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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90)화 (90/242)

혼술사 도로테아 90화

거친 숨을 갈무리하는 내내 가냘픈 몸이 들썩였다.

아주 짧게나마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차게 식은 육신에 다시 들어서자마자 오한이 온몸으로 덮쳐들었다.

어지러운 머릿속이 광광 울리고 손발이 덜덜 떨렸다.

포근한 이불 속에서도 얼어붙은 몸은 쉽사리 의지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꼼지락거리며 힘겹게 몸을 반쯤 일으킨 순간, 왈칵하고 검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멋대로 ‘살’을 날린 반작용인가.”

손목을 타고 뚝뚝 흐르는 검붉은 피를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문밖의 소란이 그제야 귀에 들어왔다.

벌컥 열린 문 너머로 성큼성큼 걸어 든 이의 얼굴이 몹시도 굳어 있었다.

“왔어?”

“무슨 짓을 한 게야!”

이렇게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인물이었나.

방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도로테아가 얼얼한 귀를 매만졌다.

그러고는 형형한 눈으로 저를 노려보는 전직 사신을 향해 피로 흥건한 두 손바닥을 펼쳐 보여 주었다.

“보다시피.”

“너, 설마 누군가를 향해 저주라도 퍼부은 게냐?”

눈을 내리깐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그녀의 피부가 유독 창백했다.

원체 희고 보들보들한 피부를 지니긴 했지만, 오늘의 도로테아가 가진 창백함은 잘 가꾸어진 투명함과는 달랐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따위…….”

분노에 찬 잔소리가 이어지려던 찰나 열린 문으로 들어선 필립의 얼굴이 굳었다.

“테아!”

축 늘어진 소녀의 맥을 짚는 얼굴이 짐짓 몹시도 심각했다.

희미한 심장 박동 소리는 꼭 어린 시절, 홀로 몇 걸음을 걷지도 못하고 고꾸라지던 그때의 어린아이와 꼭 닮아 있었다.

“아버지, 테아가 어째서…….”

아무런 말없이 그저 도로테아를 노려보는 콜린을 한 번,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반쯤 콜린에게 기대어 있는 도로테아를 한 번 바라본 필립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설마, 좀 전에 키엘 백작이 이 성을 빠져나간 것과 관계가 있는 겁니까?”

영민한 머리는 재빠르게 결론에 다다랐다.

한가득 피를 토해 낸 도로테아는 모처럼 기분 좋은 웃음을 만면에 띠고 있었다.

피 냄새를 맡은 프리드는 문가에 서서 물끄러미 그런 도로테아와, 분노한 콜린, 당황했음에도 비교적 침착한 필립을 눈에 담았다.

“네가 선택한 일이니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그 어떤 원망도 하지 않기다?”

그건 이 일을 두고서 한 말이었던가.

침묵을 지키던 기사가 눈을 내리깐 채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도로테아가 손등으로 제 입가를 닦았다.

물론 깔끔하게 닦이기는커녕 입 주변에 묻어 있던 피가 가득 번져 더욱 섬뜩한 모양새가 되었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키엘이 급히 자리를 비웠다면 적어도 내가 제대로 타격한 셈이네.”

“테아.”

필립은 고개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사촌의 몸을 지탱하며,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조심스레 피범벅이 된 얼굴을 닦아 주었다.

“리리.”

평소와 달리 몹시 의기소침한 정령이 나와 걱정스레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침대가 더러워졌으니, 깨끗하게 만들어 주렴.”

- …….

평소 같았으면 득달같이 품에 안겨 비비적대며 도로테아의 명을 들었을 정령이 콜린의 뒤로 가 숨어 버렸다.

“지금 제정신이야? 이 와중에 정령에게 힘을 나누어 주고 일을 시키겠다고? 네 몸의 한계가 어디일지, 지금 해 보자는 거냐?”

“시트며 이불이며 잔뜩 더러워졌는걸. 내 잠옷도 새로 갈아입어야 해.”

