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사 도로테아 76화
키엘이 손을 뻗어 도로테아의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몇 가닥 만지작거렸다.
마치 가느다란 은빛 실처럼 등불에 빛나는 머리카락을 들여다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맹랑하다 생각했지만.”
“…….”
“방금의 제안은 꼭 악마의 속살거림처럼 들리는구나.”
달콤한 과육 속에 독을 품은 씨앗이 들어 있듯이.
키엘의 웃음이 짙어졌다.
“참으로 탐이 나지만, 네 제안은 덥석 받아들이기가 겁이 나는군.”
“저는 은인에게 해가 될 만한 일을 하지는 않아요.”
“그럼 묻지. 이곳까지 내려와 나를 찾은 연유가, 오로지 은혜 때문이더냐?”
“…….”
웃음기를 띤 목소리와 달리 눈에는 조금의 장난기도 존재하지 않았다.
서늘한 눈빛을 고스란히 받아 낸 도로테아는 5년 전과 마찬가지로 담담한 시선으로 그와 마주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연분홍에 가까웠던 그녀의 눈동자가 어두운 남색이 되었다는 정도일까.
‘5년간 꾸준히 성장해 왔다고는 하나, 외관이 놀라울 정도로 바뀌었군.’
마치 다른 인물이 섞여 든 것처럼.
짙은 어둠이 낀 눈동자의 주인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두 번 다시 찾지 않으실 생각이었겠지요. 어느 정도는 의식적으로 저와 숙부님을 피해 다니신 것이 아닐까, 짐작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은인이 좀 필요해졌습니다.”
“내가 필요하다?”
키엘이 되뇌듯 중얼거렸다.
“은인께서는 제가 줄곧 궁금해하던 질문의 답으로 이끌어 주실 수 있을 듯싶어서요.”
그날 레이몬드의 육신을 되찾은 시각에 키엘과 마주하게 되었던 것은 결코 우연일 리 없었다.
어쩌면 앞으로도 줄곧 복잡하게 얽히게 될지도 모르는 인연이라면, 지워 둔 빚은 빠르게 갚는 것이 좋을 터.
해묵은 은혜를 갚아야만이, 만일의 경우 서로가 대적하게 되었을 때 저이의 목에 칼을 들이밀어도 떳떳할 수 있지 않겠는가.
도로테아의 말에 살기가 짙어졌다.
그가 아니라, 줄곧 키엘의 뒤에서 기척을 죽이고 있던 그림자의 것임이 틀림없었다.
키엘의 입에서 그 누군가를 저지하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누군가가 도로테아가 쳐 둔 결계의 진(陣)을 깨고서 방으로 난입했다.
그와 동시에, 방을 가득 점령하던 살기가 수그러들었다.
“숙부.”
웃는 얼굴로 콜린을 맞이한 도로테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고서 그의 팔짱을 꼈다.
순간 재빠르게 팔을 빼려던 콜린이 눈앞의 키엘을 흘끗거리고는 떨떠름하게 조카 아닌 조카에게 팔을 내주었다.
“아아, 콜린 경은 이 늦은 시각에 어찌 이곳으로 오셨습니까?”
“조카아이에게 밤 인사를 건네기 위해 왔을 뿐이오. 그보다 백작이야말로 이 야심한 시각, 숙녀의 방에 함부로 드나들어서는 아니 될 것 같은데.”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본 키엘이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지금 막 돌아가려던 차였습니다.”
“음.”
“함께 돌아가시겠습니까?”
“됐소. 나는 알아서 방을 찾아갈 수 있으니…….”
“그게 아니라.”
키엘이 활짝 웃었다.
“제가 콜린 경의 바로 옆방에서 잠을 청할 예정이라서요.”
“…….”
“우리 사이에 벽이 있다는 것이 아쉽긴 해도, 침대를 최대한 벽에 붙여 두었으니 오늘 밤은 아주 기쁘게 잠이 들 수 있을 듯합니다.”
“…….”
싫어 죽겠다는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얼굴을 한 콜린이 어기적거리며 키엘과 함께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던 도로테아가 천천히 문을 닫았다.
‘그동안 우리를 찾지 않은 것치고는 꽤 적극적으로 접근하네.’
심지어 굳이 콜린의 옆방을 쓰다니.
마주치지 않았으면 모를까, 기왕에 함께하게 된 거 콜린의 장점을 ‘살뜰히 써먹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만큼 한계에 다다랐다는 거겠지.”
저자의 육신도, 상처 입은 혼백도.
침대로 돌아온 도로테아가 창밖에서 기웃거리는 까마귀를 향해 웃었다.
“그리 보채지 않아도 곧 네가 쓰일 순간이 있을 거야.”
그때가 되면 실컷 먹게 해 줄게.
이 성 구석구석 스며든 짙은 부정(不淨)한 어둠을.
