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사 도로테아 71화
황궁에서 보낸 전령이 도착한 것은 꽤 이른 아침이었다.
근위병들과 함께 제법 기세 좋게 등장한 전령은 굳게 닫혀 있는 문 앞에 서서 도착을 알리는 뿔 나팔을 불었다.
막 식사를 마친 도로테아는 후작의 걱정스런 눈길을 뒤로하고 전령의 앞에 섰다.
“폐하께서는 하이클레어 후작 영애가 조속히 입궁하여 로헨 왕국의 사절단과 관련된 회의에 참석하시길 원하고 계십니다.”
길고 긴 미사여구와 상대를 향한 찬사 없이 건넨 본론에도, 도로테아는 배운 대로 ‘공손히’ 몸을 굽혀 그에게 인사를 건네고 두 손으로 입궁 허가서를 받아 들었다.
“이미 수차례 관련 사안으로 입궁할 것을 요청했소만, 답변이 오지 않아 이른 시간부터 걸음 하게 된 것을 이해해 주시오.”
정중해 보이지만 결국 그녀가 황제의 부름에 답하지 않았다는 것을 짚어 내는 말이었다.
도로테아가 그의 지적에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자 전령이 떨떠름한 얼굴로 그녀를 훑었다.
‘좀 더 안하무인일 것으로 생각했건만.’
그를 대하는 태도는 물론이요, 초청을 받아들이는 예법 또한 어디 나무랄 곳 한 군데 없이 훌륭했다. 독촉에도 의연한 태도를 보자 그의 심경에도 변화가 왔다.
비교적 딱딱했던 태도를 조금 부드럽게 굽힌 그가 헛기침과 함께 다시금 물었다.
“로헨 왕국 사절단과의 협상이 아국에는 몹시 중대한 일이라는 것을 영애도 알고 있기를 바라오.”
“물론입니다.”
“혹, 따로 준비 중이었던 거요?”
그게 아니라면 이 이른 아침부터 독촉하듯 날아온 전령을 이토록 태연하게 맞이할 리가 있나.
도로테아는 묘한 기대감이 깃든 얼굴을 바라보다 싱긋 웃었다.
지금까지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는 말을 꺼내면 울상이 되려나.
그녀의 입이 열리기도 전에 옆에 있던 후작이 근엄한 얼굴을 하고서 말을 꺼냈다.
“진즉 입궁하여 사절단 응대를 맡은 이들과 논의했어야 한 것에는 무어라 덧붙일 말이 없군. 제대로 된 답신을 하지 않은 손녀의 실책이오.”
후작이 그녀를 돌아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입궁할 준비가 되었느냐?”
꽤 어려운 일을 맡은 아이에게 주어진 숙제를 다 끝냈냐는 물음이나 다름없었다.
도로테아는 눈을 끔뻑이며 하나하나 짚어 보았다.
아침 식사를 막 마친 터라 배가 든든했고, 전령이 온다기에 서둘러 옷도 갈아입었다.
그녀의 마차를 몰아 줄 우드도 마침 저택에 있고, 오늘 오후에는 별다른 일정이 없었다.
“네, 지금 바로 출발할 수 있어요.”
허겁지겁 달려 나온 데인의 눈에 경악이 서리거나 말거나 손녀의 다소곳한 대답을 들은 후작이 흐뭇한 미소와 함께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다정한 손길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그래, 네 일이니 믿고 있으마.”
“최선을 다할게요.”
못 미더운 눈길로 보던 데인이 저도 함께하겠다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도로테아가 못 박듯 답했다.
“이건 제가 맡은 일이니까요.”
사절단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모처럼 입궁할 기회가 생겼으니 새로운 덫을 놓을 차례였다.
이제까지는 줄곧 사건이 일어난 뒤에 그 흔적을 쫓았다면, 이제는 누가 관련되어 있는지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혔으니 그녀가 직접 움직일 차례였다.
‘알아보아야 할 것도 제법 있고.’
직접 움직이는 것은 성가신 일이지만 타인의 시선을 거치지 않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제껏 입궁을 피해 왔던 건, 그러기 위해서는 도로테아 개인이 아닌, 하이클레어 가문의 힘을 등에 업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모처럼 궁에 들어갈 수 있는 핑곗거리가 생겼는데 굳이 가지 않을 까닭은 없겠지.
흥미로운 것들도 꽤 많고.
“폐하께서 이렇게 저를 배려해 주시니 황송할 따름입니다.”
“……그렇, 지요.”
“지금 바로 입궁하겠습니다.”
전령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여느 귀족 영애와 달리 장신구는커녕 화장도 거의 하지 않은 수수한 얼굴이었다.
입고 있는 드레스 또한 고급스럽긴 했지만 입궁에 어울리는 차림새라고 보기에는 약간 애매했다.
게다가 보좌관 하나 없이, 그저 마부와 호위 하나만을 데리고 입궁하겠다니.
심지어 외교 회의에 참석할 예정인데도.
‘그만큼이나 확실히 준비를 끝냈다는 건가.’
