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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72)화 (72/242)
  • 혼술사 도로테아 72화

    리처드는 그 이름값만큼이나 용맹하게 회의실에 자리한 귀족들을 위협했다.

    고작 3황자 하나 따위야 귀족원에서 구를 대로 구른 그들이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었겠지만…… 문제는 3황자가 황태자가 아끼는 동복아우라는 데에 있었다.

    게다가 그들의 뒤를 황태후가 든든히 받치고 있다는 사실도.

    “경들은 내 별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로군? 그렇다면 더 나은 대안을 이야기해 보게. 물론 이미 반려된 의견들을 제외하고 말이야.”

    순식간에 들이닥쳐 매섭게 퍼붓는 리처드의 공격은 귀족들에게 유효타를 먹였다.

    도로테아는 그저 여유롭게 그 상황을 관망하는 것으로 이미 뜻을 이룰 수 있었다.

    황태후 세력의 비호를 받는 황자인 데다, 하이클레어 가문까지 그의 편이 되었다면 일이 몹시 곤란해질 것이 뻔했다.

    게다가 이미 도로테아가 앞서 나온 그럴듯한 의견들을 철저하게 격파했기에, 다른 대안을 내세우기에도 여유가 부족했다.

    ‘방심했어.’

    귀족들 모두 도로테아가 짜 놓은 판에서 놀아난 셈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까지 일을 벌일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한 데다, 웬만한 귀족 가문 정도는 우습게 볼 정보력까지. 여기 있는 모두는 상황을 철저하게 오판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잡아먹히기라도 한 듯 일방적인 폭력에 밀려난 꼴이 된 회의가 급작스럽게 끝나고서도, 남은 귀족들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뒤늦게나마 뒤숭숭한 마음이 슬금슬금 일어났다.

    “설마 하이클레어 후작가가 황태자 세력과 손을 잡은 겁니까?”

    “황태후 전하를 경계하고 있는 폐하의 입장을 저들이 모를 리가 없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까, 하이클레어 후작은!”

    각자 도로테아가 던진 폭탄의 의미를 해석하기에 바쁜 사이, 정작 폭탄을 던진 당사자는 유유히 회의실을 빠져나와 3황자를 상대 중이었다.

    내로라하는 대신들 앞에서 모처럼 소리 높여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어 낸 리처드는 모처럼의 성공에 잔뜩 고양되어 있었다.

    “훌륭하군! 쓸데없이 꼬장꼬장한 늙은이들이 한마디도 못 하고 내게 당했어!”

    물론 이미 도로테아가 그럴싸해 보이던 의견들을 전부 무너뜨리고 난 후에 들이닥친 불시의 습격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공을 높이는 대신 그저 옅은 미소와 함께 날뛰는 황자를 방관했다.

    ‘어지간히도 굶주려 있었던 모양이야.’

    사냥 대회의 일은 비록 우연이 겹쳤다고는 하나, 제 형제의 살을 깎아 먹으려 들었던 리처드를 황제가 쉽사리 용서했을 리 만무했다.

    그의 경고를 받고 한동안 궁 밖 출입을 자제했을 테니 오죽 좀이 쑤셨을까.

    억눌렀어도 삐져나온 불만들은 조바심이 되어, 평소에도 그리 신중하지 않은 리처드를 더욱 무식하고 용감하게 만들어 주었다.

    도로테아가 ‘어째서’ 그에게 호의적인 손길을 베푸는지 계산 따위는 할 생각도 않고 회의에 쳐들어올 만큼이나.

    곁에 참모진들이 있었더라면 적어도 한 번은 말렸을 텐데.

    일부러 시간을 질질 끌다 회의 직전에 사람을 보낸 것이 주효했다.

    ‘희한한 일이네. 짐승의 혼은 이미 진작 이 땅을 떠났는데.’

    왜 저 황자 놈은 저토록 멧돼지의 습성을 고스란히 닮아 가는 것일까.

    마치 빙의라도 한 것처럼.

    그녀가 직접 사냥물들의 제(第)를 지내 준 것이 아니라면, 정말로 들짐승들의 원귀가 들러붙었으리라는 의심을 할 만큼이나 꼭 닮아 있었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나.’

    덕분에 의도가 더욱 잘 먹혔으니 그것으로 된 거지.

    너무 잘 먹힌 나머지, 당사자인 리처드는 제가 반쯤 이용당했으리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도로테아에게 호감을 듬뿍 느끼게 되는 부작용까지 나타났다.

    “생각했던 것보다 현명한 계집이 아닌가!”

    어깨가 잔뜩 올라간 3황자의 발언에 도로테아는 눈을 끔뻑였다.

    “감사합니다.”

