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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83)화 (83/242)

혼술사 도로테아 83화

사냥개들은 몸이 부서져라 달렸다.

수일을 굶고, 피까지 잔뜩 흘려 몸 상태가 엉망인데도 마치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그 뒤를 쫓는 루크의 눈이 냉정하게 주변 지형을 살폈다.

‘그때 그 숲이로군.’

끈질긴 추격을 겨우 따돌렸던 장소.

사방이 안개로 가득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연이어 이어지는 기묘한 공간 속에서 길을 찾아낸 것은 짐짝이라고 여기던 메릴린이었다.

불안에 떨고 있다 별안간 벌떡 일어나 숲을 가로지르는 그녀의 뒤를 따르자 어느 순간부터 쏟아지던 화살 비가 멈췄다.

느릿하게 이동했음에도 그들을 쫓던 사냥개들은 숲에서 빠져나가기 직전까지도 일행들을 따라잡지 못했다.

그 기묘한 경험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홀린 듯 달리는 개들을 쫓아 다시 한번 숲 안쪽으로 들어선 루크는, 바로 앞에서 달리던 개들의 형체가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

음침한 숲속에 들리는 것이라고는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 소리, 머리 위를 뱅뱅 맴도는 까마귀의 불길한 울음소리가 전부였다.

‘이런.’

돌아 나가기에는 이미 지나치게 깊숙이 들어왔다.

스스로도 위험에 둔감했음을 통감하면서도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부족한 선택을 했을 때에는 온전히 감에 몸을 맡기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음을, 그 자리에 멈춰 서 있기보다는 무엇이라도 하는 편이 낫다는 사실을 이미 수많은 경험을 통해 체득했으므로.

한끝만 헛디뎌도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전장에서 무수히 많은 위기를 넘겨 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지난 교훈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실책이다.’

얌전히 있으라던 도로테아의 말은 어쩌면 지금 같은 상황을 경고하는 것이었을지도.

‘냉정함을 잃었다.’

마치 공적을 세우고 싶어 안달 난 어린아이를 대하듯 달래려 들던, 저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작은 여자애 때문에.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만큼 어리석은 선택을 했음에 웃음조차 나오질 않았다.

한껏 예민하게 날이 선 시야에 낯익은 마차가 들어왔다.

엉망으로 부서진 채 어제 그 자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마차에 꽂힌 화살을 빼든 그가 면밀히 깃의 모양새를 살폈다.

“이게 누구십니까.”

별안간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뒤를 돌자 양옆에 수상한 자들을 거느린 도버 스펜서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검은 복면 차림의 남자들을 말없이 훑은 루크는 그의 발치에 얌전히 엎드린 사냥개들을 바라보았다.

“얌전히 성에 처박혀 유흥이나 즐기시면 될 것을. 어찌 이곳까지 오셔서 험한 꼴을 보십니까.”

일개 귀족이 황족 앞에서 꺼내는 말이라기에는 그 무례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믿는 구석이 있으니 입을 놀리는 것일 터.

양옆에 거느린 자들이 풍기는 기운이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루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복면을 쓴 자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스펜서 백작은 분명 황자와 마주치는 상황을 피하라고 하지 않았소.”

“그 명 때문에 일부러 숲으로 들어왔으나, 이미 마주치지 않았나!”

도버가 짜증스런 말과 함께 루크를 노려보았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7황자를 살려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어차피 다들 저자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으니 잘된 것이지. 공을 세울 기회야.”

자신이 유리한 입장임을 알고 있는 도버의 어깨가 한껏 치솟았다.

메릴린 일행이 성에 당도하기 전에 처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질책을 받은 것이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눈엣가시 같은 황자를 처리한다면 분명 앞선 잘못을 상쇄하는 것 이상의 공을 세울 수 있으리라는 계산에, 번들거리는 눈은 이미 냉철함을 잃었다.

별수 없다는 듯 눈짓을 주고받은 이들이 검을 치켜든 순간이었다.

품에서 소도를 꺼내어 던진 루크가 재빠르게 뒤를 돌았다.

설마 황자쯤 되는 이가 정면 승부를 피해 도망을 택하리라 여긴 적 없던 이들이 멈칫하다 뒤늦게 꽁무니를 쫓기 시작했다.

“놓치지 마라! 잡아 죽여!”

새된 도버의 목소리에 발치에 앉아 있던 사냥개들이 혀를 빼어 문 채 내달리기 시작했다.

어제와 같이 빽빽한 숲속을 헤치는 그의 앞에 다람쥐 하나가 쪼르르 달려왔다.

찌이. 찌.

“…….”

손바닥으로 쥐면 으스러질 것 같은 조그마한 다람쥐의 눈빛이 오만방자하고 불손하기 짝이 없었다.

한심하게 숲에 들어와 길이나 잃느냐는 듯 손짓하는 몸놀림에 어쩐지 울컥한 루크가 검을 들어 눈앞의 가지를 베어 냈다.

