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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105)화 (105/242)

혼술사 도로테아 105화

무리하게 일을 하고도 공을 치하받기는커녕, 청문회에 불려 나왔던 귀족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황궁을 빠져나갔다.

궁문 앞에서 검문을 받고 있는 마차의 행렬을 바라보던 윌리엄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며칠째 그의 궁이 마치 제 집인 것처럼 눌어붙은 루크가 있었다.

“테아에게 인사하지 않아도 괜찮겠어?”

“할 이유도 없고, 굳이 나가는 것도 귀찮아.”

“또 그런다.”

퉁명스런 목소리에 윌리엄이 씩 웃었다.

이런저런 소란이 싫어 황도로 들어왔음에도 아버지의 눈을 피해 숨어 있는 동생이, 굳이 이곳을 피난처로 삼은 까닭은 명확했다.

“상황이 잘못되면 나설 생각이었으면서.”

“…….”

자연스레 제게 다가와 과일을 집어다 주는 형을 향해 ‘그럴 생각은 없었고, 아마 자신이 나설 필요 따위는 애초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려던 루크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그저 궁금했을 뿐이다.

도로테아 하이클레어가 어떤 방식으로 판을 뒤집어 놓을지.

‘그렇지만 설마 곧장 황태자를 들이받을 줄이야.’

놀라울 정도의 무모함이라고 해야 할까.

이미 한차례, 그녀에게 경고를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오래전 제 몸도 가누지 못할 만큼 비쩍 곯아 있던 조그마한 아이는, 그때도 맹랑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그를 향해 거침없이 입을 놀렸었다.

‘상응하는 대가 없이 나에게 요구하지 마. 그것이 무엇이든, 날 네 마음대로 움직이려 하지 마.’

분명 옅은 분홍빛을 띠고 있던 눈동자는 기이하게도 그 순간만큼은 새까만 검은빛을 띠고 있었다.

번뜩이는 눈동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것을 떠올린 루크의 미간이 좁아졌다.

“형님께서 화가 많이 나신 것 같던데.”

“상관없어. 폐하께서 일을 전면적으로 재조사하시는 건 형님에게 날린 경고이기도 해. 적어도 몇 년 간은 하이클레어 후작가를 건드릴 수는 없겠지.”

황태자라는 신분을 생각해 봤을 때, 사실상의 근신이었다.

눈앞에서 수족이 잘려 나간 데다, 망신을 당하고, 동복아우까지 외면해야 하는 상황이다.

분하겠지.

그러나 고작 그 때문에 이성을 잃어 또다시 후작가를 향해 손을 뻗는 인사라면, 그릇이 고작 그 정도인 것이다.

채 성년도 맞지 못한 후작가의 어린 영애에게 휘둘려 본분마저 잊은 어리석은 남자.

그렇지만 루크는 황태자가 그러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비록 음험하고 오만한 구석은 있었어도, 황태자는 황태자였다.

“뭐, 시류를 보지 못하는 분은 아니니까. 형님도 당분간은 상황을 지켜보시겠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윌리엄은 쓴 것을 좋아하지 않는 동생을 위해 찻잔에 각설탕을 집어넣었다.

퐁당퐁당 설탕 덩어리가 녹아드는 동안 방에 내려앉은 침묵을 다시 깬 것은 윌리엄이었다.

“다만 이번 일은 묘하네.”

“뭐가?”

“테아 말이야. 리처드에게 화가 났던 걸까?”

그녀와 함께했던 일행들 중 그 누구도 손끝 하나 다친 이가 없었다.

물론 도로테아 본인의 건강은 해치긴 했지만, 그것을 제외한다면 손해를 본 것은 오로지 리처드 단 한 사람뿐.

“그 애라면 이런 방식을 택하지 않아도 리처드쯤이야 얼마든지 밀어낼 수 있었을 텐데.”

굳이 아주 번거로운 방법을 택한 것이 의아했다.

그녀가 설계해 둔 촘촘한 거미줄 위에서 춤을 추게 된 리처드는 결국, 자신의 손으로 스스로의 목을 죄였다.

“꽤 잔인한 방법이었어.”

루크는 미처 녹지 못한 설탕 알갱이가 보이는 제 찻잔을 휘저으며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이유가 있겠지.”

도로테아 하이클레어의 남색 눈이 떠올랐다.

제닉스 부인의 시신을 담고 있던 깊이 가라앉은 시선과, 날뛰는 리처드를 향한 건조한 시선이.

리처드의 말로(末路)는 아마도, 어지간하면 드러날 일이 없었던…… 그녀가 분노한 결과물일까.

그렇다면 꽤 잔인하고 표독스러운 보복이었다.

