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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99)화 (99/242)

혼술사 도로테아 99화

“그걸 확인받고 싶었나?”

무뚝뚝한 물음에 도로테아가 고개를 돌린 채 중얼거렸다.

“그냥. 나도 가끔은…… 내가 지나치게 못돼 처먹은 인간이 아니라는 걸 확인받고 싶어서.”

“너는 그냥 인간인 거다. 인간이란 원래 선과 악을 모두 제 안에 지닌 존재가 아니냐. 딱히 못돼 처먹은 것도, 맑고 순수한 것도 아니야.”

콜린의 말에 도로테아가 뜻밖이라는 듯 밖을 바라보던 눈을 그에게로 향했다.

“지금 위로하는 거야?”

“사실을 말하는 거다.”

살짝 커진 눈으로 물끄러미 콜린을 응시하던 도로테아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래.”

짤막한 답과 함께 마차에 침묵이 흘렀다.

굳이 말을 덧대지 않아도 두 사람 사이는 불편하거나 어색한 공기가 흐르기는커녕 편안하고도 자연스러워 보였다.

*   *   *

출발도 급했지만, 일정은 더욱 급했다.

마차를 끄는 말들이 입에 거품을 물 정도로 하루 종일 이동했던 일행들은 약간의 시간도 지체하고 싶지 않아 했다.

이미 습격을 한차례 받은 직후인 데다, 무려 후작 영애가 납치되었으며 3황자의 유모가 죽지 않았나.

숙박 업소를 미리 잡아 둘 여유도 없었던 일행이 택한 것은 야숙이었다.

“주변에 위협 요소가 있나 살펴보고 오마.”

행여 좋지 않은 일을 연속으로 당한 조카가 불안에 떨까, 에이든은 몹시도 비장한 표정을 하며 숲으로 향했다.

따뜻한 담요를 덮고 머리를 기댄 도로테아가 막 잠을 청하려던 때였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마차의 벽을 뚫고 그녀의 귀까지 흘러들었다.

눈을 붙이기 시작했던 콜린도 덩달아 깬 것인지 얼굴에 짜증이 그득했다.

“……! ……!”

익숙한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버텨 볼까 싶어 고개를 다시 벽에 기댄 순간, 벽 너머로 들려오던 외침이 한층 더 선명하게 귀에 들어왔다.

황자의 외침을 가만히 듣던 도로테아가 한숨과 함께 일어섰다.

“아무래도 나가서 직접 정리해야겠네.”

이런 상황에서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 콜린을 앉혀 두고 마차의 문을 연 순간이었다.

무언가가 날아와 그녀의 귓가를 스쳐 마차의 문에 맞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 박자 느리게 고개를 숙인 도로테아의 눈에, 광분한 황자가 던진 붉은 루비가 박힌 커프스가 눈에 들어왔다.

“그 술사 놈이 이 마차에 있다 하지 않았나! 내 물을 것이 있다니까!”

“황자 전하, 그자는 납치에 가담했기에 아주 중요한 증인입니다.”

“비켜!”

잔뜩 흥분한 리처드의 고양된 목소리가 귀를 얼얼하게 만들었다.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머리채를 잡힌 술사가 황자의 손에 질질 끌려 나왔다.

‘곤란한데…….’

이미 상대가 올 수밖에 없게끔 함정을 파 놓은 상태라지만, 나름대로 중히 쓸 수도 있는 인물이었다.

“3황자 전하.”

도로테아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는 리처드의 흰자위가 시뻘겠다.

그녀는 제 분에 못 이겨 실핏줄이 터진 눈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요구했다.

“그자를 내려놓으세요. 일행의 책임자는 저인걸요. 전하께서는 사건을 직접적으로 조사하실 권한이 없으십니다.”

뿌득, 이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감히 내 유모를 두고 납치에 가담한 공범이라 떠들어 대는 것들이 사방에 있는데, 나더러 지금 조사할 권한이 없다?”

“…….”