찌이. 찌이.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 실룩이는 통통한 엉덩이와 풍성한 꼬리를 보던 루크의 눈에 살기가 가득 차올랐다.

“명색이 황자가 도망이라니요! 전장의 영웅이라는 이명이 우습게 되었습니다!”

빈정거림에 분노로 잃을 뻔했던 이성이 되돌아왔다.

도망이 무엇이 어떻단 말인가.

정면으로 싸울 수 없는 형세에 굳이 맞서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있을까.

전장의 영웅.

용맹 이전에 그에 버금가는 다른 중요한 것을 실천해야 그 이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살아남아야 명예를 누린다.

살아남아야…….

저 건방진 쥐새끼를 밟아 죽인다.

이성을 차린 루크는 뒤를 견제하는 동시에 앞서가는 다람쥐와 거리를 좁혔다.

숲을 지나자마자 곧바로 검으로 내려칠 수 있을 만큼이나 가깝게.

이윽고 어두컴컴하던 주변이 조금씩 밝아지더니, 끝이 없어 보이던 숲의 출구가 보였다.

빛이 들어오는 곳을 향해 뛰어든 순간, 말에 올라탄 채 저를 내려다보는 도로테아 하이클레어가 눈에 들어왔다.

소녀는 눈을 내리깐 채 제 몸을 타고 오르는 다람쥐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얌전히 방에 틀어박혀 있으면 좋았을 것을. 말을 참 안 듣는다니까.”

“…….”

“그래도 덕분에 숲 안쪽으로 들어가는 수고를 덜었네. 잘했어.”

마치 강아지 훈련이라도 하듯 칭찬하는 태도에 루크의 눈썹이 강하게 꿈틀거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도로테아의 발치에 얌전히 앉아 있는 두 마리의 사냥개를 본 루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와 동시에 숲에서 그의 냄새를 맡고 추격하던 ‘또 다른 사냥개’ 두 마리가 사납게 짖으며 달려들었다.

루크의 검이 빛과 같은 속도로 달려든 개들을 내리그었다.

*   *   *

도로테아는 제 드레스 자락에 튄 핏자국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뒤에서 이를 지켜보던 우드가 한숨과 함께 그녀의 눈을 가렸지만, 이내 도로테아가 거부하자 더는 손을 올리지 않았다.

말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추격자들이 숲에서 튀어나왔다.

“이건 또…… “

비릿한 피 냄새를 맡은 도버 스펜서가 얼굴을 찌푸렸다 도로테아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로테아는 막 숲에서 튀어나온 상대를 향해 놀란 기색 하나 없이 활짝 웃어 보였다.

“만나서 반가워요, 도버 경. 말씀은 몇 번 들었는데 이리 직접 뵙는 것은 초면이로군요.”

“……허, 진짜로 하이클레어 가문의 그 계집이로군.”

“꽤 무례한 말투를 구사하시네요.”

“숙부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저 잡일이나 하러 왔던 것뿐인데 이게 무슨 횡재일까.”

도버 스펜서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의 눈에 보이는 어리고 조그마한 소녀는 제가 어떤 위험에 처해 있는지도 모르는 듯 눈을 끔뻑이며 태평하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아아. 반갑소, 영애. 나도 참으로 영애가 보고 싶었지.”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얼굴을 보니 키엘 스펜서가 굳이 이자를 성으로 부르지 않은 까닭도, 이리 먼 숲의 일을 정리하도록 잡일이나 맡긴 까닭도 알 것 같았다.

‘그렇게 걱정이 됐다면 차라리 곁에 두었어야지.’

멀리 떨어뜨려 놓는다고 사고를 치지 않을 리가.

도로테아는 제 앞을 막아선 우드와 루크를 슬쩍 밀어냈다.

“이 아이들이 도버 경의 사냥개라 들었습니다만.”

그제야 도로테아의 발치에 얌전히 엎드린 채 헥헥대고 있는 검은 사냥개 두 마리를 본 도버 스펜서가 얼굴을 찡그렸다.

“아아, 그렇군. 내가 훈련시킨 놈들인가.”

“숲에 그냥 풀어 두고 가시다니요. 공들여 키운 아이들인데 데려가셨어야지요.”

도로테아의 시선이 이미 루크의 검에 생을 마감한 ‘새로운 사냥개들’에게 잠시 머물렀다.

“애석하게도 경께서는 이미 다른 아이들을 들이셨네요.”

“맡은 일도 제대로 못 한 것들을 다시 거둘 필요가 있나. 사냥에 쓰일 도구 따위야 얼마든지 바꾸면 되는 것을. 더 사납고 훌륭한 놈들로 교체하면 그만인데.”

“그럼 이 아이들은 제가 데려가도 될까요? 제 아이들로 길러도 되는 것이겠지요?”

“영애, 내가 영애라면 그것보다는 다른 쪽을 걱정하는 게 좋을 것 같소만.”

도버 스펜서의 얼굴에는 화색이 만면했다.

