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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82)화 (82/242)
  • 혼술사 도로테아 82화

    아무리 막중한 책임을 갖고 내려온 길이라지만, 게으른 천성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멋들어진 경치와 화려한 성에 머무르게 된 귀족들은 점차 다른 것에 눈 돌리기 시작했다.

    3황자에게 힘을 실어 주게 된 것이 내키지 않던 이들이 가장 먼저 손을 놓았다.

    ‘어차피 문제가 생긴다고 한들,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은 하이클레어 영애가 아닌가.’

    공을 세우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도로테아 하이클레어라는 방패가 있으니 크게 손해를 볼 만한 요소도 없었다.

    그런 계산이 있으니 다들 리처드가 날뛸 때에도 격렬히 반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진 욕심에 비해 능력이 부족한 3황자를 굳이 동업할 대상으로 고르다니.

    상황을 지켜보려 한 걸음 물러선 이들은 속으로나마 도로테아의 안목을 비웃었다.

    적당히 말을 들어 주는 척하다가, 결과물이 엉망이 되어 가는 것을 후작 영애가 느낄 즈음 그녀가 손을 내밀면 못 이기는 척 잡아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저마다 품은 음흉한 속내와 느슨해진 분위기가 맞물려 성에는 기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아이를 방으로 옮겨다 놓은 우드가 찜찜한 얼굴로 물었다.

    “저 아이, 정말로 미끼로 쓸 생각이냐?”

    “어차피 ‘그들’을 잡아내지 않으면 저 아이는 평생을 쫓겨 다닐 운명인걸.”

    황도에서부터 이곳까지 자객들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아이가 목격한 광경이 그들에게 있어 보여서는 안 될, 민감한 부분이라는 뜻일 테니까.

    “신경 쓰인다면 곁에 있어 주지 그래?”

    정작 도로테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가볍게 꺼낸 말에 우드가 주저 없이 제안을 거절했다.

    “됐다. 어린아이여서 신경 쓰였던 것뿐이야.”

    “화난 거 아닌데. 그리 신경 쓰이면 정말 저 애를 지키고 있어도 괜찮아.”

    나는 관대한 주인이라, 꼭 필요할 때가 아니라면 마음이 가는 대로 해도 그리 신경 쓰지 않을 테니.

    “나도 안다. 네가 이런 것으로 나를 시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한숨을 삼킨 그녀의 첫 번째 권속은 제 어깨에도 닿지 않는 가녀린 소녀의 뒤를 따르며 덧붙였다.

    “저 아이를 미끼로 쓴다고는 하나, 언제나 가장 위험한 역할을 맡는 것은 네가 아닌가.”

    다른 이들을 장기짝으로 취급하는 귀족 놈들의 사고방식이라면 진저리 날 정도로 익숙하지만, 이 기이한 소녀는 좀 달랐다.

    이해득실을 따지고 거래를 하며, ‘선한 방향’보다는 이득을 얻는 방향을 택하긴 해도…….

    단 한 번도 제 안위를 위한답시고 누군가의 뒤에 숨어 구경만 하는 법이 없었다.

    별다른 이유 없이 악행을 저지르는 법도 없다.

    사람을 제 심부름꾼으로 부리고는 미끼니, 다리니, 내 것이니 하는 말로 칭하곤 했어도 언제나 가장 큰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본인이었다.

    “그러니 나는 네 뒤를 지킬 거다.”

    뒤에서 들려오는 우직한 말에 도로테아는 말없이 옅은 미소를 띤 채 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복도를 가로지르던 발이,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회랑의 문 앞에서 멈췄다.

    문틈으로 들리는 호탕한 웃음소리와 더불어 훅 풍겨 오는 독한 시가와 달콤하게 뒤섞인 와인 향까지.

    때마침 독한 술과 안주가 담긴 카트를 끌고 오던 시녀가 회랑 앞에 선 도로테아를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백작께서 흥이 나신 모양이네.”

    시녀의 등 뒤로 바짝 붙어 따라오던 베니가 불안한 듯 눈을 굴리며 도로테아의 눈치를 봤다.

    ‘그래도 하루쯤은 망설일 줄 알았더니.’

    자리에서 들켜 위협을 당한 것치고는 회복이 지나치게 빠른 것이 아닌가.

    놀라울 만큼 뻔뻔한 얼굴로 다시금 저택으로 돌아온 이에게 도로테아가 부드럽게 당부했다.

    “부디 치료사 님께서 그동안 업무에 매진하느라 골치 아팠을 귀족분들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해 주시길.”

    별말 없이 저를 보아 넘길 뿐 아니라, 귀족들에게 접근하는 것조차 막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도로테아의 태도에 베니가 눈을 크게 떴다.

    쭈뼛거리던 그는 시녀가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허리를 꼿꼿이 펴고서 활짝 웃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백작님께서 저를 부르신다 하여 왔습니다만. 혹여 어디가 불편하신 곳이 있으신지요?”

    열린 문 너머로 눈이 풀린 상태로 늘어져 있는 여러 귀족들이 보였다.