“다만 몸을 좀 챙겨야 할 텐데.”

걱정스런 윌리엄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긴장했던 루크의 몸이 다시금 가라앉았다.

“무엇을 하든 간에 제 몸을 상하게 하는 건 좋지 않아. 테아가 조금 더 스스로를 아꼈으면 좋겠네.”

창백하게 다 죽어 가는 얼굴을 하고서 누가 누굴 걱정한단 말인가.

“신경 쓸 거 없어. 고작해야 다른 사람을 누르자고 제 몸을 망치는 머저리는 아니니까.”

가장 극적인 순간, 극적인 장소에서 보인 허약함은 그 이상 절묘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에게 적용됐다.

아주 이로운 방향으로.

“걘 그 누구보다 살고 싶어 하거든. 게다가 굳이 다른 이들까지도 ‘허약한 상태’를 알게끔 드러낸다는 건 녀석이 의도한 거야.”

십중팔구 일부러 회복하지 않고 있는 거겠지.

심드렁한 동생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던 윌리엄이 퀭한 얼굴 위로 옅은 미소를 띠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두 사람은 역시 사이가 좋네.”

가축이니 뭐니 하는 소리가 걸려서 혹시 이상한 길로 빠져든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두 사람 모두 단어를 적절하게 사용할 줄 몰라서 그랬던 것뿐일지도.

고개를 주억거리는 윌리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크가 잠시 뜸을 들인 끝에 다시금 입을 열었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네가?”

윌리엄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의 입에서 ‘부탁’이라는 말이 나오다니.

이토록 오랜 시간 서로 알아 오면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우리 큰형님께서 리처드를 달래려 드실 거야.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달래듯 사탕을 쥐여 주며 일을 무마하려 들겠지.”

아무리 한심해도 그는 황태자의 동복아우였으며, 리처드가 등을 돌리는 건 황태자에게도 막심한 손해가 될 테니.

“직접 나설 수는 없을 테니까, 아마도 형의 손을 거쳐 당근을 건네려 들 거야.”

“……그럴지도.”

“그 부탁, 거절해 줘.”

“…….”

당장 손발이 묶인 황태자는 제 손에 흙을 묻히기 싫을 터.

윌리엄이 거절한다면, 리처드의 궁에 사람을 심거나 자신의 사람을 내보여야 한다.

그러나 근신중인 그가 여러 시선이 몰린 지금 같은 때에 자신의 전력을 드러내려고 할까?

“그건…….”

멈칫하고 말을 흐린 윌리엄이 복잡한 눈으로 동생을 살폈다.

문득 루크를 제 가축으로 들이겠다는, 허무맹랑한 말을 당당히 꺼내던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누구의 명도 듣지 않는 떠돌이 들개 같던 동생이, 상대의 의도를 읽는 것으로 모자라 스스로 돕고 있었다.

몹시, 생경한 기분이 그의 가슴에 스몄다.

*   *   *

그 무렵 하이클레어 후작가의 저택 분위기는 비교적 평화로웠다.

긴 출장 후 돌아온 도로테아의 건강 상태가 가문 사람들의 근심을 사긴 했지만, 수행을 끝내고 돌아온 대신관이 다소 낙관적인 말을 건넸으니까.

“과로로 심신이 지친 겁니다. 보아하니 딱히 큰 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니구려. 다만 스트레스에 취약하니 당분간 심신에 부담을 줄 만한 일만 피하면 되겠지요.”

따라서 식탁 위로는 연일 보양식이 올라오고, 지친 마음을 달래는 음악이 울려 퍼졌다.

저택의 고용인들 모두가 ‘과로로 반쪽이 된 우리 아가씨’를 다시 건강하게 만들기 작전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하는 거 아니냐? 네 새벽잠을 깨워서는 안 되니까 소리 내지 않고 훈련을 하라니.”

데인이 투덜거렸다.

모든 것을 다 ‘도로테아’ 위주로 맞춘 저택의 분위기에 따라 그의 생활 리듬이 완벽하게 뒤집힌 탓이었다.

차를 홀짝이며 달달한 간식들을 무서운 속도로 해치우던 도로테아가 해결책을 제시했다.

“온실에서 훈련해. 온실도 넓어.”

“무도회장에서나 들을 법한 음악이 하루 종일 흐르는 곳에서 훈련? 말이 돼?”

“그럼 저택을 나가.”

“당분간 외출 금지야.”

“안됐네.”

짧은 한숨을 쉰 데인이 손을 뻗어 여전히 홀쭉한 도로테아의 뺨을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여기는 언제쯤 다시 통통하게 살이 올라오는 거냐?”

“글쎄.”

기실, 하고자 한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상한 원기를 회복할 수 있었다.