    멧돼지의 거죽을 뒤집어 쓴 인간에게 듣는 현명하단 말은 어쩐지 그리 기분 좋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칭찬을 들었으니 감사를 표하기는 해야지.

    타고난 유전자 덕인지 제법 훌륭한 외모는 무식함에 묻힌 지 오래였다.

    어째서 귀족 영애들이 3황자가 나타나면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는지 알 것도 같달까.

    “그대가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염치를 지녔음을 내 형님께도 말씀드리지.”

    그가 언급한 그의 형님이자 제국의 황태자는 도로테아에게 딱히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일은 하이클레어 가문의 입장이 아니라 도로테아 개인의 의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미 짐작하고 있을 테니까.

    ‘그나저나 은혜라…….’

    사실상 만만한 3황자를 털어먹은 것뿐인데.

    애초에 세울 극장이었고, 필요한 돈도 마련해 뒀지만, 때마침 사고를 친 3황자에게 빚을 받아 낼 수 있게 되었으니 제 돈을 쓰는 대신 그의 주머니를 턴 것일 뿐.

    그 과거는 3황자의 머릿속에서 이미 훌륭히 ‘세탁’이 되어 버린 모양이었다.

    어느새 억지로 빼앗긴 창고의 보물들은 그가 도로테아에게 내려 준 은혜로 둔갑해 있었으니까.

    도로테아는 신이 나 벌겋게 달아오른 리처드를 보며 부드럽게 답해 주었다.

    “중임을 맡으셨으니, 훌륭히 해내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당연하다!”

    황제가 중히 여기고 있는 동맹국의 사절단을 접대하는 일이다.

    당연히 예산은 쏟아부어도 부어도 모자랄 테고, 이미 한차례 보물 창고를 털린 리처드가 과연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으려나.

    무능력자가 무식한데 용감하기까지 하면 어떻게 되는지 그 결과가 몹시 궁금했다.

    “기대하고 있어요, 황자님의 능력.”

    멧돼지가 날뛰면 날뛸수록, 도로테아가 무엇을 하든 사람들의 이목에서 벗어날 테니까.

    *   *   *

    3황자가 기분 좋게 자신의 궁으로 돌아가자, 숨어 있던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로테아는 숨겨진 공신을 향해 적절한 칭찬을 건넸다.

    “덕분에 일이 편하게 됐어. 고마워.”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 이번에는 꽤 시간이 촉박하다 보니 걱정했는데.”

    콜린은 ‘일단’ 제 신체 일부를 물려받은 자식을 그림자로 사용하는 데에 못마땅함을 드러냈지만 도로테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왕 좋은 머리를 갖고 태어난 거, 그 능력을 사용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콜린이 그녀의 권속인데, 그의 아들이 그녀를 따르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나.

    게다가 도로테아는 한 번도 필립에게 자신을 따르라 강요한 적 없었다.

    “에드윈에게도 고맙다고 해야겠네.”

    눈치 빠른 에드윈이 필립을 보내 준 덕에, 도로테아는 실시간으로 그와 소통하며 여유롭게 귀족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필립의 어깨에 앉아 있던 리리가 포르르 날아와 도로테아의 머리 위에 안착했다.

    “리리도 수고했어.”

    “아무리 그래도 설마 3황자를 끌어들이겠다고 할 줄은 몰랐어.”

    필립의 말에 도로테아는 입가에 웃음기를 매단 채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아주 신난 듯 보이던데. 네가 그에게 꽃길을 깔아 준 것처럼.”

    “나는 기회를 준 것뿐이야. 잘하면 그것은 리처드의 복인 셈이고, 못해도 내 탓은 아니지.”

    “글쎄, 애초에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 아닌가?”

    필립이 슬쩍 운을 띄웠지만 도로테아는 그저 웃기만 할 뿐 말을 아꼈다.

    “황태자는 기회주의자인 만큼 떨어지는 콩고물을 굳이 마다하지 않을 테지만, 키엘 스펜서는 다를걸.”

    필립의 얼굴이 조금 진지해졌다.

    오랜 기간, 중앙 귀족들의 뒤를 캐고 조사를 해 오면서 녹록치 않다 평가한 인물들 중 하나였다.

    젊고, 능력 있으며, 야심도 있지만 그만큼 경계심도 짙은 데다 나이에 비해 통찰력은 물론이고 차분함과 침착성, 이성까지 갖춘 인물이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을 수도 있어.”

    로헨 사절단을 스펜서 백작령에 묶어 놓으려면 제아무리 3황자의 입김이 있어도 스펜서 백작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리고 스펜서 백작은 3황자의 막무가내식 밀어붙이기에도 끄덕하지 않을 수 있는 배경을 갖췄고.

    “까다로운 백작을 어떻게 구슬리려고?”