“지금 그러니까 고작 그런 말을……!”

“내가 새 시트와 이불을 가져다줄게. 잠옷도.”

필립이 차분하게 콜린의 말을 끊어 냈다.

평소와는 달리 웃음기가 보이지 않는 얼굴에는 분노보다는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다.

말을 마친 그가 묵묵하게 시트와 이불을 걷어 내고 방을 나서며 문간 앞에 서 있는 그림자를 향해 부탁을 건넸다.

“밤손님은 이 정도면 충분하니까, 문 앞에서 더 이상 방문자가 없게끔 막아 줄 수 있을까요?”

부드러운 필립의 물음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던 프리드는, 그가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엉망이 된 방 안이 보이지 않게끔 문을 닫고 그 앞을 지키듯 섰다.

짧게 한숨을 쉰 콜린이 팔짱을 끼고서 추궁하듯 입을 열었다.

“이제 말해 봐라.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누가 보면 살인범이라도 취조하는 줄 알겠어.”

“그보다 더하지. 네 상태를 보아하니 그냥 상대를 공격한 게 아니야. 상대의 ‘혼’에 생채기를 낸 거다. 그렇지?”

희미한 웃음을 띤 채 심각한 콜린의 얼굴을 올려다본 도로테아는 물음에 답을 하는 대신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이 싸움은 내가 시작한 것이 아니야.”

“…….”

“저들은 나와 내 소중한 사람들을 몇 번이고 계속해서 건드리고 있어. 심지어 나와는 관련 없는 무수히 많은 이들도 저들 손에 희생되었고.”

“말 돌리지 마라. 넌 관련 없는 이들의 희생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녀석이 아니냐.”

“그렇긴 해. 하다 보니 정의의 사도가 되긴 했는데, 애초에 나는 그런 것엔 관심이 없지.”

도로테아가 우습다는 듯 키득거렸다.

입안에 남아 고여 있던 피가 잇새로 다시금 흘렀다.

마른기침으로 애써 껄끄러운 목을 달래 보려 애쓰는 걸 보던 콜린이 고개를 저었다.

“저들의 손속이 그토록 잔인하고, 그 세력 또한 넓다는 것을 알았으면 좀 더 기다렸어야지. 왜 이토록 무모한 짓을 한 거지?”

“확신했거든. 도버가 무모할 정도로 ‘공’을 세우려 나와 루크를 무리해서 덮쳤을 때. 저들이 똘똘 뭉친 하나의 거대한 세력이 아니라, 내부가 여러 파벌로 분열되어 있음을.”

“…….”

“지금이라면 분명 큰 타격을 줄 수 있겠지만, 기회를 놓친다면 또 꼬리만 자르고 말게 될 것 같아서.”

이 지긋지긋한 싸움의 끝을 볼 수 있다면서 이 정도의 손해는 감수할 수 있었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콜린을 향해 도로테아가 씩 웃었다.

“친애하는 막내 외숙부께서 그러셨지. 힘을 가진 자는 결코 그 힘을 함부로 타인에게 휘둘러서는 안 되지만, 적어도 결투가 시작되었다면 전심전력을 다해야만 하는 거라고.”

“…….”

“살을 내주었고, 뼈를 취한 거야.”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쓴 콜린은 몹시 혼란스러운 눈빛을 띠고 있었다.

도로테아 하이클레어. 도로테아 에버리.

이름이 무엇이건 간에 저 육체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육신의 ‘진짜’ 주인이 아니었다.

도대체 어디서 왔기에 이토록 기이한 짓들을 하는지, 어떻게 저 몸에 들어앉아 명부까지 지워 가며 자신의 수명을 늘릴 수 있었던 것인지.

처음에는 그저 ‘살아남는 것’에 집착하는, 흔하디흔한 원혼 같은 것이라고 여겼건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냐? 이렇게 하지 않아도, 네 한목숨 정도는 충분히 건질 수 있을 거다. 네가 이들을 품고서 보호하려 하지만 않는다면 너 하나만큼은…….”

