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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78)화 (78/242)
  • 혼술사 도로테아 78화

    아이의 아버지, 주드는 탈진 상태였다.

    키엘의 지시에 따라 그에게로 다가온 이들이 지친 부녀를 마차에 태울 때까지도, 메릴린은 좀처럼 도로테아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루크의 등장에 불쾌한 듯 얼굴을 찡그리고 있던 그 리처드조차도, 차마 말을 꺼내기 어려울 만큼 서럽게 울어 댔다.

    “그, 이제는 좀 그치라 하지?”

    리처드의 말에 메릴린이 눈물범벅이 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머리를 고정하던 핀들이 모두 흩어져 산발이 된 머리카락, 화장이 번져 시커먼 눈물 자국이 얼굴을 가로지른 메릴린과 마주한 리처드가 움찔했다.

    “아니, 돌아가서 더 울면 되지 않나.”

    그리 길지 않은 생이긴 했지만, 눈앞에서 귀족 영애가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으로 서럽게 우는 모습을 난생처음 본 리처드 또한 압도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꽤 친밀하다고는 들었지만.’

    메릴린이 도로테아를 잘 따른다는 것이야 황도에서는 모르는 이들이 없을 만큼 유명한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이야.

    “고작 며칠 보지 못하는 것 때문에 여기까지 내려오다 산적을 만난 건가.”

    완벽하게 틀린 추리였지만 중얼거리는 리처드의 말을 바로잡아 줄 만한 인물은 없었다.

    “사냥개의 시체를 성으로 가져가도 될까요?”

    “죽은 개를 말입니까?”

    “애석하게도 좋지 않은 죽음을 맞이했지만, 주인이 있는 개를 해한 셈이니 마땅히 주인을 찾아 보상을 해야 할 듯해서요.”

    도로테아의 말에 키엘 백작이 대답하기도 전에, 콜린이 뒤에 있는 이들로 하여금 사냥개들을 실어 나르도록 지시했다.

    웃는 얼굴의 도로테아가 마찬가지로 엉망인 꼴을 하고 있는 루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메릴린을 이곳까지 데려온 것이 그임을 알아본 듯이.

    “7황자 전하께서 부디 저 개들의 주인을 알아봐 주실 수 있으실까요?”

    “…….”

    “본디 외교와 관련된 정보가 새어 나가서는 안 되는 만큼 관계없는 이들을 성으로 들여서는 아니 되겠지만…….”

    도로테아의 눈이 루크를 향해 곱게 휘어졌다.

    “보안을 아주 철저히 유지해 주시리라 믿어요.”

    혹여 그 어떤 것이라도 누군가의 입에 오르내리거나, 성에서 있었던 일들이 밖으로 퍼진다면 그것을 모두 루크의 책임으로 묻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꽤 심통이 났군.’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서서 마차로 메릴린을 부축하는 도로테아의 어깨 위로, 어느새 조그마한 다람쥐가 올라타 있었다.

    “도대체 어떤 새끼가 저렇게 위험한 개를 숲에 풀어놓은 거야? 완전 죽는 줄 알았네.”

    목을 매만지며 투덜거리는 데인의 말에 필립이 다가와 엉망이 된 얼굴을 닦을 손수건을 건넸다.

    “근데 왜 다들 숲에 나와 있는 거야?”

    “사냥터를 둘러보려고.”

    침착한 말에 데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않는 게 좋을걸. 저 숲 굉장히 이상해. 왜인지 모르겠는데, 산짐승들이 반쯤 눈을 뒤집고서 사람에게 덤비더라니까.”

    “흠…….”

    “종류도 다양했어. 아니, 심지어 늑대가 눈앞에 사슴을 두고 우리한테 덤벼드는 걸 보고 기가 막히더라. 거기에 사슴도 눈이 돌아가서는 우리 쪽으로 돌진해 오고.”

    필립이 슬쩍 콜린과 시선을 교환했다.

    분명 도로테아는 그들이 숲으로 들어가기 전 일부러 말을 걸어 시간을 끌었다.

    그것은 숲속에서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뜻일 테고.

    아무래도 사냥개들의 주인은 그저 부주의하게 사냥 놀이를 즐기던 귀족 자제는 아닐 테지.

