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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104)화 (104/242)
  • 혼술사 도로테아 104화

    도로테아를 제외한 채 지목되는 귀족들의 답은 막힘이 없었다.

    제출된 서류는 모두 그들의 필체임이 증명됐고, 스스로 기입했던 내용은 물론이고 기획부터 예산까지 부족한 부분이 없었다.

    “일을 하던 도중 반나절가량 휴식을 취했던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전부요.”

    그 뒤로는 놀 만한 여유가 전혀 없었으니까.

    떳떳한 이들의 소명을 들은 블레어 장관의 눈이 도로테아를 향했다가 황급히 떨어졌다.

    옅은 미소까지 띤 채 여유롭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만 보아도, 그녀를 몰아세워 봤자 얻을 수 있는 게 없으리라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고발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가.’

    청문회가 진행되는 동안 그의 마음속 한구석에 담겨 있던 의구심이 스멀스멀 솟아났다.

    그에게 정보를 넘기던 자가 어느 순간부터 세세한 일과 대신 영상 기록구가 깨어졌다는 이유로 간략한 서류만을 넘겼던 것을.

    청문회장에 나온 귀족들 또한 블레어 장관의 고발이 어딘가 묘하다는 생각을 할 때쯤이었다.

    “장관님께서 하문하신 것들을 종합해 보았을 때 분명 저희 일행의 일정과 어느 정도 부합하는 면이 있군요. 사냥에 대해서나, 7황자 전하께서 합류한 시점 같은 것들이 몹시도 정확하니까요.”

    “…….”

    “그건 고발 내용을 직접 전달한 누군가가 있다는 이야기일 테니, 저희가 크나큰 오해를 샀다는 뜻이겠고요.”

    침묵하는 블레어를 향해 도로테아가 옅은 기침을 뱉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몇 가지 이야기는 빠져 있군요. 도버 스펜서 경이 어찌하여 지하에 감금되었는지, 또 우리가 귀환 도중 암습을 당했다는 것 또한.”

    “……!”

    처음 듣는 이야기에 블레어의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도버 스펜서가 감금된 까닭은 7황자에게 함부로 대들었기 때문이라고 들었건만.

    게다가 암습이라니.

    도로테아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을 보아하니 거짓처럼 들리지도 않았다.

    “그 과정에서 3황자 전하의 유모이신 제닉스 부인께서 목숨을 잃으셨으니, 나머지는 3황자 전하께 직접 발언을 청하는 것이 나을 성싶습니다.”

    도로테아가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살짝 돌려 황제를 향해 차분하게 물었다.

    “3황자 전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

    암습에 대해 들은 바가 없는 것은 황제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성질 같아서는 당장 황궁으로 돌아와 깽판을 쳤을 줄 알았더니.’

    루크는 어디로 간 걸까.

    잠시 침묵하던 황제가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내리고 나직하게 명을 내렸다.

    “3황자, 리처드를 이곳으로 불러라.”

    황태자의 손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대외적으로 고발자는 3황자의 측근이니, 3황자가 그것을 몰랐을 리 없어야 할 테지만.

    사실 리처드는 그 측근이 자신에게 ‘심어져 있던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자신의 든든한 뒷배이자 지지자인 형이 저를 믿지 못하고서 손을 쓸 수 있는 사람을 붙여 두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사람들 또한 의문에 잠기겠지.

    3황자의 측근이 3황자마저 모르고 있었던 사실을 블레어에게 전달하여 고발을 도왔다면, 블레어는 누구를 위해 ‘거짓 고발’까지 하면서 하이클레어 후작가를 저격한 것일지.

    무표정하게 자리를 지키는 황태자의 눈이 처음으로 도로테아를 향했다.

    옷깃에 선연히 남은 핏자국을 모두가 보란 듯이 고개를 반듯하게 든 도로테아는, 굳게 잠겨 있는 문을 힐끔 뒤돌아보았다.

    ‘물론 그보다는 지금 리처드가 이곳에 나타날 수 있을지가 더 문제겠지만.’

    잠시 후, 명을 받고 달려갔던 전령이 돌아와 무언가를 황제에게 속삭이기가 무섭게 그의 표정이 굳었다.

    뒤이어 허둥지둥 달려온 근위대장이 난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3황자 전하께서는 지금 치안대의 조사를 받고 계십니다.”

