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사 도로테아 95화
조금 수척해졌나.
수려한 얼굴에 살짝 드리운 그림자가 오히려 그의 매력을 한층 더 높여 주었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일격이 키엘을 꽤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세우기는 한 것인지, 웃음 속에 감추고 있던 날카로운 기세가 주머니의 송곳처럼 삐쭉 튀어나와 있었다.
물끄러미 그를 관찰하던 도로테아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기척을 조금 감추시는 것이 좋겠어요. 문밖에 있는 제 외사촌은 감이 좋은 편이라.”
“소리를 질러 도움을 청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만?”
“정말 저를 해하려 하셨더라면, 방 안에 들어선 순간 저는 죽은 목숨이었겠죠.”
도로테아의 말에 시위라도 하듯 그녀의 뒤에서 뽁, 튀어나온 리리가 주변을 빙빙 돌았다.
키엘은 여전히 안색이 좋지 않은 도로테아를 조심스레 자리에 앉혀 주었다.
“처음 만났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구나. 기껏 볼만해졌건만, 다시 못 봐 줄 몰골이 되었어.”
볼을 톡톡 두드리는 손길은 위협적이기보다는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때도 은인께서는 제가 못 봐 줄 꼴이라며 온갖 보양식을 잔뜩 먹이셨어요.”
“그랬던가.”
빙긋 웃은 키엘이 손을 거두어들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답지 않은 짓들을 많이 했었지. 너는 참으로 흥미로운 존재였으니.”
옛일을 회상하는가 싶던 그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은인이라?”
“…….”
“꼬박꼬박 그리 부르는 것치고 너는 내게 꽤 가혹한 짓을 한 것 같은데.”
도로테아의 시선이 키엘의 짙은 옷 사이사이 비치는 묘한 얼룩으로 향했다.
옷 색깔이 짙은 데다 주변이 어두워 주의해서 보지 않으면 제대로 눈에 띄지 않을 정도였지만, 온몸에서 풍기는 비릿한 피 냄새가 그가 무엇을 하다 온 것인지 짐작케 했다.
감옥에 있는 이들이라면 떠날 때에 진즉 정리했으니, 이번에는 무엇을 하고 오신 것이려나.
도로테아가 궁금하다는 듯 말간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너는 예나 지금이나 겁을 먹는 법이 없군.”
“그러기에는 은인께서 제게 너무 관대하셔서요. 자꾸 오냐오냐해 주시니 제 버릇이 나빠진 거죠.”
“이런 것까지 내 탓으로 돌리겠다?”
웃음기 어린 물음 끝에 그가 테이블 위에 있던 물잔을 들어 목을 축이고는 대뜸 본론을 꺼냈다.
“작별 인사를 해야겠다.”
“멀리 가시나요?”
도로테아의 물음에 키엘의 얼굴에 미소가 짙어졌다.
“네가 내 생각보다 더 맹랑하고 영리한 탓이야. 나를 꽤 곤란하게 만들어 주었으니.”
그가 고개를 들어 콜린의 방이 있는 방향을 흘끗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여차하면 잠이나 실컷 자게끔 사람 하나 건져 갈 생각으로 이곳으로 왔건만…… 예상외의 일에 발목을 붙잡혀서 말이지.”
“저런, 제가 또 은혜를 잘못 갚았나 보네요. 이럴 줄 알았더라면 진작 두 황자 전하를 돌려보낼 것을 그랬어요. 그러면 은인께서 좀 더 수월히 원하는 바를 이루셨을지도 모르는데.”
“황자 따위야 그리 대단한 것들도 아니지.”
제국의 황자를 무려 ‘따위’로 칭한 백작이 창가로 향했다.
막 창문을 열려던 그가 생각났다는 듯 뒤를 돌았다.
“너도 바빠질 게다.”
“그래요?”
“로헨 왕국에서 당초 이야기된 것보다 급하게 사절을 파견하겠다고 통보해 왔으니, 곧 궁에서 기별이 올 게야.”
“…….”
