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사 도로테아 58화
메릴린 레어는 최근 몹시 불안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사냥제에서의 사건 이후, 도로테아는 물론이고 그녀 또한 한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명예에 흠이 갈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상대가 부르지 않는다고 가지 않을 생각이냐? 후작 영애가 네게 그만큼 호의를 베풀었으면 너도 그 호의에 답을 할 줄 알아야지.”
“…….”
못마땅하게 혀를 차는 아버지의 말에도 그녀는 그저 눈을 내리깐 채 묵묵부답으로 버틸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향한 기대 어린 눈동자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한때 저 눈에 가득한 기대를 얼마나 바라고 또 바랐던가.
고작해야 남작 가문의 차녀. 어디 한 군데 특별히 뛰어난 재능이 있는 것도, 대단히 훌륭한 핏줄을 타고난 것도 아니다.
남작인 아버지의 신경은 온통 새로 만든 정부의 아들에게 가 있고, 형제자매들 모두 제 앞길을 살피기에 바쁜 가문에서 그녀는 언제나 뒷전이었다.
전대 남작이 세운 공으로 어린 시절 몇 번 황녀와 왕래를 하긴 했지만 그것이 전부였을 뿐.
그녀가 부리던 위세도, 실은 어린 시절 황녀와의 친분을 내세운 허세에 불과했다.
가진 것이 없으니 제 명성을 높이려면 누군가를 깎아내려야 했다.
인정하자.
메릴린 레어는 도로테아 하이클레어를 오판했다.
오랜 시간 저택에서 칩거할 수밖에 없을 만큼 예법에 문제가 있으며, 성격도 유약한 터라 후작가에서도 그녀를 수치스럽게 여겨 내놓지 않았다는 그 소문을 믿었다.
‘그렇지만 아니었지.’
후작 가문 사람들은 그녀를 아끼지 않아서 저택에 내버려 둔 것이 아니었다.
너무나 소중하고 소중하기에 바깥의 험한 폭풍에 휩쓸리지 않게끔 튼튼한 벽을 세워 보호해 온 것이다.
도로테아를 바라보던 상냥한 눈빛. 걱정스런 태도들. 스스럼없이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과 다정한 미소.
메릴린의 인생에서는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었기에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응? 영애가 너를 부르지 않는다면 네가 한번 찾아가 보는 것은 어떠하냐.”
잔뜩 달아올라 채근하는 아버지를 보니 속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후작가의 영광에 기대어 무언가를 얻으려는 계산속으로 가득한 눈빛에 숨이 막혔다.
“생각해 볼게요.”
“생각할 것이 무엇이냐. 응?”
제 딸의 꽁무니를 졸졸 쫓는 아버지의 말을 못 들은 척 메릴린이 마차에 올라탔다.
“의상실로.”
쇼핑을 하고픈 기분은 아니었지만, 저택에 틀어박혀 있으면 아버지는 물론이고 형제자매에게도 시달려야 할 것이 분명했다.
‘어차피 시즌에 맞춰 새로이 모자를 고르긴 해야 하니까.’
빠르게 지나가는 마차 밖 풍경을 바라보며 그녀는 상념에 잠겼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을까.
그날, 사냥제에서 가장 많은 사냥물들을 선물받고 뭇 영애들의 시샘을 받게 되었던 그날부터 그녀는 진실을 말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실은 나와 하이클레어 후작 영애는 척을 진 사이고, 그것은 7황자가 그녀에게 선물했던 목걸이를 내가 공개적으로 비난했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용기를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7황자와 후작 영애를 동시에 공격했다가는 아마 매장 정도로 끝나지 않겠지.’
제국의 3황자인 리처드조차 사람들의 눈앞에서 처참히 깨지지 않았던가.
무려 황자의 평판을 공격했음에도 황제는 도로테아를 괘씸히 여기기는커녕 칭찬과 함께 보화를 하사했다.
어떤 속내를 가지고 있었건 간에 그만큼 그녀가 황제에게 중요한 인물이라는 뜻일 터.
고작해야 남작 영애에 불과한 그녀로서는 말을 붙이는 것조차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마차에서 내려 의상실로 들어서자 사람들이 어쩐지 어수선한 분위기로 그녀를 반겼다.
“마담은?”
“마침 먼저 오신 손님이 계셔서 그분을…….”
눈에 익은 점원이 안내하던 아이를 향해 인상을 썼다.
“영애, 이쪽으로 오시죠.”
“먼저 오신 손님이 있다면 내가 기다리지.”
“영애도 익히 아시는 분입니다. 오히려 이참에 함께 옷을 맞추시는 것도 좋지요. 요즘은 절친한 분들끼리 살롱을 방문해서 어울리는 장식을 같이 고른다지 않습니까.”