    “성에 도착하면…….”

    콜린의 말에 필립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충분히 쉬어 둬라.”

    틀림없이 쉴 틈도 없을 만큼 바쁘게 부려 먹혀야 할 미래를 미리 걱정해 주는 ‘아버지’를 향해, 필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염려 감사합니다.”

    불친절하고 알아듣기 힘든 염려에, 무뚝뚝한 얼굴이었지만, 그가 ‘아버지’ 노릇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렇게 할게요, 아버지.”

    침묵하는 이에게 ‘아버지’라는 말을 붙이는 것이, 이제는 숨 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워졌다.

    *   *   *

    “소식이 몹시도 빠르군요.”

    성 밖에 주르륵 나와 기다리는 이들을 보며 꺼낸 말에, 키엘 백작이 잔잔한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치료를 받아야 할 이들도 있는 것 같고, 급히 여분의 방을 준비해야 할 것 같아 미리 전갈을 넣어 두었습니다.”

    성을 관리하고 있다던 제닉스 부인이 다가와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곤란을 겪으셨다 들었습니다. 사냥개의 주인에게 전갈을 넣어 두었으니 곧 성으로 찾아와 사죄할 겁니다.”

    “사냥개를 보지도 않았는데 주인을 아시는군요?”

    웃으며 던진 물음이었지만 제법 뼈가 있는 도로테아의 말에 제닉스 부인은 차분하게 답했다.

    “사냥터를 돌아다니는 사냥개들이라면, 키엘 님의 조카인 도버 경이 기르는 아이들이 분명하니까요. 사람들이 다니지 않을 때에 종종 풀어놓곤 하는데 오늘도 그랬나 봅니다.”

    말을 마친 부인이 천천히 리처드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황자님께서 방문하실 것을 알면서도 이런 부분을 헤아리지 못한 제 관리 소홀입니다.”

    미간을 찡그린 채 침묵하고 있던 리처드가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아니, 유모가 미안할 것은 아니지. 제아무리 스펜서 백작의 조카라고는 하나, 내 성 근처에서 꽤 불경한 짓을 한 건 그쪽이니까.

    비록 스펜서 백작령 내에 있다고는 하나 이 성은 리처드의 별장이었고, 그러니 성과 가까이 있는 사냥터는 리처드가 개인적으로 애용하는 사유지나 다름없었다.

    도로테아는 황자다운 위엄을 세우고 싶은 듯 턱을 치켜든 채 말하는 리처드를 내버려 두고는 낯선 인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제닉스 부인이 부른 치료사래.”

    발레리가 조그마하게 귀띔했다.

    “신전에는 제대로 된 신성력을 쓸 만한 사제가 없는 모양이야. 그나마 민간에서는 가장 이름 높은 치료사라더라.”

    한 걸음 뒤에서 고개를 들었다 숙이기를 반복 중인 남자는 고급스런 의복에 짙은 향을 풍겼다.

    약초향이 아닌, 귀족들이나 사용할 법한 향수를 쏟아부은 듯 독한 향이 코를 찔렀다.

    범상치 않은 몰골들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에는 흥분이 들어차 있었다.

    “저기, 영애.”

    그제야 정신을 차린 메릴린이 눈물을 닦으며 도로테아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저와 함께 온 부녀가…….”

    사람들이 많아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해 주저하는 모습에서 알 수 있었다.

    어딘가 ‘이상한’ 증상을 보이고 있으니 그녀만이 쓸 수 있는 그 능력으로 살펴봐 달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겠지.

    ‘루크가 어떻게 끌어들였는지 알 것도 같네.’

    소심하고 겁이 많지만 묘한 부분에서 무른 메릴린을 휘두르는 법을 이미 파악한 모양이었다.

    “알겠어요. 따로 만나 이야기를 해 볼게요.”

    도로테아의 말에 메릴린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쳤다.

    반쯤은 고의적으로 아이의 기이한 상태를 모른 척하고 있던 도로테아의 앞에, 리처드의 위신을 충분히 세워 준 제닉스 부인이 다가왔다.

    “비록 부족할지 모르나 근방에서는 가장 유능한 치료사입니다. 필요한 약재가 있다면 얼마든지 써도 좋다고 했으니 우선 치료부터 받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려요.”