    황태자가 조용히 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도로테아는 말없이 눈을 내리깐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조사라니. 무슨 혐의로?”

    “갑작스런 습격으로 목숨을 잃은 제닉스 부인의 시신을 검안소에 몰래 들어와 불태우셨다 합니다.”

    “……?!”

    순간 황제의 낯빛이 변했다.

    사건이 전혀 다른 흐름을 타고 굴러가기 시작했다.

    도로테아와 메릴린, 발레리를 제외한 이들은 저마다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벌리거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물론 그중에는 하이클레어 후작가도 있었다.

    “혐의를 부인하고 계시지만, 3황자 전하께서 검안소 주변을 맴돌고 계셨음을 목격한 이가 있는 데다, 무엇보다 그분의 커프스단추가 검안실 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기사의 보고에 황제가 천천히 일어나 분노가 꾹꾹 눌러 잠긴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그를 이곳으로 데려오라. 그리고 에이든 경.”

    “예, 폐하.”

    도로테아를 품에서 조심스레 내려놓은 에이든이 절도 있는 자세로 황제의 부름에 답했다.

    “경이 경호 책임자였으니 암습 상황 때 어떠했는지 짐에게 소상히 고하라. 누가, 어떻게…… 그리고 제닉스 부인이 사망에 이르게 된 과정까지도. 지금 당장.”

    한쪽 무릎을 굽혀 예를 갖춘 에이든의 입이 열렸다.

    제법 따가운 시선에 도로테아가 고개를 돌리자 윌리엄이 먼발치에서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로테아는 그런 그에게 다정한 웃음을 건넸다.

    ‘봤지? 개나 소나 황태자 하는 거. 쟨 저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는데도 저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네가 뭐가 부족해서 고작 2황자로 만족하려 하니.’

    도저히 결심을 세우지 못한다면, 까짓거 도로테아 본인이 황태자를 끌어내리면 알아서 자동으로 승급(?)되겠지.

    그런 음침한 속내와는 달리 다정한 도로테아의 웃음에 후작가 사람들 모두가 찡한 듯 고개를 주억였다.

    “……힘든 와중에도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웃어 주는 것을 보아라. 방금 그렇게 피를 흘리고도, 그저 우리에게는 웃어 주기만 하는구나.”

    그리고 후작의 죽일 듯이 노려보는 시선에 황제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7황자는 어디 있는 게냐?”

    “귀환 도중에 바람처럼 떠나셨답니다.”

    그제야 제대로 된 보고를 들은 황제는 입을 꾹 다문 채 좌중을 훑었다.

    가히 눈빛만으로도 사람 하나쯤은 너끈히 찜 쪄 먹을 듯한 살기였다.

    *   *   *

    영문을 모른 채 끌려와, 청문회의 맨 앞자리에 앉아 있는 도로테아와 그 뒤의 메릴린을 본 리처드의 눈이 커졌다.

    황태자는 제 동복아우의 능력을 높이 산 적이 없었다.

    같은 어미를 두었다는 이유로 그를 품긴 했지만, 내심 아우의 무능력함과 부족한 인성을 경멸해 왔으니 그를 신뢰한 적도 없으리라.

    그러니 그의 계획을 공유한 적 없음은 당연했다.

    리처드 또한 늘 든든한 지지자라 여기는 자신의 형이 저를 그토록 별거 아니게 취급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테고.

    도로테아와 일행들이 고발당했음을 알게 된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얗게 질린 얼굴로 질질 끌려 나온 3황자가 황제의 앞에 부복했다.

    겁먹은 목소리가 중얼중얼 같은 말을 반복했다.

    “폐하, 아닙니다. 아닙니다.”

    궁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치안대에 잡혀 내내 추궁을 받고 있었던 탓일까, 리처드는 이미 넋이 반쯤 나간 듯 보였다.

    기어 들어가는 아들의 목소리에 황제가 팔걸이에 거칠게 손을 내리쳤다.

    “무엇이 아니라는 것이냐? 네가 네 유모의 시신을 불태운 사실이? 그 유모가 암습과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중간에 붙잡았던 술사를 놓치고 죽여야 했던 것도 리처드의 탓이었고, 심지어 암습과 연관된 유모의 시신마저 불태우려 했다.

    일련의 사실들을 죽 늘어놓았을 때, 누가 보더라도 그가 납치범들과 모종의 연관이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저는 정말 그저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저, 주변을 지나던 차였는데…….”