“절친한 이들?”
얼굴에 의아함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점원이 문을 열었다.
“…….”
도로테아 하이클레어와 발레리 제르망이 우아한 드레스를 차려입고서 마담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 * *
도로테아는 저를 보고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린 메릴린을 향해 옅은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넸다.
“사냥제 이후 처음 뵙네요. 몸은 괜찮은가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핏기가 가신 안색을 보아하니 어지간히도 겁을 집어먹은 듯했다.
‘딱히 내가 뭘 한 것 같지는 않은데.’
문득 사냥제가 끝나 갈 무렵 데인을 필두로 가문의 사내들이 메릴린에게 가져다 바친 어마어마한 양의 사냥물이 떠올랐다.
확실히 마음고생을 좀 했을지도.
“영애가 이곳에 계신 줄 미처 몰랐어요.”
음울한 눈을 한 채 어쩔 줄 모르고 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그녀의 말에 도로테아가 부드럽게 권했다.
“괜찮다면 함께 고르죠. 괜찮지, 발레리?”
“물론이지.”
어차피 보여 주기용 연극이니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터.
도로테아의 제안에 메릴린이 답을 하기도 전에 발레리가 냉큼 웃으며 끄덕였다.
그러고는 특유의 온화한 말투로 메릴린을 이끌었다.
“자. 이리로 와요, 메릴린. 오늘은 테아가 제게 멋진 모자를 사 주겠다고 제안했거든요. 메릴린도 하나 골라 봐요.”
“제가 어떻게…….”
웅얼거리는 목소리에는 난처함이 가득했다.
도로테아는 주저하는 메릴린을 바라보다가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의상실의 사람들을 힐끗 둘러보았다.
그녀가 이곳으로 들어선 순간부터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이들이었다.
“괜찮아요. 메릴린도 아시다시피 제가 3황자 전하께 하사받은 게 제법 많잖아요.”
일순간 의상실이 조용해졌다.
놀라울 정도로 솔직한 도로테아의 말에 메릴린의 눈이 커졌다.
평소 조용하고 차분한 그녀답지 않게 오늘따라 유독 들뜨고 수다스러웠다.
“제가 그분께 드릴 수 있는 부탁이라고 할 만한 것이 뭐가 있겠어요. 3황자께는 온갖 진귀한 물건들이 즐비할 테니, 그걸 좀 나누어 달라고 했죠.”
도로테아의 말에 메릴린이 제 두 손으로 떡 벌리고 있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이내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제가 아주 부자가 되어서요. 모자 정도는 얼마든지 사 드릴 수 있어요.”
불안한 듯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도로테아가 생긋 웃었다.
모자 정도야 얼마든지 살 수 있지.
그건 딱히 3황자가 무엇을 건네지 않아도 마찬가지였다.
보물 창고를 털겠다고 말했을 때, 그의 일그러진 얼굴이 떠올랐다.
황자는 차마 그 누구에게도 도로테아가 무엇을 부탁했는지, 제가 무엇을 건네주었는지 말하지 못했으리라.
그건 그에게 어마어마한 수치와 모욕으로 남았을 테니까.
“저, 저, 저는 도저히 그런 호의를 받을 수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듣던 도로테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3황자 전하께서 제게 주신 보석을 하나 가질래요? 넘쳐 나는데.”
날아가던 이성을 되찾은 듯 한참 동안 호흡을 고른 메릴린이 천천히 입을 뗐다.
“3황자 전하께서 영애에게 건네신 물건이라면 함부로 다른 이에게 선물할 수는 없어요.”
도로테아가 입술을 비죽였다.
“그럼 어떻게 하죠? 기껏 받은 물건들을 방에 처박아 둘 바에야 누구든 필요한 사람이 쓰는 게 낫지 않을까요? 차라리 다 팔아 버릴까.”
어린아이처럼 투덜대는 그녀의 말에 메릴린이 다시 넋을 놓았다.
옆에 있던 발레리가 달래듯 다정한 목소리로 친구를 토닥였다.
“그런 보석들을 한꺼번에 취급할 수 있는 상회는 드물어. 최상급은 기본이고 희귀 등급도 꽤 많아 보이던걸. 아마 상인들이 질겁하고 달아날 거야.”
“그럼 차라리 가치를 아는 이들에게 알음알음 팔아 볼까.”
추천할 만한 모자를 뒤적거리던 마담의 손이 일순 흠칫했다가 재빠르게 다시 움직였다.
도로테아는 멍하니 눈을 끔뻑이는 메릴린을 향해 미소 지었다.
“영애가 알고 계신 친우 중에 귀하고 예쁜 것을 좋아하는 이들은 없나요?”
은근한 물음에 그녀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제 귀를 의심하는 듯한 눈치였다.
