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사 도로테아 65화
그 시각, 메릴린처럼 잠 못 이루고 불안에 떠는 사람이 또 있었다.
뒷주머니 좀 차 보려다가 졸지에 돈은 돈대로 받지 못한 채 극장의 문을 닫아걸고 임시 휴업 중인 레번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밤늦게까지 연습에 매진하던 단원 중 하나가 쪼르르 달려와 물었다.
“대장, 우리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이미 방치된 지 사흘이 넘었는데.
망할 놈의 계집 같으니. 내가 뒷주머니를 차고 비상금이라도 좀 챙기고 난 다음이면 말도 안 해.
땡전 한 푼 받지 못했는데, 느닷없이 쳐들어와 중간에 끼어들어 귀신같이 일을 망치더니…… 공연까지 중단시켜 버렸다.
“인생 참 엿 같아…….”
대박 칠 기회가 바로 코앞까지 왔었는데 그걸 이렇게 놓치네.
지난 며칠간은 정말이지 하늘을 날 것 같았는데, 곤두박질치는 것 또한 순식간이었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허기가 그를 덮쳤다. 이미 성공의 달콤함을 맛보고 나니 더욱 빈손이라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었다.
레번은 몸을 젖혀 말끔하게 새로 칠해진 천장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시키는 거나 따박 따박 하면서 욕심부리지 말걸.’
살아온 인생에 대한 회의는 물론이요,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로 가득한 그가 술을 들이켰다.
“하다못해 찾아갈 수 있기라도 하면…….”
그의 신분으로는 후작가 저택의 문턱은커녕 그 근처에도 다다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 이제 와 후회해 봤자 소용없는 거지.”
스스로의 무지에 질타를 보내며 후회의 구렁텅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그는 폐인이 되어 가고 있었다.
술 냄새를 풀풀 풍겨 가며 단장실에 틀어박힌 채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그를 찾아온 미네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빵을 건넸다.
“크흑.”
비록 이제는 쳐다도 보지 않는 오래된 검은 빵이지만 함께 동고동락해 온 동료들과의 추억이 떠올랐다.
그 순간이었다.
그를 강타하는 한 줄기 빛과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성은 좀 하고 있었니?”
“……!”
아직 조금은 앳된 티가 남아 있지만 상대를 압도하는 위엄이 실린 목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그의 멱살을 잡아 쥐고 성공의 코앞까지 데려다주었던 안내자이자, 그가 자기 발로 차 버렸던 그의 선지자.
문을 열고 들어선 도로테아는 저를 향해 허겁지겁 달려드는 레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키지 않는 얼굴로 도로테아의 뒤를 따라 들어오던 우드는 달려드는 레번을 보고 재빠르게 손을 뻗었지만, 우드의 손은 허공을 휘적거렸을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레번은 그녀의 가까이로 달려오자마자 멈춰 서서 그대로 몸을 납작 엎드렸기 때문이다.
“반성했습니다. 몹시 반성했어요!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없을 겁니다!”
물기 가득한 목소리는 어느새 통곡이 되어 있었다.
도로테아는 제 드레스 자락을 적시는 눈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큰 소리에 먹먹해진 귀를 만지작거렸다.
헛손질을 하고 머쓱해하던 우드가 폐인 몰골을 한 채 엎드려 비는 레번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반성은 잘했어?”
어린아이처럼 꺼이꺼이 울던 레번이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앞으로는 그런대로 얌전해지겠네.’
쓸데없이 다른 공연을 올리자는 둥 귀족 취향에 맞춰 극을 만들자는 둥 하는 헛소리를 하지 않을 테니 그것으로도 흡족했다.
그런 도로테아와는 달리 우드는 반쯤 정신을 놓은 레번에게 가엾다는 시선을 던지며 얼굴을 구겼다.
“옛 친우라며? 좋은 감정으로 후원 중이라고 하지 않았나?”
“옛 친우 맞아. 레번, 우리는 꽤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있는 거잖아?”
도로테아의 말에 레번이 잽싸게 고개를 끄덕이며 코가 맹맹한 목소리를 냈다.
“그렇습니다. 앞으로도 그러고 싶고 그러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코를 팽, 하고 풀자 옆에서 기다리던 미네가 쪼르르 달려와 콧물을 닦을 천을 건넸다.