며칠 동안이나 답신 없이 저택에서 두문불출했던 것은 어쩌면, 그녀가 이번 사절단을 맞이하는 일에 사활을 걸었기 때문은 아닐까.
게다가 후작의 눈에 가득한 믿음과 기대가 전령으로 하여금 이 상황을 그렇게 받아들이게 만들고 있었다.
철없는 귀족 영애의 패악을 걱정하며 다소 떨떠름하게 저택을 방문했던 전령의 마음에 점차 감탄과 신뢰가 솟아났다.
마차에 올라탄 도로테아가 황궁 사람들의 정중한 시중을 받으며 곧바로 입궁하는 것을 지켜보던 데인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에드윈에게 속삭였다.
“쟤가 뭘 준비하긴 했어?”
“음…….”
본 적이 없으니 모르겠지만, 어른들은 죄다 도로테아가 무언가 준비한 것이 있다고 철석같이 믿는 눈치였다.
에드윈은 조용히 상황을 살피다 배웅하는 이들의 틈에서 빠져나와, 그나마 믿을 만한 필립에게 급히 전갈을 날렸다.
* * *
회의는 각축장이었다.
저마다 하고픈 말들로 가득 찬 인간들이 넘쳐 났다.
도로테아는 테이블 위에 이토록 근사한 음식들을 가득 차려 놓고도, 마치 장식품처럼 내버려 놓고 침을 튀기느라 바쁜 이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보시오, 경! 경은 그것이 진정 훌륭한 의견이라고 생각하여 말을 꺼내는 거요?”
“허, 그럼 경의 말대로 사절단을 모두 궁 밖에 머물도록 하자는 말이오? 로헨 왕국이 비록 규모에서는 우리 제국과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고는 하나, 그 저력으로 봤을 때…….”
저마다 공을 세우려 눈을 벌겋게 뜨고서 핏대를 높이기에 바빴다.
도로테아는 그들의 사이에서 버터를 듬뿍 발라 구운 타르트가 놓인 접시를 가져왔다.
파삭하고 입안에서 부서지는 얇은 타르트의 결이 입안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가운데에 들어 있는 진득한 잼의 단맛이 버터의 고소함과 만나 맛을 극대화하고 있었다.
‘확실히, 황궁의 음식답군.’
아침 식사를 방해받았던 것조차 잊을 수 있을 만큼 흡족한 맛이었다.
잘 구워진 황금빛 타르트에 이어 엄선된 어린 찻잎으로 끓여 낸 차를 입안에 머금은 도로테아가 어느새 조용해진 회의실을 둘러보았다.
“영애께서는 아무런 의견이 없으시오?”
떨떠름한 목소리의 소유자는 도로테아가 회의장에 들어설 때부터 내내 그녀의 인사를 받아주기는커녕 발언권조차 주지 않았던 인물 중 하나였다.
무슨 말을 해도 탐탁지 않게 여길 것이 분명하여 입을 닫고 있었더니, 입을 열게 만들어 트집을 잡을 생각인가.
자신을 물어뜯을 생각으로 눈을 빛내는 이들을 훑어본 도로테아가 옅은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이렇게 훌륭하신 분들이 이미 오랜 고민을 통해 얻으신 값진 의견들을 내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감히 제가 끼어들 수는 없지요.”
“경험이 부족하다고는 하나 폐하께서 직접 명하신 일입니다. 의욕을 보이셔야지요.”
“하긴, 무엇을 알아야 참견을 하겠지요.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어린 영애에게 폐하께서 너무 많은 기대를 거셨습니다.”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이들은 모두 황태후를 따르는 귀족파가 분명했다.
그렇다고 후작과 친분이 있는 귀족들이라고 도로테아에게 호의적인 입장인 것은 아니다.
그들로서도 ‘어린 영애’가 자신과 비슷한 대우를 받으며 공을 나눠 가지려는 것이 영 내키지 않을 테니까.
“저는 여러분의 훌륭한 고견에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도로테아는, 냉큼 옆에 앉은 유넨 자작의 앞에 놓여 있던 케이크 조각을 집어 들었다.
포크로 반을 가르자 딸기를 조려 만든 잼이 스르륵 흘러나오며 새콤한 향이 회의실을 가득 메웠다. 케이크에 붉은 잼을 듬뿍 묻혀 한입 가득 집어넣는 것을 보던 이들이 침을 삼켰다.
“와아…….”
도로테아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케이크가 몹시도 부드러워 입안에서 씹지도 않아도 녹네요. 아주 훌륭해요.”
그 무엇보다도 접시에 놓인 간식들을 차례로 맛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맞은편에 앉아 회의를 주도하던 쥬벨 백작이 미간을 구겼다.
대대로 로헨 왕국과의 교류에 큰 역할을 해 온 만큼 발언권이 가장 높은 그가, 위엄 가득한 목소리로 도로테아를 질책했다.
“영애는 이곳에 무엇을 하러 왔다고 생각하는 거요? 폐하께서 특별히 그대를 참석시키신 만큼 그 신임에 답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제가 감히 여러분들의 고견에 의견을 덧대어도 괜찮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리하라는 말이지!”