콜린에게도 저택에 틀어박혀 정순한 기운들을 받아들여 머금고 있으라 명해 두었고.

“아직은 좀 더 가엾게 보여야 하지 않을까?”

자신을 얕보고 별거 아닌 양 여겨 주어야만이 깊숙이 감추어 두었던 속내를 드러내지.

인간은 강자 앞에서는 스스로의 음험함을 감추고 몸을 낮추기 마련이다.

그러나 약자 앞에서 만큼은 스스로의 추악한 민낯을 까발려, 깊이 숨어 있는 욕망이 무엇인지 드러내는 데에 거침이 없다.

그래야 제 손아귀에 잡아 흔들 수 있는 인물이라 여기니까.

“가여워 보여야 한다니. 그런 말이 어디 있냐?”

“그래야 사람들이 날 더 걱정해 주잖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진지한 빛을 띤 데인의 눈동자가 그녀와 마주했다.

드물게도 웃음기나 장난기를 쏙 뺀 채 사촌을 눈에 담은 소년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런 소리 하지 마. 걱정은 단순히 네게 마음을 쓰는 형태의 하나일 뿐이야. 우리는 언제나 네 일에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고.”

“알아.”

진짜 알아먹긴 한 건지.

그의 아버지인 펠릭스는 몹시도 엄격한 사람이었다. 자식에게도 스스로에게도.

그리고 그런 그를 길러 낸 노후작, 숀 또한 마찬가지였고.

아니, 어쩌면 하이클레어 후작 가문의 피가 흐르는 이들 모두가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그와 같은 기준을 상대에게도 요구하곤 했다.

딱딱하고 엄숙한 분위기와 흐트러지지 않는 절도 있는 태도.

후작 저택의 숨 막힐 듯한 공기를 멋대로 휘젓고 다닐 수 있도록 허용된 것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오로지 도로테아 하이클레어. 한 사람에게만 늘 예외적이었다.

그토록 온 마음을 숨기거나 부끄러워도 않고 내보이는데, 정작 정성을 쏟는 상대는 왜 늘 위태로워 보이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어린 시절 받았던 외면이 마음속 응어리로 아직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가끔은 그런 과한 생각까지도 할 만큼이나 그의 사촌은 늘 무언가를 갈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는 사람처럼.

도로테아는 제 앞에 쌓인 빈 접시를 밀어내며 테이블 위에 턱을 괴고서, 자못 진지해 보이는 사촌을 향해 배시시 웃었다.

“알고 있어. 단 한순간도 그 진심을 의심해 본 적 없을 만큼이나.”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답지 않게 정색하고서 말을 꺼냈던 데인은 도리어 머쓱해졌다.

머리를 긁적인 그가 덧붙였다.

“솔직히 네가 건강해져도 걱정이 줄어드는 건 아니지. 넌 건강할 때는 건강한 대로 상상할 수 없는 사고를 치고 다니니까…….”

“테아가 아무리 사고를 쳐도 너만 하겠느냐.”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데인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못마땅한 눈초리로 손자를 훑은 후작은 앉아 있던 데인을 밀어냈다.

“가서 네 아버지의 일을 돕거라. 나는 테아와 할 이야기가 있으니.”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지 채 몇 분이 되지도 않았음에도 내려진 축객령에 데인이 입을 삐죽였지만, 이내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빈자리에 앉은 후작은 테이블 위에 쌓인 빈 접시들과 찻주전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핼쑥한 얼굴을 하고 있긴 했지만 손녀의 눈동자는 생기를 가득 담고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던 후작이 불쑥 손녀의 애칭을 불렀다.

“테아야.”

“네, 할아버지.”

“폐하께서는 황태자 전하를 아끼신단다.”

“…….”

“그분은 속이 좁고 의심이 많은 데다, 제국 공신들의 영향력을 지나칠 정도로 견제하는 면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황태자이시지.”

조곤조곤하게 이어지는 후작의 말을 들으며 도로테아는 눈을 깜빡였다.

주름진 손으로 아직 옅은 김이 나는 찻주전자를 들어 올린 후작이 평온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차가 식었으니 새로 가져오라 말을 전하거라.”

있는 듯 없는 듯 가만히 기대어 서 있던 프리드가 주전자를 받아 들었다.

그림자처럼 붙어 있던 호위가 부엌이 있는 방향으로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작이 말을 이었다.

“3황자 전하께서는 스스로가 황태자 전하의 체스 말이 되었다는 사실조차도 몰랐을 게다. 그는 그저 모자란 망나니에 불과해.”

“그렇지만 이제는 적어도 자신의 ‘뒷배’가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자신에게서 등을 돌릴 수 있는 존재임을 알았겠죠.”

