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사 도로테아 106화
“아무리 그래도 제국의 황자인데, 그건 좀 어렵지 않겠니.”
최대한 부드럽고 다정하게 설득하는 후작을 보던 에이든이 입을 삐죽였다.
이미 조카에게 모범이 되지는 못할망정 경솔한 언행을 보였다며 형에게 쥐어 터지고 난 뒤라, 덥수룩한 수염이 난 얼굴은 퉁퉁 부어오른 상태였다.
“아무것도 모르시면서. 테아의 야망을 보십시오. 가히 장군감 아닙니까. 황자조차도 발아래에 꿇리겠다는 저 용맹무쌍한 태도는 누가 보더라도…….”
“닥쳐.”
입을 꾹 다문 에이든이 슬쩍 눈치를 봤다.
에이든이 어떤 사고를 치든 늘 자애롭게 넘기던 그의 어머니, 후작 부인마저도 냉담한 눈빛을 보냈다.
막내 삼촌이 구박받는 모습을 본 도로테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해 본 소리예요. 정 어려운 일이면 굳이 생각하지 않을게요.”
밖을 헤매고 돌아다니는, 늑대의 탈을 쓴 양이 탐이 나서 길들여 볼까 했던 것이 전부다.
함께 사는 가족들이 모두 반대한다는데 가축을 들일 수야 없는 노릇이지.
다행히도 순순히 포기해 준 도로테아를 향해 안도의 한숨과 기특하다는 눈길이 쏟아졌다.
때마침 심부름을 겸해 콜린에게 다녀온 우드는 자초지종을 듣고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제 주인을 훑었다.
“너, 황자에게도 나와 비슷한 짓을 하려고 했던 거냐?”
“아니.”
살의에 먹혀 미래를 잃었을 우드에게 ‘인간의 삶’을 가져다준 것은, 그의 곁에 있던 누이와의 계약이었다.
타고난 살성에 더해, 누군가의 지독한 원념이 담긴 저주를 고스란히 제 몸에 담아 다닌 루크와는 달랐다.
“그 아이는 내버려 두면 정말로 괴물이 될 테니까.”
방향을 잃은 검이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의 목숨을 거두는 것도, 그리한 끝에 예리한 검조차도 부러지게 되는 결말은 원하지 않았다.
살성(殺性)을 봉인(封印)해 제 곁에 둔다면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냥 생각만 해 본 거야.”
만일 그 과정에서 혹여 제 가족들이 조금이라도 다치거나 희생될 위험이 있다면, 굳이 두 팔을 걷어붙일 이유는 없었다.
저토록 염려하는데 괜한 고집을 세워 걱정을 끼치느니 그냥 두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괴물이 된다고? 혹시 전에 보았던 그 걸어 다니는시체 같은, 뭐 그런 존재가 되는 거냐?”
“아냐,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쓰고서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죽이는 흉살(凶殺)이 되는 것뿐이야.”
“그것도 문제 아니냐.”
비록 도로테아의 말이 터무니없긴 하지만, 그 터무니없는 말들 중에 거짓된 말이나 흰소리가 없었음을 아는 우드의 얼굴이 굳었다.
제국의 황자가 무더기로 사람을 죽이는 살인마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저도 모르게 굳은살이 박인 손을 폈다 쥐었다 하던 우드가 오래전 느꼈던 미묘한 감각을 떠올리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복수를 행하던 때, 반쯤 미쳐 있긴 했지만 그때의 감각은 아직도 선연했다.
검이 사람을 가르는 감각, 피가 튀어 제 옷에 묻고 비린내가 코를 찔러도 역겹기는커녕 가슴 한쪽이 흥분으로 두근거렸다.
괴물이 되어 가던 자신을 늪에서 꺼내어 준 것이 이 아이였지.
눈에 아련한 빛이 가시기도 전에 도로테아가 입을 열었다.
“극장에 갈 테니 마차를 준비해.”
“극장?”
뜬금없이 극장에 가고자 한다는 말을 들은 우드의 되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도로테아가 가볍게 덧붙였다.
“한동안 내려가 있는 사이에 극장에선 계속 공연을 해 왔을 거 아니야. 수금하러 가야지.”
“…….”
“왜?”
“아무리 그래도 귀족 영애가 수금이 뭐냐, 수금이.”