* * *
리처드는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황제의 눈에 들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침부터 입이 떡 벌어지도록 훌륭한 식사를 대접받게 된 귀족들이 불편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영향을 받지 않고, 아침부터 거나하게 차려진 식사를 진심으로 즐기는 것은 단둘뿐이었다.
“이것 참. 이렇게 든든하게 먹고 나면 꼭 식후 운동을 해야겠군.”
껄껄 웃으며 식사를 하던 에이든이, 오늘따라 유독 힘이 없는 콜린의 앞에 기름진 고깃덩이를 내려놓았다.
“형님은 참으로 비실비실하시오. 테아를 돌보려면 좀 건강을 찾으실 필요가 있지 않소.”
“닥쳐.”
도로테아는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이는 콜린의 목소리를 배경음 삼아 식사를 이어 나갔다.
황궁에서 직접 빼 왔다는 수석 요리사의 실력이 꽤 훌륭했던 덕에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아침이었다.
부드럽게 수비드한 닭 가슴살을 막 나이프로 가르는 순간, 누군가가 말을 건넸다.
“제르망 자작 영애는 보이지 않는구려.”
“낯선 곳에 와 잠을 설쳤는지 조금 피곤해 보여, 제가 휴식을 권했습니다.”
도로테아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쥬벨 백작이 헛기침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간단하게나마 오늘의 일정을 정리하고 영지를 어찌 돌아볼 지에 대해서도 결정하는 것이 좋겠소.”
콜린의 앞에 다정하게 ‘보양 음식’을 놓아준 키엘 백작이 입을 열었다.
“워낙 급작스러운 방문이어서, 준비한 것이 미흡하긴 하지만 대략적으로 영지의 특색에 맞게…….”
마치 미리 준비해 둔 듯 자연스럽게 꺼내는 말을 들으며, 고기 조각을 입으로 가져가던 도로테아의 손이 일순 멈칫했다.
등 뒤에 서 있던 그림자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찰나의 순간이었다.
부드럽게 씹히는 고기에 발라진 고소한 소스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씹고 있는 음식을 음미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그녀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평안부가 반응했다.’
그녀가 건넨 평안부를 갖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토록 이른 아침이면 후작가에서는 식사 준비에 여념이 없을 터.
저택 밖으로 나간 인물은 없을 테고, 후작가에 일이 생겼더라면 간밤에 돌려보낸 리리에게 진즉 신호가 왔을 터.
‘그러니 부적이 반응할 만큼 곤란해진 건…….’
메릴린인가.
저릿한 감각이 발끝을 스치는 것을 느끼며 도로테아는 남은 고기 조각을 포크로 한번에 집어 털어 넣었다.
위험이 점차 가까워지듯, 등 뒤를 스치는 저릿함이 점점 더 짙고 빠르게 그녀에게 경고를 보냈다.
머릿속으로 이곳의 지도를 떠올린 그녀가 포크를 툭,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저는 이곳의 사냥터를 둘러보고 싶어요, 스펜서 백작님.”
“…….”
해변을 거닐며 산책을 하네, 아름다운 성의 전경을 둘러보네 하는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던 귀족들이 일시에 침묵했다.
어제 신선한 고기를 공급받겠다는 명목으로 실컷 야만적인 장면들을 목격해 온 이들의 얼굴이 불쾌함으로 물들었다.
다행스럽게도 도로테아가 덧붙였다.
“일행을 나누어야 영지를 빠르게 파악할 수 있겠지요. 제게는 숙부님이 계시니, 먼 곳까지 나가 보려 합니다.”
시선을 주고받는 이들의 눈빛에 염려가 어렸다.
일행을 나누자는 말에 찬성하면서도, 누군가는 도로테아의 동태를 살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게, 이곳으로 답사를 오게 된 것도 도로테아의 농간에 빠진 탓이 아니었던가.
“음, 좋지! 사냥터를 둘러보는 일에는 내가 합류하지.”
리처드의 어깨가 으쓱했다.
비록 지난번 사냥 대회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기는 했다만 사냥이야말로 그의 특기가 아닌가.
‘볼수록 쓸 만한 계집이로다.’
타국과의 교류에서 중요한 것은 주도권을 갖는 것.
제 사냥 실력을 뽐내어 미천한 왕국 놈들이 바짝 엎드리도록 한다면 부황께서도 인정하실 수밖에 없겠지.
의기양양한 3황자의 얼굴을 보는 귀족들이 재빠르게 푸르죽죽해졌다.
‘저건 말려야 한다.’
‘더 이상 사고 못 치게 해야 해.’
도대체 누가 저 망나니의 고삐를 쥘 수 있을까.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도로테아는 생글거리며 연신 리처드를 충동질하기에 바빴다.
