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사 도로테아 80화
그림 같은 성이었다.
훌륭한 침대에 아이를 누인 주드는 연신 안절부절못하고 그 주위를 맴돌았다.
밖에는 제국의 중추라 불리는 귀족들이 수없이 많이 모여 있었다.
그저 아이를 도로테아에게 보여야만 한다는 그 집념 하나로 이곳에 다다르고 나서야, 그녀의 대단함을 실감했다.
‘과연 봐주시기는 할까?’
이 근방에서 이름을 알린다는 치료사는 귀족들이 부녀에게 별 관심이 없는 듯 보이자, 냉정한 얼굴로 그들을 모른 척했다.
‘그래, 그것이 당연한 반응이지.’
주머니를 뒤져도 돈 한 푼 나올 기색이 없고, 은혜를 입어도 갚을 재간이 없었다.
침울한 얼굴로 아이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이 어두워졌다.
‘어쩌면 여기까지일지도.’
이곳까지 다다른 것만 해도 용했다.
황도로 올라가서 딸아이의 상황과 일련의 이상한 일들을 모조리 고발하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기겁을 하고 그를 말렸다.
잘 모르는 이들까지도 소식을 듣고 미쳤다며 고개를 저을 정도였다.
“헤일런…….”
지푸라기처럼 푸석푸석한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이 떨렸다.
아이를 들여다보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순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합니다.”
앳되지만 정중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열린 문으로 빼꼼 고개를 내민 것은 도로테아 하이클레어, 바로 그녀였다.
입을 벌린 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주드는 인형 같은 도로테아가 제 앞에 서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 아가씨……!”
떨리는 목소리로 도로테아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은 그가 허름한 모자를 벗어 그녀에게 경의를 표하며 입을 열었다.
“제발…… 제 아이를 한 번, 봐주시기라도 해 주십시오, 아가씨. 아이는 간악한 왕국 놈들의 저주에 걸려, 크흡!”
그는 메릴린 앞에서 내밀었던 증거를 꺼내어 그녀에게 건넸다.
왕국의 문양을 살펴본 도로테아는 옅은 미소를 띤 채 침대로 향했다.
곤히 잠들었다기에는 아이의 얼굴이 몹시 이질적이었다.
도로테아는 이미 부녀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아이의 상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누군가 아이의 생기를 빼앗아 갔다.’
가까이 다가가 확인한 결과 더욱 명확했다.
아이의 혼은 그 자리에 있었지만 색이 투명하다시피 옅었고, 생령 특유의 싱그러움이 없었다.
부족한 원기를 채우지 못해 한여름의 마른 논바닥처럼 바싹 마른 혼을 들여다본 도로테아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확실히 누군가에게 ‘저주’를 당했네요. 하지만 나는 이 아이가 다시금 눈을 뜰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어요.”
도로테아의 말에 주드의 얼굴에 환희가 스쳤다.
메릴린이 지니고 있던 조그마한 물건으로도 잠시지만 아이의 입이 트였었으니 도로테아의 말을 믿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그가 울먹이며 소리쳤다.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내가 왜 그래야 할까요?”
주드는 제 귀가 잘못되었나 의심하며 도로테아를 올려다보았다.
상냥한 목소리와 다정한 얼굴을 지닌 인형 같은 귀족 소녀는 웃는 얼굴로 그를 향해 묻고 있었다.
내가 어째서 이 아이를 도와야 하느냐고.
“그건, 그건…….”
“로헨 왕국이 얼마나 수상한 짓을 하고 있었든지 간에 고작해야 평민 두 사람의 증언으로는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어요. 비록 수상한 짓을 했어도, 폐하께서 고작 당신들을 위해 굳건히 다져 온 양국의 동맹을 깰 생각은 없으실 테고.”
주드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지만 도로테아는 이야기를 멈추는 대신 못다 한 말들을 잔인할 정도로 또박또박 덧붙였다.
“힘겹게 아이의 목숨을 구한다고 한들 눈을 뜨고 엉뚱한 소리를 퍼뜨리고 다녀, 혹여 로헨 왕국과의 동맹에 이상이 생긴다면 폐하의 심기를 건드린 죄목으로 내가 손해를 보게 될 텐데.”
제국의 황제가 그녀를 몹시 신임하는 것과, 이참에 황태후의 세력을 견제하려 한다는 말 따위는 굳이 할 필요가 없지.
계속된 도로테아의 침묵에 주드가 제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죽는 날까지 로헨 왕국의 일 따위는 입에도 올리지 않겠습니다. 저 아이의 입도 제가 단속할 수 있습니다. 아가씨께서 자비를 베풀…….”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걸 원한 게 아니에요. 상대가 그렇게 하는 걸 좋아하지도 않고요. 나는 그저, 내가 당신을 도와야 할 이유를 대어 보라고 했을 뿐이죠.”
여상스러운 목소리에 주드의 속이 타들어 갔다.