“내 유모는 애초에 뒈졌어야 할 영애의 목숨을 구하려 대신 죽기까지 했건만, 나보고 그녀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란 말인가!”

그때, 리처드의 손에서 축 늘어져 있던 술사가 별안간 벌떡 일어났다.

끌려 나오며 줄이 헐거워졌던 것인지, 누군가가 헐겁게 만들어 두었던 것인지.

어느새 풀린 손으로 벼락같이 리처드를 밀쳐 낸 그가 도로테아를 향해 돌진했다.

허약한 술사라고는 믿기지 않는, 나름 재빠른 속도였다.

도로테아의 뒤에 있던 필립이 앞으로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한발 앞서 도로테아에게로 향하는 술사를 가로막았다.

촤악.

잘 손질된 검이 남자를 일직선으로 내리그었다.

날카로운 검날에 상체가 베인 남자의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

다들 경악스런 얼굴로, 검을 휘둘러 일격에 술사의 목숨을 앗아 간 귀족 영애를 바라보았다. 발레리 제르망이 표정 없는 얼굴을 하고서 제 발치에 쓰러진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댕그랑.

피 묻은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제아무리 에이든에게 훈련을 받았다고는 하나, 제대로 검을 써 본 적 없었을 연약한 두 손이 검의 반동으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피가 튀어 엉망이 된 드레스를 차분히 살핀 발레리가 얼굴에 튄 피를 닦아 내며 뒤를 돌아 웃었다.

“괜찮아, 테아?”

첫 살인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침착한 태도에 침음이 흘렀다.

푸른빛 드레스에 낭자한 핏자국을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발레리. 난 괜찮아.”

짤막한 답에 발레리 제르망이 환하게 웃었다.

필립의 눈이 조용히 바닥에 떨어진 검을 응시했다.

날카롭게 잘 벼려진 검날과 투박한 손잡이의 형태가 몹시도 낯익었다.

도로테아는 천천히 발레리에게로 다가가 그녀가 미처 닦아 내지 못한 피를 마저 닦아 주었다.

“수고했어, 발레리.”

들어가서 쉬는 것이 좋겠어.

*   *   *

제 분에 못 이겨 사고를 치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는지, 눈에 잔뜩 들어찼던 독기가 쏙 빠진 리처드가 자신의 마차에 틀어박혔다.

제아무리 안하무인이어도 그가 저지른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곰을 사냥하고 신이 나서 돌아왔던 에이든은, 그가 자리를 비운 새에 일어난 참사에 풀이 잔뜩 죽은 채 조카의 눈치를 봤다.

눈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이미 제 형제를 수십 번도 더 죽였을 루크는 살기를 뿜어내던 것을 멈추고서 말에 올라탔다.

“먼저 황도로 돌아가겠다.”

훌쩍 떠나는 루크의 뒤로 일행들은 말없이 피가 낭자한 자리를 정리했다.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더라도 사람이 죽은 곳에서 잠을 청할 만큼 굵은 신경 줄을 가진 이들은 없었다.

“바, 발레리 영애는 괜찮겠죠?”

“그럼요, 메릴린. 그녀는 괜찮을 거예요.”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이유로 마차 안에 틀어박힌 발레리가 걱정된 것일까.

메릴린의 시선이 발레리가 타고 있는 마차에 잠시 머물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죽은 남자의 피를 뒤집어쓴 채 웃고 있던 발레리의 얼굴이 아직도 뇌리에 선연했다.

‘그녀의 검에 사람이…….’

죽었다.

분명 술사가 달려들 때 보여 주었던 몸놀림만 보아도, 그는 검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인물은 아닌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는 하나 성인 남자를, 그것도 상대적으로 가녀린 몸집의 귀족 영애가 일격에 베려면 정말 가진 힘을 다해서 내리쳐야 했을 테지.

발레리 제르망의 떨리던 두 손과 동요 한 점 없이 빛나던 두 눈.

