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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88)화 (88/242)
  • 혼술사 도로테아 88화

    “이제 안심해도 좋아요. 당분간 저들이 음식을 찾는 일은 없을 테니까.”

    숙취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저주의 반동까지 겪고 있는 귀족들이었다.

    아침부터 고기 요리를 위장에 때려 박았으니 다들 반나절 이상은 배탈 때문에 그 어떤 음식도 찾지 않으리라.

    그 시간 동안 주방에서는 필요한 식재료를 모두 조달할 수 있을 것임이 틀림없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주방장이 연신 허리를 숙였다.

    도로테아는 그림으로 그린 듯한 미소와 함께 그의 인사를 마다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제가 저지른 일이니 수습도 제가 하는 것이 당연했다.

    일을 벌이고 회피한다고 해서 그녀를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 생기는 부정적인 감정까지 사라지진 않을 테니까.

    심지어 사고를 수습하면서 톡톡히 이득을 봤으니 오히려 그녀로서는 기꺼운 일이었다.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젓는 도로테아를 바라보는 주방장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에는 새벽에 느꼈던 절망과 공포는 온데간데없고, 위기를 무사히 넘긴 것에 대한 환희와 기쁨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저희를 위해 이렇게 애써 주시다니요.”

    “아, 그리고 식재료를 새로 구입하는 비용이라면 제가 댈게요. 제 외사촌에게 말씀하시면…….”

    도로테아의 말에 주방장은 물론이고 옆에 있던 시녀까지 펄쩍 뛰었다.

    “어떻게 저희가 영애의 돈을 쓸 수가 있겠어요. 이곳 재료를 수급하는 일인 것을요.”

    “그럴 수는 없지요. 제닉스 부인께서도 허락하지 않으실 테고요.”

    “그분은 3황자 전하의 체면을 몹시 중요시 여기시거든요.”

    그렇게 보이지는 않던데.

    어린 시절을 함께한 유모와 황자치고 두 사람의 관계는 묘하게 사무적으로 보였다.

    제닉스 부인은 필요 이상으로 공손했고, 리처드는 그녀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이고.

    고용인들의 말과는 다른 온도를 풍기는 두 사람의 사정이 궁금증을 자아냈지만, 도로테아가 입을 열기도 전에 말들이 우다다 쏟아졌다.

    “게다가 3황자 전하께서 매달마다 별장으로 건네는 품위 유지비가 얼마인데요.”

    “그분은 원래 남는 것이 돈밖에 없는 분인지라, 이 정도는 새 발의 피일 거예요.”

    도로테아의 귀가 솔깃했다.

    “그래요?”

    돈이 많은 것이야 진작 알고 있었던 사실이긴 했다.

    그렇지만 리처드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훌륭한 재력을 갖춘 데다, 씀씀이도 거침없다는 사실에 새삼 흐뭇해졌다.

    역시 그를 끌어들인 것은 적절한 판단이었다.

    ‘살려 두길 잘했어. 아무리 쓸모가 없어도 황자다 보니 죽으면 귀찮겠다 싶어서 수호부를 심었던 건데. 이제 보니 다른 용도로도 꽤 쓸 만하잖아.’

    돈 필요할 때마다 족치기 딱 좋은 인간이 아닌가.

    일이 끝나고 나면 굳이 상대할 필요가 없겠거니 여기던 생각에 변화가 일었다.

    품 안에 든든한 저금통이 생긴 기분에 도로테아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 사촌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필립이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젓자, 옆에서 데인이 떨떠름하게 속삭였다.

    “애초에 쟤 때문에 다들 위기에 빠졌던 거 아니냐?”

    그냥 자기가 친 사고 수습한 건데 뭘 저렇게까지 고마워해?

    “귀족이라고 떵떵거리는 인간들 중 본인이 저질러 놓고도 책임지는 인간은 드무니까. 특히 그것이 아랫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들 만한 일이라면.”

    그렇지만 도로테아는 제 잘못을 순순히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친애하는 외사촌들과 외숙부를 움직여 고작해야 주방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을 보호해 주었다.

