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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93)화 (93/242)

혼술사 도로테아 93화

“양이 좋겠어.”

“무엇이 말인가.”

“가축 말이야. 내 울타리 안에 넣을 가축은 양이 좋겠다고.”

약혼 제안을 받고 내뱉은 가축 발언에 도로테아는 몹시 즐거워했다. 그뿐만 아니라 한술 더 떠서 제국의 황자를 진심으로 가축 취급하기 시작했다.

“생각해 봐. 말은 도망가기 십상이고 소는 내게 위협이 될 만한 힘이 있잖아. 그런데 양은 울타리 밖에 나갔다가는 육식동물들의 먹잇감이 되어 버릴 테니까.”

“…….”

“한번 길들여지고 나면, 밖에서 살아가기 힘들어지겠지.”

조잘조잘 떠들어 대는 얼굴을 바라보던 루크가 고개를 돌렸다.

헛소리에 일일이 답을 해 주다 보면 자신의 수준까지 바닥으로 내려갈 것이 뻔했다.

루크가 입을 다문 채 무시로 일관하자, 도로테아는 그를 놀려먹던 것을 그만두고서 다시 손수건에 붉은 문양을 채우는 데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데인이 부탁한 ‘정상적이고 아름다운’ 흰 손수건을 옆에 두고, 한 땀 한 땀 붉은 문양을 새기는 얼굴이 퍽 진지했다.

“그래서, 날 이리로 부른 까닭이 뭐지?”

“신뢰를 보여 달라며.”

도로테아는 보람찬 얼굴을 하고 완성된 수호부를 루크의 눈앞에 펼쳐 보였다.

“온종일 나와 함께 지내다 보면 신뢰가 생기겠지. 나무랄 데 없는 능력과 인성, 품격까지 볼 수 있을 테니까.”

상대의 실없는 말에 그가 한층 더 서늘해진 눈으로 미련 없이 돌아서려는 그때였다.

연이틀째 도로테아의 문 앞을 지키고 선 필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테아, 손님이 왔는데.”

도로테아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피어났다.

짙은 고동빛을 띤 머리를 곱게 틀어 올린 제닉스 부인은, 드레스 자락이 스치는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매끄러우며 사뿐한 걸음으로 도로테아의 앞에 섰다.

“어서 오세요, 부인. 보시다시피 제 몸이 좋지 않아 일어서서 맞이하지 못하는 점을 이해해 주세요.”

“영애께서 그리 상태가 좋지 않으시다는 것을 알면서도 찾아온 것은 제 쪽이니 괘념치 않으셔도 좋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잘잘못을 가리자면 아마 기다리지 못하고 걸음을 한 제 쪽의 잘못이 더 크겠지요.”

차분히 답하던 제닉스 부인은 손님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 티 테이블을 보고 멈칫했다.

평소 그녀가 자주 마시는 차와 곡물로 만든 스콘이 보였다.

“…….”

“이곳까지 걸음한 부인의 마음이 그리 가볍지 않을 것 같아 준비해 봤어요. 무엇이든 맛있는 것이 입에 들어가면 한결 편해지니까요.”

“영애의 배려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나직이 답한 제닉스 부인이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그녀의 눈이 도로테아의 바로 곁에 마치 그림자처럼 붙어 있는 루크에게로 향했다.

“두 분께서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두터운 교제를 하고 계셨나 봅니다.”

“아직은 아니에요. 본인 말에 따르자면 제 울타리 안의 가축이 될지 말지 고민 중이라네요.”

푸념인지 하소연인지 모를 말들이 이어졌다.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부족해서 그런가, 제가 건넨 호의를 자꾸만 곡해하지 뭐예요. 어쩔 수 없이 저를 신뢰할 수 있을 때까지 곁에 두려고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부인?

눈웃음과 함께 물음을 건네며 몸을 앞쪽으로 기울인 도로테아가 순간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자, 루크의 손이 자연스레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온 신경을 그 상대에게 집중하고 있어야 나올 수 있는 빠르고 조심스런 손길이었다.

짧은 순간을 눈에 담은 제닉스 부인이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7황자 전하께서도 이 자리에 계셔야겠군요.”