“‘생(生)’이라는 건 무엇일까?”

또다시 엉뚱한 질문이 던져졌다.

마치 말장난을 하는 것만 같아 콜린은 불쾌한 얼굴을 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제법 사람다운 불퉁한 얼굴을 한 남자를 올려다본 도로테아가,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몸을 옆으로 기댄 채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그저 목숨 줄을 부지한다는 게 아닌걸.”

지난 생의 명재신을 떠올렸다.

그 좁은 사당이 세상의 전부였던 명재신의 삶은 한 번도 수면 위로 드러난 적이 없었다.

누군가가 삶은 투쟁의 연속이라 했던가.

누군가는 승리하고, 누군가는 패배하는 잔혹한 현실 위에 서서 끊임없는 혈투를 이어 나가는 고단한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고.

그런 자들의 아래에, 단 한 번의 승리나 패배도 거머쥘 수 없는, 이름조차 불리지 않고 그 ‘결투장’으로 불려 올라간 적도 없는.

패배할 권리조차도 주어지지 않는 존재가 있음을 누가 알아줄까.

적어도 지난 생에서 그녀는 숨은 붙어 있되 ‘살아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저 숨 쉬는 것에 만족할 생각이라면 진즉 이런 수고 따위는 버렸을 거야.”

아주 평범하지만 그 누구보다 특별한 일상들.

나와 매일같이 식사를 하고, 시답잖은 말다툼을 하거나 엉뚱한 사고를 치고, 대화를 나누고 마음을 쓰고.

‘나’의 이름을 불러 주고.

“내가 살아 있기 위해서는 오로지 숨 쉬는 내 몸뚱이 하나만 필요한 게 아니야.”

도로테아가 콜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차갑고 서늘한 손끝이 닿는 순간 콜린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당신도 내 삶의 일부인걸.”

그러니 나는 당신들을 지키며, 내 삶을 최선을 다해 지키고 있는 거지.

그녀의 눈초리가 곱게 휘어들었다.

때맞춰 새로운 이불과 시트를 든 필립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가 들고 온 새 이불은 은은한 들꽃 향을 머금고 있었다.

“널려 있던 빨래를 몰래 가져온 거니까.”

그렇게 말한 필립은 다시금 도로테아의 입가에 굳어 있는 피를 정성껏 닦아 내어 주었다.

“잠옷은 여기에 둘게. 불편해도 네가 갈아입을 수 있지?”

“응.”

“시트를 갈아 끼워야 하니까, 잠깐 아버지께 안겨 있을래?”

홀로 설 수 없는 도로테아를 위한 배려였다.

도로테아는 온순한 양의 눈을 하고서 콜린의 품에 안겨, 제 침대 위의 흔적들을 세심히 처리하는 외사촌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아름다운 소년은 언제나와 같이 친절하고 상냥했다.

‘근데.’

도로테아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기울여졌다.

좀 어딘가.

분명 어딘가 다른데.

감이 뛰어난 그녀조차도 이번만큼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콕 집어낼 수가 없었다.

*   *   *

날이 밝자, 아침 식사를 하러 내려온 이들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애가 식사 시간에 늦다니 별일이군.”

요 며칠 그녀와 동행한 사람이라면 도로테아가 먹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는 사실도, 식사 시간이 되면 눈을 반짝이며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내려온다는 사실도 알 터였다.

그런 그녀가 다른 일행들이 모두 내려올 때까지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게다가 키엘 백작은 급한 일로 새벽에 이미 성을 나갔다니.”

여러모로 분위기가 어수선할 수밖에 없었다.

별생각 없는 리처드와는 달리 루크는 어딘가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콜린은 물론이고 그의 아들인 필립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애초에 식사를 자주 거르는 인물이긴 하지만 그럴 때마다 필립은 꼬박꼬박 기별을 보내곤 했는데.

