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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101)화 (101/242)
  • 혼술사 도로테아 101화

    오랜 여행에서 돌아온 메릴린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저택에 들어섰다.

    그런 그녀의 앞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누군가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드디어 돌아왔구나!”

    들뜬 목소리가 그녀를 반겼다.

    “내 몇 번이고 서신을 부치거나 전보를 보낼까 생각했다만, 큰일을 하러 가서 다른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것 같아 이제껏 기다렸지.”

    마치 저를 위해 그랬다는 듯 선심 쓰는 목소리가 거슬렸다.

    메릴린 레어는 기대감 가득한 목소리와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피곤해요. 올라가서 쉬고, 후에 말씀드릴게요.”

    평소라면 아버지를 업신여긴다고 불호령이 떨어졌어야 옳을 태도지만.

    “그래, 오냐. 피곤할 만도 하지. 쉬고 나서 이야기하자꾸나.”

    오늘만큼은 달랐다.

    메릴린은 너그럽고 자애로운 아버지 흉내를 내려는 듯 다정하게 구는 남자를 못 본 척 지나쳐 곧장 층계를 올랐다.

    “아주 대단한 분 납셨네.”

    삐딱하게 빈정거리는 굵직한 목소리에 메릴린이 고개를 돌려 상대를 응시했다.

    문가에 기대어 그녀를 노려보던 오빠, 데이빗은 천천히 방으로 들어와 그녀를 훑었다.

    낯선 드레스를 입은 메릴린을 품평이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너랑은 안 어울려. 돼지 목에다 진주 목걸이를 건다고 해서 네가 뭐 특별히 달라질 것 같아?”

    “빌린 거니까 안 어울리는 건 당연해. 이 드레스 한 벌로 내가 달라 보일 거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메릴린이 담담하게 답했다.

    애초에 스펜서 백작령으로 내려가게 된 것 자체가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거기에 연이은 습격까지 받았으니 그녀가 입을 옷이 마땅히 있을 리가.

    발레리가 빌려준 옷은 확실히 그녀가 평소 차려입는 드레스에 비해 질이 좋고 디자인도 훌륭했지만, 그녀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메릴린은 귀찮다는 듯 데이빗을 응시하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용건만 이야기해. 할 얘기 없으면 쉴 수 있게 나가 주고.”

    평소라면 움츠러들어서 아무 말없이 고개를 수그렸어야 할 메릴린이다.

    그런 그녀가 그를 앞에 뒀는데도 대놓고 귀찮다는 얼굴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제는 당당하게 축객령마저 내리고 있었다.

    ‘이 망할 계집이.’

    언제부터였더라.

    하이클레어 후작가의 영애와 어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마치 본인이 고위 귀족이라도 된 양 구는 것이 몹시도 거슬렸다.

    “너 말이다. 아버지가 좀 잘해 주신다고 너무 그렇게 좋아하지 마라. 아버지는 그냥…….”

    “나도 알아. 좋은 가문과 교류할 유용한 디딤돌 정도로 보고 계신 것뿐이지.”

    딱히 기대한 적도 없건만.

    데이빗은 꼭 메릴린이 아버지의 총애에 기대어 제멋대로 날뛰기라도 한다는 듯 말했다.

    “그래, 네가 그렇게 하이클레어 후작 영애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는 거야 뭐라 하지 않겠지만. 적당히 하란 말이야.”

    “그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들어온 거야?”

    “뭐?”

    “그게 아니라면 용건을 이야기해 줘. 나 정말로 피곤해서 그래.”

    스펜서 백장령으로 가던 길목에서도 목숨의 위협을 몇 번이고 넘겼는데, 집으로 오는 길목에서조차 납치를 당하지 않았던가.

    거기에 눈앞에서 직접 사람이 죽는 광경까지 목격했고.

    “너 진짜 요새 아버지 믿고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인데!”

    “오빠는 그런 말 외에는 할 말이 없어?”

    아버지 따위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오히려 그녀에게는 부자가 똑같이 경멸스러웠다.