피를 뒤집어쓴 얼굴에 피어난 부드럽고 상냥한 웃음을 떠올린 메릴린이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걸 좀 마시려무나, 테아야. 메릴린 영애도 몸을 좀 녹이십시오.”

상황을 정리하던 벤이 잊지 않고 다가와 두 사람을 챙겼다.

손에 쥐어진 것은 진한 갈색 빛을 띠는 따뜻한 초콜릿 음료였다.

다디단 냄새를 풍기는 음료에서 느껴지는 온기 덕일까. 어딘가 모르게 불편했던 속이 마시기도 전에 편안해졌다.

걸쭉한 액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메릴린이 불쑥 물었다.

“발레리 영애는 언제나 저렇게 영애에게 헌신적인가요?”

“도움이 많이 되죠.”

도로테아의 간접적인 인정에 메릴린의 얼굴이 더욱 묘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늘 붙어 다니는 두 사람은 자타가 공인하는 절친한 사이였지만, 생각해 보면 두 사람이 서로 알고 지낸 지 불과 채 1년도 되지 않았다.

그동안 두 사람 간에 대단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도로테아가 특별히 발레리에게 무언가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도 들어 본 적 없다.

“친구 관계라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일방적인 헌신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해서 제르망 자작 가문이 하이클레어 가문의 도움을 받거나 위세를 등에 업고서 일을 도모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째서 도로테아에게 저토록 헌신적인 걸까?

“무슨 생각해요?”

몸을 녹일 요량으로 피운 장작불에 반짝이는 남빛 눈동자는, 평소보다 한층 더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검을 휘두른 발레리만큼은 아니지만 오늘 하루 납치당한 것은 물론이고 눈앞에서 죽음을 목격한 도로테아의 얼굴 역시 놀라울 정도로 담담했다.

홀린 듯 눈동자를 바라보던 메릴린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 저, 3황자 전하가 갑자기 흥분하셔서 그 술사를 끌어낸 게 좀 이상해서요.”

“리처드가 말했잖아요. 누군가 유모를 모욕했다고.”

“그러니까, 그 부분이요.”

다들 갑자기 사라졌던 제닉스 부인이 도로테아와 함께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좀 의아해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납치범과 한패일 거라는 추측은 지나치게 극단적이었다.

결정적으로 메릴린과 도로테아가 자세한 상황에 대해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다.

설마 자신을 납치한 공범을 두둔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테니까, 설령 아귀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후에 조사를 통해 밝힐 수 있으리라 생각했겠지.

“3황자 전하가 들을 수도 있는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를 떠들은 건, 어쩌면 일부러…….”

누군가가 그를 도발해 술사를 끌어내길 바랐던 건 아닐까.

재빠르게 리처드를 뿌리치고 도망가려 했던 술사의 반응만 보더라도, 이곳에 그를 도우려던 인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에는 충분히 신빙성이 있었다.

“메릴린, 그리 깊게 생각할 것 없어요. 그자는 이미 죽었으니 납치범들에 대해 알아낼 기회는 사라진 셈인걸요. 고민해 봤자 죽은 이가 입을 열지는 못하니까요.”

“…….”

발레리의 헌신이 되레 독이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제닉스 부인이 목숨마저 희생해 가며 얻어 냈던 상대의 ‘꼬리’를 심문할 기회까지 잃은 셈이니까.

“결국…… 얻은 게 아무것도 없군요.”

“얻은 게 왜 없죠?”

“네?”

도로테아의 의아한 물음에 메릴린이 당황해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인 도로테아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제가 손에 쥐었던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길바닥에 나뒹구는 돌멩이 취급을 하다, 잃고 나서는 잃은 원인을 남에게 전가하는 멍청이 하나를 치울 수 있게 되었는데요.”

“……그거, 혹시 그러니까…….”

3황자 님을 지칭하는 말인가요?

메릴린이 복잡 미묘한 얼굴로 리처드가 틀어박힌 마차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치만 3황자 님의 뒤에는 황태자 전하께서 계시는걸요.”