몇 번이고 저 조그마한 얼굴을 들여다봐도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좀처럼 읽어 낼 수가 없었다.
그의 목소리가 모진 폭풍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덜덜 떨렸다.
“무엇이라도, 제가 할 수 있는 무엇이라도 돕겠습니다.”
도로테아는 의자에 앉아 턱을 괸 채 창백하게 굳은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운이 좋게도 폐하와 달리 저는 로헨 왕국에 그리 좋은 감정이 없어요. 동맹이 깨지든 말든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죠.”
“…….”
“저들은, 내 삶에서 유일하게 ‘가치 있게 여기는 인간들’을 건드렸어요.”
그것도 수차례나.
자신을 향한 화살이야 몇 번 감내할 수도 있다.
그냥 입을 다무는 것으로 나와 내 주변이 평화로워진다면야 그것도 나쁘진 않지.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할머님의 건강을 망친 것만으로도 이미 선을 넘었는데, 자꾸만 가문의 담벼락을 더 넘고자 손을 뻗는단 말이지.”
영문을 모를 중얼거림에 주드는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기다렸다.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지만 그녀의 말에서 약간의 희망을 얻을 수 있었기에 견딜 수 있는, 무겁고 깊은 침묵의 시간이었다.
“게다가 어찌나 도망에 능한지, 잡았다 싶을 때마다 꼬리를 끊고 달아나기까지 하고. 나로서는 몹시 짜증스러울 수밖에 없단 말이죠.”
도로테아는 손을 뻗어 여전히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주드의 몸을 일으켰다.
무료함이 깃들었던 남색 눈동자에 그녀가 무언가 흥미를 느끼거나 일을 벌일 때면 보이는 묘한 이채가 감돌았다.
은근한 목소리가 주드의 귀에 감겨들었다.
“로헨 왕국의 헛짓거리를 폭로하려면 내게는 명확한 ‘증거’와 ‘증인’이 필요해요. 당신들보다도 훨씬 괜찮은 것으로.”
“네, 네.”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를 향해 도로테아는 그가 취해야 할 ‘답’을 알려 주었다.
“만약 당신이 위험을 무릅쓰고 꼬리가 아닌 ‘몸통’을 끌어낼 수 있다면 나도 저 아이를 돕겠어요. 최소한 아이의 안전은 제가 책임지도록 하죠. 하이클레어가의 이름을 걸고.”
처음부터 도로테아가 취할 태도는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저 성가신 것들의 머리통을 열고 그 속내를 들여다보려면 반드시 몸통이 필요하며, 또 제국의 황제가 납득할 만한 사유까지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던지는 일이 필요하지.
이 부녀는 무엇보다도 더 믿음직스러운 미끼였다.
‘은혜를 베푸는 것은 편하고 쉽지. 그렇지만 내게는 목숨을 도외시하고 일을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간절한 태도가 필요해.’
절박함을 끌어내려면 이 정도의 거래는 해야 했다.
다행히도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닌 모양인지 주드의 눈에 결연함이 서렸다.
이미 반쯤 송장이 되어 포기하려던 아이를 살릴 수 있고 멀쩡히 키울 수도 있다는데, 그까짓 목숨을 걸고 위험에 뛰어드는 것이야 천 번 만 번이라도 할 수 있다는 얼굴이었다.
조금 전까지와는 달라진 기세에 도로테아가 흡족하니 웃음 지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요.”
부디 내가 원하는 결과를 가져다주길.
* * *
그즈음, 치료사인 베니는 몹시 신경 쓰이는 눈초리로 도로테아가 들어간 방문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그가 부녀의 존재를 알면서도 반쯤 무시한 까닭은, 그들보다도 그들을 보호하는 ‘후견인’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남루한 차림새만 보더라도 그 부녀는 누군가의 자비를 바라며 붙은 기생충들에 불과할지니, 그가 굳이 상대해야 할 까닭이 없었다.
‘이쯤 되면 저 대단한 후작 영애께서 나를 불러야 마땅한데.’
어린 소녀다 보니 굳이 평민 치료사 따위를 상대하지 않으시겠다?
그의 눈동자가 못마땅한 기색을 띠었다.
그래 봤자 이 근방에서 그만큼 뛰어난 인물은 없었다.
고작해야 약초 만지는 할아범 몇과, 신성력이라고는 쥐꼬리만큼 달고서 신관입네 하는 더럽게 비싼 인간들 정도일까.
‘황도에서야 얼마나 대단한 인간인지 몰라도 여기서는 결국 나를 찾게 될 거다.’
속으로 콧방귀를 낀 그가 눈앞의 귀족 나으리를 향해 굽실거렸다.
“어디, 상태는 좀 나아지셨습니까?”
“아무렴, 매일 아침마다 거동이 힘들 정도로 무겁고 숨이 찼는데 지금은 아주 멀쩡하군. 훌륭한 실력이야.”