도로테아는 궁의 전령이 도착하기도 전에 타국의 사절단 방문 일정을 훤히 꿰고 있는 키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로헨 왕국과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밝힌 셈이었다.
아닌 척 뒤통수를 친 그녀가 난감해질 만큼 키엘 스펜서의 호의는 차고 넘쳤다.
도로테아는 드레스 자락을 쥐고 가볍게 무릎을 굽혀 인사를 건넸다.
“은인의 호의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네 일 처리가 제법 마음에 들었거든.”
“…….”
“3황자 시해 건은 자칫하면 수십이 죽어 나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7황자는 범인을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고, 목표를 위해서라면 살생을 꺼리지 않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선 도로테아를 담은 그의 눈에 옅은 감탄이 서렸다.
“너는 도버를 풀어놓고 함정을 만들어 상대를 끄집어냈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다치는 사람이 없게끔 완벽하게 일을 처리했다.”
“…….”
“정작 나는 그들 모두를 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제닉스 부인은 이미 그와 손을 잡을 때부터 죽음을 각오한 상태였다.
성의 고용인 대부분은 도버의 만행이 황자인 리처드의 묵인 아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협조하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그가 스펜서 백작령에서 날뛸 때마다 쌓인 원한이 차고 넘쳤으니까.
“내 영지민들의 목숨을 구해 주었으니 감사해야겠지.”
“궁금한 것이 있어요.”
창틀에 기댄 키엘이 여유로운 얼굴로 픽 웃었다.
“굳이 제닉스 부인의 손을 빌리지 않으셔도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으셨을 텐데, 어째서 부인의 손을 빌리셨어요?”
부인 홀로 이 계획을 성사시킬 수 없으니 당연하게도 성의 고용인들의 협조를 빌릴 수밖에 없고, 계획에 참여하는 이들이 많아지면 자연스레 발각 가능성도 높아진다.
차라리 곁에 있는 그림자들을 이용해 ‘처리’하는 것이 더 나았을 텐데.
“그편이 더 재미있지 않니.”
별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답했지만, 어느새 말속에 어려 있던 웃음기는 사라져 있었다.
“한때 아들을 대신하여 애지중지 품었던 아이에게 손을 쓰다니. 여인들의 모정이라는 것은 참 대단하지. 어쩌면 제가 낳은 자식이 아니기에 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가슴으로 낳은 자식인걸요.”
냉소적인 말에 도로테아가 낭랑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진정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스스로의 손을 더럽히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저 외면해 버리면 그만이었을 텐데.”
아이가 더 이상 괴물이 되어 가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던 거다.
사랑하는 만큼 망가지지 않길 바랐으니, 적어도 더 나아가지 않기를. 이제는 멈추기를.
또 다른 누군가의 원한을 사지 않기를.
“부인의 모정이 모자라서 일이 이렇게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도로테아의 말에 키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눈에 서린 알 수 없을 감정을 모른 척 도로테아가 이야기를 꺼냈다.
“한 망국의 장군이 있었어요.”
몹시 뜬금없는 서두에 키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귀를 기울였다.
“왕은 책임을 내팽개친 채 향응에 빠졌고, 강대한 군이 쳐들어와 이미 열세가 뚜렷했던 상황에서 장군은 마지막 결사대를 조직했어요.”
“…….”
“5만 대 5천. 극복할 수 있는 수도 아니었거니와, 이미 지켜야 할 나라는 무너져 엉망이 된 상황이었으니 그도 최후의 결전임을 예상했을 거예요.”
“그래서?”
“그래서 장군은 결전을 시작하기 전에 가장 먼저 자신의 소중한 이들을 모두 베고서 전투에 임했죠. 사랑하는 아내와 아끼던 자식들 모두를 본인의 검으로 베고서요.”
그리고 4번의 치열한 전투 속에서 무려 3번을 이겼다.
마지막 4번째 전투에서 결국 그와 휘하 장병 모두가 사망하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놀라울 정도의 분전이었다.
“저는 그 장군의 행동을 지지하진 않아요.”
설령 전투가 끝나고 처자식의 처지가 몰락했을지라도, 아이는 아직 제대로 삶을 살아 보지도 못한 처지가 아닌가.