    이곳까지 쫄래쫄래 쫓아온 오빠의 목적도 실은 아버지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틀림없이 그쪽 사람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게끔 소개를 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겠지.

    다른 점이 있다면 줄곧 그녀를 발치에 두고 부려 먹었던 그로서는 아쉬운 소리 해 가며 매달리기 싫은 걸 테고.

    “미안하지만 나는 오빠가 무엇을 부탁하든 들어줄 마음이 없어.”

    데인은 자신에게 거의 유일하다시피 ‘진심으로 친절’한 사람이고, 그 외에는 대개 그녀가 어려워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녀의 오빠, 데이빗은 천성적으로 놀고먹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런 그와 어울릴 사람이래 봤자 3황자 리처드 정도였다.

    ‘하다못해 노는 것을 좋아하는 3황자님조차도, 신분이 낮은 오빠와 굳이 어울리려 하지 않으시겠지.’

    “너 이……!”

    돼도 않게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는 그는 양아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미 죽음 앞에서 살아 돌아온 데다, 심심하면 살기부터 뿌리고 보는 7황자와 매일 식사를 했던 메릴린은 눈 하나 깜짝 않고서 오빠를 응시했다.

    데이빗이 성큼성큼 다가와 곧장 손을 높이 들었다.

    “너 진짜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한껏 붉어진 얼굴을 하고 쩌렁쩌렁하게 외친 순간이었다.

    난데없이 창문 틈새로 쏘옥 들어온 다람쥐 한 마리가 데이빗의 다리를 타고 올라 상의 속으로 스며들었다.

    “어, 으?”

    당황한 데이빗과 달리 다람쥐는 특유의 호기심으로 그의 옷 속 구석구석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기어오른 다람쥐가 상의의 목 위로 고개를 쏙 내민 순간, 데이빗은 그 촉촉한 코가 목에 닿는 감촉을 느끼며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다.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려 창문에 비친 그림자를 바라보는 메릴린은 몹시 우울해 보였다.

    곱게 차려입은 병약한 미소녀가 창틀에 매달려 망토 자락을 마치 드레스처럼 손에 쥐고서 공손하게 물었다.

    “늦은 시간에 몹시 실례됨을 알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미리 말씀드렸듯이, 방문첩을 보내어 떠들썩하게 저택으로 들어오는 것보다는 이것이 더 낫다고 생각해서요.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메릴린?”

    상대의 의사를 묻고 있는 도로테아의 예의 바른 말과, 우아한 몸짓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창틀에 매달려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참, 메릴린.”

    “네?”

    “오늘 저택으로 귀환하시고, 저녁 무렵 방문해도 괜찮을까요?”

    “네?”

    “방문첩을 건네고 정문으로 들어갈까도 생각해 봤지만, 메릴린 말대로 정정당당하게 문으로 나간 키엘 백작님이 아버지를 굉장히 슬프게 만드셨거든요.”

    “…….”

    “그러니 창문으로 가야 할지, 문으로 가야 할지 이번에는 의사를 좀 여쭈어보는 것이 좋겠다 싶어서요.”

    “그냥 창문으로 오세요. 아무한테도 들키지 마시고.”

    그 말을 들은 도로테아는 활짝 웃으며, 자신은 언제든 메릴린의 편의를 우선시할 테니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말해 달라고 했었다…….

    메릴린은 한숨을 삼키며, 활짝 열린 창문으로 가볍게 넘어 들어오는 도로테아의 가볍고 우아한 뜀박질을 망연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한밤중에 귀족 영애의 방을 창문을 통해 드나든다는 점에서 이미 예의는 개나 줘 버린 것인데.

    ‘쓸데없이 인사말은 정중하고 공손하기까지.’

    도로테아의 뒤로 따라 들어온 프리드가 조용히 창문을 닫고, 바닥에 기절해 있는 데이빗을 번쩍 들어 신속하게 입과 눈을 가린 채 침대에 내려놓았다.

