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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59)화 (59/242)

혼술사 도로테아 59화

잠에 취해 있던 도로테아는 낯선 기척에 눈을 떴다.

활짝 연 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살에 어두웠던 방이 환해졌다.

“언제까지 잘 거야, 이 잠꾸러기야. 해가 이미 중천인데.”

“제인은?”

도로테아가 잠에서 깨자마자 가장 익숙한 인물을 찾자 상대가 의아하다는 듯 답했다.

“이른 아침에 이미 저택을 나갔어. 네가 심부름 보낸 거 아니었어?”

“아…….”

그제야 어젯밤 지시했던 것들이 떠올랐다.

“맞아. 내가 보냈지.”

잠기운이 남은 눈꺼풀이 자꾸만 감겨 왔다.

애써 잠에서 깨려 눈을 비비는 사이, 그녀의 앞에 자연스레 씻을 물이 담긴 그릇이 놓였다.

손을 뻗어 씻기 딱 좋을 만큼 미지근한 온도의 물에 얼굴을 적시자 데인이 핀잔했다.

“얼른 일어나. 네가 벌인 일 때문에 황도가 발칵 뒤집혔는데 지금 잠이 온단 말이야?”

“잠들지 못할 까닭도 없지.”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떳떳하지 못한 것도 아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일을 키우는 거야? 도통 이해가 안 가.”

“…….”

“그렇게 좀 나가서 사람들과 어울리라고 할 때에는, 죽어라 저택에 처박혀 있더니.”

그야 그때는 그녀의 ‘혼’과 이 ‘육신’이 제대로 융합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정령을 데려오는 것만으로도 몇 달을 정양해야 할 만큼.

“건강이 좋지 않았으니까.”

“그렇다 해도 너무 급작스런 변화잖아. 좀 천천히 가자고.”

“그럴 생각이었는데…….”

그녀가 물그릇을 밀어내고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기사는 자연스레 그녀의 발치에 슬리퍼를 놓아 주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기에는 자꾸만 나를 건드리는 것들이 많아서.”

“너를 건드리는 게 많은 게 아니고, 네가 걸려 오는 시비를 다 받아치니까 일이 점점 더 커지는 거지. 보통은 적당히 흘려보내고 그러는 거라고.”

팔짱을 낀 채 투덜거리는 데인의 말을 반쯤 흘려버린 도로테아가 문을 열고 밖으로 향했다.

“3황자를 적으로 돌릴 생각이야?”

“리처드 말이야? 딱히?”

심드렁한 대답에 데인의 눈이 질린 듯 그녀를 흘끔거렸다.

리처드를 도발해 일을 키우긴 했지만, 그를 상대하고자 일을 키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에게는 쉽게 흥분할 상대가 필요했고, 그가 황자라는 신분을 가진 덕에 훨씬 일이 쉬워졌을 뿐이다.

‘리처드야 귀여운 수준이지.’

비록 그의 어깨에 들어앉은 원념이 적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리 좋은 생을 산 것은 아니겠지만.

그녀가 남의 업보까지 죄다 청산해 줄 정도로 좋은 성격은 아니었다.

“그럼 도대체 왜 이렇게…….”

“말했잖아. 주변에서 자꾸만 성가시게 구는 것들을 끌어낼 생각이라고.”

야금야금 곁에 와 자꾸만 사건을 일으키는 것들이 신경에 거슬렸다.

이미 몇 번이고 후작가의 담을 넘나든 ‘상대’의 정체를 이제는 좀 알아야 할 테니.

*   *   *

도로테아의 초대장에 명시된 장소를 확인한 귀족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지정한 장소는 상류층 계급에게는 퍽 낯선 지역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여긴 번화가에서도 조금 떨어진 곳이군요.”

“이런 곳에 뭐가 있다는 거지?”

지나치게 새롭고 낯선 장소에 대한 약간의 거리낌과 호기심이 교차했지만 대개는 초대에 응하는 길을 택했다.

고상한 척하면서도 가십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귀족들에게, 사냥제에서의 일은 흥미진진함 그 자체였다.

자신에게 불똥만 튀지 않는다면 그 무엇이든 재미있을 터.

그러한 습성을 이해라도 한 듯 도로테아는 사람들을 ‘흥미로울 만한’ 요소들이 가득 담긴 초대장으로 유혹했으니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여기에 이런 건물이 있었던가요?”