    “그 밤에 그 주변을 배회했다? 시체 검안소가 있는 건물의 주변을 말이더냐?”

    “……예.”

    황제가 증거품으로 내민 커프스단추를 거칠게 내던졌다.

    “검안소에서 발견된 것이다. 누가 보아도 네 것이 분명하구나.”

    그의 소매 안쪽의 단추가 사라진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그마한 단추에조차 화려한 금박을 입혀 제 이니셜을 박는 사치와 허영이, 물건의 주인이 리처드임을 단박에 알려 주었다.

    천천히 제 목을 죄여 오는 자신의 업보에 리처드가 어버버 입을 뻐끔거렸다.

    “저는, 그러니까, 유모에게 마지막 인사를…….”

    “그 밤중에 그곳에 가서 불을 지른 것이 네 인사더냐.”

    리처드가 반짝 고개를 들고는 뒤를 돌아보며 도로테아를 가리켰다.

    이미 이성을 잃은 듯 미약하게 고개를 젓는 황태자조차도 보이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

    “영애가, 후작 영애가 저를 그리로 불러냈습니다! 제가 원해서 간 것이 아닙니다, 폐하!”

    “어찌 영애가 너를 그곳으로 불렀느냐? 너는 왜 거절하지 않고 그곳을 갔고?”

    “…….”

    리처드가 다급하게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분명 전갈을 받고 그 늦은 시각에 궁을 빠져나와 직접 검안소까지 간 것은 분명하게 떠올랐지만 ‘누구’에게 전갈을 받았는지, 또 어째서 의심 한 점 없이 그곳을 향했는지 도통 떠오르지가 않았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는 뒷목이 서늘했다.

    기억이 흐릿한 부분들은 이상하게도 도로테아와 연결되어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뻐끔거리던 리처드가 홀린 듯 중얼거렸다.

    “후작 영애가 한 짓입니다. 전부 후작 영애가…….”

    도로테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서 눈을 내리깔았다.

    몇 번이고 선택할 기회를 주었건만.

    왜 자꾸 그녀가 그로 하여금 그런 선택을 하게끔 만들었다고 여기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슬쩍 자신을 향해 걱정스런 시선을 보내는 데 여념이 없는 가족들을 바라보고, 다시금 눈앞에 엎드려 떨고 있는 어린 사자를 응시했다.

    결국 제닉스 부인은 그녀의 염원을 이룬 셈이 되었다.

    어린 사자가 스스로 독주를 마셨으니, 그 누구도 위험을 무릅쓰거나 다쳐 가면서 그를 멈추지 않아도 되었다.

    이제 그의 폭주는 멈출 테고,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은 아비에 의해 뽑혀 나갈지니.

    도로테아는 말없이 부스스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벌벌 떨고 있는 어리석은 아들을 내려다보는 황제의 눈이 가라앉았다.

    “테아 저 아이가 시신을 불태운다 한들,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이번 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바로 본인인 것을.”

    “…….”

    “게다가 술사를 붙잡은 것도 테아의 호위였다지.”

    어리석은 셋째 아들의 몸이 떨리는 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황제가 한숨을 쉬었다.

    리처드가 애초에 대단한 심계를 가진 인물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적어도 엄청난 범죄 조직과 연루되어 있다거나, 납치를 직접 자행할 만큼의 담력은 없으리라는 것 즈음은.

    그럼에도 스스로 손을 더럽혔다는 것은, 그 스스로 누군가에게 이용당할 만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겠지.

    결백하지 않기에 우물쭈물 사건의 전말을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는 것이다.

    심지어 저를 키워 준 유모의 시신까지 훼손해 가며 지키려 했던 그의 ‘문제’가 무엇이든 간에, 절대 가볍게 넘어갈 문제가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아무래도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겠구나.”

    황제의 말이 끝나자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상황에 넋을 놓고 있던 블레어가 뒤늦게 움찔했다.

    근엄한 목소리가 청문회장을 울렸다.

    “조사단을 파견하라. 내 친히 스펜서 백작령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알아보도록 할 터이니.”

    “…….”

    “그리고 블레어 재무 장관.”

    “……예, 폐하.”

    “자네가 올린 고발장과는 다른 말들이 상당히 많아 보이는군.”