    마치 준귀족이라도 되는 양 당당한 걸음걸이로 부인의 앞으로 나온 치료사는 짐짓 심각한 얼굴로 일행들을 살폈다.

    꼼꼼히 들여다보던 그의 눈이 도로테아의 옆에 있던 메릴린에게서 멈췄다.

    “이 영애가 가장 심각한 듯 보이니, 먼저 치료하겠습니다.”

    “…….”

    비록 빗겨 나갔다고는 하나, 팔에 화살을 맞아 지혈하고 있는 데인이 바로 곁에 있었다.

    루크의 상태도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고.

    화장이 번져 검은 자국이 얼굴을 뒤덮고, 머리가 가시덩굴처럼 산발이 된 것 외에는 옅은 찰과상뿐인 메릴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치료사는 마치 존재하지도 않는 그녀의 통증을 느끼기라도 하는 양 안타까운 얼굴을 하며 메릴린에게 물었다.

    “통증이 심하십니까?”

    “…….”

    무려 황자의 유모가 보증한 ‘실력 좋은’ 치료사의 말에, 주변에 있던 다른 귀족들의 시선에도 걱정이 어렸다.

    모두들 진심으로 메릴린의 심상치 않은 부상을 걱정하자, 당사자 또한 아픔을 호소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내 꼴이 그렇게 엉망이야? 정말 그래?’

    가까스로 그쳤던 메릴린의 눈에 서러운 눈물이 다시금 차오르기 시작했다.

    ****

    식사 시간이 되자, 바닷가를 거닐던 나머지 귀족들도 돌아와 상황을 보고받았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사냥터에 가 보길 잘하셨군요.”

    쥬벨 백작이 꺼낸 말에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혹여 왕국의 귀빈들이 이곳에 머무를 때도 아까처럼 위협적인 사냥개들이 다닌다면 곤란해졌을 터.

    “경들은 별문제가 없었나 보오?”

    리처드의 물음에 귀족들이 떨떠름한 얼굴로 시선을 교환했다.

    어쩌면 놓쳤을지도 모르는 부분을 미리 발견하긴 했지만, 얻어걸린 거지 제 능력으로 찾은 것이 아니지 않나.

    심지어 사냥터에 가자는 제안조차도 도로테아가 먼저 했을진대.

    그러나 공을 가로채인 당사자인 도로테아는 무슨 생각인지 리처드의 말에 깊은 동조를 표하며 연신 그를 부채질했다.

    “황자님이 사냥터에 안개가 짙게 끼었다며 숲에 들어가려는 저희를 만류하지 않으셨다면 더 큰 피해를 입었을 겁니다.”

    “암, 그렇지.”

    “저는 아무래도 성에 남아 힘겨운 여행길에 시달렸던 친우를 달래 줘야 할 것 같은데, 오후에는 쥬벨 백작님과 함께 움직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아! 걱정 마라. 내가 세심히 살펴보도록 하지. 백작도 나만 믿으시게.”

    “…….”

    도로테아는 저를 향한 원망과 짜증의 시선들을 무시한 채 가장 먼저 식사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록 접시를 싹 다 비우긴 했어도 후식이 나오기도 전에 자리를 뜨는 생소한 모습에 데인이 눈을 크게 떴지만, 이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메릴린 영애를 그토록 마음 깊이 걱정하고 있었구나.’

    그토록 좋아하던 먹을 것마저 마다하고 가는 뒷모습에 마음이 절로 훈훈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레어 남작 영애야 그렇다 쳐도 7황자 전하와 데인 경은 어찌하여 이곳을 찾았소?”

    미심쩍은 눈길이 그제야 와닿자 데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남작 영애가 모처럼 테아에게 가고 싶다는데 홀로 보낼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실제로도 보셨겠지만 오는 길 내내 몹시도 험준하고 산적들이 사방에 넘쳐 났습니다만.”

    “산적들이요?”

    오는 길이 순탄했던 귀족들이 의아한 듯 물었지만 루크는 침묵했다.

    산짐승들이 그토록 이지를 잃고 달려드는 것조차도 그저 이상하다는 말로 넘기고, 보통 실력이 아닌 이들이 조직적으로 일행을 노리는 데도 고작 한다는 생각이 산적이라니.

