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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79)화 (79/242)
  • 혼술사 도로테아 79화

    도로테아의 불친절한 화법에 메릴린이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운데, 부름을 받은 우드가 뒤늦게 방으로 들어섰다.

    품에 상처에 바를 수 있는 연고와 붕대, 소독할 수 있는 몇 가지의 간단한 도구를 챙겨 온 그는 빠르고 능숙하게 메릴린의 팔에 있는 타박상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상것인 제가 감히 귀족 영애의 발을 치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시녀를 불러 상처 부위에 붕대를 감아 달라고 하십시오. 크게 상한 곳이 없으니, 연고만 발라 두어도 며칠 내로 감쪽같이 나으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메릴린의 말에 무뚝뚝하게 고개를 숙여 보인 우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몇 걸음 물러서다, 별안간 도로테아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 할 말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꾹 다물린 입술은 결국 그가 방을 나설 때까지 열리지 않았다.

    그가 나가고 시간이 조금 지난 뒤, 다른 귀족들을 상대하던 발레리가 방을 찾았다.

    서둘러 일어서려던 메릴린을 향해 다정한 미소를 보낸 그녀가 앉으라는 듯 손짓했다.

    “바깥이 소란스럽던데, 무슨 일이야?”

    “에이든 경께서 뒤늦게 사냥터의 일을 아시고는 직접 숲의 위험성을 확인하러 가시겠다고 하셔서.”

    “그 숲은…….”

    메릴린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괜찮겠지. 이제는 별문제가 없을 테니까.”

    도로테아는 누군가의 기합 소리가 들려오는 창밖을 흘끔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상대는 ‘사냥감’을 놓쳤고, 꼬리가 될 만한 단서까지도 남겨 준 꼴이 되어 버렸다.

    숲에 더 이상의 위협은 없다고 보아도 좋으니 굳이 살필 까닭은 없지만…….

    “친애하는 외숙부님이 주변을 휘젓고 다녀 주신다면 상대의 경계심도 더욱 바짝 오르려나.”

    성 주변에 쓸데없는 수작을 부려 놓으려는 간계는 막을 수 있을 터였다.

    사냥개를 루크에게 맡겨 두었으니 빼돌릴 수 있는 가능성은 적을 테고.

    충분히 애를 태운 뒤에 상대를 끌어내는 것이 좋을까?

    눈에 띄지 않게, 그리고 웬만하면 내 ‘진짜 능력’은 보이지 않게끔 성가신 일을 줄여야 할 텐데.

    이곳에도 틀림없이 황태후의 눈이 있을 테니까.

    생각에 잠긴 도로테아가 긴 침묵과 함께 검지로 창틀을 톡톡 일정하게 두드렸다.

    “테아.”

    발레리의 부드러운 부름이 도로테아의 상념을 멈추게끔 만들었다.

    특유의 고아한 미소를 머금은 그녀가 도로테아를 일깨웠다.

    “3황자 전하께서 체면이 상하셨으니 에이든 경과 함께 숲을 살피러 가실 거야. 적어도 저녁 무렵까지는 고용인들을 제외하면 최소한의 인원만이 성에 남아 있겠지.”

    도로테아가 비교적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은 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생긴다는 의미였다.

    메릴린이 불안함이 감도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와 함께 온 부녀요. 아이의 상태가 좀 이상한 거 보셨어요?”

    “아아.”

    짧은 긍정의 말에 메릴린이 좀 더 용기를 얻어 목소리를 냈다.

    “그 아이를 고칠 수 있을까요?”

    그때 레이몬드는 비록 시신이었으나, 지금 저 아이는 미약하긴 해도 숨을 쉬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건강한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꺼낸 물음에 도로테아는 명확한 답을 해 주는 대신 그저 침묵을 택했다.

    *   *   *

    당연하게도 치료사는 메릴린의 조그마한 타박상은 물론이고 짐승에게 물려 살점이 떨어져 나간 데인이나 자객의 화살이 스친 루크의 부상을 치료하지 못했다.

