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사 도로테아 70화
“설마 백작 부인께서 그런 부탁을 하실 줄은 몰랐네요.”
백작가를 떠나오는 길에 메릴린이 꺼낸 말이었다.
부인은 떠나기 직전 백작에게 ‘레이디 파티마’를 극장에서 계속 공연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을 남겼다.
극의 주인공이 레이몬드 게르만이라는 사실은 결국 그 누구도 알지 못할 테지만, 그의 사랑 이야기는 무대에 남아 있을 테지.
“그 아이의 어리석음은 순수함이기도 해요. 나는 그런 면이 참 좋았는데. 그게 당신을 곤란하게 만들었지요.”
백작은 부인의 뜻에 따라 극장을 후원하는 한편, 악귀에게 살해당한 이들에 대해서도 합당한 보상을 할 수 있는 방향을 찾아보겠다 약속했다.
물론 메릴린에게도.
도로테아는 백작 부인과 나눈 마지막 대화를 회상했다.
“다소 거친 방법으로 ‘진실’을 보여 드려 죄송해요, 부인.”
“영애가 아니었더라면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는 가족들을 위해 애써 괜찮은 척, 모른 척을 해야 했겠죠. 차라리 마음이 홀가분하네요.”
오롯한 선심에서 비롯된 행위는 아니었다.
비록 과거 ‘고립된 자신’에게 던져졌던 수많은 위선적인 말들이 떠올라 욱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백작가 사람들은 부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이제 물어보셔도 됩니다.”
“네?”
“영애께서 저에게 호의를 베푸셨지만, 그것만이 다가 아님을 압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으셨지요?”
병상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지혜로운 인물이었다.
“부인께 아드님의 죽음을 흘린 이에 대해 알고 싶어요.”
게르만 백작의 사업이 연거푸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사업적 감각과 인맥들도 큰 도움을 주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옆에서 함께 보조를 맞추어 온 부인의 역할이 컸으리라.
만약 그녀가 병을 앓지만 않았더라도 백작은 가문을 더 꼼꼼히 살피고 다스릴 수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이렇게 최악의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을 테지.
도로테아는 여러 번 부딪혀 본 상대의 수법에 이제 제법 익숙해졌다.
상대는 꼬리를 남기지 않는다.
아마 백작 부인이 아들을 잃은 충격과 고통으로 세상을 떠난다면,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는 게르만 백작은 물론이고 아직 부족함이 많은 소백작까지 한번에 무너졌을 터였다.
그렇게 되면 레이몬드와 파티마의 일까지 모조리 다 묻히게 될 수 있었을 테고.
실로 잔인하기 그지없으며, 소름 돋을 만큼 촘촘한 설계였다.
생각을 마친 도로테아가 어색하게 눈을 굴리는 메릴린을 향해 물었다.
“세인트 자작 부인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나요?”
“세인트 자작 부인이라면…….”
“백작 부인을 자주 찾아와 적적하지 않게끔 달래 준 좋은 분이라기에.”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던 메릴린이 고개를 저었다.
“저와는 친분이 없는 분이라 잘 모르겠네요.”
“그렇군요.”
“다만 세인트 자작가라면 스펜서 백작께 여쭤보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메릴린의 말에 멈칫한 도로테아가 눈을 끔뻑였다.
허리를 펴고, 손에 깍지를 낀 그녀가 느릿하게 되물었다.
“스펜서 백작님께요?”
“저는 초대받지 못했었지만 얼마 전 스펜서 백작님의 조카분이 세인트 자작의 친척 아가씨와 혼인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원래라면 이런 사소한 일은 금방 잊었겠지만, 7황자에게 혼쭐이 난 직후 들었던 이야기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참석해야 할 곳을 신중히 골라야 한다는 생각에 참석자 명단까지 훑어봤으니까.’
3황자가 그 결혼식에 참석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앞으로 황가 사람들이 가는 곳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겠다며 손사래를 쳤었지.
메릴린의 말에 생각에 잠겼던 도로테아는 마차가 멈추는 것과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도착했군요.”
마차가 레어 남작가의 저택 앞에 섰다.
도로테아는 가벼운 작별 인사와 함께 마차에서 내린 메릴린의 뒤를 따라 내렸다.
“영애는 왜…….”
“메릴린 양이 저와 다른 이들을 위해 적잖은 위험을 무릅써 주었으니 저도 마무리까지 해 드리려고요.”
수수께끼 같은 말과 함께 저택에 들어선 도로테아는 그날, 악귀를 마주했다가 앓아누웠다는 시녀의 방으로 향했다.