못마땅한 듯 타박하는 우드의 말에 도로테아가 살짝 고개를 옆으로 갸우뚱하니 기울인 뒤, 진지하게 말을 고쳤다.
“그럼 돈 걷으러? 아님 용돈 벌이하러? 안 그럼 삥 뜯으러?”
“아냐, 됐다.”
차라리 수금이 낫겠다.
내심 모든 것을 체념한 우드가 조용히 마차를 부르러 가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쟨 틀림없이 황자의 미래가 걱정이 된다거나, 그에게 다칠 사람들이 염려되어서 살성을 봉인하니 어쩌니 하는 게 아닐 테다.
“그냥 편리한 심부름꾼 하나 더 데리고 다닐 생각인 거겠지.”
* * *
못 본 사이 극장은 한층 더 화려하고 근사한 공간이 되었다.
“저희 작품들을 상업적이라며 비판하는 이들도 편히 극장을 찾을 수 있게끔 관객석 중 일부를 내밀한 개인 공간으로 꾸몄더니, 확실히 유입이 늘었습니다.
극이 잘 보이는 ‘좋은 자리’보다, 스스로를 감출 수 있는 비밀스런 공간이 더욱 인기가 많다는 말에 우드가 얼굴을 찡그렸다.
“찔리는 것이 그리 많은가.”
“귀족 나리들이야 체면치레에 목숨을 거는 분들 아닙니까.”
가볍게 대꾸한 레번은 도로테아를 흘끔 보고는 재빠르게 말을 고쳤다.
“물론 우리 테아 아가씨께서는 고작해야 체면 때문에 눈앞의 이득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짓 따위는 하지 않으시죠.”
“……그건.”
칭찬이라기에는 좀 애매하지 않나.
도로테아 하이클레어가 아무리 별난 인간이라고 한들 엄연한 귀족인데, 체면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돈만 밝힌다는 소리가 아닌가.
가슴 깊은 곳에서 저도 모르게 울컥함을 느낀 우드가 막 반박을 하려던 찰나였다.
“글쎄, 어떤 이득이냐에 따라 다르겠지.”
“……그거, 이득이 더 크면 자존심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말로 들린다만.”
희귀한 생물이라도 발견한 듯 저를 보고 있는 우드의 시선에 도로테아가 싱긋 웃었다.
“내가 말했잖아. 어떤 체면이냐, 어떤 이득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라고.”
장부를 슥, 훑어보던 그녀가 오류가 없음을 확인하고 만족스레 두꺼운 서류철을 덮었다.
긴장한 얼굴로 도로테아를 살피던 레번이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잘했어. 이달 말부터는 극장에 투자했던 귀족들에게 수익금과 배당된 이자를 보내 주도록 해.”
“예.”
원래라면 아까워 죽겠다며 땅을 치고 울며불며 날뛰었어야 할 일이건만, 레번은 그저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런데.”
레번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공식적으로 이 극장의 가장 큰 투자자는 3황자 전하이신데, 아시다시피…….”
그분은 아가씨께 삥을 뜯기신 게 아니던가요.
레번이 말을 다 끝내지 못한 채 흐렸다.
이 상황에서 그에게 수익금과 배당된 이자를 덧붙여서 돌려보내면 ‘네 돈을 삥 뜯어서 세운 건물로 우리는 이만큼 돈 벌었다.’라고 자랑하는 꼴이 아닌가.
3황자의 성질머리를 생각해 보면 후환이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괜찮아.”
입가에 옅은 미소를 베어 문 도로테아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분께서는 딱히 이득을 바라고 투자하신 것이 아니니까. 돌려 드릴 필요는 없을 거야.”
역시 수틀리면 황제조차도 들이받을 것만 같은 담력을 지닌 도로테아라 하더라도, 더 이상 황자들과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은 거겠지.
대화를 듣고 내심 안도하던 우드를 힐끔 바라본 도로테아가 덧붙였다.
“그렇지만 그분이 보내 주신 성의에 감사 표시 정도는 해야지.”
“그럼 수익금을 보낼까요?”
“황태자 전하께 보내도록 해. 3황자 전하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형님께.”
아무것도 모르는 레번이 명을 듣고 고분고분 새 장부를 꺼내는 것과 달리 우드의 얼굴 근육은 경련했다.
