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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77)화 (77/242)
  • 혼술사 도로테아 77화

    “하이클레어 후작 영애를 찾는 까닭이 뭐지?”

    나지막한 목소리에 힐끗 뒤를 돌아보았던 메릴린 레어가 조각상처럼 그대로 굳었다.

    그러고는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모양새를 갖춰 공손하게 몸을 굽혀 인사를 건넸다.

    “7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루크의 시선이 바들바들 떠는 메릴린에게 잠시 닿았다가 이내 떨어졌다.

    그러고는 다시 남자를 향해 질문을 반복했다.

    “후작 영애를 찾는 까닭.”

    황자 전하라는 호칭에 남자가 바싹 마르는 입술을 연신 침으로 적시며, 새하얗게 비어 버린 머릿속을 더듬거리면서 말을 꺼냈다.

    “제, 제 어린 여식이 병에 걸렸사온대.”

    “그런데.”

    “실은 이 아이가, 국경 지대에서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

    아무리 아는 것 없는 무지렁이라 해도, 눈앞의 황자가 대단한 인물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양옆으로 늘어선 건장한 호위들을 거느리고 있는 남자는 ‘국경 지대’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잘 벼린 칼처럼 날카로워졌다.

    남자는 애써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아 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숲에서 길을 잃어 깊은 곳까지 들어갔는데, 몹시 수상해 보이는 일련의 무리들이 모여서 무언가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상하게도 주변에 자욱한 연기가 끼어 옴짝달싹도 못 하고 숨었는데, 별안간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고 하더군요.”

    “눈부신 빛이라.”

    “그러고 돌아와서는 자꾸만 잠이 드는 일이 잦아지고 식은땀을 흘리며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토하더니, 종국에는 이렇게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아이의 상태는 확실히 심각해 보였다.

    생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축 늘어진 몸을 보던 메릴린이 남자가 꺼내 든 조각보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한때 손수건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조그마한 천에 새겨진 문양이 낯익었다.

    “로헨 왕국.”

    루크는 그제야 남자가 도로테아를 찾아 댄 까닭을 알았다.

    국경에서 이곳까지는 마차를 타도 최소 삼 일은 넘을 만큼 먼 거리였다.

    딸아이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기적을 일으킨 건지, 부녀는 무사히 이곳에 당도했을 뿐만 아니라 제 말을 들어 줄 만한 인물도 만났다.

    루크의 눈이 가늘어졌다.

    ‘고작해야 저들의 몇 마디 말로는 증거가 되지 못해.’

    아이의 상태가 이상한 것도 사실이고 남자의 증언도 거짓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걸 밝히려면 신전을 끌어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가 아는 황제라면 지금같이 민감한 시기에 외교적 결례까지 무릅써 가며 신전을 끌어들여 일을 키우려 들지는 않겠지.

    ‘그렇지만 도로테아 하이클레어가 직접 저 남자를 만난다면.’

    황도에서처럼 수사를 방해받지도 않을 테지.

    게다가 도로테아는 애초에 제국의 안위나 뒷일의 감당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서 움직이는 인물.

    무엇을 쫓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황태후 본인은 물론이고 그녀가 감싸고도는 친(親)로헨 왕국 귀족들과 관련이 있을 터.

    머릿속으로 계산을 끝낸 루크가 입을 열었다.

    “이건 아무런 증거도 되지 못한다. 우연이라 우기면 그만이야.”

    절망하듯 무너지는 남자에게 돌아갈 여비라도 주려는 듯 메릴린이 몸을 굽힌 순간이었다.

    “아윽!”

    아이와 닿을 만큼 가까워진 그때, 별안간 타들어 가는 듯한 뜨거운 통증에 그녀가 짧게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이건…….”

    품에 지니고 있던 붉은 글씨가 새겨진 ‘부적’이 눈앞에서 화르르 타올라 사라지기가 무섭게, 축 늘어져 있던 아이의 눈에 찰나의 순간 초점이 돌아왔다.

    으아아…….

    목 깊은 곳에서부터 튀어나온 알 수 없는 소리를 뱉은 아이는 발버둥 치던 것도 잠시, 이내 다시 늘어졌다.

    “바, 방금…….”

    방금 분명 움직였어. 눈에 초점이 돌아왔어.

    줄곧 미약한 숨을 쉬는 것이 전부였던 아이가, 입을 열어 소리를 냈어.

    남자가 멍하니 메릴린을 올려다보다 이내 엉금엉금 기어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붙잡았다.

    “영애, 영애님. 제발 도와주십시오.”

    “예, 예?”

    절박한 울부짖음이 당황한 메릴린을 향했다.

    “방금 아이가 눈을 떴습니다. 줄곧 정신도 차리지 못하던 아이가…….”

    “그건…….”

    도로테아 하이클레어가 준 ‘부적’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눈에 들어차기 시작한 희망을 읽은 메릴린이 불편한 표정으로 주춤 뒤로 물러났다.

