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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60)화 (60/242)

혼술사 도로테아 60화

“극단이라. 재미있는 생각을 해 냈구나.”

“황송합니다.”

“다만 귀족들을 초대하기에는 적절치 않은 장소가 아닐까 싶은데.”

극의 내용도 지나칠 정도로 선정적이었다.

확실히 몰입감은 뛰어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콧대 높은 귀족들이 가난한 거리의 극단 여자와 귀족 자제가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를 좋아할 리는 없었다.

나이 지긋한 귀족들의 미간에는 이미 깊은 주름이 새겨져 있었다.

보수적인 이들에게 이 극이 얼마나 못마땅하게 느껴졌을지야 보지 않아도 훤했다.

“폐하.”

“게다가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자꾸만 황자들과 엮이는 모습도 그리 현명한 홍보 방식은 아니란다.”

파격적이기야 했지만.

황제는 입가에 옅은 웃음을 달고 있으면서도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그녀를 아끼는 것과 달리 이 이상의 선을 넘지 말라는 경고에 도로테아가 무릎을 살짝 굽혔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소녀는 다만 오래된 인연을 외면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오래된 인연이라?”

모르는 척 대화를 듣고 있던 귀족들의 귀가 쫑긋했다.

“여주인공 파티마가 우연하게 에드워드를 만났던 것처럼, 저 또한 ‘우연한 기회로’ 오래전 저와 연이 있었던 인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필립이 엉거주춤 서 있던 레번을 데려오자, 하얗게 질려 있던 그가 황제의 앞에 넙죽 엎드렸다.

“오래된 연이라…… 과거에 이런 자와 알고 지냈다고?”

황제의 눈이 의아한 빛을 띠었다.

그녀는 황도로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곧장 가문의 저택으로 돌아갔을 텐데.

언제 교류를 했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 극단을 통솔하고 있는 이의 이름은 레번으로, 일찍이 7황자 전하의 은혜를 입어 거리 생활을 청산하고 극단을 만들었답니다.”

“7황자가 말이냐?”

주변이 술렁였다.

다른 황자들도 아니고 7황자가 저자에게 은혜를 내렸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아버지인 황제조차도 그녀의 말을 믿지 못하고 미심쩍은 눈으로 엎드린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들라.”

덜덜 떨고 있는 레번을 내려다본 황제가 목소리를 한층 부드럽게 낮췄다.

“황자에게 은혜를 입었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그러니까…….”

레번은 얼어붙은 입을 가까스로 떼긴 했지만 여전히 너무 긴장한 상태였다.

온통 새하얗게 변한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것이라곤 방금 공연했던 극의 대사들뿐이었다.

“7황자 전하께서는…… 저를 구원하시고 바른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저거, 방금 극 중에 나온 여주인공의 대사 아니었나?’

‘여주인공이 자신의 비밀스런 사랑을 신관에게 털어놓을 때의 대사 같은데.’

황제는 웃거나 화를 내지도 않고 그저 다시금 물었다.

“7황자가 어떻게 네 인생을 구원했느냐?”

이번에는 마땅히 생각나는 대사조차 없었다.

머뭇거리던 레번은 결국 솔직하게 이실직고했다.

“어린 날, 거리에서 나쁜 패거리들과 절도를 일삼으며 또 다른 아이들을 유혹해 범죄를 이어 나가던 저를…….”

다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감옥에 처넣으셨습니다.”

“…….”

근데 그게 왜 구원이야.

찜찜한 얼굴로 레번을 내려다보던 황제가 다시금 물었다.

“자네가 구원을 받은 게 언제 적의 일인가.”

“제 나이 열한 살 때의 일입니다.”

“…….”

들으면 들을수록 구원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니까 집도, 부모도 없이 거리 생활을 하는 어린아이를 7황자가 한 점의 자비조차 없이 냉정하게 감옥에 집어넣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설득력 하나 없는 말에 황제는 슬쩍 자신의 무뚝뚝한 아들을 바라보았다.

루크는 해명 한마디조차 하지 않고 묵묵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묘한 분위기를 읽어 낸 레번이 재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감옥에서 많은 것들을 느꼈습니다.”

“이를테면 어떤 것 말이냐?”

“저처럼 뒷배가 없는 인간은 죄를 지으면 감옥에 간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러니 두 번 다시 감옥에서 굶고 싶지 않거든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고요.”