도로테아의 드레스 한 자락도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사명감으로 가득 찬 행동에, 레번이 서둘러 얼굴을 닦고는 간절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제가 앞으로 진짜 잘할게요. 말도 잘 들을 거고 뭐든지 하라는 거 다할 겁니다.”
“응.”
자기가 한다는데 굳이 하지 말라 할 이유는 없지. 그리고 말 잘 들으면 좋은 거고.
도로테아는 그저 그렇게 하겠다는 레번에게 고개를 끄덕인 것뿐인데, 뒤에 있던 우드가 몹시 질린 얼굴로 그녀를 봤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너.”
“별짓 안 했는데.”
알아서 그냥 저러는 거야.
도로테아로서는 좀 억울한 일이었다. 레번이 멋대로 충성을 맹세하는 것을 제가 굳이 막을 이유가 없지 않나.
어찌 되었건 우드의 불손한 눈초리가 계속되자, 도로테아가 슬쩍 내려다보며 물었다.
“내가 여기서 손 떼고 남남으로 살아가는 편이 더 좋아?”
그 물음에 눈이 돌아간 레번이 저보다 머리통 한 개는 더 큰 우드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이미 제정신이 아니니 겁이 날 것이 없었다.
“이 새끼가 처돌았나. 왜 멀쩡한 남의 꽃길에 가시를 뿌리고 X랄이야!”
한때 뒷골목을 평정했던 양아치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걸걸한 말에 우드는 몹시 당황했다.
그러고는 서둘러 이미 눈이 돌아간 지 오래인 레번의 어깨를 덥석 잡고 흔들었다.
“정신 차려라. 쟤랑 엮이는 게 네 인생이 망하는 지름길이야.”
“내가 선택한 삶이야! 나는 내 길을 갈 거라고!”
“그래, 자기가 선택한 길을 가게 해 줘.”
도로테아가 첨언하자, 우드는 기가 막힌 듯 멱살이 잡힌 채 할 말을 잃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그저 가여운 인간을 구제해 주려 선심 어린 몇 마디를 했을 뿐인데, 상대는 저를 멱살 잡고 죽일 듯한 원수 취급하고 있지 않은가.
도로테아가 가볍게 손뼉을 짝, 하고 쳤다.
“가서 씻고 와, 레번.”
“옙!”
얌전히 멱살을 놓은 레번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로테아는 어느새 제 곁에 와 있는 미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다른 단원들에게 지시했다.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렴.”
“손님이요?”
“응, 게르만 백작께서 오실 거야.”
도로테아의 입가에 짙어진 미소에 다들 호기심 어린 눈을 하고 있다 이내 다들 후다닥,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단장인 레번이 통곡하며 매달려서 겨우 돌아온 후원자가 또다시 본인들을 방치하지 않도록.
* * *
적장자와 함께 극단을 방문한 게르만 백작은, 며칠 새에 저를 마치 지나가는 돌멩이처럼 모른 척하는 단장과 극단원들을 둘러보았다.
테이블 위에 차려진 그럴듯한 음식들과는 달리, 그들은 게르만 백작의 방문을 전혀 반기지 않는 눈치였다.
도로테아는 흡족한 얼굴로 저택에서 공수해 온 샌드위치를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못 본 새에 단원들의 태도가 달라졌구려.”
“그러게요. 다들 심경의 변화가 있었나 봐요.”
딱히 후원을 받지 말라는 소리는 안 했었는데.
공연을 잠시 멈춘 이유는 게르만 백작의 부탁을 들어준 것뿐이었다. 애초에 극장을 어디에 넘길 생각도, 혹은 폐쇄하거나 정리할 생각도 없었건만.
잠시 휴식을 취할 시간을 준 것이, 도리어 저들을 불안케 한 모양이었다.
‘어차피 앞으로도 내내 공연을 올리고 간간이 심부름도 시킬 생각이라 당분간 쉬어 두라는 거였는데.’
의욕에 넘치는 것을 보니 그리 배려할 필요 없이 그냥 굴릴 것을 그랬다.
도로테아는 저를 알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는 백작에게서, 이내 그의 곁에 서 있는 장남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동생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지간히도 힘든 일인지 낯빛이 몹시 거무죽죽했다.
상태가 저렇게 좋지 않은데도 이곳까지 함께 동행한 것을 보면, 마차를 습격하도록 사주한 건 저치의 짓인가.