    도로테아는 지금 황도에 없고, 메릴린은 그녀와 마주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다시 축 늘어진 아이를 보아하니 분명 저 아이의 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도로테아 하이클레어뿐일지도 몰랐다.

    ‘그때, 레이몬드 공자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었던 것처럼.’

    망설이는 메릴린의 뒤에서 저음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그녀의 귀로 흘러들었다.

    “아무래도 하이클레어 후작 영애를 만날 일이 생긴 모양이군.”

    사아악 핏기 가시는 소리가 마치 귓가에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메릴린이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돌려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송구하오나, 저는 당분간 저택에서 자중하며 지내야 한다는 아버님의 말씀에 따라…….”

    루크가 옆에 선 이들 중 하나를 불러 지시했다.

    “레어 남작에게 메릴린 레어 남작 영애가 절친한 사이인 하이클레어 후작 영애의 초청을 뒤늦게 수락하여 스펜서 백작령으로 내려갔다 전해 주게.”

    “화, 황자 전하. 먼 길을 가기에는 저희 가문의 마차와 호위가 미비합니다.”

    “마침 내가 일정이 비어 마차와 호위를 준비할 수 있군.”

    “불충하게도 한낱 남작 영애인 제가 7황자님께 그런 폐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든 꾸물꾸물 용을 쓰는 메릴린을 향해 루크가 드물게도 옅은 웃음을 보였다.

    “섭섭하군. 우리의 친분은 어찌하고?”

    “저희에게 무슨 친분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제발 말씀을 거두어 주소서.”

    “친구의 친구는 친구 아니겠나.”

    억지에 가까운 말에 메릴린이 다시 반박하려는 순간 루크가 비교적 부드럽게 물었다.

    “영애가 고르시게. 친구의 친구로서 나와 아주 좋은 친구가 될지. 아니면 적이 될지.”

    “…….”

    선택지가 친구가 되거나 적이 되거나 둘 중 하나인가.

    왜 이렇게 극단적이야.

    루크는 엮이고 싶지 않은 듯 필사적으로 눈을 돌리는 메릴린을 여유롭게 바라보았다.

    도로테아는 분명 주변인을 이용해 ‘자신’을 협박하려 들거나, 쓸데없는 강요를 하지 말라고는 했지만, 주변인을 협박해선 안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게다가 메릴린은 아직 도로테아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지 않은 채 망설이고 있는 어린양으로 보이고.

    “저, 아무리 그래도 공무를 수행 중인 영애를 찾아갈 수는…….”

    “글쎄, ‘소중한 친구’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다면 가능할 것 같은데. 애초에 폐하께서는 하이클레어 영애에게 전권을 넘겼으니 몇 사람 정도 더 초대하는 건 가능하겠지.”

    마침 마부도 저기 있군.

    루크의 시선이 소란스러움에 사람들을 헤치고 고개를 내민 데인 하이클레어에게로 향했다.

    *   *   *

    거절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건넨 제안을 데인 하이클레어는 몹시도 산뜻하게 받아들였다.

    “안 그래도 테아가 걱정되던 차였습니다. 레어 남작 영애가 테아를 위하는 마음이 남다른 분이시라는 건 진작 알고 있던 차였지만. 참으로 대단한 우정입니다.”

    주변이 술렁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메릴린은 눈을 질끈 감고서 이미 재가 되어 사라져 버린 부적이 있던 소매 안쪽을 만지작거렸다.

    엮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저 아이는 십중팔구 레이몬드처럼 ‘비정상적인’ 현상을 겪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게다가 이미 사람들이 지나치게 모여들었어.’

    여전히 7황자가 있는 방향을 외면한 채 메릴린이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평범하게 떠난 여행길은 희한할 정도로 많은 흉수들이 들러붙으며 목숨을 건 도주극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빠르고 집요하게 우리를 쫓아올 수 있는 거죠?”

    애초에 출발조차도 충동적이었으며, 황도를 떠날 때에도 일부러 샛길을 이용했는데.

    성으로 들어서는 길만 하더라도 수십 가지가 되는데도 저들은 단시간에 일행을 찾아냈을 뿐 아니라, 빠르게 이동하면서도 정확하게 그들을 노리고 있었다.

    “수가 너무 많군.”

    주변을 호위하던 이들이 이미 한차례 적들의 이목을 속여 다른 길로 보냈건만.

    여유로웠던 것도 잠시, 백작령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또 다른 추격자들이 붙어 그들의 목숨을 노렸다.

    몹시도 필사적인 태도를 보니 더더욱 저들 부녀를 거둔 것이 틀린 선택이 아님을 알았다.

    ‘살인멸구를 해야 할 정도란 말이지.’

    이토록 상대가 몸이 달아 있는 것을 보면 황태후의 꼬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콰앙!

    그 순간 굉음과 함께 달리던 마차가 멈춰 섰고, 그 반동으로 안에 있던 이들이 모두 나동그라졌다.