“…….”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묘하게 찜찜한 답이었다.

“그리하여 저와 같은 처지의 아이들을 모아 거리에서 공연을 하며 돈을 벌었습니다.”

절도도 하고, 부업도 했지만.

어찌 되었건 간에 불법적으로 행한 일들은 되도록 감추고 숨기는 것이 옳았다. 그리고 실제로도 레번 아래에 있는 아이들은 그나마 가장 온순한 아이들이었다.

거리 생활을 하다 약탈을 주업으로 하는 건달이 되는 것이 대부분의 수순이었으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도로테아가 입을 열었다.

“우연히 다시 레번을 만나게 되었지만, 이곳 아이들의 사정이 몹시 열악했습니다. 환경도 이렇다 보니 좋은 공연이 나올 수도 없었고요. 감사하게도 3황자님께서 하사하신 호의 어린 선물을 신전에 기부하고 이곳의 건물을 넘겨받았고, 주변의 치안은 7황자님께서 해결해 주셨습니다.”

“…….”

리처드가 조용히 도로테아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보물들을 ‘경매’에 매긴 것도 아니고 신에게 바쳤다는 데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애초에 황가의 보물이라고는 하나 개인적인 수집품에 불과한 물건들이니 체면을 구길 뿐, 대단히 손해를 본 것은 아니었다.

‘신전의 기부는 결국 내 이름으로 하게 되는 거고.’

이렇게 되면 극단의 아이들을 돕는 일에도 한발 걸친 게 되는 셈이다.

저도 모르게 자선 사업에 동참하게 된 리처드가 떨떠름한 얼굴로 침묵했다.

도로테아는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말을 이어 나갔다.

“폐하께서는 이 제국의 백성들이 누구 하나 굶지 않게 하려 매일 같이 회의를 하시고, 제 할아버님은 그런 폐하를 보필하며 제국에 큰 변고가 일어날 때마다 ‘수호’하기 위해 검을 들어 왔습니다. 그런 할아버님을 옆에서 모신 제가, 폐하를 위해 작은 뜻을 보탠 것은 비록 보잘것없더라도 ‘귀족’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일이라 여겼기에…….”

상대의 얼굴에는 금칠을. 그러면서 자신의 행동에는 정당성을.

타고난 언변가를 보는 황제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명민하다 칭찬은 했었지만 대담함까지 갖춘 아이가 아닌가.

이렇게 되면 3황자 또한 더 이상 그녀를 향해 날을 세울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도로테아, 자신의 위상도 높이고 겸사겸사 극단 홍보도 해 준 셈이 되었지.

고개를 주억이던 황제가 짐짓 목소리를 좀 더 낮추어 근엄하게 물었다.

“주인공인 파티마를 죽인 의문의 집단에 대해서는 왜 아무런 설명이 없는 것인지 말하라.”

극에 내용을 묻자 레번이 움찔했다.

그야 파티마를 죽인 자들의 정체는 아직 오리무중이니까.

이것이 실화라는 사실은 극히 일부만이 알고 있는 데다, 섣불리 밝혔다가는 게르만 백작가와 척을 지게 될 수도 있었다.

레번을 대신해 도로테아가 말을 이었다.

“왜냐면, 벌써 이 집단의 정체가 밝혀져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호오?”

“다음 극에도 계속해서 등장할 예정이니까요.”

“이야기가 이어지는 게로구나.”

“네.”

게르만 백작가를 풍자하거나, 그들의 태도를 비판하고자 극에 올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과는 상관없이, 백작 영식을 죽이고 파티마의 혼을 멋대로 갈취하려 들었던 이들에게 경고할 생각이었던 거지.

극이 널리 알려지고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수록 흉수들은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으리라.

연극은 꽁꽁 숨은 이들을 향한 도발에 가까웠다.

“후작은 네가 위험한 길로 빠지지 않기를 원할 것이다.”

“저도 할아버님께서 위험해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폐하.”

뜬구름 잡는 말에 잠시 동안 물끄러미 도로테아를 바라보던 황제가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자리를 뜨려는 듯 몸을 돌리던 그가 멈추어 서서 레번을 향해 마지막 물음을 던졌다.