의아한 것도 잠시였다.

어제의 그 무리한 ‘식사’ 이후 한동안 방에 뻗어 있어야 했던 귀족들은 도로테아의 부재에 이때다 싶은 듯 목소리를 높였다.

“아무리 그래도 일정이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 이리 시간을 어기는 것은 좋지 않지.”

점잖게 던진 누군가의 말이 시작이었다.

“늦잠을 자는 모양입니다.”

“아침잠이 많은 것이야 큰 흠이 아니라지만, 지금은 폐하의 공무를 수행 중인데…….”

“중임을 맡았으면 그만한 책임감이 있어야 하건만.”

수염을 만지작거리던 쥬벨 백작이 짐짓 근엄한 목소리를 내자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발레리가 웃는 얼굴로 말을 꺼냈다.

“이틀 전, 저희가 외출했을 때 성에 계셨던 여러분들께서는 휴식을 취하셨지요. 일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적절한 휴식을 취하는 것 또한 자기 관리의 한 요소라고요.”

“…….”

리처드를 필두로 술을 마시고 도박, 노름을 ‘정신이 나갈 때까지’ 즐겼던 이들 모두에게서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을 만큼 절제 없이 무분별한 행동을 했던 그날의 일은 다들 쉬쉬하고 있었건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일을 입에 올린 발레리를 향해 여러 의미의 시선들이 쏟아졌다.

숨 막히는 긴장감에 메릴린이 연신 물을 들이켜고 있던 순간이었다.

“송구스럽게도 제가 식사 시간에 늦고 말았군요.”

새가 재잘대듯 간질간질한, 가냘픈 목소리가 날아든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굳은 얼굴의 콜린에게 부축을 받으며 내려오는 도로테아 하이클레어가 보였다.

“테아……?”

핏기 한 점 없이 창백한 피부, 어제보다 훨씬 야윈 듯한 두 뺨, 힘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 듯 층계를 내려올 때마다 휘청거리는 다리.

심지어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마저 신경 써서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그마했다.

자리를 박차고 나간 데인이 재빠르게 그녀의 다른 한쪽을 부축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어젯밤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애가 왜 이렇게 며칠을 굶은 사람처럼 피죽밖에 남지 않은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손 위로 얹어지는 손의 무게조차도 깃털처럼 가벼웠다.

저도 모르게 이를 꼭 악문 데인 하이클레어가 제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사촌을 향해 타박했다.

“몸이 좋지 않으면 사람을 보내서 알리면 되잖아. 뭐 때문에 무리하며 여기까지 내려와?”

“괜찮아. 별거 아냐.”

“별거 아니긴 대체 뭐가!”

걱정 가득한 눈을 하고서 버럭버럭 잔소리를 퍼붓는 데인의 말을 반쯤 흘려보낸 도로테아가 안절부절못하고 선 에이든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테아야, 너 어찌…….”

“별거 아니에요. 곧 황도로 돌아가야 할 텐데, 아직 구체적인 안이 완성된 것이 아니다 보니 불안해져서요. 밤새워 이런저런 변수들을 고려하다 보니 잠을 좀 설쳤네요.”

싱긋 웃는 그녀를 바라본 귀족들의 표정이 묘했다.

도로테아의 말만 놓고 보자면 도무지 진척이 없는 계획 때문에 밤을 새워 일한 그녀와 달리 다들 잘 자고 일어나 밥 먹으러 기어 나온 셈이었다.

“그, 정 불편하면 들어가서 쉬시오.”

쥬벨 백작이 불편한 얼굴로 헛기침을 하며 마지못해 건넨 말에 도로테아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는걸요. 여러분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식사 자리 또한 과분한 기회이자 즐거움이고, 제 경험에 필요한 일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 영애의 눈은 테이블에 놓인 따끈따끈한 수프에 고정되어 있네만.

다들 도로테아의 마지막 말만큼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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