거든.”
외부와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는 방 안은 친근한 이미지의 티 하우스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방을 채운 가구와 침구는 모두 어두운 빛깔로, 밝은 색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채광창을 가린 것은 문양 하나 없는 심심한 디자인이긴 해도 값비싼 린넨을 사용한 암막 커튼이었다.
“눈치 못 챘어? 여긴 철저하게 누군가의 취향에 맞춰진 방이야. 다만 내 취향이 아닐 뿐이지. 그렇다면 나를 초대한 자의 취향이 아니겠어?”
그렇게 말한 도로테아가 테이블 위 음식을 훑었다.
방 안의 모든 것이 그녀의 취향과는 거리가 있지만, 저 음식들만큼은 그녀가 평소 선호하던 것들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요리들은 그녀를 위해 준비해 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미네가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도, 안내인이 가타부타 말도 없이 일행을 방에 들인 것 또한 누군가가 의도한 바에 따른 것일 터.
혼란스러운 기색으로 귀를 기울이던 우드가 별안간 얼굴을 굳히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야.”
“응?”
“너, 알고 들어왔지.”
분명 수상한 냄새가 풀풀 풍기는 걸 알면서도 방치한 것이 틀림없었다.
경험상 이렇게 되면 또 뒷목을 잡고 넘어갈 만한 일에 휘말리곤 했다.
최소 살인 사건의 목격자에서 때로는 암습 및 납치의 당사자가 되는 등의 아주 어마어마한 규모로.
티 하우스를 보고 반색하며 달려드는 꼬마를 지그시 관찰할 때부터 이미 ‘뭔가 있음’을 짐작했으리라는 확신이 그의 뇌리를 강렬히 잠식했다.
그녀가 생긋 웃었다.
“멀쩡하게 눈 뜨고 대낮에 소매치기를 당하긴 해도, 감은 그런대로 쓸 만하구나.”
“…….”
우드의 이마 위로 혈관이 삐죽이 솟았다.
겁도 없이 상대의 소굴로 뛰어든 주인을 다그치려던 그때였다.
벽에 기대어 있던 프리드가 조용히 허리춤에 있는 검을 쥐었다.
똑똑.
명쾌한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이의 얼굴이 아주 낯익었다.
도로테아는 놀란 기색 하나 없이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백작님. 기다리고 있었어요.”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고 허리에 검을 패용한 채 군화를 신고 들어선 키엘 스펜서는, 백작령에서 만날 때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마치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어딘가 모르게 위태로운 동시에 위험한 날것의 분위기를.
* * *
입을 떡 벌린 우드가 넋을 놓고 굳어 버린 채 자리에 앉아 있자, 도로테아가 다시금 그를 타박했다.
“우드, 자리의 주인이 왔으니 이제 그만 비켜 드려.”
“아아, 괜찮아. 그저 구색만 맞추려고 둔 것이니 누가 마신들 무슨 상관이겠나. 자리야 새로 만들면 그만이니.”
너그럽게 말을 꺼낸 키엘의 시선이 어느샌가 도로테아의 뒤로 숨은 미네에게로 향했다.
“이 어린 숙녀분과도 오랜만이군. 못 본 사이 굉장히 많이 달라졌는걸?”
미네는 그가 등장한 순간부터 왠지 몸을 숨긴 채 나오지 않더니, 목소리를 듣자 몸을 움츠린 채 덜덜 떨기 시작했다.
도로테아는 제 옷자락을 필사적으로 부여잡은 조그마한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우드, 미네를 데리고 나가 있어.”
본능적인 공포일까, 경험으로 학습된 공포일까.
눈앞의 사내에게는 자그마한 어린아이 따위 아무래도 좋을 테지만 미네의 입장에서는 다르겠지.
“말도 안 되는 소리 마라!”
“괜찮아. 정말이야. 나라고 대책 없이 여길 들어오진 않았어.”
“…….”
도로테아가 걸음을 옮겨, 눈을 부릅뜬 채 격렬히 저항하는 우드의 귀에 속삭였다.
“내가 누군가를 상대하면서 단둘이 남을 때 손해 본 적 있어? 그리고 프리드가 곁에 있을 거야. 미네를 밖에 두었다가 괜히 인질로 삼을 기회를 주면 안 되잖아.”
마땅찮은 듯 한참을 노려보던 우드가, 아이를 품에 안고 거칠게 문을 닫고 나가자 키엘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저 친구 앞에서 그리 나쁘게 굴었던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앞에서 안 하시고 뒤에서만 하셨으니 더 경계할 만하죠.”
도로테아가 테이블 위에 놓인 샌드위치를 덥석 집어 들었다.
내용물이 풍성하게 들어간 조각을 한입 가득 무는 것을 본 키엘이 웃었다.
“그런 것치고 우리 아가씨는 너무나 경계심이 없는데?”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 낸 도로테아가 남은 샌드위치를 내려놓으며 차분히 말을 꺼냈다.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파티마가 목숨처럼 사랑한 남자 앞에서도 차마 털어놓지 못한 그녀의 비밀. 사랑하는 이의 시체를 두고도 달아나야만 했던 까닭.”
키엘이 말없이 무릎을 꼰 채 깍지 낀 손을 그 위에 올렸다.
“다만 궁금한 것은 그녀의 혼이 올바른 곳으로 가지 못한 채 누군가의 도구로 전락하게 되는 것까지 당신이 의도한 바였나, 하는 부분.”
죽으면서까지 이름 한 자 꺼내지 않고서 신의를 지킨 그녀에게, 영원히 죽지도 살지도 못한 상태로 머무르는 형벌을 줄 만큼 당신이 잔인하고 끔찍한 인간인지.