“아주 귀하고 비싼 재료로 만든 약 덕분입니다. 이곳 숲에 들어가 직접 채집해야 하고, 저처럼 실력 있는 치료사가 그 자리에서 즉시 가공해야만 하기에 아주 귀한 물건일 수밖에 없지요.”
“자네처럼 대단한 사람이 어째 이곳에 머무르는가. 응?”
싱글벙글 웃고 있는 귀족의 비위를 맞추던 그가 저 멀리 키엘을 보고 재빠르게 달려갔다.
“스펜서 백작님!”
평소 같았더라면 훨씬 더 살갑게 그를 먼저 불렀을 키엘의 얼굴에 성가시다는 기색이 스쳤지만, 이내 베니가 눈치채기도 전에 빠르게 사라졌다.
“아아, 베니. 그대가 이분들을 치료하고 있었군.”
“그저 서툰 실력으로 중임을 맡으신 분들의 머리를 조금이나마 가볍게 해 드리려 했을 뿐입니다.”
키엘이 빙긋 웃었다.
“자네답군.”
권력자들에게서 풍기는 돈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는다는 비꼼이 들어 있는 말이었지만, 정작 그 비꼼을 눈치채지 못한 베니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키엘 스펜서는 그의 ‘쓸모’를 처음으로 알아준 인물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베니는 스스로가 이토록 대단한 치료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조차도 몰랐을 테니까.
그나저나 오늘따라 왜인지 키엘 스펜서의 태도가 그리 살갑지 않은 것 같기도 한데.
싱글거리는 얼굴을 보던 베니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차에 키엘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대를 찾는 목소리가 들리는군.”
고개를 돌리자 방금 전 ‘치료’를 해 주었던 귀족 나으리가 다시 그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보게, 베니. 그 귀하다는 단약 전부 내게 팔게.”
어느새 다가온 쥬벨 백작의 말에 베니는 찢어질 듯한 입가를 가까스로 누르고서 짐짓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것은…… 제가 직접 제조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일정 시간이 지나면 약효가 떨어집니다. 지니고 계셔 봤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당연하지. 고작해야 씀바귀 잎과 계피를 개어 만든 별것 아닌 환일 뿐이다.
실제로 통증을 없애는 것은 환약이 아니라 그가 지니고 있는 주머니 속 정체를 알 수 없는 열매와 제가 짚고 있는 지팡이였으니.
“자네가 그렇다니 어쩔 수 없구만.”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쥬벨 백작의 눈에 아쉬움이 가득 서렸다.
아쉬운 건 베니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가 만드는 환약의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매번 이렇게 변명하지 않아도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능력이 부족해 송구할 따름입니다.”
“아니, 뭐…… 이것만으로도 대단하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쥬벨 백작을 향해 베니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나저나, 여쭈어볼 것이 있는데 혹 답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응? 무엇 때문에 그러지?”
“그, 오시는 길에 사냥개와 산짐승들에게 몰려 크게 곤욕을 당하셨다던 일행분들을 뵈었는데, 아버지와 함께 온 어린아이가 있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뵌 적이 없어서…….”
베니의 물음에 쥬벨 백작의 눈이 대번 시큰둥해졌다.
“그자에게 말을 높일 필요 없네. 고작해야 제 영지에서 도망친 농민에 불과해.”
“그렇지만 아이가 아프다고 들었는데요.”
“뭐, 여자들이란 누가 조금만 사정해도 툭하면 앞뒤 안 가리고 눈물 바람에 연민과 동정을 쏟아붓지 않나. 듣자 하니 후작 영애의 친구가 길에서 주워 온 자들이라더군.”
베니의 눈이 번쩍 뜨였다.
바로 그 후작 영애가 중요했다.
황제 폐하를 스스럼없이 만나고 그에게 직접 중임을 하사받아 황자와 함께 다닐 정도로 대단한 권력을 지닌 소녀.
그녀와 가까워질 수만 있다면 지금처럼 귀족들에게 굽실거리며 어떻게든 비위를 맞추려 애쓰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운이 좋으면…… 황궁으로 들 수도 있겠지.’
베니의 눈이 꿈이라도 꾸듯 황홀함에 반짝였다.
오랜 시간 동안 ‘치료사 아닌 치료사’로 행세해 온 능숙함 덕에 재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한 그가 안타까운 듯 말했다.
“제가 그 아이를 좀 보면 좋을 텐데요…….”
“실력만 좋은 줄 알았더니 꽤 마음이 여리군. 원한다면 가서 들여다보게. 하이클레어 후작 영애에겐 내가 말해 놓으면 되는 거 아니겠나. 자네가 아이를 치료한다면 그녀도 꽤 후하게 대접하겠지.”
“아아, 저는 그런 대접 따위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아픈 아이를 돌보아야 하는 것이 치료사로서의 숙명이니까요.”
어리석은 돌팔이는 그렇게 제 무덤을 향해 한 걸음씩 천천히 발을 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