드레스 자락을 살랑이며 단장실을 빠져나가는 도로테아의 뒤로 우드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황실을 상대로 시비라도 걸 생각이냐?”
“글쎄, 별로.”
“두 사람은 이미 네 덕에 삐걱거리는 사이가 아니냐. 이런 상황에서 네가 3황자에게 가야 할 배당금을 황태자에게 보내면…….”
“당분간 갇혀 있어야 할 리처드의 분통이 좀 터지겠지.”
“그걸 알면서!”
소녀의 입이 서늘한 비소(誹笑 : 비웃음) 한 조각을 베어 물었다.
“그래도 그는 살아 있잖아. 배가 아프고, 짜증이 나고, 분노도 할 수 있게끔. 궁 안에서는 여전히 왕처럼 군림하고 있을 테고.”
허리를 꼿꼿하게 편 도로테아의 눈에서 새파란 안광이 비쳤다.
푸른 얼음과도 같은 차갑고 서늘한 감각이 우드의 몸을 굳게 만들었다.
미숙한 권속은 그제야 주인의 마음속 깊은 곳, 숨겨져 있던 서늘하고도 차가운 분노를 느꼈다.
“왜 그렇게 화가 난 거냐? 그자가 무엇을 했길래?”
도로테아는 우드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등을 돌리고 조용히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연 연습에 한창이던 이들이 무대에서 내려와 도로테아의 곁으로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가씨.”
“아가씨, 어서 오세요.”
“아프셨어요?”
“얼굴이 반쪽이 되셨네요.”
재잘거리는 이들 모두 처음 봤을 때와는 달리 말쑥한 차림에 밝아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부평초처럼 거리를 떠돌며 삿대질과 혐오스런 시선을 받던 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가장 먼저 도로테아의 옆자리를 선점한 미네가 제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배시시 웃으며 건넸다.
“어머, 귀족 나으리께 받은 귀한 사탕을…….”
“아가씨께 드리고 싶었나 봐요.”
물끄러미 사탕을 내려다보던 도로테아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른 이들의 차림새도 말쑥했지만, 미네는 귀족가의 어린 영애라 해도 믿을 만큼 차림새가 훌륭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머리카락, 잘 먹어 적당히 살이 오른 두 볼, 매끄럽고 보들보들한 피부와 몸에 맞게끔 신경 써서 만든 고급스런 맞춤 드레스까지.
신수가 훤해진 모습에 우드가 놀랄 지경이었다.
‘여기 있는 이들이 한때 빈민이었다는 사실을 누가 믿을 수 있을까.’
그들에게 둘러싸인 도로테아는 여전히 창백한 낯빛이었지만, 어딘가 묘하게 부드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기분이 묘하군.’
좀 전까지만 하더라도 살기 아닌 살기를 뿜어내던 저 눈동자가 지금은 꼭 잠들기 직전의 편안함과 포근함을 품고 있다는 것이 몹시 기이하게 느껴졌다.
“제가 죽는 장면 연기하는 거 보시겠어요? 저 정말 실감나게 죽거든요.”
“여주인공을 협박할 때 제가 얼마나 살벌하게 연기하는지도 봐 주십시오!”
“주인공들 사이를 반대하는 시아주버님께 뺨을 맞는 신이 있는데, 좀 더 실감나게 맞으려고 만든 인조 가죽도 봐 주세요!”
은은한 미소를 띤 도로테아 앞에서 사람들이 저마다 광기 어린 자랑을 늘어놓았다.
양아치 역을 맡은 남자가 내뱉는 걸쭉한 욕을 들으며 박수를 치는 미네를 본 우드가 떨떠름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거 좀. 예쁘고 동화 같은 이야기도 있는데 왜 하필 통속극이야.’
열정적인 단원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도로테아가 가볍게 두 손으로 박수를 쳤다.
“새로운 극을 올릴 거야.”
도로테아를 둘러싼 단원들은 흥분 가득한 얼굴로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이번에도 사랑 이야기인가요?”
“응.”
탄성이 쏟아졌다.
또 어떤 애틋한 이야기를 공연하게 될지 기대에 잔뜩 부푼 이들을 향해 도로테아가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을 잃고 몰락한 귀족 도련님 이야기야.”