시녀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연신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악귀는 소멸되었다고 했는데…….”
“적어도 물리적인 위협에서는 자유로워졌을지 모르겠지만, 악귀를 마주하고 받았던 충격이 가시는 건 아니니까요.”
도로테아는 고통스레 미간을 찡그리고 있는 시녀의 이마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부정한 기운에 노출되었으니 자연스레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요.”
평범한 사람이라면 쉽사리 떨쳐 내기 힘들 만큼 끔찍한 조우가 아니었던가.
무언가를 가볍게 읊조린 도로테아가 무언가를 머리맡에서 손으로 잡아챘다.
“방의 공기가 탁하니 좀 더 두꺼운 이불을 덮게 하시고, 창문을 활짝 열어 두는 것이 좋겠어요.”
가볍게 흘린 언질에 메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칠었던 숨소리가 잦아들고, 일그러졌던 얼굴에도 편안함이 맴돌았다.
“아마 깨어나고 나면 무엇을 마주했는지 기억하지 못할 거예요.”
“그런 것도 가능하군요.”
멍하니 중얼거리는 메릴린을 향해 도로테아가 싱긋 웃었다.
메릴린은 반쯤 체념한 듯한 웃음과 함께 어깨를 으쓱했다.
“그것도 정령사이기 때문이라고 하실 테죠?”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고맙겠어요.”
시녀에게서 시선을 뗀 도로테아가 물끄러미 메릴린을 바라보며 물었다.
“원한다면 영애도 편해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어요.”
엉뚱하게 엮여 이래저래 피를 본 것은 사실이니, 이 정도는 충분히 받을 만했다.
잠시 망설이던 메릴린이 고개를 저었다.
“기억해야 할 것 같네요. 모처럼 목숨까지 건 일인데 모두 잊어버리면 억울할 것 같아요.”
어차피 악귀는 분명 소멸되었다고 했으니.
중얼거리는 메릴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메릴린은 아까보다도 좀 더 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영애는 정말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에요.”
“제가요?”
“사촌의 목숨을 마치 장난감처럼 미끼로 내거는 것에 일말의 주저함도 없으면서, 또 우연히 함께 휘말린 제게는 몹시도 당연하다는 듯 ‘보상’을 하셨죠. 심지어 그럴 필요 없을 만큼 영애는 고귀한 신분인데도.”
어느 순간에는 타인의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 무감각해 보이다가도, 또 어느 순간에는 그 누구보다 남의 마음을 헤아려 주기도 하고…….
“뭔가 남들과는 다른 구석이 있어요. 사람들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생각을 한달까. 아니, 다르게 상황을 받아들인달까.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기도 하고요.”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도로테아는 저를 향한 조심스런 평가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이 아닌 것으로 살아왔거든요.”
그곳에서의 재신은 인간이기보다 부적으로서의 쓰임새를 더 요구받았다.
생각하지 말라. 행동하지 말라. 감정을 갖지 말라.
인간으로 사고하는 법을 철저하게 차단당한 지난날의 흔적이 아직도 제게 달라붙어 있음을 새삼 느꼈다.
“저야말로 메릴린 양에게 몹시 흥미를 느껴요.”
“저한테요?”
“뭐랄까. 자신의 위치도 모르고 함부로 입을 놀렸을 때만 하더라도 단순히 머리가 나쁘고 겁이 많은, 그렇고 그런 인물인 줄 알았는데.”
“…….”
“사람이 아닌 존재의 위협까지 감수하면서 남의 일에 도움을 줄 만큼 오지랖이 넓은 것을 보니, 앞뒤도 모르고 달릴 만큼 방향 감각도 없고.”
“…….”
“겁을 먹었다가, 또 어느 날은 용기를 냈다가. 두서없기까지 해서.”
“…….”
“행동에 일관성은 없는데 늘 한결같이 제 무덤을 파는 것이 몹시 신기해 보여서요.”
차라리 욕을 해라.
자신을 놀리는 말처럼 느껴진 듯 메릴린의 볼이 부풀었지만 도로테아는 진심이었다.
그래서 몹시 흥미를 느끼고, 그녀답지 않게 일에 끌어들이기까지 했으니까.
“저는 생각보다 꽤 많이, 메릴린 양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편이에요.”
물론 당사자는 전혀 믿지 않겠지만.
* * *
“이른 방문이라 죄송했습니다.”
“그럴 리가요. 언제든 오시면 환영이지요. 오히려 누추한 저택에 실망하셨을까 걱정입니다.”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는 남자의 옆에 선 메릴린은 질린 얼굴이었다.