이 방 안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가든 간에 그가 도로테아의 동의 없이 말을 밖으로 옮길 리 없다는 확신이 섰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루크에게서 눈을 뗀 부인이 찻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주전자를 손에 쥐고 잔에 따르는 손짓에는 흐르는 듯한 기품이 흘러넘쳤다.

뭇 귀족 영애들의 귀감이 될 만한 완벽한 귀부인의 모습에서 비친 것은, 깊고 무거운…… 삶의 무게만큼의 고단함이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이고 어떤 시간들을 보내야만 눈빛, 손짓, 꼿꼿이 선 허리와 가지런한 발끝, 구김 하나 없이 잘 손질된 드레스까지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을까.

매끄럽고 아름다운 하얀 손이 적절한 온도의 찻잔을 도로테아에게로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도로테아가 가지런히 놓인 스콘을 향해 손을 뻗는 것을 바라보며 조용히 자신의 죄를 자백했다.

“그날, 3황자 전하를 포함한 모두에게 드린 술에…… 약을 탄 것은 저입니다.”

무려 황자를, 그것도 어린 시절부터 고이 모셔 온 유모가 직접 해하려 했다는 폭탄 발언에도 방 안은 고요했다.

놀라 나자빠져야 할 도로테아는 태연하게 스콘을 집어 들고 잼을 발라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루크의 손이 그녀의 턱을 잡고 위로 올려 경고했다.

“제대로 씹어라. 삼키지 말고 더 씹어.”

“…….”

불만스런 눈으로 입을 우물거리던 도로테아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입안의 것들을 삼키고, 차를 한 모금 들이켤 수 있었다.

그리고 물었다.

“술에 따로 약도 타셨나요?”

어쩐지. 고기 요리로 코스를 만들어 먹이면서 배탈을 유도하긴 했지만, 다들 예상보다 더 오래 앓는다 싶었더니.

“황자 전하께서는 술에 강하셔서, 웬만큼 마시고 취해도 곧잘 정신을 차리십니다.”

“그래요?”

“강한 환각제로도, 독한 술로도 시도해 봤지만 듣지 않아서 둘을 섞었더니 그런대로 효과가 있더군요.”

“그렇구나.”

도로테아가 새삼스럽게 알게 된 사실에 감탄했다.

“리처드는 참 건강하네요.”

줄담배에 술독에 빠져 살면서 여색까지 밝히는데 어쩜 그렇게 건강할 수가.

‘명줄이 참 길다.’

누구는 명줄 하나 늘이자고 그렇게 발버둥을 쳐야 했는데 말이야.

인생은 불공평하다더니. 그 말이 딱이었다.

속으로 말을 삼킨 도로테아는 반쯤 남은 스콘을 입에 털어 넣는 대신 살짝 내려놓고서 그리 작지도, 크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죄송해요, 부인.”

웃음기 한 점 없이, 자못 진지하게 사과의 말을 꺼낸 입이 이내 이실직고했다.

“부인의 계획을 망친 건 아마도 저일 거예요.”

“짐작했습니다.”

3황자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 그녀에게는 꽤 유용한 패였고 아직까지 충분히 써먹을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리처드가 이곳에서 죽거나 다치면 그녀의 책임이 되니까.

눈앞의 여인에게 어떤 사연이 있다 하더라도 그리했을 테지.

찻잔을 손에 쥔 부인은 은은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한동안 침묵하다 불쑥, 알 수 없는 말을 꺼냈다.

“어린 황자가 태어나고 나면, 고귀한 피가 흐르는 황자의 유년 시절은 대개 유모와 함께 보내게 됩니다. 풍부한 학식을 갖추고, 귀족다운 기품을 지니며, 평판이 훌륭하고, 황자를 제 목숨보다 더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조건이지요.”

조건을 하나하나 읊는 차분한 목소리가 아주 잠깐 멈칫했다가 말을 이었다.

“그러한 조건을 갖춘 유모를 선발하는 것은 황태후의 몫입니다.”

“…….”

“황후는 기반이 약하여 지방 귀족들의 입김을 당해 낼 수 없으니 휘둘리기 쉽고, 황제는 즉위 직후 자신을 지지해 주었던 황태후와 그 아래 귀족들에게 자신의 ‘성의’를 보여야 하는 입장이었으니까요.”