화려하진 않지만 튼튼한 건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귀족들이 하나둘 입장하기 시작했다.

둥그런 원형으로 이루어진 내부는 중앙의 공간을 두고 좌석들이 빙 둘러 있는 형태였다.

“확실히 경매장과 비슷해 보이기는 하네요.”

“무슨 생각인지. 이렇게 공개적으로 물건을 ‘경매’한다면 황실을 적으로 돌리게 될 텐데요.”

설령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한들, 황가의 물건을 사사로이 판매한다는 건 황실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될 터.

“경매가 시작된 후 망신을 당하는 건 결국 후작 영애겠죠.”

“아무도 물건을 입찰하려 들지 않을 거예요.”

다들 재미난 구경거리를 보러 온 것이지, 스스로 분란의 중심에 설 마음은 없었다.

픽 웃으며 꺼낸 귀부인의 말에 곁에 있던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 와중, 활발히 대화를 이어 나가던 귀족들이 일순 입을 꾹 다물자 넓은 공간이 일순 조용해졌다.

오늘 초대장을 보낸 장본인인 도로테아 하이클레어가, 막 제 외사촌인 필립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직까지 텅 비어 있는 무대를 힐끔 바라본 그녀는 제일 상석에 지인들과 착석했다.

누군가가 그녀를 향해 인사를 건넬 용기를 내기도 전에, 거대한 막이 내려와 중앙의 무대를 가리는 것과 동시에 주변이 어두워졌다.

사람들의 형체만 거의 구분할 수 있는 어둠 속에서 안내인을 따라 입장하는 귀족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꽤 준비를 단단히 한 모양이군.”

“무려 황가의 보물 창고에서 나온 물건들이 전시될 예정이니까요. 아마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내겠죠.”

막 너머에서 들리는 분주한 소리에 자리 잡은 이들의 기대감이 짙어졌다.

이윽고 천천히 막이 올라가는 것과 동시에, 어두운 객석과는 달리 무대가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가 무대 한가운데에 서서 빙 돌며 멋들어진 인사를 건넸다.

“이곳, 극단 ‘솔레이스’를 찾아 주신 관객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모자를 벗은 남자의 얼굴이 익숙했다.

도로테아는 제법 훌륭하게 사회자 역할을 소화해 내는 레번을 바라보며 웃었다.

오래도록 거리에서 살아남으며 가진 것이라고는 변죽과 적응력뿐인 인물인 데다, 봐줄 만하진 않아도 즉흥 공연에 익숙한 인물이니 이 정도야 소화하리라 믿었지.

레번의 말에 놀란 것은 자리한 귀족들이었다.

“무슨…….”

“극단이요?”

“분명 경매가 있을 예정이라고…….”

웅성거리던 귀족들의 목소리가 어느 순간 뚝 끊어졌다.

다들 그제야 애매모호하기만 했던 초대장의 문구들을 기억해 냈다.

모두의 앞에 선보이고 싶은 다양한 볼거리와 즐거움은 그녀가 3황자로부터 얻어 낸 수많은 보화들이 아니었단 말인가.

얼떨떨한 분위기 속에서 다들 눈치를 보듯 주변을 살폈다.

어두우니 서로의 표정을 살피며 상황을 파악하기에도 어려웠다.

몇몇 이들의 엉덩이가 들썩이는 듯하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이리되었으니 차라리 구경이라도 해야지.’

도로테아가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이토록 일을 키우고 사람들을 초대하기까지 했는지 내심 다들 궁금하던 차였다.

“오늘 저희 극단 솔레이스의 첫 개막 무대로 선보일 공연은…….”

“궁금한 게 있는데.”

레번의 소개를 듣고 있던 필립이 조용히 도로테아에게 속삭였다.

“어째서 극단의 이름이 ‘솔레이스(solace)’인지 물어봐도 돼?”

“……레이디, 파티마입니다.”

레번의 소개말과 함께 천천히 배경이 전환되었다.

웃고 있지만 어딘가 쓸쓸한 눈을 하고 있는 여인의 초상화가 새겨진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그냥. 이 극단이 얼마나 가게 될지는 몰라도 이번 공연만큼은 ‘위안’의 의미로 만든 셈이니까.”

죽어서도 평온하지 못했던 그녀의 혼을 앞에 두고 ‘천도재’를 지내겠다고 약속한 건 본인이었으니.

‘비록 약속한 대상은 이미 강을 건넌 지 오래라 하더라도.’