남은 케이크 조각을 깔끔하게 입에 털어 넣은 도로테아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입가를 닦아 냈다.
어두운 밤, 달빛에 비치는 바닷물과 같이 끝을 알 수 없는 깊이를 가진 군청 빛 눈이 빛났다.
‘아차.’
그녀에게 발언권을 주지 않으려 애쓰고 있던 몇몇 귀족들이 뒤늦게 눈을 크게 떴지만, 이미 도로테아는 의장에게서 정당한 발언권을 얻은 상태였다.
“우선 폐하께서 동맹국과의 우호를 다지는 데에 뜻을 내비치신 만큼 사절단을 귀하게 대접해야 한다는 말씀에는 동의하나, 그들이 별궁에서 묵는 것은 어려울 듯싶습니다.”
“뭐?”
“로헨 왕국에서는 일찍이 저희 제국의 사신들이 방문했을 때에 ‘귀빈급’으로 대접한 바 있습니다. 왕궁은 오로지 왕족들만이 출입할 수 있다는 것을 핑계로 사택을 내주었죠.”
그런데 제국에서 사절단을 맞이하며 비록 별궁이라고는 하나 황궁의 담 안에 있는 건물을 내준다면 체면이 상할 터.
“이번 사절단에는 왕녀가 끼어 있소.”
“왕녀는 사절단과는 별개로 대신관님께서 주관하실 성년식에 참여한다고 들었습니다. 즉, 사적 용무로 방문한 타국의 왕녀에게 별궁을 내주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
뻐끔거리는 입을 다문 유넨 자작을 시작으로, 그녀는 이제껏 나온 의견들을 하나하나 격파해 나갔다.
트집을 잡을 만한 그 어떤 구석도 찾아내기 힘들 만큼 정밀한 정보들을 바탕으로 꺼낸 의견들에, 다들 체면을 구긴 채 침묵했다.
‘얕봤군.’
어린 영애 하나쯤은 쉽게 요리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던 이들의 얼굴에 낭패감이 서렸다.
도로테아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이미 식어 버린 차로 목을 축였다.
떨떠름한 얼굴의 의장이 그녀가 입을 멈춘 사이 물었다.
“그래서, 영애가 생각하는 대안이란 뭔가?”
이제까지 나온 의견들을 전부 부정했으니 적어도 그녀에게 적절한 대안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다들 물어뜯을 준비가 된 승냥이 떼처럼 눈을 빛내며 막 찻잔을 내려놓은 도로테아를 주시했다.
“저는 사절단이 머물 장소로 스펜서 백작령을 추천하려 합니다.”
“스, 스펜서 백작이라니!”
순간 폭탄이라도 던져진 듯 회의실이 발칵 뒤집혔다.
몇몇 이들은 입을 벌린 채 다물지 못했고, 어떤 이들은 불만 섞인 중얼거림과 함께 얼굴을 구겼다. 흥미로운 기색을 뿌리는 이들까지 더해지며 회의실이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도로테아는 모두가 잠잠해지길 기다렸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모두 아시겠지만 3황자 전하의 별장이 그곳에 있지 않습니까. 바다를 낀 성의 전경이 아주 아름다워 황태자 전하께서도 방문 후 몹시 칭찬하셨다지요.”
“…….”
“게다가 로헨 왕국은 내륙으로 둘러싸인 국가인 만큼 해산물이 몹시 진귀하다고 들었습니다. 왕녀께서도 바닷가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서 묵으시는 것을 아주 기쁘게 여기실 테고요.”
다들 머릿속이 팽팽하게 돌아가는 것이 빤히 보였다.
스펜서 백작 가문이 어디인가.
황태후의 비호를 받는 가문인 동시에 로헨 왕국과도 깊은 연이 있는 데다, 3황자와 황태자의 외가이기도 했다.
적어도 도로테아의 입에서 3황자의 세력을 밀어줄 만한 의견이 나오리라는 예상을 하지 못한 이들이 잠시 주춤한 사이, 그녀를 지지해 줄 배후가 나타났다.
“이 제국의 위신을 세운다는데 내 별장 정도는 언제든 내줄 수 있지!”
머리에 든 건 없어도 욕심은 많은 3황자 리처드가 직접 회의실로 쳐들어온 것이다.
도로테아는 흐뭇하게 웃었다.
‘무식한 아이일수록 용감한 법이지.’
3황자가 직접 개입했으니 이 일은 이미 그녀의 손을 떠난 셈이다.
설령 문제가 생겨도 억지로 밀어붙인 3황자의 탓으로 내몰 수 있으니.
욕심에 가득 찬 황자가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사이, 도로테아는 다시금 사르르 녹는 간식을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
‘역시 황궁에 오길 잘했어.’
황궁 파티시에는 돌아갈 때에 납치해 가고 싶을 만큼이나 그녀를 충분하게 만족시켰다.
도로테아가 달콤한 과즙이 흘러내리는 체리 케이크를 먹으며 미소 지었다.
힘내라, 리처드.
내가 테이블 위의 접시를 비울 때까지 열심히 날뛰려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