    상석에 앉아 주사위를 만지작거리는 리처드의 옆으로 반짝이는 주화 더미가 가득 쌓여 있었다.

    “꽤 즐겁게 놀고 계시네. 우리 황자님께서는.”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 고개를 돌린 우드와 달리 도로테아는 문이 온전하게 닫힐 때까지 향락에 빠진 이들을 재밌다는 듯 구경했다.

    마치 신기한 이국의 동물을 바라보듯, 인간이되 인간임을 잠시 내려놓은 개돼지들을 훑는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런 그녀를 찜찜한 눈으로 훑던 우드가 한마디 꺼내려던 찰나였다.

    “테아!”

    막 에이든과의 대련을 끝낸 듯, 꼴이 엉망이 된 데인이 흐르는 땀을 채 닦기도 전에 못마땅한 표정으로 도로테아의 앞에 섰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아니, 다들 재미나게 놀고 있는 것 같아서.”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뒤섞인 냄새의 정체를 짐작한 데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안쪽에서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연신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갈 생각은 하지도 마.”

    “안 들어가.”

    딱 잘라 답을 했음에도 흥미가 생기면 일단 뛰어들고 보는 사촌이 영 못 미더운지 데인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네 친구들은?”

    “메릴린과 발레리라면 근처 상점들을 둘러보고 온대.”

    “콜린 숙부님은?”

    “숙부님은 키엘 백작님과 함께 외출하셨어. 필립도 따라갔고.”

    데인의 얼굴에 의아함이 서렸다.

    일은 똑 부러지게 할지 몰라도 사회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콜린에게 다른 귀족들과의 친분이 있을 리 만무했다.

    게다가 스펜서 백작은 곁에 둘 사람을 까다롭게 고르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런 이가 어찌 숙부님과 함께 외출을 했다는 거지?

    “내가 부탁했어. 스펜서 백작의 환심을 사 주면 좋겠다고 말이야.”

    젊은 남자 귀족에게 환심을 사려면 발레리 제르망이나 메릴린 레어처럼 어여쁜 영애들에게 부탁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콜린처럼 말재주 없고 딱딱하기 그지없는 인물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요구였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좁힌 데인이 다시금 따져 묻기 전에, 도로테아가 제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피처럼 붉은 글자가 가득 새겨진 손수건이었다.

    “또 이거냐?”

    “응.”

    “이제 슬슬 꽃이나 이니셜처럼 평범한 자수를 놓을 수는 없을까?”

    도로테아는 기껏 밤을 새워 만든 효과적인 부적을 마다하고 쓸데없이 나풀거리는 천 쪼가리를 원하는 어리석은 사촌의 품에 제액부(除厄符)를 안겨 주었다.

    “다음에.”

    길가에 흐드러진 꽃을 천에 담아 보았자, 인간의 손에서 피어난 가짜가 무에 그리 아름답겠나.

    감상을 하려거든 밖을 내다보면 될 일이다.

    그렇지만 도로테아는 제 ‘가족’이 원하는 일이니 한 번쯤은 내킬 때 해 주리라고 관대하게 마음먹었다.

    “좋아, 약속했으니 잊지 않기다.”

    연거푸 다짐받은 데인이 피처럼 붉은 글씨로 가득한 부적을 주섬주섬 품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들고 질문했다.

    “7황자는 여전히 방에 머물고 있나?”

    “왜?”

    “도통 그 꿍꿍이를 알 수가 없어서. 여기까지 우격다짐으로 메릴린을 핑계 삼아 내려오더니 귀족들에게 접근하는 것 같지도 않고.”

    데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무언가를 가늠해 보려는 듯 생각에 잠겼다.

    뼛속까지 무장(武將)인 데다 가끔 도로테아에게 바보 취급을 받긴 하지만, 그도 엄연히 후작가의 직계로서 충분한 수업을 받은 만큼 돌아가는 상황을 아예 모르진 않았다.

    7황자가 일부러 저를 끌어들여 이쪽으로 올 명분으로 삼았다는 것 정도는 쉽게 짐작했으니.

    다만 그가 모르는 것이 있다면, 루크는 공을 가로채고자 이곳을 찾은 것이 아니라 그가 줄곧 추적하던 세력의 꼬리를 밟기 위해 왔다는 사실이었다.

    “괜찮아. 7황자라면 당분간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을 거야. 오늘 아침에는 간단하게 방 안에서 우유 한 잔과 에그 스크램블을 먹은 뒤 줄곧 병법서를 읽었대. 헤일런 남작이 이야기를 나누고자 찾아왔지만 거절하고 줄곧 혼자 있었고.”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거야 이 저택에는 그녀가 굳이 묻지 않아도 이런저런 소식을 알려 주는 친절하고 다정한 사용인들이 넘쳐 났으니까.

    도로테아가 말없이 빙긋 웃자, 데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야, 황자는 안 돼.”

    “알았어.”

    “안 된다고. 너, 내가 에이든 숙부께…….”

    아니, 그쪽은 안 되지.