    한두 번 해 본 것이 아닌 듯 능숙한 기사의 손길에 메릴린의 눈이 짜게 식었다.

    *   *   *

    낯설지만 낯익은 방에 들어선 도로테아는, 마치 제 집이라도 되는 양 자연스레 자리를 잡고 앉아 옷매무새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멍하니 그런 그녀를 관찰하던 메릴린은 옷의 주름을 매만지는 도로테아의 손끝이 미약하게 떨리는 것을 보고서 미간을 좁혔다.

    ‘변함없이 무르다니까.’

    피곤해 죽겠다는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도로테아를 향한 걱정으로 가득 찼다.

    “안색이 너무 나쁜데요, 영애. 좀 쉬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는 일이라서요.”

    어깨를 으쓱하는 도로테아의 안색은 여전히 생기 한 점 없이 창백했다.

    궁을 다녀오는 대신 방에서 휴식을 취했더라면 좀 나았을까.

    그러나 그녀에게도 나름의 각오가 필요했으니까.

    저를 향한 걱정을 모른 척한 도로테아가 슬쩍 말을 돌렸다.

    “다른 게 아니라 오늘 저녁 메릴린이 같이 가 주었으면 하는 곳이 있어서요. 제인을 데려갈까 했지만 메릴린이 가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서.”

    “좋아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메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호쾌함에 도로테아가 오히려 눈을 끔뻑였다.

    “가자면서요.”

    담담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메릴린이 한숨과 함께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제가 가지 않아도 영애는 갈 생각이었잖아요. 그 몸을 하고 혼자 가게 둘 수는 없죠.”

    잠시 말을 끊은 그녀의 시선이, 구석에 있는 프리드에게로 향했다.

    “영애의 호위라는 저 사람은 ‘외부의 공격’ 외에 영애가 스스로의 몸을 축내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요.”

    존재감 없이 서 있던 프리드는 저를 향한 말에도 표정의 변화 없이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켰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도로테아가 닫아 두었던 창을 활짝 열었다.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메릴린은 체념한 얼굴로, 프리드의 옆구리에 끼여 자신의 방 창문을 타고 넘어 준비되어 있던 마차에 올라탔다.

    메릴린은 마차가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고 나서야 궁금한 듯 도로테아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지금 가는 곳이 어디예요?”

    “시체 검안소요.”

    “……네?”

    메릴린의 얼굴이 삽시간에 파랗게 질리는 것을 보던 도로테아가 다정하게 웃었다.

    “같이 가 주신다고 해서 든든해요, 영애. 실은 혼자 가고 싶은 곳은 아니니까요.”

    “그런 델 왜 가요!”

    “가야 해서요?”

    “왜 그런 델 가야 하냐고!”

    “가야 하니까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법 담담함을 유지하고 있던 메릴린은 다시금 제 머리털을 쥐어뜯기 시작했다.

    마차가 어두운 밤을 가르고 목적지를 향하는 길은 두 사람의 대화만큼이나 순탄하고 매끄러웠다.

    *   *   *

    늦은 밤, 건물을 지키고 있어야 할 보초들은 온데간데없었다.

    활짝 열린 문을 거침없이 통과하는 도로테아의 뒤로 머리가 산발이 된 메릴린이 뒤를 따랐다.

    천으로 덮인 여러 시신들이 쌓여 있는 보관소를 거침없이 누비던 그녀가 검안소 깊은 곳에 따로 마련되어 있는 별실로 들어섰다.

    “여기가 어…….”

    물음을 던지던 메릴린이 순간 하려던 말을 끝내지 못하고 삼켰다.

    검시가 이루어지기 전의 시신이 보관되는 장소에, 마치 잠이 든 것처럼 평온한 표정을 한 제닉스 부인이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이건…….”

    도로테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게 왔네요. 다행히 아직 검시를 하라는 명이 떨어지지는 않은 모양이에요. 조사가 시작되었으면 골치 아팠을 텐데.”

    메릴린의 눈이 커졌다.