샌드위치를 반쯤 먹고 내려놓은 도로테아가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소백작과는 아마도 초면인 것 같네요. 동생분의 일은 유감이에요.”
줄곧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남자의 진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처음 뵙겠습니다, 영애. 체이스 게르만이라 합니다.”
은은한 미소와 함께 그를 바라보고 있던 도로테아는 곧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저희는 분명 초면이고 별다른 원한 관계도 없죠. 게르만 백작님께서 요구하신 대로 공연도 멈춘 상태예요.”
“…….”
“그런데 왜 제 죽음을 사주하셨죠?”
하이클레어 후작가는 황실의 수호검이자 명문가이다.
도로테아가 데인의 입을 막는 등 나름대로 조치를 취했다고 한들, 하이클레어 후작가에서 전말을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제 할아버님은 저를 위협하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 되었든 용서하지 않으실 테고. 그건 제 외숙들도 마찬가지일 텐데. 괜한 일을 하셨네요.”
게르만 백작은 수척해진 얼굴로 눈을 감았다.
체이스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송구합니다, 영애. 그러나 분명 오해가 있습니다. 제가 영애의 뒤를 미행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마차 사고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래요? 조사에 따르자면 용병 길드에서는 소백작께 직접 의뢰를 받았다고 하던데요.”
필립이 빼돌려 온 의뢰서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백작가의 인장은 물론이고, 그가 기존에 했던 미행 의뢰에 더해 얹어 준 웃돈 또한 어마어마했다.
물론 아무리 돈이 중하다고 한들, 대낮에 후작가의 금지옥엽을 습격한다는 정신 나간 방식을 쓰지는 않았겠지만…….
다들 꼭 ‘뭐에 홀린 사람처럼’ 비이성적인 결정을 내리고 또 행했다는 점에서 몹시도 수상했다.
‘게르만 백작은 장남이 내 뒷조사를 했다는 사실조차도 몰랐나 보네.’
만일 정말 암살에 관여된 것이 체이스가 아니라면, 누군가 그의 이름을 빌려 도로테아를 처리하려 들었다는 소리다.
한번 들쑤셔 볼 만한 가치는 있지만.
‘용병 길드에서는 섣불리 제 사람들을 내주려 하지 않겠지.’
그렇다고 일을 키우면 자신의 가족들이 알게 되리라.
그건 그녀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머릿속으로 정리를 끝낸 도로테아가 여유로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백작님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 드린 저와는 달리, 소백작께서 제게 미행을 붙이셨다는 것만은 변함이 없군요.”
순식간에 얼굴이 어두워진 체이스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 천천히 몸을 낮추고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와는 상관없는 제 독단이었습니다.”
게르만 백작은 몹시도 괴로운 얼굴로 아들을 외면했다.
꽤 크게 상심한 듯 보였지만 적어도 아들을 감싸거나 변명 따위를 늘어놓고자 이곳까지 온 것은 아닌 듯 보였다.
“어쩌면 소백작께서 제 목숨까지는 거두려 하지 않으셨을 수 있겠지만, 다른 것은요?”
청년의 눈에 서린 의아한 빛을 바라보며 도로테아가 눈을 내리깔고서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이곳에 오기 전, 변을 당했던 메릴린 영애의 저택에 잠시 들렀습니다.”
“…….”
“그녀가 몹시도 이상한 말을 하더군요. 습격을 받을 당시 목격한 얼굴이 몹시 낯익었다고.”
의아해하던 청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심약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며 도로테아가 또박또박 죽은 자의 이름을 읊었다.
“레이몬드 게르만.”
“…….”
“자신을 습격한 범인이 그분이라고요.”
“말도 안 되는……!”
게르만 백작이 벌떡 일어나 믿을 수 없다는 듯 도로테아와 아들을 번갈아 보았다.
여전히 여유로운 도로테아와 달리 거의 반쯤 넋이 나가 있는 아들의 얼굴을 보고서 무언가 일이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이미 화장된 사람이 멀쩡하게 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을 습격하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닌가요?”
죽은 자의 육신에 들어앉은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레이몬드 게르만의 혼은 아니었다. 여상한 목소리로 폭탄을 집어 던진 도로테아가 내려놓았던 샌드위치를 마저 입에 털어 넣었다.
“소백작께서는 지금부터,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사건의 전말을 제게 털어놓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지금 밖을 돌아다니고 있는 ‘빈 육신’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