파티마는 생의 미련 한 점 남기지 않고, 미네에게 채 한마디 인사조차 없이 급히 떠나갔다.

그러니 혼을 위로할 천도재를 지내지 않는다고 해서 서운해할 파티마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때로는 죽은 넋을 기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산 자를 위해 죽은 자를 기리기도 하는 법이다. 설령 이미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넋이라도, 산 자의 마음속에서는 살아 있는 게지.”

이미 성불한 지 오래인 넋은 아무것도 듣지 못할 텐데, 어째서 넋을 기리는 천도재를 하느냐고 물었던 재신에게 신어미는 그렇게 답했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었던 말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아, 에드워드! 당신은 어째서 그리도 제게 다정한가요?”

도로테아는 무대 위에서 ‘파티마’를 연기하고 있는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한때 그녀와 동고동락했던 이들이 모여 그려 낸 그녀의 생은 몹시도 고달프고, 서글프며, 가슴 아팠다.

이 극은 파티마의 것이 아니라 그녀를 사랑한 이들이 만든 천도재.

아직 살아남아 이 험한 세상을 헤쳐 갈 이들의 마음을 달래고 다독이기 위한, 산 자를 위한 천도재.

“그러니 극단의 이름은 ‘위안’이어야 맞는 거지.”

아리송한 도로테아의 말에 필립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   *   *

미네의 등장에는 귀엽다는 탄성이 연달아 들리더니, 남주인공이 등장하자 다들 숨을 죽였다.

우연히 거리에서 만난 매너 좋은 백작가의 자제.

두 사람을 가로막은 신분 차이.

파티마를 협박하는 낯선 인물들.

제법 전형적인 신파극으로 흘러가는 데도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귀족들이 평소 보는 공연에 비해 훨씬 표현이 자유롭고 강렬하니까.’

우아하고 점잖은 척하며 아름답게 노래하는 여주인공과는 달랐다.

파티마는 때로는 고달픈 운명에 분노하다, 가끔은 유혹에 넘어가기도 하고 제 처지를 한탄하면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발버둥 쳤다.

이윽고 오래 알고 지내던 남자가 그녀의 ‘비밀스런 만남’을 그만두라 협박하고, 정의로운 남자주인공 에드워드가 그런 협박범과 결투를 벌이는 장면까지 왔다.

두 남자가 쓰러지고 황급히 자리에서 도망간 파티마가 의문의 조직에 붙잡혀 죽임을 당하는 것까지.

극단 건물 근처의 담벼락 아래에 그녀의 시체가 묻히는 것을 마지막으로 천천히 무대의 막이 내렸다.

엔딩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은 객석이 다시 밝아졌지만, 여전히 멍한 얼굴들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도로테아가 느릿한 걸음을 옮겨 어느새 좌석에 자리한 3황자의 앞에 섰다.

“극은 어떠셨나요?”

“…….”

“즐거우셨어야 하실 텐데요.”

입을 꾹 다문 리처드가 짜증스레 도로테아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이 극을 관람하게 하고 싶었다면 직접 초대를 했어야지.”

엉뚱한 말을 흘려 사람을 열 받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양옆에 대동한 이들의 표정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이 무색할 만큼 그들이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얌전히 극을 관람하는 것뿐이었다.

도로테아는 의뭉스레 웃었다.

“황자님은 소문에 무척이나 빠르시니, 아마도 직접 초대하지 않아도 와 주시리라 믿었거든요.”

초대도 하지 않았는데 소문에 휩쓸려 경솔하게도 현장을 덮치러 온 놈이라는 욕이었다.

3황자의 성질머리를 익히 아는 이들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리처드는 버럭 소리를 지르지도, 그녀를 향해 위협적인 협박을 하지도, 검을 뽑아 들지도 않았다.

그때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리처드의 뒤로 누군가의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편한 차림을 하고 객석에 앉아 있는 노인을 향했다.

그의 곁에 있는 7황자, 루크가 도로테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폐하.”

황급히 몸을 낮추는 귀족들 사이로 황제가 도로테아를 향해 웃음을 지었다.

“실로 흥미로운 공연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황제의 눈에 서린 이채를 보고, 그가 남자 주인공인 ‘에드워드’의 정체를 알아냈다는 것을 알아챘다.

게르만 백작의 영식.

황제는 명백하게도 죽은 이의 신분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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