    그 도로테아의 친인척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의 둔감함이었다.

    옆에 있던 필립이 싱긋 웃었다.

    “데인은 에이든 숙부를 참 많이 닮았죠.”

    아버지인 펠릭스를 반만 닮았어도 눈치는 있었을 텐데.

    하필이면 에이든의 친자라고 해도 믿을 만큼 닮은 것이 눈치라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   *   *

    식사 자리에서 일찍 자리를 뜬 도로테아는 시녀의 안내에 따라 메릴린이 치료받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복도의 창을 가려 놓은 커튼들은 모두 새로 한 건가?”

    “네, 부인께서 직접 지시한 것입니다.”

    고급스러운 벨벳 원단을 사용하긴 했지만 커튼은 지나칠 정도로 두껍고 색이 무거웠다.

    성을 장식할 때에 흔히 쓸 만한 소재는 아닌데.

    “기본적으로 성 내부 구조상 저녁이 되면 서늘한 데다, 로헨 왕국은 이곳보다 기온이 높은 곳이니까요.”

    그럴듯한 이야기에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인 도로테아가 이윽고 방문 앞에 멈춰 섰다.

    그녀를 대신해 문을 노크한 시녀가 나지막이 알렸다.

    “도로테아 하이클레어 후작 영애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문이 열리자, 이제는 제법 사람 몰골을 하고 있는 메릴린이 지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옆에 있는 치료사는 도로테아의 등장에 고개를 푹 숙인 채 어색하게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녀의 옆에 간단하게나마 식사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 샌드위치를 흘끔 본 도로테아가 웃으며 그녀의 앞에 앉았다.

    “좀 어때요, 메릴린?”

    “영애.”

    꽤 진지한 얼굴의 메릴린이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고 잠시 망설이더니 치료사를 향해 고갯짓했다.

    “다른 사람들부터 봐줘요. 나는 됐으니까.”

    “그렇지만…….”

    “됐다고요.”

    단호한 말에 마지못해 나간 치료사를 보던 그녀가 얼굴을 찡그리며 다짜고짜 물었다.

    “정말로 저이가 이 근방에서 가장 대단한 치료사라고요?”

    “제닉스 부인께서는 그리 말씀하셨어요. 거짓말을 하실 분으로는 안 보이네요.”

    “저 남자, 제 상처가 어디 있는지 구분조차 못 하던걸요. 뼈가 상했는지, 근육이 상했는지, 혹은 피가 멎은 건지 아니면 애초에 나지 않은 건지도 몰랐어요!”

    몸에 짙게 밴 약초의 향에 반신반의했지만 아무리 봐도 대단한 치료사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성에 있는 하녀나 시녀들은 하나같이 저 사람이 진짜 훌륭한 치료사라는 거예요!”

    흥분한 메릴린의 말을 듣던 도로테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메릴린.”

    “말도 안 되는…… 네?”

    열변을 토하던 메릴린이 순간 당황한 듯 하던 말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로테아는 그런 메릴린의 볼을 톡, 하고 가볍게 두드려 주고는 웃었다.

    “아마 사람들의 말이 모두 거짓은 아닐 거예요. 저이는 정말로 ‘아픈 것을 낫게’ 한 적이 있을 테니까요.”

    남자의 몸에 짙게 밴 약초의 냄새에 하마터면 알아채지 못할 뻔했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주머니와, 그가 갖고 있던 커다란 지팡이.

    “희한한 일이네요.”

    영안이 트인 것도 아니요, 혼력을 갖춘 것도 아닌데.

    “어째서 축귀물(逐鬼物 : 귀신을 쫓는 물건)을 지니고 있을까.”

    그는 병을 치료한 것이 아니다.

    부정한 기운을 지우고, 병마에 깃들거나 병자를 찾아온 ‘귀’를 멀리 물리친 것일 뿐.

    “그럼, 치료사가 맞는 거예요?”

    긴가민가한 얼굴의 메릴린을 그윽이 들여다본 도로테아가 활짝 웃었다.

    “아뇨, 돌팔이예요.”

    아픈 것을 낫게 했다고는 하나, 그는 치료사가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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