“결론은?”
나지막한 물음에 도로테아는 베어 물다 만 샌드위치를 내려다보고는 흐음, 하고 뜸을 들였다.
“백작령에서 느꼈던 위화감이 있어요. 분명 우리 가문을 넘보던 그 개새끼들은 당신과 아는 사이가 분명한데, 적극적으로 그들의 명을 따르던 도버 스펜서와 당신은 좀 달랐죠.”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키엘이 빙그레 웃었다.
“제가 허를 찌를 수 있었던 건, 그들이 멍청했기 때문이지만…….”
도로테아의 남색 눈동자가 일순간 반짝였다.
“그들이 제 능력을 지나치게 과소평가 했던 덕도 있었죠. 숨긴 적도 없는데, 아는 것이 도통 없더군요. 당신이 중간에서 장난쳤기 때문이죠?”
“은혜를 갚는다더니 그 전에 암습에 당할 것 같기에. 그럼 네게 받아야 하는 빚이 있는 내가 너무 손해지.”
도로테아가 천천히 몸을 뒤로 젖혀 등받이에 기댄 채 나른하게 대꾸했다.
“좋아요. 나는 내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 박하게 굴지 않으니 당신을 믿어 보죠.”
“어째 손해만 보는 기분인데.”
“거짓말.”
도로테아가 의뭉스러운 웃음을 띤 키엘 스펜서를 가볍게 힐난했다.
“제가 3황자에게 모든 혐의를 미루어 준 덕에 영지 안에 남은 흔적을 정리할 시간을 벌었잖아요. 폐하께서는 황가에 ‘오점’을 남기고 싶어 하지 않으시다는 걸, 당신은 아주 잘 알고 있고요.”
분명 리처드가 ‘관여했다’고 여겨지는 부분들은 모두 불문에 붙여질 테고, 증거는 확실하게 공중에서 분해될 것이다.
훗날 그 누가 일을 파헤친다고 하더라도 진상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손해를 본 건 리처드죠. 굳이 말하자면.”
“글쎄, 내 기억에 우리 아가씨는 되레 그러기를 원했던 것 같은데? 네가 나를 이용해 먹었으니, 나도 너를 이용할 기회를 줘야지.”
눈을 깜빡이며 잠시 말이 없던 도로테아가 시원하게 인정했다.
“그건 그러네요.”
그 와중에도 충실히 샌드위치를 마무리 짓고 에그 스크램블이 듬뿍 올라간 팬케이크를 노리는 그녀를 보며 키엘이 쿡쿡 웃었다.
“참 대단하단 말이지. 누가 보면 공복인 줄 알겠어.”
미네와 함께 거리로 나왔을 때부터 줄곧 그녀의 행적을 뒤쫓아 다닌 모양이었다.
입에 가득 든 음식을 삼킨 도로테아가 조용히 물었다.
“그래서, 용건은요?”
“저쪽에서 널 만나고 싶어 해.”
“아아, 내가 모처럼 최선을 다해 상대해 주며 찾아오라 했더니 어쭙잖게 사람을 납치하려 든 그 꼴같잖은 인간들?”
“평가가 박하네.”
눈을 아래로 내리깐 도로테아는 어느새 또 늘어난 빈 접시를 밀어내며 새침하게 대꾸했다.
“실망을 해서 그런가 봐요. 너무 별 볼 일 없어서.”
“어쩔 수 없어. 원래 처음부터 누리고 살았던 자들일수록 상황 파악도, 주제 파악도 느리거든.”
그녀의 역성을 들 듯 맞장구친 키엘이, 부드러운 크림과 시트로 이루어진 케이크가 놓인 접시를 도로테아 앞에 놓아 주었다.
“그러니 다음번에는.”
그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저들을 상대하겠다고 네 몸을 버리는 짓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
접시를 내려다보던 도로테아가 고개를 들어 꽤 진지한 눈을 하고 있는 키엘을 마주했다.
한참을 서로 탐색이라도 하듯 들여다보는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은 침묵을 깬 것은 도로테아였다.
“은인께서도 그치들과는 상종하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키엘의 당부를 받아친 그녀가 덧붙였다.
“자고로 곁에 두어야 할 사람은 신중히 골라야 하는 법이니까요. 같이 놀다 비슷한 수준으로 전락하시면 제가 실망할 것 같아요.”
입가를 실룩이던 남자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유쾌한 듯 한참 웃음을 멈추지 않던 그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네가 실망하지 않게끔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겠군.”
저 혼자 신이 나 웃어 젖히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도로테아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리고 조건이 하나 있어요.”
“음?”
“만나고자 한 것은 저쪽이어도, 만나는 것은 제게 달린 문제죠. 쓸데없는 장난을 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장소는 제가 정할게요.”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인 키엘이 물었다.
“어디로?”
* * *
늦은 저녁, 손님이 찾아왔다는 기별에 의아해하며 아래층으로 내려간 코제트는 뜻밖에도 근사한 장발의 미남을 마주했다.
향기 좋은 꽃다발을 한가득 품에 들고 온 남자는 활짝 웃으며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부인.”
“예? 예.”
“부군이신 콜린 경께 앞으로 신세를 지게 될 키엘 스펜서라 합니다. 편히 키엘 경이라 불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당황한 나머지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누군가가 다급하게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보다 서너 배는 더 창백한 안색을 한 콜린이 코제트를 가리고 섰다.
죽일 듯이 바라보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키엘이 품에 들고 온 꽃다발을 콜린에게 건넸다.
“제 방은 부디 콜린 경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배정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런 미친놈.
콜린은 인간이 되고 난생처음으로 뒷목이 당기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생생히 경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