리처드가 소문난 망나니에 멍청한 인사라 해도 뒤에서나 수군거리지 앞에서는 말도 못 꺼내는 까닭이 거기 있었다.

제국의 황자라는 신분에 더해 일을 망쳐도 수습할 수 있는 재력, 사건을 무마해 줄 뒷배까지.

“괜찮아요. 제 뒤에도 대단한 분이 계셔서.”

“어…….”

황제는 줄곧 로헨 왕국과의 동맹을 원해 왔고, 도로테아는 그것을 위해 파견된 인물이었다.

리처드의 난동은 ‘고작’ 죄인을 놓아준 실수에 불과할지도 모르나, 크게 본다면 국가적 차원에서 도모하는 일을 망친 반역자를 놓치게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모든 것이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중대한 교훈과 함께 도로테아가 제국에서 따를 자 없는 권력자를 입에 올렸다.

“폐하께 이를 거예요.”

“…….”

활짝 웃는 얼굴을 바라보며 메릴린이 눈을 끔뻑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도로테아 하이클레어는 진심으로, 그 누구보다 더 리처드를 경멸하고 싫어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권위를 내세워 짓누르려 들었던 쥬벨 백작에게조차도 ‘나잇값 못해서 귀엽다.’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하던 도로테아가 아닌가.

‘정말 싫은 거구나.’

이런저런 생각들이 복잡하게 뒤엉키자 머리가 아파 왔다.

결국 이 상황들을 이성적으로 정리하는 것을 포기한 메릴린이 마차에 올라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도로테아는, 어느새 제 뒤에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있는 프리드를 바라봤다.

“나뭇잎이 묻었네.”

손을 뻗어 얼굴에 붙은 나뭇잎을 떼어 주던 그녀가 별안간 손바닥으로 뺨을 가볍게 톡 두드렸다.

“물건을 함부로 빌려주면 못써.”

“…….”

“기사에게 검은 목숨과도 같은 것이라던데. 네 목숨을 함부로 남에게 내주면 안 되지.”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던 기사는 스르르 제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수그린 채 벌을 청하는 자신의 기사를 바라보던 도로테아는, 미소 띤 얼굴로 천천히 몸을 돌려 아무런 말없이 마차로 들어가 버렸다.

마치 바위처럼 무릎을 꿇은 채 그 자리에 굳어 있는 프리드를 본 데인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쟨 왜 저기서 저러고 있어?”

“죄를 청하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리처드 그 새끼는 마차에서 잠이나 처자고 있는데, 에이든 삼촌이랑 숲까지 가서 맨손으로 곰을 잡아 온 애가 왜 죄를 청하고 있냐고.”

심지어 곰도 그냥 곰이 아니라 코디악(Kodiac : 최대 3.8미터, 무게 370킬로그램에 달하는 육식 곰) 종이던데.

“테아 쟤…… 화난 걸까?”

“글쎄, 화가 난 것 같긴 하지?”

“역시 먹을 게 부족했던 것 같아. 식량을 좀 더 구해 봐야겠다.”

왜 엉뚱한 데 화를 내냐며 어이없어하다가도 결국 ‘화를 풀어 주어야겠다.’라고 결론짓고 홀로 숲으로 들어가는 데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필립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이러고 계시면 테아의 평판에 누가 됩니다. 그만 일어나세요.”

“…….”

시신을 수습했던 자리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검을 들고 온 필립이, 그의 앞에 피 묻은 검을 집어 던졌다.

“경은 앞으로 본인의 검을 좀 더 세심히 관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물론 검 없이도 경은 충분히 강하지만, 그것과는 다른 문제니까요.”

아름다운 얼굴의 귀족 소년은 상냥한 얼굴을 하고,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조곤조곤하게 가르치듯 말을 덧붙였다.

“귀족 영애에게조차 저항 없이 빼앗길 검이라면 없는 것만 못하지 않을까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던 프리드의 메마른 눈이 검을 내려다보았다.

피가 굳어 가며 진득해진 탓에 이것저것 달라붙은 검은 몹시도 지저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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