“저라면 결전을 택하느니 항복했을 거예요. 그리고 곁에 있는 가족들의 안위를 더 챙겼겠죠.”
나라가 이미 무너졌는데 무엇을 위해 검을 든단 말인가.
“다만 그가 아무런 애정이 없었기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사랑하는 가족들의 목숨을 본인의 스스로 앗아 갔을 리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저 차마 눈을 감아서라도 상상할 수 없었던 것뿐이었겠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비참한 인생을 꾸려 갈 소중한 가족들의 미래를.
“제닉스 부인은 진심으로 리처드를 사랑했어요. 그의 옆에서 달콤한 말을 흩뿌리거나 아첨을 떨어 대는 이들보다도 더.”
그렇기에 리처드의 끝을, 더 나아가 괴물이 될 그를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길고 긴 도로테아의 이야기를 줄곧 듣고만 있던 키엘이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동요 한 점 내비치지 않는 얼굴을 한 남자는 도로테아의 코앞까지 다가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몸을 챙기는 것이 좋겠다.”
푹신한 여우 털목도리를 도로테아의 목에 둘러 준 키엘은 꼼꼼하고 세심한 손길로 목도리를 여며 준 뒤 천천히 손을 뗐다.
“나는 사람에게 그리 애정을 갖지 않는 편이지만.”
“…….”
“네가 아픈 것은 보고 싶지 않구나.”
“괜찮아요. 원래 제 사람들은 다들 그래요.”
도로테아의 새침한 말에 키엘이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방을 빠져나가기 위해 창문을 연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노크도 없이 벌컥 도로테아의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영애, 지금 밖에……!”
황급히 방 안으로 들어선 메릴린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막 방을 나가려던 키엘 스펜서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빙긋 웃으며 메릴린을 향해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좋은 저녁입니다, 레어 남작 영애.”
“그, 아니. 저기…….”
허둥대는 메릴린이 황급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굳게 닫힌 방문 덕에 이 상황을 보는 눈이라고는 방 안에 있는 셋뿐이었다.
막 성년을 앞둔 귀족 영애의 방을 드나드는 미혼의 백작이라니.
메릴린이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속삭였다.
“도대체 어떻게 이곳에 계시는 거예요……!”
“큰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조용히 인사만 하고 가려 했던 것뿐입니다만. 놀라게 만들어 미안하군요.”
오래전 메릴린의 방을 ‘새벽 방문’했던 도로테아가 떠오르는 행보였다.
도로테아가 아주 정중한 태도로 부적절한 시각에, 부적절한 장소로 방문했었던 악몽 같은 기억이 떠오르자 그녀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키엘이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부드럽게 달래듯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지금 막 빠져나가려던 차였으니까요.”
창문을 여는 그를 본 메릴린이 기겁하고 손을 뻗었다.
“어디로 나가시려고요!”
“창문이 가장 빠르고 편하니까요.”
“문을 이용하시라고요, 문을!”
“문을?”
도대체가.
귀족이라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상식이 없단 말인가.
도로테아나 도로테아와 엮인 이들과 지내다 보면 꼭 그녀가 비상식적인 인물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 백작씩이나 돼서 굳이 귀족 영애의 방 창문으로 자신의 영지에 있는 ‘성’을 빠져나가려는 거냐고.
키엘이 진지하게 물었다.
“진짜로 문을 이용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시라고요! 출입하라고 만들어 놓은 문을 두고 왜 창문을 이용하시는데요!”
메릴린의 말을 듣던 키엘 스펜서가 고개를 돌려 도로테아를 향해 말했다.
“문을 이용하라는구나.”
“네, 메릴린은 정정당당한 방문을 좋아하더라고요. 저도 창문으로 다니는 건 금지당했어요.”
“당연하죠!”
사람이 다니면 안 되는 곳이라고 써 붙여 놓기라도 해야 하나.
메릴린이 씩씩대는 것을 본 키엘이 짐짓 진지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실례를 무릅쓰고 문을 이용해 성을 나가겠습니다.”