“그나저나 7황자와의 인연 외에, 테아와는 어떤 인연이 있는가?”

레번이 제 고개를 바닥에 쿵, 하고 박는 것과 동시에 도로테아가 활짝 웃었다.

“레번이 감옥에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패거리에 넣으려고 꼬드겼던 소녀가 저예요.”

“…….”

자리에서 일어나던 이들 모두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믿을 수 없다는 듯 도로테아를 바라봤다.

레번의 등이 식은땀으로 젖어 들어가는 가운데 데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물었다.

“저 새끼가 널 꼬드기려 들었다고?”

“다행히 감옥에서 반성하고 나와 이렇게 번듯한 극단의 단장이 되었으니 훌륭하잖아.”

평생 제 아래에서 구르긴 해야 할 테지만.

먹는 것도 해결해 줄 테고, 돈도 벌 수 있게 해 줄 테니.

저를 향해 쏟아지는 살기에 레번이 더욱 고개를 푹 숙였다.

5년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저 계집애를 만날 때마다 삶이 한층 더 고달파지고 있었다.

*   *   *

하나둘 극장을 빠져나가는 귀족들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던 도로테아는, 눈물 자국을 단 채 다가오는 메릴린을 향해 부드럽게 물었다.

“극은 즐겁게 관람했나요?”

“영애께서는, 그날…… 제게 일부러…….”

“본의 아니게 이용한 꼴이 되었으니 미안하게 생각해요.”

딱히 메릴린이 없더라도 그날 발레리와 둘이서 말을 흘렸겠지만, 메릴린의 존재가 대화를 더욱 자연스럽게 위장할 수 있게끔 도운 것도 사실이었다.

귀족들을 상대하는 의상실의 마담은 눈치가 빠르다.

메릴린은 자연스럽고 티가 나지 않게 말을 흘리는 데에 크게 일조한 셈이었다.

새하얗게 질린 그녀가 덜덜 떨리는 입술을 가까스로 뗐다.

“그럼, 이제, 저를…… 용서해 주시는 건가요?”

“우리 사이에 빚은 남아 있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느긋한 얼굴의 도로테아와는 달리 메릴린은 여전히 초췌하기 짝이 없었다.

탓할 마음도 없었건만 왜 그리 눈치를 보는지.

애초에 충분히 대가를 치르지 않았던가.

도로테아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지자 눈치를 보던 메릴린이 멍하니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유독 색이 짙은 것처럼 느껴지는 남색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테아, 레어 영애도 계셨군요.”

데인 하이클레어가 흐뭇한 얼굴을 하고 다가왔다.

메릴린은 그가 지난 사냥제에서 제게 어마어마한 사냥물을 떠넘긴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는 한 걸음 물러섰다.

“마차가 준비됐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자. 메릴린 영애께서는 마차를 가져오셨습니까?”

“아, 저는 대여할 생각이에요.”

어색한 얼굴로 웅얼거리듯 답하는 메릴린의 말을 데인이 덥석 받았다.

“그럼 저희 마차를 타고 가시죠.”

당황한 메릴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데인의 제안을 듣던 도로테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영애가 원하는 대로 해요.”

어찌 보면 오히려 의상실에서의 일로 사소하지만 빚을 진 셈이니.

느릿하게 돌아서는 도로테아의 뒤로 주저하는 듯 기척이 느껴졌다.

이윽고 결심한 듯 메릴린이 데인의 호의 어린 제안을 받아들여 도로테아의 뒤를 따라 마차에 올라탔다.

조금 놀란 듯한 필립과는 달리 발레리가 상냥하게 메릴린을 맞이했다.

“이리 와 앉아요. 잘 왔어요, 영애.”

“감사합니다.”

데인은 순순히 마차에 올라탄 메릴린을 몹시 흐뭇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어색한 듯 마차 바닥을 내려다보는 메릴린에게서 눈을 뗀 필립이 물었다.

“연극 ‘파티마’는 언제까지 공연할 예정이야?”

황제의 앞에서 ‘다음 이야기’를 제작할 예정이라는 말을 꺼냈으니 분명 계획이 있을 터.

사촌의 물음에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하던 도로테아가 짤막하게나마 답했다.

“이야기를 모르는 자들이 제국에 없어질 때까지.”

아주 멀리, 숨어 있는 이들의 귀에까지 들리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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