    “아, 구슬릴 필요 없어.”

    “……?”

    “나는 그가 원하는 걸 아니까.”

    도로테아의 얼굴에 의뭉스러운 웃음이 번졌다.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필립을 마주한 도로테아가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미끼를 데려가려고.”

    아예 맛보지 않았다면 모를까.

    하룻밤의 숙면이 선사한 달콤함은 아마도 그에게 더욱 커다란 갈증을 남겼을 터였다.

    다시 재회했을 때에 그의 영혼의 균열이 한층 더 깊어진 것을 보면 그동안 그가 얼마나 괴롭게 버텨 왔을지 눈에 선했다.

    생애 내내 시달려 온 갈증을 해결해 줄 남자가 눈앞에 어른거리는데…… 과연 참을 수 있을까.

    “함정인 것을 알아도 뛰어들 수밖에 없는 미끼일 거야.”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확실한 약점이 있나 보네.”

    필립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는 그 ‘약점’이자 ‘미끼’가 자신의 아버지인 콜린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도로테아 또한 그것을 친절히 알려 줄 만한 친절함을 갖춘 인물은 아니었다.

    *   *   *

    궁을 빠져나가기 위해, 궁인의 안내에 따라 마차가 있는 곳으로 향하던 그때였다.

    일련의 무리가 다가와 도로테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차분한 분위기의 중년 여성이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그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는 몹시 고급스럽지만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깔끔하고 단정한 옷차림새와 새파랗게 날이 선 눈, 흠잡을 데 없는 걸음걸이가 사람들의 눈을 은근하게 사로잡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도로테아 하이클레어 후작 영애. 부족하나마 황태후 폐하의 말벗을 해 드리고 있는 멜린다라고 합니다.”

    황태후.

    뜻밖의 인물이 언급되었음에도 도로테아는 놀란 기색 없이 우아하고 차분한 분위기의 귀부인을 마주한 채 살짝 무릎을 굽혔다.

    “안녕하세요, 멜린다 부인.”

    “영애께서 중임을 맡은 사실을 알게 되시자 황태후께서는 몹시도 영애를 초대하고 싶어 하셨답니다.”

    “…….”

    “긴 회의 동안 기력이 상했을 영애를 위해 만찬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꽤 노골적인 접근이었다.

    대표적인 친로헨 세력이라고는 하나, 황태후는 정계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이제까지 지켜 온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부인을 지그시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공손히 몸을 굽혀 화답했다.

    “그분의 호의를 제가 어찌 감히 무시할 수 있을까요.”

    간식으로만 배를 채웠더니 마침 든든한 식사가 당기던 차였다.

    황태후의 초대라니, 적어도 손님이 섭섭하지 않을 만큼의 상은 준비되어 있지 않을까.

    “마침 공복이라 시장하던 차랍니다.”

    회의실에서 함께 있었던 귀족들이 보았더라면 기함할 말과 함께, 도로테아는 순순히 황태후 궁으로 향했다.

    궁으로 가는 길 내내 희한할 정도로 많은 궁인들이 그녀들의 곁을 지나쳤다.

    저마다 할 일에 치여 바삐 움직이는 것 같아도, 시선의 끝에는 늘 도로테아가 담겨 있었다.

    ‘과연.’

    회의실의 논쟁이 각자의 몫을 조금이라도 더 먹으려는 하이에나들의 기 싸움이었다면, 여기는 그 먹이를 통으로 집어삼키고 싶어 하는 포악한 육식 동물들의 전장이었다.

    ‘그 어느 것이든 아귀다툼임에는 변함이 없지만.’

    길고 긴 복도를 지나, 화려한 황금빛 문에 다다르자 스르르 문이 열렸다.

    “어서 오너라.”

    그녀의 외조카뻘인 블라디미르 공작이 선물했다던 티아라가 머리 위에서 반짝였다.

    도로테아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루비가 박힌 다이아몬드 관에서 새어 나오는 악취에 환히 웃었다.

    화려하게 치장했지만, 속은 메마르고 건조하기 짝이 없는 황태후의 혼이 쩍쩍 갈라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와 마찬가지로 세월을 잔뜩 머금은 주름진 손이 내밀어졌다.

    도로테아는 이미 속 알맹이가 모조리 빠져나간 듯 쭈글쭈글한 손등 위로 입을 맞췄다.

    “하이클레어 가문의 여식이 황태후 폐하를 뵙습니다.”

    손등의 키스는 존경과 헌신의 의미.

    “어서 오렴. 내 언젠가 한 번은 너를 보고 싶었단다.”

    도로테아를 내려다보는 황태후의 목소리는 봄날처럼 부드러웠지만, 눈동자는 여전히 서늘하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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