    그나마 메릴린의 상처가 옅은 데다, 다른 이들은 다치는 데에 이골이 난 나머지 가벼운 상처들 정도는 스스로 치료할 수 있어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진작 말이 나왔을 만큼 형편없는 실력이었다.

    “문제는 어째서 다들 저 돌팔이를 하나같이 치켜세우고 있냐는 거야.”

    성에서 일을 하는 이들은 모두 저 남자를 몹시도 신뢰하는 눈초리였다.

    “치료사님은 며칠째 자리에 누워 오늘내일하던 할머님도 일으키셨고, 말을 하지 못하던 아이의 입도 트이게 할 정도였다니까요.”

    “무엇보다도 키엘 백작님이 몹시도 신뢰하시는 분이니까요.”

    “키엘 백작이라.”

    두통이 있을 때면 종종 그를 불러 통증의 완화를 부탁한다는 말에 도로테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래서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모양이다.

    남자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면서 여태껏 키엘에게 꼬여 드는 부정하고 탁한 기운들을 일시적으로나마 쫓아내었을 테니까.

    도로테아는 저자가 무엇을 하든 제 앞길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별 상관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콜린은 조금 다른 듯했다.

    “무엄한 자다. 심지어 자신이 하는 짓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잇속을 차리는 일에만 눈을 떴구나.”

    “왜? 저자는 그래 봤자 기운을 흐트러뜨리는 것이 전부일 텐데.”

    “‘길’을 엉망으로 만들지 않나. 저러다 망자들이 가는 길이 중간에 흐트러지기라도 하면? 길 잃은 혼들이 객귀가 되는 것도 모두 우리의 책임…….”

    말을 하던 콜린이 별안간 미간을 찌푸리고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우리’라고 칭하는 존재에서 벗어나 인간의 육신을 뒤집어쓰고 있음을 깨달은 듯했다.

    도로테아는 미묘하게 굳어 버린 그의 표정을 읽어 내지 못한 것처럼 슬쩍 말을 돌렸다.

    “뭐, 우리에게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지 몰라도 ‘몇몇’ 이들에게는 꽤 도움이 될 테지.”

    저토록 실력이 부족한데 누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필립은 언제나 그렇듯 수수께끼 같은 도로테아의 말을 들으며 사냥터에 출입도 해 본 적 없는 귀족들을 찾아가는 치료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분명 추레한 차림의 부녀가 어떤 상태인지 보았을 텐데, 그들의 신분이나 차림새를 보더니 치료는커녕 다치지도 않은 귀족들에게 먼저 접근하고 있었다.

    “필립.”

    “응.”

    “저자가 그 ‘부녀’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

    도로테아의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남자가 들어간 방에서 신기함에 들뜬 탄성이 들려왔다.

    “오오! 늘 시달리던 관절통이 오늘따라 확실히 사라지는군. 이 연고의 효험이 아주 훌륭한데 그래!”

    “아니, 뭘 했길래 두통이 이렇게 싹 사라지는 거지?”

    쥬벨 백작의 것으로 들리는 목소리는 조금의 거짓도 없이 경탄에 경탄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에 필립의 눈이 흘끗 도로테아를 향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말을 철회할 생각이 없는 듯 다시금 강조했다.

    “허튼짓 하지 못하게끔. 절대로.”

    필립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로테아는 허투루 지시를 내리지 않는다.

    그녀가 ‘굳이’ 강조하는 일이라면 그럴 만한 까닭이 있으리라.

    한 치의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아들의 곁에서, 콜린은 몹시 불쾌한 눈초리로 닫힌 방문 너머에서 새어 나오는 치료사의 겸양 어린 말을 듣고 있었다.

    *   *   *

    똑똑똑.

    세 번의 노크 후 도로테아는 상대의 허락도 없이 방문을 열었다.

    막 제 어깨에 붕대를 갈고 있었던 루크의 서늘한 눈이 예고 없이 들어선 방문자를 향했다.