황태자가 가진 재력의 원천은 공적으로는 재무 장관이나, 사적으로는 넉넉한 처가의 재산이 있는 3황자에게서 나왔다.

게다가 비록 온갖 자극적인 유흥을 즐기는 3황자일지라도, 그의 사치와 허영은 어떤 면에서 황실의 권위를 높여 주는 역할 또한 하고 있었다.

3황자의 평판과는 별개로, 그를 품음으로써 황태자가 얻고 있던 이점들이 고스란히 사라지게 생긴 것이다.

게다가 그는 동복아우이니, 황후 입장에서도 이번 황태자의 행보가 그리 달갑지만은 않을 터.

후작의 얼굴에 복잡한 빛이 떠올랐다.

“그분이 우리 가문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번 일처럼 곤란한 처지에 놓일 수 있으리라는 것도. 그렇지만 우리는 신중하게 처신해야 해.”

다른 귀족들까지 끌어들인 데다, 명분 싸움에서조차 완벽한 승기를 가진 만큼 황제는 이쪽의 손을 들어 주었지만 그것이 곧 후작가를 지지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제국의 황제는 단순히 앞뒤 상황의 옳고 그름만으로 입장을 표명하지 않으니까.

도로테아는 스펜서 백작령에서 만난 ‘술사’나 ‘수상한 단체’, 키엘 백작의 정체 따위에 대해서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제야 겨우 윤곽이 드러난 셈이지만, 입을 열기에는 아직 섣불렀다.

믿어 주지 않을까 겁이 나서가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면 이쪽이 지나치게 경계하는 듯한 인상을 상대에게 심어 줄 수 있기에.

‘모처럼 접근하기 쉬우라고 이런 꼴을 자처하고 있는데, 그래서는 아니 될 말이지.’

후작은 자신의 말을 조용히 경청하는 손녀를 바라보며 잠시 머뭇거리다 조용하게 물었다.

“아가, 혹시…… 너는 7황자 전하를 황위에 올리고 싶은 게냐?”

뜻밖의 말에 고개를 든 도로테아의 눈에 할아버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가 보였다.

지나치게 똑똑한 손녀에 대한 염려.

그리고 본격적인 정쟁에 발을 들이밀게 되었을 때 후작가가 맞이할 풍파 등을 고려하는 그의 어깨가 얼마나 무거울지 새삼 알 수 있었다.

눈을 끔뻑이던 도로테아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뇨, 루크는 황제가 될 재목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손녀의 말에 후작이 반색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네, 루크는 상대를 온건하게 굴복시키기보다는 힘으로 누르는 것을 택할 테고, 부드럽고 온화한 권유보다는 목에 칼을 들이미는 군주를 좋아할 귀족은 없죠.”

“바로 그거란다!”

“타협해야 할 일이 생겨도 타협을 할 줄 모를 테고, 적당히 눈을 감아야 할 일에도 규율을 들이밀 터이니.”

“공포 정치를 하겠지!”

손녀의 혜안에 무릎을 친 후작의 얼굴이 점차 밝아졌다.

그래, 테아가 아무리 심계가 깊고 별난 아이라고는 하나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정도는 구분할 수 있는 아이지.

“그래서 루크는 황위에 오를 재목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흐뭇해하던 후작을 바라본 테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지만 이대로라면 누가 황위에 오르든 간에 루크는 제거되어야 마땅한 존재로 보이겠죠. 군권을 쥐고 있는 잘 벼려진 검은 권력자에게 큰 위협이니까.”

“그놈이 제거가 되든 말든…….”

나는 상관없다고 말하려던 후작이 말을 흐렸다.

어쨌거나 제국의 황자였고 도로테아도 한때 그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지 않았던가.

할아비가 매정한 인간이라 여기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아깝잖아요. 어디에든 담겨 있지 못하고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튀어나와 있는 것이.”

그 능력은 가히 중하게 쓰일 만하건만.

“어쩔 수 없는 일이란다. 황가에서는 비일비재한 일이야.”

“제가 검집을 만들어 주면 어떨까 생각해 봤어요.”

“검집이라니?”

“잘 길들여서 검집 안에 집어넣으면 유용한 검이 될 수도 있잖아요.”

가축이라 말했을 때에 윌리엄의 표정이 몹시 기괴했던 것을 감안하여 에둘러 꺼낸 말에 후작의 얼굴이 황망해졌다.

바로 뒤에서 에이든이 껄껄 웃으며 다가와 말했다.

“오냐, 똘마니로 거두고 싶다는 말이로구나!”

순간 눈치 없는 아들을 바라보는 후작의 이마 위로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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