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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73)화 (73/242)

혼술사 도로테아 73화

도로테아의 눈이 재빠르게 황태후가 마련한 ‘테이블 위 만찬’을 훑었다.

눈길이 테이블에 머문 것은 극히 짧은 시간이었으나, 차림이 단출한 덕에 그 면면을 파악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간소하기도 하지.’

제국의 황태후라는 지위에 걸맞지 않는 배포였다.

그것도 만찬이라는 이름을 내걸었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더욱이 그러했다.

‘나에 대한 불쾌감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건가.’

사치스럽기로는 둘째가라면 유명한 황태후의 궁에서 나오는 식사가 궁금했던 도로테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실망이 만들어 낸 깊은 침묵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황태후였다.

“회의 내내 이것저것 신경 쓰느라 고생했겠더구나. 참 많은 덫을 놓았어.”

마치 그녀가 황궁에 들어와 했던 일들을 훤히 꿰고 있는 듯한 뼈 있는 말에도 도로테아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애초에 그 회의장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그녀를 감시하듯 지나쳤던 궁인들만 해도 수십이었다.

그곳에서의 일은 황태후뿐만 아니라 각 궁으로 시시각각 전해졌으리라.

“송구하게도 어리석은 소녀는 전하의 말씀이 도통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만.”

공손히 자신을 낮추되, 아둔한 인사처럼 눈치 없이 구는 도로테아의 말에 황태후가 호오, 하고 웃음 지었다.

“네 부추김이 아니었더라면 리처드가 언감생심 제 아버지가 심혈을 기울이는 일에 발을 담그려 들었을까.”

그녀는 제 손자를 아주 잘 알았다.

꼴통에, 성질머리도 더럽지만, 적어도 숙여야 할 때와 그러지 않아도 될 때 정도는 구분하는 판단력은 갖추고 있었다.

“저는 그저 황자님께 진 빚을 갚고 싶었을 뿐입니다.”

맹랑한 말에 황태후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기가 걷혔다.

“황자를 끼워 넣어 네 뜻을 좀 더 쉽게 이루려는 것이 아니고? 리처드의 손을 빌어, 성가신 귀족들의 입을 전부 닫게 만들었으니 아주 기쁠 테지.”

“…….”

날카로운 목소리가 마치 사람을 바늘로 찌르듯 깊이 들어왔다.

도로테아는 이제껏 만나 온 그 누구보다 성가신 이 여인을 두고 순진한 척 눈을 끔뻑였다.

그런 그녀의 표정을 살핀 황태후가 코웃음 쳤다.

“귀족 회의까지 가서, 제 이득을 차리고자 아집을 부리고 멋대로 군 것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면 곤란해지는 것은 리처드다. 네가 원한 것이 그것이 아니냐.”

“제가 어찌하여 3황자님께서 곤란해지시길 바라겠습니까.”

오히려 리처드가 되도록이면 오래도록 살아 주길 바라는 것은 도로테아였다.

꼬리가 길어서 밟기도 좋고, 그렇다고 쉽사리 죽지도 않으니 적당히 필요할 때마다 잘라 쓰기 딱 좋지 않은가.

‘어머, 도마뱀 같네.’

도마뱀처럼 꼬리를 단 멧돼지를 떠올린 도로테아가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그러자 목에 걸려 있던 십자가 목걸이가 스르르, 옆으로 함께 움직였다.

황태후의 눈길이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십자가 목걸이를 향하는 것과 동시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도로테아를 몰아세웠다.

“7황자를 위해서 상대를 쳐 낸 것은 아니고?”

“7황자님이요?”

루크? 루크를 위해 내가 리처드를 끌어들여 회의에 어깃장을 놓았다고?

도로테아는 진실로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차라리 리처드를 이용해 루크를 실각시키려 했다면 이해나 가지.

‘루크만 사라지면 프리드도 돌려주지 않아도 되고, 우드의 과거를 아는 인물도 없어지는데.’

게다가 그는 우드의 과거를 가지고서 도로테아를 협박했던 전적도 있었다.

‘황자가 아니고, 다소 주고받은 게 없었더라면 진즉 그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었을 터.’

우스움에 손을 가린 채 키득대자, 황태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옆에 있던 멜린다 부인이 엄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무례가 지나치십니다. 황태후 폐하의 면전이 아닙니까.”

“송구합니다. 너무 우스워서 그만…….”

황태후는 손을 들어 발끈한 멜린다 부인의 입을 막았다.

잘 손질된 긴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그녀가 다시금 물었다.

“네 정녕 리처드를 위해 일을 벌였다니, 나로서는 꽤 기꺼운 일이다만 네 일에 황족을 끌어들이는 건 보기 좋은 그림은 아니란다.”

“예.”

“자칫하다가는 네 목이 남아나지 않을 수도 있어.”

도로테아의 목숨 줄을 두고 경고한 황태후는 이내 목소리를 누그러뜨려, 다른 것을 물었다.

“극장의 공연을 중지시켰더구나.”

별생각 없이 던진 말 같아도 무언가를 알아내려 살피는 기색이 역력했다.