    “아, 벗은 몸 보여 주는 걸 싫어한댔지. 좋아, 보이지 않게끔 문을 닫아 줄게.”

    도로테아가 싱긋 웃으며 활짝 열린 방문을 닫으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너도 나가라.”

    “할 말이 끝나면 절로 나갈 생각이야. 걱정 마.”

    “…….”

    사람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은 여전했다.

    그저 어릴 때의 치기였거니 했건만.

    저 건방짐은 예법을 통달하고도 바뀌지 않는 것을 보니 그저 도로테아의 본성인 모양이다.

    불쾌한 척 살기를 피웠지만, 루크는 사실 제가 그리 불쾌해하지 않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상대 또한 거짓으로 을러대는 것을 이미 파악한 듯 보였고.

    흥얼흥얼 콧노래와 함께 다가온 그녀가 테이블 위에 놓인 쿠키를 집어 들어 한 입 가득 베어 물었다.

    파사삭 소리와 함께 쿠키 부스러기들이 바닥에 떨어지자, 루크의 미간이 좁아졌다.

    “여긴 쿠키보다도 스콘이 더 맛있어. 간식을 먹으려거든 그걸 주문하는 게 좋을 거야.”

    “필요한 열량은 식사로 모두 채울 수 있다. 그런 장난거리 따위 먹지 않아도 그만이야.”

    나직한 말에 어깨를 으쓱한 도로테아가 의자에 앉아 무릎 위로 깍지 낀 손을 올린 채 루크를 바라보았다.

    “메릴린을 이곳까지 오게 만든 게 당신이지?”

    “그녀는 그 부녀의 소원을 들어준 것뿐이다.”

    도로테아가 픽 웃었다.

    “메릴린에게 연민과 동정이 꽤 많긴 하지만, 그녀는 그 누구보다 생존 본능이 강한 사람이야. 고작해야 길거리에서 만난 불쌍한 행인들을 돕자고 이곳까지 내려올 리 없지.”

    하물며 도로테아 자신을 만나는 것을 꺼려 하고 있었을 텐데.

    도로테아의 추궁에 루크는 별다른 변명을 더하는 대신 순순히 인정했다.

    “핑계가 필요해서. 이곳은 스펜서 백작령이고, 나는 그와 껄끄러운 관계니까.”

    “황태후의 끈이라서?”

    “그것도 있고. 나와는 잘 안 맞는 것도 있고.”

    순순히 인정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그녀에게 바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도로테아는 어깨를 꽉 동여맨 붕대 아래 옅게 비치는 선홍빛을 바라보다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너와 같이 움직일 생각이 없는데.”

    “내가 아니었다면 네가 그토록 아끼고 감싸는 외사촌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나를 움직이기 위해, 네가 일부러 보험으로 끌어들인 데인을 말하는 거야?”

    도로테아가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느릿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지난번의 경고가 그리 잘 먹히지 않았나 봐. 그때 분명히 나를 강제하거나 협박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도로테아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담긴 경고를 읽었는지 루크는 내가 건드린 것이 ‘주변인’이라는 어설픈 변명을 대는 대신 침묵했다.

    도로테아는 7황자에게 조만간 제멋대로 주변인들을 건드린 대가를 치르게 하리라 마음먹으며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저 부녀가 로헨 왕국을 언급했다던데. 그 단서가 궁금해 쫓아온 것이겠지?”

    “그래.”

    “적어도 이곳에서는 얌전히 내 말에 따르겠다면, 때가 되었을 때 네게도 기회를 줄게.”

    루크의 잿빛 눈이 도로테아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침묵 속에서 답을 읽었다는 듯 도로테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존심이 강한 짐승이니 고개가 아닌 눈빛이 꺾인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녀가 품에서 연고를 꺼내 테이블 위에 툭, 던졌다.

    “발레리가 챙겨 온 외상약이야. 신전에서 축복을 걸어 준 물건이라니 바르면 효과가 있겠지. 저 돌팔이보다는 훨씬 나을 거야.”