    “조사요?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잖아요. 게다가 3황자 님께서 유모의 시체를 검시하는 것을 허락하셨을 리가…….”

    도로테아가 손을 뻗어 밀랍 인형처럼 창백한 제닉스 부인의 뺨을 매만졌다.

    서늘한 감촉과 달리 딱딱하게 굳어 있어야 할 시체는 몹시도 부드러웠다.

    “시체 같지 않아요.”

    “계약된 육신이니까요.”

    죽어서까지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영혼을 건 계약이니까.

    도로테아의 말에 메릴린은 할 말을 잃은 듯 그저 멍하니 제닉스 부인을 바라보다, 이내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조사가 시작되면 부인께서 납치범들에게 협력했었다는 사실도 밝혀지겠죠?”

    적어도 이번 납치 건만큼은 부인이 목숨을 걸고 그녀들을 도왔다고 하더라도, 면밀한 조사에 들어가면 스펜서 백작령에서 있었던 일들까지 모두 밝혀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메릴린이 말을 흐렸다.

    안타깝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사를 멈출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요, 조사관을 매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복잡한 표정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자신에게 ‘방울’을 흔들라던 부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연했다.

    도로테아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때였다.

    벽에 기대어 서 있던 프리드가 자세를 바로하고 입구를 응시했다.

    어둠으로 가득 찬 문 너머에서 저벅저벅 걸어 들어온 남자의 창백한 얼굴이 낯익었다.

    도로테아가 옅은 미소와 함께 천천히 옆으로 자리를 옮겨, 남자가 누워 있는 이를 확인할 수 있게끔 배려해 주었다.

    리처드의 눈이 잠이 든 것처럼 그 자리에 고이 누워 있는 그의 유모에게로 향했다.

    “종속의 인(印)이라면 그녀의 왼쪽 어깨에 있을 거예요, 3황자 전하.”

    “…….”

    다정한 안내에 따라, 리처드의 떨리는 손이 목까지 꼭꼭 잠겨 있는 단추를 열어 안을 확인했다.

    이윽고 고개를 든 황자의 눈빛은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이 인장이 어째서 유모에게……!”

    “그것이 그녀가 스펜서 백작령에서 일어난 일련의 수상한 사건들과, 그 외에 제국 내에서 벌어진 일들을 벌인 모종의 단체의 일원이라는 증거예요.”

    도로테아의 말에 메릴린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다른 이도 아니고 3황자에게 직접 사실을 밝히다니. 도대체 어쩔 셈인거지?

    리처드는 예상대로 몹시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를 왜 이리로 불렀지?! 어쩌자는 거야!”

    “알고 싶어 하셨잖아요. 그녀가 정말로 납치에 가담한 공범인지.”

    심지어 직접 심문을 하겠다며 기껏 잡아 놓은 술사를 잡고 설치다, 결국 그 입을 열기는커녕 영원히 막아 버리기까지 했고.

    여유로운 얼굴로 리처드를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또박또박 사실을 짚어 주었다.

    “이제 그녀에게서 종속의 인을 발견한 이들이 그녀의 행적을 쫓을 테죠. 스펜서 백작령에서부터 시작해 그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선 리처드와 눈을 마주한 도로테아가 고개를 기울인 채 그가 생각할 시간을 주려는 듯 느릿하게 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모의 억울함을 풀어 주겠다며, 이미 감금되어 있던 술사를 빼내어 죽음으로 입을 막아 버린 황자님이 사람들의 눈에 어찌 보일까요?”

    상황을 파악한 황자의 눈에 서서히 공포가 차올랐다.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친 리처드가 발작하듯 외쳤다.

    “무슨 소리냐! 나는, 나도 이 여자한테 속은 거야!”

    그토록 애틋하던 감정도 결국 한순간이다.

    끝까지 저밖에 모르는 황자의 추하디추한 모습을 지켜보던 메릴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자 황자의 일그러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몸만 큰 황자는 겁을 잔뜩 먹은 어린아이처럼,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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