    “저 사람들은 단지 테아가 새벽의 일을 수습해서 고마워하는 게 아니야.”

    필립이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는 데인에게 덧붙였다.

    “테아가 사람 취급해 준 것이 고마운 거지.”

    한 번도 누군가에게 고용돼 일해 본 적이 없으니, 머리를 조아려 가며 비위를 맞춰 본 적 없는 데인에게는 아리송한 이야기였다.

    필립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촌을 더 납득시키려 노력하는 대신 고개를 돌려 도로테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연신 눈물을 글썽이는 이들을 관대한 미소로 받아 주고 있었다.

    *   *   *

    도로테아는 방으로 돌아가던 걸음의 방향을 바꿔 위층으로 향했다.

    우드가 철저하게 지키고 있는 방 안에는 뜻밖의 방문자들이 와 있었다.

    “아, 영애.”

    식사를 마치고 곧장 들른 듯한 메릴린과 발레리가 그녀를 맞았다.

    아직 깨어나지 못한 아이를 돌보던 아버지 또한 엉거주춤 그녀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아이는 아직 한 번도 깨지 않았나요?”

    “아까 잠시 눈을 떴다가 몇 마디만 하고 금세 잠들었습니다.”

    “뭐라고 하던가요?”

    “꿈을, 무서운 꿈을 꿨다고…….”

    “당신이 누구인지 알아보던가요?”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불안한 얼굴로 도로테아의 기색을 살폈다.

    혹시 뭔가 문제가 있다는 말이 나올까 염려가 되는 모양이었다.

    “순조롭게 회복하고 있네요.”

    상대를 알아보고, ‘꿈’으로 칭하긴 했지만 그녀의 몸이 침식당했던 시기의 기억도 갖고 있다는 의미니까.

    “운이 좋았어요. 조금만 더 늦었어도 구하기 어려웠을지 모르는데.”

    메릴린을 만난 데다 흥미가 생긴 루크가 빠르게 이곳을 찾은 것도 한몫했다.

    여러모로 우연이 겹쳤으니 실로 하늘이 도왔다고 할 수밖에.

    “감사합니다.”

    중년의 남자가 다시 한번 허리를 굽혀 도로테아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자, 은은한 미소와 함께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발레리가 입을 열었다.

    “테아, 저 아이는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응?”

    “아직 저 아이를 추격하는 무리들이 있잖아. 무려 황자가 있는 이곳을 습격하려 들었을 정도면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남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이의 회복이 최우선이었기에 미처 헤아리지 못한 부분이었다.

    상대는 ‘황족’의 보호 아래에 있는 아이를 이미 두 번이나 습격했다.

    심지어 무능한 리처드와는 다르게 눈치가 기민하고 상대의 정체를 반쯤 유추하고 있는 루크가 함께할 때조차도.

    도로테아의 눈이 누워 있는 아이를 향했다.

    “그러게. 적어도 살아 있다는 걸 아는 한, 추격을 멈추지는 않겠지.”

    “여, 영애…….”

    이미 한차례 아이를 잃을 뻔했던 남자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그 간절함 어린 눈을 마주한 도로테아가 입을 열기도 전에 발레리가 먼저 선수 치듯 제안했다.

    “내가 데려가면 어떨까 해. 네가 구한 아이니, 네가 거두어도 좋겠지만…… 네게는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니까. 오히려 아이의 안전을 생각하면 나나 메릴린이 거두는 것이 맞겠지.”

    발레리의 말은 틀린 바가 없었다.

    도로테아 하이클레어.

    그 이름만큼 귀족들을 들썩이게 하는 이름이 또 있을까.

    그녀의 과거, 정령사로서의 능력, 황제가 내리는 두터운 신임과 황자들과의 친분까지.

    그런 도로테아가 거두어들인 떠돌이 출신의 아이라니.

    아마 일거수일투족이 귀족들의 관심거리가 될 터.

    추격자들은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아이를 쫓을 수 있게 될 터였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 도로테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네가 곤란해질 텐데?”