“혹시 유모를 맡기 싫으셨던 건가요?”

리처드는 태어나서 젖을 무는 순간부터 애가 덜되어 먹었던 걸까.

도로테아의 호기심 어린 눈동자에 제닉스 부인이 웃었다.

“아니요, 황자의 유모가 되는 것은 몹시 영광된 자리인 것을요. 그리고 황태후 폐하께서는 몹시 신중하게 유모를 고르셨답니다.”

황태후는 언제나 그 자리를 몹시, 간절하게 원할 만한 여인들을 찾아내어 일을 맡겼다.

처음 제닉스 부인이 황자를 품에 안았던 날은 그녀의 어린 아들을 잃은 지 딱 1년이 되던 해였다.

품에 안긴 아이의 천진난만한 미소는 겉으로는 멀쩡해도 속이 너덜너덜해졌던 그녀의 마음에 메말라 가던 애정을 되찾아 주었다.

“자네는 이제 어린 황자의 양육을 맡게 된 걸세. 아직은 젊고 경험이 많지 않은 자네로서는 힘든 일이 많을 테니, 가끔 나와 함께 황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도 좋겠지.”

은근한 제안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황자를 더 좋은 환경에서 양육하기 위한 ‘조언’을 받는다는 명목으로 황태후의 눈과 귀가 되어 달라는.

막 세상에 나와, 채 옹알이를 하기도 전에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려 드는 이들의 눈길이 붙는 것은 어쩌면 황자로서 당연한 운명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젊은 날의 제닉스 부인은 황자에 대한 애정과 연민으로 이미 충만해 있었다.

“그리하여 저는 황태후 폐하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황자 전하의 양육은 제게 전적으로 맡겨 주시면 되니, 적절한 일이 아니라면 따로 소식을 전하지는 않겠다고요.”

“그분께서는 부인의 거절에 어떤 반응을 보이셨나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웃으며 그러라 하셨지요.”

뜻 모를 웃음과 함께 순순히 그녀를 다시 황자의 곁으로 보내 주었다.

“그 아이는 황가의 아이일세. 아무리 자네의 품에서 길렀어도 황자로서 자라나겠지. 언젠가 자네는 결국 나를 찾게 될 게야.”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돌아선 등 뒤로 날아드는 그 말의 뜻을 알지 못했다.

“아무리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였어도 언젠가는 제 품을 떠나 어른이 되기 마련이고. 그렇게 품을 떠난 뒤의 아이는 두 번 다시 제 손에 잡히지 않기 마련이지요.”

제 품에 뛰어들던 천진난만한 아이는 자라났다.

“그 아이가 열세 살이 되던 해에, 마구간에서 일하던 하인 하나가 죽었습니다.”

“죽어요?”

“아끼던 말의 갈기를 손질하다 잘못해서 매질을 당하다가요.”

달그락.

티스푼이 비어 있는 찻잔으로 떨어졌다.

“부족한 것이 없이 자랐는데도 만족할 줄 몰랐습니다. 남의 손에 있는 것은 탐을 내고, 탐이 나는 것은 가져야 했지요.”

그리고 도버 스펜서를 만났다.

막 사춘기를 지나던 리처드에게 도버는 꽤 큰 영향을 미쳤다.

잘난 형제들 가운데에서 열등감에 시달리는 리처드에게, 사람을 짓밟고 올라서는 법을 가르친 것도 도버 스펜서였다.

‘자극적인 놀이’를 소개한 것도, 귀 얇은 리처드를 부추겨 신흥 귀족이나 상인들의 주머니를 털고 다닌 것도.

“악행을 저지르는 도버 경 이상으로, 그의 속살거림에 넘어가는 아이가 참으로 밉더군요. 도버 스펜서는 그저 악인이라고 여기면 그만이지만, 리처드는 제 품에 안아 재우고, 먹이고, 입히고 길렀습니다. 한때 목숨같이 생각한 적이 있을 만큼 아주 소중하게 품었지요.”

그러니 그 믿음에 대한 배신이 더욱 괴롭고 가슴 아팠다.

조각조각 난 마음은 그 어떤 것으로도 다시 돌릴 수 없었다.