    “…….”

    “그리고 한 가지 더. 키엘 스펜서는 건드리지 마.”

    그 순간 누그러진 듯 보이던 회색 눈동자에 살기가 어렸다.

    숨조차 쉬기 힘들 만큼 강한 기세를 뿜어 대는 7황자를 보는 도로테아의 눈은 냉정하기 짝이 없었다.

    “그자는 위정자다. 황태후의 뒷배를 타고 제 잇속을 챙기기에 바쁜…….”

    “그렇지만 내 은인이라서.”

    말을 끊은 도로테아의 이야기에 루크의 입가가 실룩였다.

    불만이 가득한 눈동자를 마주한 채 도로테아는 어린아이를 가르치듯 얼렀다.

    “물 한 방울의 은혜도 넘치는 샘물로 보답해야 한다는 말, 모르니?”

    “그런 엉터리 셈법이 있나. 천하의 머저리나 할 짓이다.”

    “과연 그럴까.”

    배가 고파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이에게 던져진 빵 한 조각과, 배불리 먹어 졸린 이에게 던져진 빵 한 조각의 가치는 결코 같지 않지.

    “저 사람은 내게 그런 은혜를 베풀었어.”

    가진 것이 너무나도 없어, 제 몸조차 가누는 게 어려웠을 때 그가 빌려준 한 잔의 술은 곧 자신의 무기가 되어 사신을 잡아 옥죄는 창살로 변모했다.

    그리하여 콜린을 곁에 둘 수 있게 되었고.

    “그러니 적어도 그 은혜를 갚기 전까지는 신중해야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것처럼 반항 어린 눈을 한 루크를 향해 도로테아가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네가 유독 내게만 무른 까닭도, 내게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잖니?”

    나는 네 목에 걸려 있던 지독한 원념을 지워 주었고, 네 바로 곁에서 귀에 독이 될 말을 쏟아 낼 유모를 처분할 수 있도록 도왔으니.

    내게는 별일 아니었지만 네게는 아주 중요한 일이었겠지.

    방 안을 가득 채우도록 넘실거리던 살기가 일순간 사라졌다.

    날 것처럼 가득 벼려져 있던 짐승의 회색 눈동자에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들어찼다.

    침묵이 내려앉은 방을 빠져나온 도로테아는 방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을 향해 예의 바르게 말을 건넸다.

    “7황자 전하께서 제 친우와 외사촌을 보호하다 부상을 입으신 게 마음에 걸리네요. 먼저 황도로 올라가시는 것을 권했지만 그러지 않겠다 하시니 마음이 놓이지 않아요.”

    시선을 교환한 병사 중 하나가 조심스레 상심한 듯 보이는 도로테아를 달랬다.

    “염려 마시지요, 영애. 저희가 호위 인원을 충원해서라도 황자 전하의 안전을 책임지겠습니다.”

    “아시겠지만, 황자 전하께서는 위험한 일이 생겨도 쉬이 도움을 청하지 않는 자존심이 강한 분이니…… 혹여 일이 커지면 이곳의 보안을 책임져야 할 분들에게까지 화가 미칠까 염려가 됩니다.”

    다정하고 상냥한 어린 영애의 깊은 생각에 다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몇몇은 일개 보초에 불과한 이들의 입장까지도 고려하는 그녀의 깊은 마음씨에 진심으로 감동한 눈치였다.

    “그러니 황자 전하께서 혹 움직이게 되시면 제게 몰래 귀띔해 주시겠어요?”

    일개 병사는 황자의 행동을 저지할 수 없지만, 이곳에 책임자로 내려온 도로테아라면 가능한 일이었다.

    “예,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못난 황자 놈의 일거수일투족을 알려 줄 믿음직한 아군들을 포섭한 도로테아는 그제야 만족스런 얼굴로 층계를 올랐다.

    저 멀리서 다른 귀족들에게 환심을 사던 치료사의 눈길이 그를 본체만체하고 올라가는 도로테아에게 길게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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