    비쩍 마른 그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멋들어지게 손질한 수염이 모양을 잃고 흐느적대며 입술을 덮고 있었다.

    잔뜩 긴장한 듯 힘이 들어간 어깨를 바라보던 황제가 천천히 일어나 손을 뻗었다.

    블레어를 토닥이는 손길에 힘이 들어갔다.

    “자네의 고발을 도왔던 자는 아무래도 좋지 못한 의도를 가진 듯하군. 고발자의 신변을 보호하는 것이 원칙이나, 이번만큼은 예외일세. 그의 신변을 조사를 맡게 될 감찰관에게 넘기도록.”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면밀하게 재조사할 예정이니.

    황제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 하나하나가 그를 강하게 타격했다.

    하얗게 질린 상태로 그 자리에 굳어 버린 재무 장관을 지나친 황제가 복잡한 얼굴로, 도로테아를 데려가는 후작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귀족들이 줄줄이 빠져나가는 회장 안에서 꿈쩍도 하지 않던 황태자가 가장 느지막하게 몸을 일으켰다.

    여유로웠던 그의 눈에 새파란 예기와 살기가 넘실거렸다.

    지나치게 이곳저곳에서 이름값이 높아져 버린 계집을 찍어 누르고, 할 수 있으면 건방진 일곱 번째 아우까지도 엮을 수 있으면 좋으리라는 생각에 벌인 일이었다.

    동복아우는 물론이고, 자칫하면 제 돈줄이나 다름없는 재무 장관까지 잃을 처지에 놓이게 될 줄이야.

    자신을 스쳐 가는 황제의 실망스런 눈길을 느끼지 못했을 리 없었다.

    성공했더라면 아무런 질책도 없었을 일이건만, 이토록 참담히 실패했으니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몹시도 뼈아팠다.

    *   *   *

    “안색이 너무 좋지 않아, 테아.”

    “괜찮아. 의외로 속은 멀쩡해.”

    진심 어린 말에도 발레리는 걱정을 거두지 않았다.

    살가운 걱정을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메릴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쉬었다.

    사령제(死靈祭)가 죽은 자의 넋을 위로하는 춤이자 노래임을 알았을 때에 말려야 했는데.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방울을 쥐고 열심히 박자를 탔던 것 때문에 마음이 몹시 켕겼다.

    ‘아무리 죽은 사람이 안쓰러워도 산 사람만 하겠냐고.’

    왜 나는 거기서 방울을 흔들고 있었던 거지.

    도로테아를 말리지 못하고 한몫 거들었던 죄책감에 머리를 쥐어뜯던 메릴린이, 저만치 앞에 있는 가문의 마차를 보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그 누구보다 빠르게 청문회장을 빠져나온 아버지가 넋을 놓은 얼굴로 마차 안에 들어앉아 있었다.

    “그럼 먼저 가 볼게요.”

    “혹여 오늘의 일로 질타를 받지는 않으십니까? 부족하지만 제가…….”

    데인의 호의 어린 말에 메릴린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저희 아버지께서는 아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실 거예요.”

    산뜻하게 거절하고 마차에 올라탄 메릴린을 보는 아버지의 두 눈이 검게 죽어 있었다.

    눈앞에서 진짜 피 터지는 ‘정쟁’을 본 그는 이미 위로 향하고자 하는 욕망을 잃은 것 같았다.

    “아버지.”

    “몇 번을 죽었다가 살아난 기분이로구나.”

    “…….”

    “넌 도대체 뭘 하고 다닌 게냐? 나는 그저…….”

    살벌한 청문회를 눈앞에서 목격한 것으로 벌벌 떠는 늙은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메릴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버지가 원하시는 ‘가문의 위상을 높여 승작하게 되는’ 상황이라는 건, 결국 누군가가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뜻이에요.”

    무엇을 원할 때에는 그 이상의 것들을 대가로 내어 놓을 만한 용기도 있어야 하는 법이라서요.

    “그런 이치들을 배우고 다녔어요.”

    도로테아 하이클레어의 곁에서.

    그렇게 중얼거린 메릴린이 창밖으로 떠나는 후작 일가와, 그런 그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만 보고 있는 발레리를 바라보았다.

    먼지가 날리는 마차를 바라보는 발레리의 얼굴에, 놀라울 정도로 표정이 없었다.

    꼭 도로테아가 데리고 다니는 아름다운 외모의 호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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