다정히 웃으며 극의 내용을 풀어 나가는 도로테아 옆에서 꾸벅꾸벅 졸던 미네의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아무 말 없이 그 조그마한 목에 손을 가져다 대어 받친 프리드가, 천천히 아이를 도로테아의 무릎에 뉘여 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잠든 천진난만한 얼굴 위로 얼음 기사의 눈빛이 지그시 머물렀다.
* * *
“여보, 이건 너무 비싼 물건 같아요.”
고급스런 주단이 깔린 케이스 안에 놓인 붉은 브로치를 본 여인이 순간 숨을 삼켰다.
영롱하게 빛나는 루비를 중심으로 주변에 조그마한 다이아몬드를 촘촘히 박아 넣은 브로치는, 그저 흘끗 스치듯 보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 외에도 백금과 호박으로 이루어진 테슬과 프린지 장식은 브로치를 더욱 호화스럽게 보이도록 하는 데에 한몫했다.
저택 한 채 값은 너끈히 나갈 것 같은 브로치를 든 여인의 손이 떨렸다.
콜린은 보석을 받아 들고도 기쁘다기보다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코제트의 반응에 미간을 좁혔다.
“선물? 맛있고 귀한 것으로 해 주면 되잖아. 에이든 숙부가 마침 곰을 잡았으니, 귀한 웅담을 줄까? 숙모께 가져다 드릴래?”
그가 아무리 사람의 거죽을 뒤집어쓴 사신이래도, 곰의 정기가 가득 담긴 웅담을 산 채로 씹어 삼키는 것을 좋아하는 여인이 없으리라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일부러 보석상에 들러 추천을 받아 구입한 물건인데.
‘그리 좋아하지 않는군.’
설마, 진짜로 도로테아의 말처럼 웅담을 가져다주었어야 했나.
아내의 예상 못 한 반응에 고민에 잠겼던 콜린은 잠시 머리를 굴린 후, 그가 빠져나갈 수 있을 만한 변명을 마련했다.
“테아의 선물이오. 그 애가 고르고, 내가 계산했소.”
적어도 그의 센스가 부족하다는 오명에서 만큼은 벗어날 수 있겠지.
“착용하지 않으면 그 애가 서운해할 거요.”
도로테아를 들먹인 말에도 코제트는 여전히 브로치를 착용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망설였다.
무뚝뚝하게 바라보고 있던 콜린이 손을 뻗자, 여인의 가녀린 어깨가 순간 흠칫 떨렸다.
“아…….”
아차, 하는 얼굴을 보면서도 콜린은 아무런 말없이 브로치를 집어 들어 그녀의 오른쪽 가슴 위에 꽂아 주었다.
차마 브로치를 건드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그녀가 결국 손을 내렸다.
보석의 영롱한 빛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하나뿐인 남편의 얼굴이 지나치게 창백하다는 점이었다.
‘테아의 건강도 많이 상했다던데.’
콜린의 겉옷을 한쪽 손에 쥔 채 그를 따라 방으로 향하던 코제트는, 은은한 미소와 함께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아들을 보고 걸음을 늦췄다.
“어디 외출이라도 하려고?”
빙긋 웃은 필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테아에게 가는 거라면…….”
“새로 사귄 친구에게 가요. 어쩌면 늦저녁에 테아에게 들를 수도 있지만요.”
필립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코제트는 어느새 방 안으로 사라진 콜린을 눈으로 쫓으며 다급하게 당부했다.
“그 애에게 브로치는 고맙지만 지나치게 무리할 필요는 없다고 전해 주렴. 내가 하고 다니기에는 너무 과분한 물건이야.”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린 필립이 의아한 눈을 한 코제트를 향해 다정하게 속삭였다.
“테아였더라면 그런 선물은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건 아버지께서 고르신 물건이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
“참고로 테아는 웅담을 추천했어요.”
놀란 빛을 띠던 코제트의 얼굴에 순간이지만 안도의 빛이 스쳤다.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키득거리던 필립이 다녀오겠습니다, 하는 인사와 함께 등을 돌렸다.
마차로 향하는 필립의 손에 쥐어진 종이에는 누군가가 휘갈긴 주소가 적혀 있었다.
벤자민 모어. 크래사이드가. 루트베리 65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