도로테아는 연신 후작과 인연을 엮어 보려는 남자에게 능숙하게 응대를 해 주고는, 핑계와 함께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 마차에 올라탔다.
잠든 제인에게 무릎을 내준 콜린이 그녀를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오지랖이 넓군.”
“그렇다기보다는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해 두자.”
“미래라고?”
“난 메릴린이 마음에 들어.”
적당히 속물적이고 적당히 사람이 무르다.
쉽게 휩쓸리지만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제껏 제 주변에 머무는 이들은 대개 ‘도로테아’에게 신세를 졌거나 또는 마음의 빚을 진 사람들.
특히나 가족들이라면 더했다.
도로테아에게 죽은 그녀의 어머니, 엘렌을 투영하는 이들은 그녀의 얼굴을 볼 때마다 애정과 부채감을 함께 느꼈다.
도로테아가 어떤 행동을 해도 막아서기는커녕 그녀의 어리광을 들어주기에도 급급할 만큼이나.
그리고 발레리 제르망 또한 지나칠 정도로 관대하고.
“그녀는 널 그리 좋아하지 않는 듯 보이던데.”
“음, 그래서 좀 유감이야.”
도로테아 딴에는 나름의 호의를 꽤 많이 베풀었는데.
어째 메릴린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핏기가 사라지는 게 영 상대의 호의는 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신 도로테아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콜린을 바라보았다.
“당신, 키엘 스펜서를 알고 있었지?”
5년 전, 황도로 돌아오던 날 신세를 졌던 은인이라는 걸.
콜린은 예산과 행정 업무를 병행해 왔으니 궁에 드나드는 인물들이나 지방 영주들을 파악하고 있었을 터.
진작 그의 ‘이름’을 알아내었을 텐데.
여태껏 도로테아에게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었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정보를 숨긴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일이었다.
“저쪽에서도 이제껏 우리를 찾지 않았다는 건, 굳이 그날의 일을 생색낼 생각이 없었다는 거다.”
“흠.”
“스펜서 백작가는 하이클레어 후작가와도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아.”
제법 필사적으로 변명을 하는 것을 보니 찔리는 구석이 있긴 한 거군.
콜린의 말이 영 틀린 것은 아니었다.
헤어질 때에 도로테아는 키엘에게 ‘갖고 있는 욕망을 버린다면’ 지금보다 좀 더 편해질 수 있을 거라는 충고를 건넸다.
키엘은 그녀에게 ‘그건 힘들다.’고 말했었지.
생각해 보면 그가 콜린이나 도로테아를 다시 찾지 않은 까닭은, 스펜서 백작으로서 하이클레어 후작가의 사람들과 엮여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었다는 거다.
“좋아, 그 부분은 추궁하지 않겠어.”
도로테아가 산뜻하게 잘못을 넘어가겠다고 하자, 콜린이 미심쩍은 얼굴로 그녀를 살폈다.
“그렇지만 이제는 서로를 알게 되었으니 거리낄 것도 없겠다, 졌던 빚을 갚아야지?”
“……빚을 진 건 내가 아니라 너였던 것으로 기억한다만.”
“네가 뒤집어쓰고 있는 껍데기가 벌인 일이잖아. 기억을 제때 받아들이지 못해서 대응도 못 하고 당할 뻔했던 게 어디서.”
도로테아는 외숙부의 정강이를 가볍게 걷어차 주고는 팔짱을 낀 채 명령했다.
“이제부터라도 스펜서 백작과 친분을 쌓도록 노력해 봐. 호의를 사는 것도 좋고, 주로 어떤 사업을 하는지, 어떤 이들과 어울리는지 자세하게 알 수 있으면 더 좋겠지.”
“…….”
저항의 의미를 담은 긴 침묵 끝에 콜린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말해 두지만, 그는 이미 한 번 우리와 엮이는 것을 거부했다. 설령 이쪽에서 다가간다고 한들 저쪽에서 거절하면 그만이야.”
글쎄, 그럴 수 없을걸.
도로테아는 연신 손장난을 치며 심드렁하니 해결책을 건넸다.
“간단하지. 그가 원하는 것을 줘.”
콜린의 얼굴이 팍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그녀가 활짝 웃었다.
“키엘은 여전히 그날 밤을 못 잊은 것 같던데. 같이 밤이라도 보내고 정보를 얻으면 꽤 괜찮은 거래 아니겠어?”
“…….”
콜린은 역시 이 요망한 계집애를 진작 지옥의 불구덩이에 처넣도록 지하 세계의 주인에게 보고를 올렸어야 했다고 후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