도로테아는 저를 압박하는 황태후의 기세를 모르는 척 흘려보내고는 태연히 답했다.

“알고 지내던 아주 귀한 분이 돌아가셔서요. 혹시 아시나 모르겠으나, 게르만 백작 부인께서 지난밤 새벽, 영면하셨답니다.”

찻잔을 향하던 황태후의 손이 멈칫했지만, 얼굴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러한가. 좋은 인물이었는데 안타깝게 되었군.”

“공교롭게도, 백작 부인의 둘째 아드님이 실종되어 마음고생을 꽤 하셨던 모양이에요.”

정작 홀가분하게 떠난 백작 부인이 들으면 고개를 저을 만한 이야기지만.

도로테아는 상대를 흔들기 위해 진실 속에 적당한 거짓을 뒤섞었다.

그리고 지금의 반응으로 확신했다.

‘레이몬드 영식의 죽음을 수사하는 루크를 멈춘 것은 황태후야.’

황제가 레이몬드의 죽음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것도 황태후 덕이었으려나.

그렇다면 남은 것은 그녀와 ‘그들’과의 끈이 어느 정도까지 닿아 있는가, 정도일 터.

그러기 위해서는 되도록 오래 대화를 나누며 상대를 떠보는 것이…….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계산속을 굴리고 있던 와중, 시녀 하나가 다급히 들어와 황태후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윌리엄이?”

의아한 기색을 띄운 황태후는 도로테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을 열고 들어선 익숙한 얼굴에 도로테아의 고개가 기울었다.

‘쟨 왜 또 온 거지?’

흘끗 황태후를 살폈지만 그녀는 딱히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손자를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구나. 좀처럼 다른 궁으로 발걸음 하지 않는 네가, 이리도 기민하게 움직이다니.”

“황태후 폐하.”

“너도 이 아이와 연이 있느냐?”

“처음 입궁했을 때 마주하고, 몇 번 이야기를 나눈 것이 전부입니다. 다만 이번에 아우와 함께 큰일을 맡았다기에 궁금함이 일어 발걸음을 하게 되더군요.”

황태후는 들고 있던 찻잔을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그녀는 잠시 말없이 유약한 손자를 바라보다 나직하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네게 이 일에 참여해도 좋다는 허락을 내리신 적이 없을 텐데. 공을 세우고 싶은 마음에 지나치게 성급했구나.”

“그렇군요. 제 생각이 짧았나 봅니다.”

“황족으로서 자각을 가져야지. 황제 폐하의 명 없이 타국과의 외교적 사안에 참여하는 건 불경한 일이야.”

말을 뱉은 황태후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비쳤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말은 결국 회의가 끝나기가 무섭게 리처드를 개입시켰다며 도로테아를 불러 꾸짖은 그녀에게도 해당되는 사안이었다.

회의가 끝나기가 무섭게 이미 회의실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을 다 파악하고 있는 그녀야말로 멋대로 외교적 사안을 들여다본 셈이니까.

간접적으로나마 사람을 심었다는 사실조차 인정한 꼴이 된 황태후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침묵 끝에 그녀가 건넨 것은 축객령이었다.

“피곤하구나. 이제 그만 저 아이를 데리고 나가 보도록 해라.”

제 얼굴에 침을 뱉었으니, 더 이상 잡아 둘 명분조차 희미해진 셈이다.

황태후가 미간을 좁히며 한마디 던졌다.

“제법이구나.”

“…….”

“황자들을 이리도 잘 다루니, 네 어깨가 그리 기고만장한 것도 이해가 가.”

윌리엄의 단독 행동에 엉뚱한 죄명까지 뒤집어쓰게 생긴 도로테아는 내심 억울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 보거라. 피곤하구나.”

재차 이어진 축객령에 멜린다 부인이 문을 닫아걸었다.

졸지에 대화를 마치지도 못한 채 쫓겨난 도로테아가 눈을 끔뻑였다.

속내를 좀 더 떠볼 생각이었는데.

상대의 마음만큼이나 굳건하게 닫힌 궁의 문은 쉽사리 다시 열리지 않을 것처럼 단단했다.

‘이래서는 곤란한데…….’

그녀를 황태후에게서 빼돌린 당사자는 몹시 안도한 얼굴이었다.

“괜찮니?”

도로테아가 삐걱거리는 고개를 천천히 돌려 그와 마주했다.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어딘가 유약해 보이는 인상의 2황자는, 특유의 상냥함을 가득 담아 걱정 어린 목소리로 안부를 묻고 있었다.

“괜찮지 않아요.”

“황태후 폐하의 말이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궁을 나선 이상, 직접 손을 쓰시는 일은 없을 거야. 그저 리처드의 일로 몇 마디 하려 부르신 거겠지.”

“그게 아니라, 저는 궁에 남아 있고 싶었다고요.”

“…….”

“덕분에 저까지 쫓겨났잖아요.”

투덜거리는 도로테아의 얼굴을 보던 윌리엄이 그녀를 가늠하듯 바라보다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진심이구나.”

“진심이죠.”

황태후는 비밀이 많은 인물이었다.