“저 아이는 아무것도 모를 겁니다. 자신이 죽는 그날까지, 남에게 어떠한 상처를 주었는지, 깨달을 수 없겠지요. 그 천진난만함이 무섭습니다. 그 무지가 더욱 끔찍합니다.”

그제야 황태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가 잠시나마 가슴에 품었던 아이는 황가의 핏줄이며 그에 걸맞은 괴물로 자라날 것임을.

그것이 황가에서 태어난 이들의 운명이라고 하더라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침입자를 막지 않으신 거군요.”

“비겁하지요. 아무리 미워도 차마 제 손으로는 그럴 수가 없어서, 누군가가 대신해 주길 바라며 문을 열어 놓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답니다.”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부인은 사건의 전말과 자신의 죄를 모두 토설하고서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이야기에는 빠진 부분이 많았다.

이를테면 도대체 ‘누가’ 그녀에게 리처드를 습격할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는지.

회랑을 드나든 하인과 하녀들이 수십이고, 그들 하나하나가 모두 숙련된 인력들인데 무엇 하나 이상함을 느끼지 않았을 리 없었다.

제닉스 부인이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실행했을 확률이 낮다는 것도.

그러나 도로테아는 아귀가 맞지 않는 퍼즐을 두고 따지고 들기보다, 조용히 손을 뻗어 그녀의 손 위로 얹었다.

“오늘 이곳에서 들은 사실이 다른 곳으로 새어 나가는 일은 없을 거예요.”

다정한 속삭임에 제닉스 부인이 빙긋 웃으며 물었다.

“처벌은 하지 않으시나요?”

“처벌할 것이 있나요?”

고작해야 황자와 귀족들의 술에 약을 타고 성문을 열어 놓은 정도로.

그리 따지면 3황자를 때마다 벗겨 먹고, 필요할 때마다 이용했으며, 미끼로까지 사용한 도로테아는 이미 감옥에서 처형당했어야 옳았다.

“그러니 이만 가 보셔도 괜찮아요.”

웃는 얼굴로 죄를 토설한 부인을 떠나보낸 도로테아가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내내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채 대화를 나누는 것도 힘에 부쳤다.

축 늘어진 채 숨을 고르는 도로테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크가 입을 열었다.

“너는 처음부터 모두 짐작하고 있었던 거군.”

범인이 알아서 너를 찾아올 것이라는 것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그런데도 일부러 나를 곁에 두다니.”

무려 황자 시해 미수범이 아닌가.

축 늘어져 있던 도로테아가 발을 까딱이며 힘없이 대꾸했다.

“어차피 일을 키울 생각도 없잖아.”

그녀가 리처드를 어찌해 보려 한 사실이 드러나도 루크에게 이득이 되는 바가 없었다.

오히려 일개 유모에게 놀아난 황자 탓에 황가 전체의 권위가 바닥을 치는 결과만을 가져올 뿐.

게다가 이번 일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 자칫 몇 년 전, 유모의 배신을 알아챈 루크가 독단적으로 유모를 처리했던 사건까지 다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지 몰랐다.

“고작 유모의 심계에 아무것도 모르고 당할 뻔했던 사실이 또다시 회자되는 건 네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을 텐데?”

“…….”

굳이 쓸데없는 말까지 보태는 도로테아를 향한 루크의 눈에 일순간 날카로운 예기가 비쳤다.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구르던 그녀가 고개를 살짝 들고 물었다.

“내가 알고 있는 패를 깠으니, 이제 신뢰가 좀 생기지?”

“내가 알아 봤자 활용도 못 할 패라면 쓸모없는 것이 아니냐. 버리는 패 하나를 쥐여 주고 생색내지 마라.”

도로테아가 적잖이 실망한 듯 한숨과 함께 고개를 침대에 묻었다.

“방심하다 유모한테 뒤통수 맞고 뒈질 뻔한 게 너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마음의 위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서 일부러 알려 준 건데…….”

죽여 버릴까.

지금이라면 손가락으로 이마를 튕기는 것으로도 죽을 것 같은 이 계집을, 죽여 버릴까.

루크의 마음속에 상대를 향한 신뢰 대신 살심이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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