암울한 분위기 속에 한 줄기 빛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제가 직접 사냥터를 안내해 드리지요.”
키엘 백작의 말에 까다로운 귀족들의 눈에 호감이 서렸다.
‘과연. 훌륭한 결단이로군.’
‘스스로를 저 망나니의 곁에 묶어 둠으로써 일을 막아 보려는 희생정신을 보게.’
희생정신으로 무장한 키엘 백작이, 콜린 하이클레어를 향해 다정히 웃었다.
“비교적 순한 암말을 골라 드리겠습니다. 타기 쉬우실 겁니다.”
곁에 있던 필립은 아버지를 향해 다정히 작업을 걸고 있는 백작을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보다, 무슨 일인지 평소보다 빠르게 식사를 끝낸 도로테아를 흘끔거렸다.
여전히 옅은 미소를 띠고서 담담히 앞을 보고 있었지만, 어쩐지 평소와는 다른 낯선 분위기가 느껴졌다.
* * *
그 시각, 메릴린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미친 듯이 속도를 내며 달리는 마차 안은 제대로 앉아 있기 힘들 정도로 크게 흔들렸다.
창백한 얼굴로 아이를 끌어안고 있는 남자는 아예 마차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새어 나오려는 비명을 틀어막기 위해 이를 악문 탓에 턱이 아플 지경이었다.
휘이- 휘이-.
불길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바람 소리와 함께, 마차를 향해 날아든 화살이 비켜 가는 것이 살짝 열린 창으로 보였다.
“고개를 숙여라.”
열린 창 사이의 틈새로 날아든 무언가가, 루크의 검에 가로막혀 바닥에 박혔다.
제 손바닥만 한 표창이 발치에 내리박히는 것을 본 메릴린이 침을 꿀꺽 삼켰다.
마차를 모는 데인이 내뱉는 욕설이 적나라하게 귀에 꽂혀 들었다.
“조금만 더 가면 스펜서 백작령이로군.”
“…….”
“운이 좋으면 별 탈 없이 도착하겠지.”
운이 나쁘면 어떻게 된단 말인가.
메릴린의 눈이 축 늘어진 어린아이에게로 향했다.
도대체 일이 왜 이렇게 된 거야.
분명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여느 때와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은,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는데.
두 귀를 틀어막고 몸을 웅크린 메릴린이 일의 시발점을 회상했다.
* * *
도로테아와의 껄끄러운 관계는 그럭저럭 풀린 것 같았지만, 여전히 메릴린을 향한 소문들은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귀족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을 피하려 이른 아침부터 상점에 들러 물건을 구매하고 나오던 길이었다.
초라한 차림새의 부녀가 별안간 마차 앞에 뛰어들었다.
“저, 저희는 도로테아 하이클레어 후작 영애를 뵈어야만 합니다!”
놀란 말들을 달래느라 마차가 선 사이 다급한 목소리가 메릴린에게 마차 밖을 내다보도록 만들었다.
“여, 영애께서 도로테아 영애의 절친한 친우이시자 영혼의 짝이시라고 들었습니다.”
남자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도로테아와 메릴린을 영혼의 짝이라 부르는 순간, 메릴린은 저도 모르게 정색하며 마차에서 내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저희는 도로테아 영애를 뵙고 직접 드릴 말씀이…….”
황급히 다가가 입을 다물게 하려던 메릴린의 눈에 남자의 품에서 축 늘어진 아이가 보였다.
기괴할 정도로 관절이 꺾인 채로 힘 하나 없이 축 늘어진 아이의 육신.
어딘가 익숙한 기시감에 메릴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 아이는…….”
“살려 주십시오, 영애. 얼른 뵈어야 합니다. 제 아이가…….”
메릴린은 서둘러 아이를 훑었다.
‘아냐, 레이몬드 영식과는 달라.’
그와는 다르게 맥이 희미하게 뛰고 있었고, 옅게나마 숨을 쉬고 있었다.
물어뜯을 듯 사납게 달려들지도 않았으며, 눈동자 또한 무언가 덧씌워진 듯한 형태의 회백색을 띠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확실히 좀 이상한데.’
게다가 도로테아 영애를 언급하다니.
이런 남자가 그녀와 어떤 관련이 있단 말인가.
“메릴린 영애라면 언제든 후작가를 찾아도 만나 주실 만큼 두 분 사이에 벽이 없다 들었습니다!”
“그 소리 좀 그만해요!”
울먹이는 남자의 말에 도리어 메릴린이 울고 싶었다.
거리에 어느새 하나둘 보는 눈이 늘어가고 있는 터라 더더욱 저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신경 쓰였다.
‘대체 누가 영혼의 짝이고, 벽이 없고, 절친이라는 거야!’
큰일 날 소리.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려고 막 입을 열려던 그 순간, 그녀와 남자의 머리 위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