    “글쎄, 알다시피 나는 곤란해지는 것이 별로 두렵지 않은 사람이라.”

    빙긋 웃은 발레리가 덧붙였다.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네가 저 아이에게 꽤 정성을 들였다는 것은 분명해 보이니까. 저 아이가 허망하게 목숨을 잃으면 기껏 정성을 쏟은 의미가 사라지게 되잖아.”

    조곤조곤 말하는 목소리는 부드럽고 다정했다.

    듣고 있는 메릴린의 가슴이 간질간질해질 정도로 예쁜 마음 씀씀이였다.

    그런 친구의 호의 가득한 말에 도로테아는 담백하고도 간결하게 답했다.

    “응, 그렇게 해.”

    눈 깜짝할 사이에 아이가 몸을 숨길 곳이 결정되었다.

    대화 내내 눈을 끔뻑거리던 남자가 누구에게 먼저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사이, 발레리는 미끄러지듯 우아한 몸놀림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   *   *

    “두 분은 정말 서로를 끔찍이 위하시는군요.”

    메릴린이 불쑥 내뱉은 말에 도로테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는지 메릴린의 얼굴에는 아차, 하는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다정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서운하네요, 영애.”

    “네, 네?!”

    뜬금없는 한마디에 메릴린의 가슴이 철렁했다.

    마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인 도로테아는 경악할 만한 말을 꺼냈다.

    “저와 영애 사이에 있는 깊은 유대감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는데요.”

    “유대감이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도로테아의 돌발 발언에 겁에 질린 메릴린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두 사람의 눈물겨운 우정을 칭찬했을 뿐인데 왜 또 내게 불똥이 튀는 거지?

    “영애는 목숨을 걸고 제 일을 도우셨잖아요. 게르만 백작 영식의 몸이 영원한 안식을 찾을 수 있게 된 데에는 희생을 기꺼이 감수한 영애의 결정 덕이 컸죠.”

    “…….”

    그건 당신이 반쯤은 사기 치고 반쯤은 협박했기 때문이었잖아.

    메릴린은 그날 잠긴 마차 안에서 천국과 지옥을 오갔던 기억을 떠올리며 부르르 떨었다.

    도로테아는 그런 메릴린의 반응을 보지 못한 것처럼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이미 서로의 집을 왕래하는 사이기도 하고요.”

    나는 입을 잘못 놀린 대가로 사과를 하러 간 거고, 당신은 새벽에 불법으로 무단 침입한 거고.

    “아, 숲에서 빠져나온 영애가 울면서 내 품에 안겨 든 것을 본 귀족들이 이미 수십인데…….”

    추태도 잊고 어린아이처럼 품에 안겨 들어 엉엉 울었던 기억이 떠오르자, 스멀스멀 샘솟는 수치심으로 메릴린의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도로테아가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그날 영애가 흘린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드레스는 제 옷장 안에 고이 모셔져 있답니다.”

    “버려 주세요. 제가 하나 사 드릴게요. 보상해 드릴게요.”

    “어머, 그럼 선물도 주고받는 사이가 되는 거군요?”

    퇴로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메릴린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창백해졌다.

    저렇게 헌신적인 친구가 이미 곁에 있는데 어째서 가진 재산도 없고 가문도 한미한 저와 자꾸만 엮이려 드는가.

    이건 꼭…… 그러니까, 제국의 보물이라 불리는 후작 영애의 행동을 수식할 만한 말은 아니지만…….

    몹쓸 치근거림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말없이 눈만 굴리고 있는 메릴린을 한동안 가만히 들여다보던 도로테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마다 운명에는 그 삶에 찾아오는 시련과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에요.”

    몹시 뜬금없는 말이었다.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이 참으로 우스워서, 어느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시련의 양이 그 사람 홀로 극복하거나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만 주어지는 것은 아니죠.”

    “그렇긴 해요.”

    “그러니 우리는 삶에 때때로 스민 위기를 모면하는 데에 도움을 줄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것을 흔히 ‘귀인’이라 하죠.