아무리 심계가 깊어도, 좀 더 곁에 머물렀더라면 알아낼 수 있는 것들이 분명 있었을 텐데.

이렇게 나와 버렸으니 상대는 두 번 다시 도로테아를 초대하려 들지 않을 터였다.

윌리엄이 허탈한 듯 웃었다.

“나는 어릴 적 그분의 얼굴만 뵈어도 겁이 났었는데. 그분께 질책까지 들었을 너는 아주 멀쩡해 보이는구나. 더 남아 있고 싶었다니. 그것참, 유감이네.”

홀로 키득거린 윌리엄은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루크가 옳았군.”

익숙한 이름에 도로테아가 눈썹을 올리자, 윌리엄이 덧붙였다.

“널 데리러 갈 필요는 없을 거라고 했었거든.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지 않을 거라고 말이야.”

그런데도 굳이 황실 어른의 노여움을 무릅썼단 말인가.

새삼스럽게 눈앞에 있는 남자의 오지랖이 감탄스러웠다.

“음? 그 눈빛은 어떤 의미일까?”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남았나 해서요.”

궁에서는 숨조차도 함부로 쉬지 말라는 말이 있건만.

여기저기 얼굴을 들이밀며 이 사람, 저 사람 구원하고 다니는 공사다망한 윌리엄이 살아남은 것이 신기했다.

도로테아의 말에 윌리엄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이번 일로 네게 단단히 밉보인 모양이구나.”

“뭐, 꼭 그렇지는 않아요.”

일단은 황자인 데다, 그도 도로테아가 리처드를 ‘고의적으로’ 끌어들인 일을 알고 있다면 어느 정도 자신의 세력을 궁 안에 두고 있다는 소리였다.

왜 그토록 제게 친절한지 속내를 다 들여다볼 수는 없으나, 결과적으로 제게 이득이 될 수 있는 일일지도.

게다가 윌리엄이라면 루크보다는 고분고분하니 물음에 답을 해 줄 것도 같았다.

“황제 폐하께서는 황태후 폐하의 의견에 곧잘 귀를 기울여 주시나요?”

궁금했다.

루크의 수사를 중단한 것이 만일 황태후의 요청이었다면, 황제는 진상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쪽의 손을 들어 준 것인지.

아니면 진실이 알려져 봤자 귀족들의 체면만 상할 뿐이라는 계산 때문에 사건을 덮은 것인지.

도로테아의 물음에 윌리엄이 눈을 끔뻑였다.

솨아아-.

좀 전부터 제법 많은 시선들이 따라붙고 있었지만 도로테아에게는 딱히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정령이로구나? 이런 데에 정령을 쓰다니.”

주변의 소리를 차단하고 있는 리리의 수고를 알아준 윌리엄이 나직이 웃고는, 제 상체를 숙여 도로테아의 귀에 속삭여 주었다.

“적어도 그분의 영향력이 더 뻗어 나가는 걸 황제 폐하께서 반기지 않으시는 것은 분명하지. 로헨 왕국과의 동맹은 굳건해야 하지만, 동시에 지나칠 정도로 서로를 옥죄는 일만은 없어야 하니까.”

“…….”

“그것이 선대 폐하가 할머님에게서 적자를 보시지 않은 이유란다.”

도로테아의 눈이 순간 빛났다.

이건 필립에게도 들은 적이 없는 이야기인데.

과연 집안일을 담 너머의 사람들이 온전하게 알아먹기란 힘들다는 건가.

“그분은 한 번도 아이를 가지신 적이 없으셔. 그러나 ‘황태후’가 되실 수 있을 만큼 힘을 갖고 계시긴 하지.”

“한 번도 아이를 가진 적이 없으시다…….”

도로테아가 픽 웃었다.

“그것참,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어딘가 기이한 어감의 말에, 윌리엄이 그 뜻을 물으려던 찰나였다.

줄곧 어딘가 서늘한 분위기를 풍기던 도로테아의 표정이 봄날 눈 녹듯 따스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신기할 정도로 고요했던 주변의 소리가 돌아옴과 동시에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테아야.”

손녀가 걱정되어 회의가 없는 날임에도 궁을 찾아든 후작을 본 도로테아가 그를 향해 종종걸음으로 다가섰다.

“듣자 하니 회의장에서 황자 한 놈이 난동을 부렸다기에…….”

매서운 눈초리가 윌리엄에게로 향했다.

‘네놈이 도로테아가 참석한 회의에서 깽판 친 황자 놈이냐.’하고 묻는 눈초리에 윌리엄은 한숨을 삼켰다.

루크의 충고를 들었어야 했나.

‘가 봤자 괴한 취급을 당하거나, 심한 취급을 받으며 이용당하거나, 엉뚱한 이들에게 원한만 산다.’라던 아우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저 도로테아가 곤란을 겪는 것을 조금이나마 막아 보려 했을 뿐인데.

‘저 소녀는 꼭 먹음직스런 먹이를 보듯 나를 보고, 후작은 파렴치한 무뢰배를 보듯 나를 보는군.’

음, 내 명이 좀 짧아진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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