    데인이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리 황자와 도로테아의 관계에서 위험을 감지했어도 에이든이 끼어드는 건 곤란했다.

    ‘숙부님이라면 일단 목부터 날린 다음 생각이라는 걸 하실 분이니까.’

    황자를 조지겠다는 목표를 세웠어도 차근차근 계획을 짜야 했다.

    “젠장, 필립한테 가 봐야겠네. 너 바로 방으로 돌아가라. 엉?”

    갑작스레 을러대더니 이내 성큼성큼 저택을 빠져나가는 데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이제는 어디로 갈 생각이지?”

    훌륭하게 주위 사람들을 따돌리고서.

    우드의 물음에 도로테아가 짧게 답했다.

    “사냥 준비가 끝이 났으니, 사냥개를 깨워야지.”

    이곳으로 온 부녀를 줄곧 쫓던 죽은 사냥개들의 시체는 조사차 성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을 터였다.

    “사냥에 실패한 개들에게 주인을 찾아 줄 때가 왔어.”

    *   *   *

    한때 사냥감들을 향해 민첩하게 달려들어 목을 물어뜯었을 사납고 충성스러운 사냥개의 몸은 생기를 잃고 축 늘어져 있었다.

    입 밖으로 혀를 쭉 뺀 채 죽어 있는 개들의 사체는 조사 중이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잘 보존되어 있었다.

    “인식표가 없으니 이 개들을 모른다고 하면 그만이야. 상대가 인정하지 않으면 개의 주인을 알아내기는 어려울 거다.”

    “그러게. 그렇겠네.”

    홀쭉한 배를 보아하니 좀 더 사냥에 힘을 쏟게끔 자주 굶긴 것이 분명했다.

    이미 윤기를 잃은 거죽을 쓰다듬던 도로테아의 손이 단단한 뱃가죽을 꾹 눌렀다.

    “주인은 제게 충성을 다하는 개를 버려도 개는 주인을 버리지 않아.”

    “…….”

    “주인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인정하게끔 해 줘야겠지.”

    수수께끼 같은 말과 함께 도로테아의 손이 개의 사체에서 떨어진 순간이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뱃가죽이 움찔하더니, 이내 숨이 돌아온 것처럼 부드럽게 오르내리길 반복했다.

    “일어나렴. 너희의 주인을 찾아가야지.”

    거친 숨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사냥개들이 고개를 위로 빼고 자신을 버린 주인을 향해 울부짖었다.

    이내 도로테아와 우드를 스쳐 열린 문으로 달려 나가는 사나운 사냥개들을 본 우드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죽은 걸 되살릴 수도 있는 거냐, 너는.”

    “되살린 것은 아니야. 잡귀들에게 저 사체를 내줬을 뿐.”

    육신을 갖고자 하는 잡귀들은 길이 열리자마자 신이 나 달려들었겠지만, 막상 그 육신 구석구석에 스민 혼의 마지막 악다구니에 압도당할 뿐이다.

    “저 개들이 지닌 가장 강력한 기억, 주인에 대한 회귀 본능이 남아 몸뚱이를 움직이고 있는 거야.”

    오늘 밤이 지나면 저 움직임조차도 결국 멎겠지만.

    “죽은 몸에 들어앉아 봤자 힘만 소진하고 끝난다는 것을 모르는 어리석은 것들이거든.”

    우드는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주절대는 도로테아를 따라 텅 빈 조사실에서 나왔다.

    정원을 가로질러 저택을 빠져나가는 사냥개들의 뒤로 7황자가 따라붙는 것이 보였다.

    “황자가 따라붙었군.”

    “응, 줄곧 기회를 노리고 있었을 테니까.”

    애초 그녀의 몇 마디에 얌전히 방에 들어앉아 있을 인물이 아니라는 것쯤은 파악하고 있었다.

    아마도 저택에 머무르는 내내 도로테아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을 터.

    그녀가 사냥개들이 보관된 방으로 들어간 것을 파악하는 즉시 움직일 수 있도록 채비를 했을 것이다.

    ‘하여간 성격이 급하다니까.’

    내 기다리라 그리 일렀건만.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루크는 일련의 사건들의 배후에 몹시도 집착하고 있었다.

    도로테아가 어떻게 죽은 개들을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는지, 그 개들이 어떻게 주인을 찾아가는 건지, 이런 것들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을 터였다.

    오로지 추격하던 이들을 찾을 수 있다는 그 사실이야말로 유일하게 의미 있는 일일 테니까.

    “자, 그럼 우리도 가야지.”

    “말을 가져오겠다.”

    마구간으로 향한 우드를 기다리던 도로테아는 별안간 몸을 굽혀 제 발치에 있는 묵직한 돌멩이를 주워 손에 쥐었다.

    손에 들린 돌멩이를 연신 위로 던졌다 잡기를 반복하는 그녀에게, 새까만 말을 몰고 온 우드가 손을 내밀었다.

    자연스레 우드의 품에 안겨 말 위에 올라탄 도로테아가 손짓으로 방향을 가리키자, 두 사람을 태운 말이 빠르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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