    귀인.

    마치 홀린 듯 도로테아의 말을 되뇌던 메릴린은 어느새 저를 향해 반짝이는 남빛 눈동자 한 쌍을 보고 흠칫했다.

    느릿한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면 영애가 제게로 이끌어 준 이들이, 제가 필요해 마지않았던 퍼즐의 조각들이었던 것 같지 않아요? 제가 가는 길을 안내할, 아주 유능한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는.”

    “그랬나요?”

    도로테아의 인생에 관여하고자 의도한 적도, 그들을 일부러 도로테아에게로 인도하려 했던 적도 없는 메릴린이 떨떠름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러니 격 없는 막역한 관계를 유지해요, 우리. 앞으로도 영애가 제 인생에 좋은 발판이 되어 주셨으면 해요.”

    메릴린의 두 손을 곱게 거머쥔 도로테아의 말에 메릴린이 숨을 들이켰다.

    ‘결론이 그거였냐고!’

    곱게 포개어진 채 붙잡혀 있는 그녀의 손끝이 덜덜 떨리고 있건만 상대는 활짝 웃고 있었다.

    어떻게든 손을 빼내려 발버둥 치던 그때 어디선가 힘찬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뻣뻣한 고개를 돌리자 복도 맞은편에서 천천히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에이든과 데인이 보였다.

    복도를 가득 메울 정도로 거대한 덩치에 산적 같은 외모를 지닌 에이든의 눈에 물기가 반짝였다.

    천천히 다가온 두 사람이 맞잡고 있는 손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동안 메릴린은 얼어붙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참으로 보기가 좋은 광경이구나. 그래, 무릇 진정한 친우라면 이렇게 서로 위해 주고 아껴 주어야지.”

    껄껄 웃는 웃음소리가 쩌렁쩌렁 복도를 울려 귀가 아파 왔다.

    “그래, 테아의 친구라면 내 조카딸이나 다름없지.”

    “아니요.”

    전 숙부님이 멀쩡히 살아 계시는걸요.

    에이든은 아끼는 조카의 절친한 친구를 향해 애정과 관심을 듬뿍 담아 그가 줄 수 있는 최선의 약속을 건넸다.

    “걱정 마라, 테아야. 나는 네 친구라면 언제든지 가문의 연무장으로 초대하여 내 비기라 할 수 있는 비장의 검식을 전수해 줄 수 있단다! 그것만 익히면 어떤 전장에 떨어져도 제 한 몸은 지킬 수 있지!”

    “…….”

    “온 김에 날도 좋으니 네가 예전에 내게 말해 주었던 그 도, 도…….”

    “도원결의요?”

    “그걸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저 지나가듯 해 준 이야기였는데 뼛속까지 기사인 에이든에게는 몹시 감명 깊게 다가왔던 모양이다.

    금붕어 수준의 기억력에도 그것을 금세 떠올리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는 듯 제 외숙부를 구경하는 도로테아를 바라보던 메릴린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도원결의가 뭔가요?”

    “일종의 맹세라고 할 수 있죠.”

    “맹세라니, 어떤?”

    도로테아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복도를 울렸다.

    “한 해, 한 달, 한 날에 태어나지 못했어도 한 해, 한 달, 한 날에 죽기를 원하니, 하늘과 땅의 신령(皇天后土)께서는 굽어살펴 의리를 저버리고 은혜를 잊는 자가 있다면 하늘과 사람이 함께 죽이소서.”

    같이 태어난 적도 없는 타인들끼리 모여서 서로 죽는 날을 함께하기로 합의한 것만 해도 기가 막힌 일이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같이 죽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든, 사람이 죽으라고 쫓아오든 간에 맹세를 어긴 놈을 끝까지 찾아 죽이겠다는 무시무시한 내용이었다.

    “걱정 말아요, 영애. 제 목숨 줄은 질기니까요.”

    “그게 그런 문제인가요?”

    “둘 다 장수하자는 덕담 같은 거죠.”

    아닌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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