    허겁지겁 몸을 일으키는 일행들에게 마차를 몰던 데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들이 이상합니다!”

    창문으로 빠져나온 루크는 마차를 몰고 있던 말의 눈이 희뿌옇게 된 것을 확인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데인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우연이 있을 수 있습니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달리던 말들이 죄다 실명이라니.”

    “말이 안 되는 게 그것 하나뿐일 리가 없지.”

    어느새 좁아진 길 위로 모여드는 산짐승들의 기세 또한 몹시도 기이했다.

    검을 손에 쥔 이는 단둘뿐.

    초식 동물이고, 육식 동물이고 할 것 없이 모여든 짐승들이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인간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과연, 암살자에게 당한 것보다는 산짐승의 먹이가 되었다고 처리하는 것이 훨씬 낫다?”

    백작령에 도착하자마자 귀신처럼 사라져 버린 자객들을 대신해 내보낸 용병인 셈인가.

    “제기랄 아무래도 오늘 재수가 더럽게 없는 모양인데.”

    욕을 뱉은 데인의 뒤에 서 있던 메릴린의 앞에 조그마한 생명체가 접근했다.

    흠칫하던 것도 잠시, 이쪽을 향해 거침없이 쪼르르 다가오는 다람쥐를 본 그녀의 눈이 커졌다.

    ‘도로테아 영애의 다람쥐야.’

    왜인지 모를 확신이었다.

    검을 든 이들이 수많은 짐승 떼에 고전하는 사이 메릴린은 제 머리 위를 맴도는 까마귀와, 다시 돌아와 자신에게 따라오라는 듯 손짓하는 다람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홀린 듯 그녀의 입이 열렸다.

    “저기, 당신. 이름이 주드라고 했던가요?”

    아이를 안은 채 마차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온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나를 따라와요.”

    짙은 안개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길 위에 선 다람쥐의 존재만이 오직 또렷했다.

    마치, 자신을 믿고 따라오면 된다는 듯이.

    *   *   *

    “사냥하기에 좋은 날씨는 아니로군. 안개가 너무 짙어.”

    “그러게 말입니다. 스펜서 백작령은 이렇게 안개가 짙게 끼는 일이 드문데.”

    키엘의 시선이 숲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도로테아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숲 어귀에서 들려오는 까마귀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불만스러운 눈치인 리처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오늘 사냥을 하기에는 무리인 듯싶으니, 사냥터를 에둘러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겠어요.”

    “기껏 왔더니 희한한 일이군. 성 주변에는 안개가 이토록 짙게 끼지 않았었는데.”

    “그러게요. 아주 희한한 일이죠.”

    숲 안에서 일어나는 작당들이 몹시도 흥미로웠다.

    누군가가 살아 있는 짐승들을 충동질해 놓았다.

    잔뜩 흥분해 엉켜 죽은 짐승들의 혼에서는 지독한 사취와 함께 달큼한 향이 났다.

    “그럼 이제 그만 돌아가…….”

    리처드의 말에도 미동 없이 숲을 보고 있던 도로테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한 걸음. 두 걸음. 제게로 가까워지는 기척이 느껴진다.

    피피가 옳은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가끔은 짧게나마 ‘망자의 길’을 열 수 있는 재주가 이렇게 도움이 되기도 하는군.

    산 자의 헐떡이는 숨소리가 하나, 둘, 셋. 그리고 나머지 둘까지.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으세요?”

    기다리는 이들이 지척에 다다랐음을 느낀 도로테아는 제가 열어 두었던 ‘망자의 길’을 닫았다.

    그와 동시에 살아 있는 이들의 눈에서 벗어났던 도망자들이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어, 어?”

    누군가의 비명과 발걸음 소리에 리처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로테아의 앞을 가로막은 프리드가 숲을 노려보기가 무섭게, 부스럭거리던 수풀 사이에서 눈물 콧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한 여인이 튀어나왔다.

    “도로테아 영애!”

    가련하게 흐느끼는 메릴린이 그제야 안심한 듯 도로테아의 품에 안겨 통곡했다.

    입이 떡 벌어지도록 흐트러진 몰골을 한 그녀의 뒤로 창백한 안색의 부녀가 나타나는 것과 동시에, 사나운 사냥개가 어디선가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컹, 컹!”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키엘 스펜서의 검이 이를 드러내고 달려든 사냥개를 내리그었다.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사람을 사냥하려 달려들던 사냥개 세 마리가 모두 목숨을 잃었다.

    “자칫 큰일 날 뻔했군요.”

    메릴린을 품에 안은 도로테아가 ‘쇠 목줄을 찬’ 사냥개를 내려다보며 느릿하게 말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큰일 날 뻔했어요.”

    자칫하면 인간 사냥을 눈앞에서 목격할 뻔하지 않았나.

    울음소리가 잦아드는 사이, 뒤늦게 지친 얼굴의 데인과 루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로테아는 살아남은 이들을 향해 다정하게 웃어 주었다.

    “어서 와.”

    기다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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