“지금 그러니까, 영애는…….”
“3황자 전하께서 하사해 주신 것들이 많으니, 그것들을 ‘보여 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면 좋잖아요.”
마차를 꽉꽉 채워 넣어 준 그의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아…….”
“원한다면 메릴린에게도 보여 줄게요.”
흠칫 몸을 움츠린 메릴린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누가 봐도 겁을 잔뜩 먹은 표정을 보며 도로테아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모쪼록 관심 있는 영애들을 초대하는 걸 메릴린이 도와줬으면 해요. 마담도 그래 줄 거죠?”
화들짝 놀란 마담이 애써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가게에서 가장 비싸고 값나가는 모자를 세 개 고른 도로테아는 그것을 모두 메릴린의 품에 안겼다.
멍하니 선물을 받아 들고만 있던 그녀가, 발레리와 함께 의상실을 떠나려는 도로테아를 향해 헐레벌떡 뛰어왔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땀범벅이 된 얼굴의 메릴린이 속삭였다.
“주제넘은 소리라는 거 알고 있지만…….”
“네?”
“귀, 귀한 것들은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보여 주셔야 해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응시하던 도로테아가 잔잔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그렇게 할게요.”
3황자가 건넨 금은보화의 값어치가 얼마나 되든 도로테아에게는 그리 귀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보여 주어야지. 얼마든지.
마차의 문이 닫히고 출발하자마자 발레리가 뜻밖이라는 듯 중얼거렸다.
“의외로 메릴린은 꽤 마음이 여린가 봐. 네가 ‘불법 경매’라도 연다고 ‘착각’한 모양인데?”
일부러 그렇게 착각하도록 유도하긴 했지만.
애초에 말을 흘리려 했던 건 메릴린이 아니라 마담이었으니 그녀와는 별반 상관이 없었다.
메릴린이 있거나 없거나 아마 도로테아와 발레리의 대화는 비슷한 방향으로 흘러갔겠지.
“때맞춰 등장해 준 덕에 생각보다 더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지긴 했네.”
“그러게. 고마운 의미에서 초대장이라도 보내야 할까 봐.”
의상실에 들어설 때부터 이미 안색이 몹시 좋지 않았던 걸로 보아 요 며칠 내내 가족이든 친지든, 혹은 알고 지낸 이들이든 꽤 오래 시달렸을 테지.
기절했다 일어나니 갑작스레 바뀐 상황에 혼란스럽고 분노할 법도 하건만.
도로테아가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정말…… 예상도 못 했는데 말이야.”
발레리는 그런 친구를 흘끗 바라보다 이내 아무 말 없이 새로 사들인 모자를 내려다보았다.
푸른빛이 감도는, 예쁜 끈이 덧대어진 챙이 넓은 모자를 만지작거리던 그녀의 신발이, 순간 도로테아의 곁에 앉은 프리드의 발에 살짝 닿았다.
발레리는 흠칫 놀라지도 않고 천천히 발을 안쪽으로 모았다.
마차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 * *
황도에 있는 귀족 가문으로 속속들이 ‘초대장’이 보내졌다.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발송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초대장의 내용은 의뭉스럽기 그지없었다.
“다양한 볼거리와 즐거움을 제공한다…… 라. 도대체 이것이 연회란 말인가, 아니면 티 파티란 말인가.”
“게다가 장소도 처음 들어 보는 곳인데.”
귀족들이 공간을 빌려 연회를 여는 일이야 종종 있지만, 이처럼 주소와 시간대만 알려 주는 경우는 드물었다.
게다가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명확하게 명시하지도 않았고.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들에게 암암리에 말이 돌았다.
‘도로테아 하이클레어가 3황자에게서 얻어 낸 보석들을 경매에 부칠 생각’이라고.
아무리 황제의 신임을 받는 가문이라고는 하나, 일개 후작 영애가 황실의 물건을 경매에 내어놓는다면 그건 꽤 큰 문제가 될지도 모르는데.
“하이클레어 후작은 이런 문제를 전혀 모르고 있는 건가?”
“제아무리 후작 영애라고는 하나 꽤 기고만장한걸.”
“로헨 왕국에서 그녀를 원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폐하께서 웬만한 일은 그냥 넘길 거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어쩌면 7황자 전하를 믿고 그러는 걸지도 모르고.”
이런저런 시끄러운 말들 속에서 소문은 빠르게 돌았다.
재미있는 자극에 목마른 귀족들에게 도로테아가 불러일으킨 불씨는 제법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었다.
이윽고 초대장에 적힌 날짜가 다가왔다.
속속들이 장소로 모여드는 귀족들 가운데에는 초췌한 얼굴의 메릴린 레어도 포함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