팔짱을 낀 메릴린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지켜보는 가운데 키엘은 창틀에 기대고 있던 몸을 떼고 느릿하게 문을 향해 걸었다.
이윽고 그가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간 뒤에야 도로테아가 물었다.
“그런데 영애는 무슨 일로 그리 급하게 제 방을 찾은 거죠?”
“아, 다른 게 아니라 성에 손님이 와서요.”
“손님이요?”
“영애의 아버님께서 지금 도착해 계세요. 영애의 상태를 듣고 급히 내려오셨다고…….”
잠깐. 그러고 보니…….
별생각 없이 소식을 전하던 메릴린이 말을 하다 말고 얼어붙었다.
들어야 할 만한 내용을 모두 전해 들은 도로테아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복도가 소란스러운 거군요. 백작님과 우리 아버지, 두 분이서 만나셨나 봐요.”
열린 문으로 굳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각에 어찌하여 딸아이의 방에서 나오시게 된 건지 분명히 말씀해 주셔야 할 겁니다.”
경계심이 잔뜩 밴 벤의 단호한 목소리가 문틈을 타고 실려 들어왔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눈을 끔뻑이던 도로테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넋을 놓고 있는 메릴린에게 말을 건넸다.
“스펜서 백작께서는 분명 문을 통해 정정당당하게 나가셨는데도 아버지께서 화가 나셨네요.”
그냥 창문을 이용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싶어요, 메릴린.
* * *
늦은 저녁, 백작저로 돌아온 키엘 스펜서는 자신이 초대하지 않은 낯선 침입자를 싸늘히 무시했다.
거칠게 쉰 목소리가 그를 다그쳤다.
“만나는 보았습니까? 하이클레어 후작 영애를 데려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어찌하여 그래야 하지?”
조급해 보이는 상대와는 달리 그의 말에 대꾸하는 키엘 스펜서의 목소리에는 여유가 넘쳤다.
바득, 이를 간 상대가 얼굴을 구긴 채 소리를 높였다.
“지금 백작은 우리와의 연을 끊겠다는 거요?!”
“내가 분명히 말했던 것 같은데. 그 아이와 일행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애당초 당신들의 목적은 ‘증인’을 없애는 것이라 하지 않았나.”
“그렇게 싸고도는데 어찌 손끝 하나 건들 수 있겠소! 게다가 이번 일로 일방적으로 손해를 본 건 바로 우리요! 무슨 생각으로 도버를 이곳으로 보낸 거요?”
다다다다 쏘는 말을 반쯤 무시한 키엘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두고 의자에 느긋하게 기대어 앉아 다리를 꼰 채 답했다.
“제 발로 알아서 들어간 것을 누구의 탓으로 돌리는 겐가.”
“당신의 조카가 아니오!”
“애초 그 애에게 멋대로 ‘사람을 건네줄 테니 영지를 휘젓고 다녀라.’며 부추긴 것은 당신들이 아닌가. 나 몰래 뒤에서 움직일 때는 언제고 이제 와 내게 수습하라니 우습군.”
한마디도 져 주는 법이 없었다.
키엘을 노려보던 중년의 남자는 한참의 침묵 뒤 살기 어린 목소리로 내뱉었다.
“제아무리 당신이라도 우리의 협력 없이는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을 거요.”
“내가 원하는 바?”
“행여 당신이 ‘황태후’의 배에서 태어난 유일한 적자임이 밝혀진다면.”
“…….”
“지금의 황제가 당신을 살려 둘 것 같소?”
물음을 빙자한 은근한 협박이었다.
그저 가만히 미소 짓고 있던 키엘 스펜서의 뒤에서, 줄곧 기척을 감추고 있던 그림자가 튀어나와 눈앞의 남자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바닥에 나뒹구는 시체를 내려다보던 키엘이 중얼거렸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가만있는 사람을 내버려 두질 않는군.”
원해서 그리 태어난 것도 아니건만.
한숨처럼 나오려던 말을 삼킨 키엘이 피곤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고단한 삶의 무게가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