그는 눈앞에 있는 이 소녀를 당장이라도 무릎 꿇려 데려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에 가득 찬 것 같아 보였다.

오히려 그의 곁에 있는 복면인들에게서 더욱 긴장한 기색을 엿볼 수 있었다.

도로테아는 그저 그 자리에 서서 제 발치에 앉아 꼬리를 흔드는 사냥개들을 쓰다듬고 있었을 뿐인데도.

“새로운 ‘개’가 얼마든지 있는 도버 경의 이 버려진 ‘개’들은…….”

“음?”

“제가 가져도 될까요?”

재차 묻는 말에 도버 스펜서가 심드렁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에서조차 개에 집착하는 것을 보아하니 딱 쓸모없이 감수성만 풍부한 소녀답군.

버린 것은 쓸모가 없으니 버려진 것이다.

그런 것을 가엾다고 주워 드는 것은 거지나 할 법한 생각이 아닌가.

저런 철없는 영애를 두고 도대체 왜 다들 그리 신중해야 한다는 둥 답답하게 구는지 모를 일이었다.

얼굴을 굳힌 도버 스펜서가 소리쳤다.

“어차피 이곳에는 보는 눈이 없으니, 빨리 처리하고 귀환한다!”

누군가를 ‘사냥’하는 일에 최적화된 이들이 순식간에 목표물을 둘러쌌다.

도로테아는 고개를 끄덕여 도버 스펜서의 말에 동의했다.

‘보는 눈이 없으니 어떻게 처리하든 상관없는 일이지.’

그녀는 제 품에 감춰 두었던 부채를 꺼내어 펼쳤다.

부채 위로 수놓아진 일월성신(해, 달, 구름 등을 관장하는 신령)이 선명하게 비치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발치에 얌전히 앉아 있던 사냥개들이 짖기 시작했다.

“리리, 수고 좀 해 주련?”

얼빠진 도버 스펜서의 뺨에 톡, 하고 물방울이 튀었다.

‘물의 정령!’

거대한 형체의 물고기가 마치 해일처럼 일행들을 덮쳤다.

이윽고 정신이 들었을 때, 도버 스펜서는 7황자의 손에 머리채를 잡힌 채 열린 성안으로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   *   *

활짝 열려 있는 성문을 지키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우드가 손을 뻗어 도로테아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습격하는 무리를 여럿으로 나누었군.”

“맞아.”

가볍게 긍정한 도로테아를 보던 우드가 미간을 좁혔다.

“영애들에게는 프리드를 붙여 놓았고…… 데인과 에이든은 어디로 간 거지?”

“키엘 스펜서와 함께 있겠지.”

도버 스펜서의 머리채를 질질 잡고 성문을 통과한 루크가 그를 마치 짐짝처럼 패대기쳤다.

피투성이가 된 남자가 구석으로 힘없이 굴러가는 것과 동시에, 우드가 ‘미끼’라고 칭한 부녀가 있는 방으로 재빠르게 올라갔다.

“확인하러 가지 않는 건가?”

“응, 괜찮아.”

어딘가 피곤해 보이는 도로테아가 그들이 머무르는 방이 있는 위쪽을 바라보다, 이내 3황자가 향락에 빠져 있던 회랑으로 고개를 돌렸다.

“루크, 저들을 지하 감옥에 가두어 둬. 화풀이는 충분히 했을 테니 그만 건드리고.”

“내가 네 말을 들어야 하나?”

어딘가 묘하게 반항감이 서린 반문에 도로테아가 가던 길을 멈추고 웃는 얼굴로 돌아봤다.

“내 말을 안 듣고 갔다가 혼쭐나서 수습해 준 것이 방금 전이잖아. 아무리 학습 능력이 없어도 지금은 좀 자중하는 것이 좋지 않겠어?”

“…….”

“두 번은 안 구해 줘.”

다행히도 루크는 학습 능력이 부족해도 말귀를 못 알아듣는 인물은 아니었다.

불만이 가득해 보이기는 했으나, 그는 말없이 제가 던져 놓았던 인간의 뒷덜미를 잡고 질질 끌어 지하 감옥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자, 그럼…….”

도로테아가 나직한 중얼거림과 함께 회랑으로 향하는 넓은 복도를 거닐었다.

이 커다란 성을 가득 메우고 있던 사용인들이 모두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적막한 복도에 그녀의 발소리가 또각또각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이윽고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열자, 코를 찌르는 악취와 함께 마치 죽은 듯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굴러다니는 빈 술병들과 흡연재들로 더러운 바닥을 가로지르던 그녀의 귀에, 누군가의 헐떡이는 숨소리가 들렸다.

도로테아는 아름다운 무늬의 가죽으로 둘러싸인 소파 아래에서 뒹구는 베니를 찾아내어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새까맣게 타오른 지팡이에서는 이제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턱을 괸 채 욕심에 가득 차 결국 제 목을 죈 가여운 중생을 바라보았다.

“잘했어.”

훌륭한 미끼가 되어 주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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