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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55)화 (55/242)

혼술사 도로테아 55화

그 뒤 황자는 아무런 소식도 보내지 않았다.

사교계가 조용한 것을 보면 아마도 백작가 영식의 죽음은 어떻게든 묻힌 모양이었다.

그가 누구를 사랑했든, 그가 어찌 죽음을 맞이했든 간에 그보다도 중요한 것은 가문의 체면이었다는 걸까.

그 사실이 그리 애석하게 느껴지지는 않지만, 이 ‘세계’에 존재하는 ‘신분’의 벽이 단단하다는 것을 새삼 느낀 계기가 되었다.

‘전의 세계에서도 대놓고 말하지만 않았을 뿐이지 ‘신분’의 차이는 있었으니 별다른 건 없나.’

확실히 사람들은 도로테아 하이클레어의 천재성을 칭찬하면서도, 그녀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 채 간접적으로도 말을 꺼내는 법이 없었다.

저택 안에서라면 그 누구라도 엘렌 하이클레어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일도, 안 좋게 이야기하는 일도 없지만 바깥에서의 그녀는 여전히 ‘언급되어서는 안 되는’ 금기의 인물인 듯 보였다.

“테아, 무슨 생각해?”

“사람들이 참 쓸데없는 것에 얽매인다는 생각.”

이 짧디짧은 생에서 이룬 것이 무엇이든, 단 하나도 다음 생으로 가지고 갈 수 없을 터인데.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 얽매여 정작 진실로 중요한 것들을 외면하는 무지한 이들이 우스웠다.

“쓸데없는 것?”

“사귀는 사이에 급을 논하는 거나, 아랫사람 윗사람의 서열을 두는 것이나.”

전부 시시하기 짝이 없어.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한 발레리가 이내 차분하게 답했다.

“글쎄, 신분 그 자체가 나쁜 건 아닌 것 같아.”

“…….”

“가끔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이들이 있어서 그렇지. 그 자리에 걸맞은 이들이라면 굳이 문제가 되진 않을 거야.”

“걸맞은 이들?”

“귀족의 의무를 행할 줄 알고, 권리를 행사하는 것 또한 정당하고 바르게 할 줄 아는 인물이라면 애초에 문제가 될 리 있겠어?”

빙긋 웃으며 건넨 말에 도로테아가 침묵했다.

잔잔하게 가라앉아 있는 남색 눈동자가 생글거리는 발레리 제르망을 응시했다.

차분하고 얌전해 보이던 그녀는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변죽이 좋은 듯했다.

도로테아의 유별난 구석이나 변덕스러운 행동에도 잘 맞춰 주는 동시에, 가문의 어른들에게도 깍듯하고 예의 바르게 굴 줄 알았다.

덕분에 하이클레어 가문에서는 도로테아의 ‘첫 친구’를 향해 퍽 호의적인 시선을 보냈다.

데인을 제외한다면.

데인만큼은 끝까지 발레리 제르망보다는 메릴린 레어를 더 가까이하라며 투덜거렸다.

메릴린 영애야말로 모범적이며 좋은 친구가 되어 줄 것이라나 뭐라나.

대낮부터 술을 들이켠 듯 흰소리를 하는 사촌의 발언이야 흘려들으면 그만이지만, 아무튼 저택의 사람들은 발레리가 도로테아와 퍽 잘 맞는 친구라고 여겼다.

“그러고 보니 테아, 혹시 사냥 대회가 열릴 거라는 말을 들었니?”

“사냥 대회?”

“곧 로헨 왕국에서 사절단이 오기로 했잖아. 양국 간에 친선경기가 열릴 예정이라던 걸. 그 전에 귀족 자제들의 실력을 보고 싶다는 거겠지.”

말이 좋아 친선 경기지, 실상 양국의 자존심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볼거리가 많을 거야. 영애들도 많이 올 거고.”

“난잡하겠네. 쓸데없는 입들도 많을 테고.”

사냥 자체도 거북했지만 거기에 대회라는 말을 붙이는 순간 혐오감이 더해졌다.

자기 과시를 위해 생명을 앗아 가는 것을 경쟁하는 인간들을 구경하며 즐기고 싶진 않았다.

“기분 전환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낯을 가리는 네게는 별로일 수 있겠네.”

다소 냉랭한 도로테아의 말에도 발레리는 별달리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는 듯 웃었다.

“그럼 사냥 대회는 관람하지 않을 생각이구나?”

발레리의 말에 멈칫한 도로테아가 생각에 잠겼다.

며칠 전, 후작이 식사 자리에서 벤의 작위를 언급한 것이 떠올랐다.

귀족 사회에서 벤의 출신은 여전히 논란거리였다.

설령 그가 작위를 얻었다 하더라도 후작에게 알랑거려 받게 된 것이라니, 귀족을 꼬드겨 신분이 상승했니 하는 비꼬는 소리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조만간 스스로를 증명해야 할 것이라고 했었지.’

아마도 이번 사냥 대회를 염두에 두고 꺼내신 말씀일 터였다.

“나도 참석하게 될 거야. 아마도.”

내키지는 않겠지만.

제의(祭儀)도 아니고, 그저 오락과 과시를 목적으로 빼앗은 생명의 피가 뿌려진 자리는 유독 번잡스럽고 난잡한 잡귀들이 꼬여 든다.

그녀가 ‘보게 될 세상’은 아마도 끔찍하겠지.

도로테아는 아무 말 없이 남은 차를 훌훌 털어 마셨다.

발레리는 그런 친구를 잔잔한 미소를 띤 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

황제가 친히 주관하는 사냥 대회.

훌륭한 실력과 용맹함을 갖춘 자국의 인재를 확인한다는 명분이 달리자, 귀족 자제들 중 실력 깨나 좋다는 이들이 너도나도 참석 의사를 밝혔다.

운이 좋아 황제의 눈에 들거나, 다른 가문의 후원을 받게 될 수 있는 기회일 테니까.

벤 에버리도 ‘자신을 증명해 보여야 할’ 입장에 선 인물 중 하나였다.

도로테아는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앞을 응시하는 기사들 사이에서 제 아버지의 얼굴을 찾아냈다.

한때 떠돌이 상인에 불과했던 남자에게서는 이제 제법 검을 만진 태가 나고 있었다.

늦게 검을 잡은 만큼 대단한 성과를 이루진 못했지만, 순전히 노력으로 저만한 실력을 갖춘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몇몇 귀족들이 그를 알아본 듯 속살거렸지만, 워낙 참가한 이들이 많은지라 다행히 관심이 여기저기 흩어졌다.

오늘 대회에는 평소 훌륭한 평가를 받던 기사들은 물론, 황자들도 참석했다.

다른 때와 달리 유독 젊고 어린 영애들이 많이 눈에 띄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출발선에 서 있는 참가자들은 저마다 자신이 받은 손수건을 가슴께에 잘 보이도록 장식하거나, 허리춤에 찬 검집에 달아 놓았다.

누군가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슬쩍 물었다.

“하이클레어 영애께서는 사냥 대회에 참석하는 가문의 남성들에게 아무것도 드리지 않았나요?”

벤은 물론이고 함께 대회에 참석한 데인과 필립에게도 손수건은 보이지 않았다.

도로테아가 눈을 끔뻑이며 답했다.

“드렸어요. 참석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하나씩.”

“그런데 왜…….”

그녀가 손을 들어 의기양양하게 누런색의 무언가를 꺼내 든 에이든 하이클레어를 가리켰다.

“무운을 비는 부적을.”

“…….”

한순간 영애들의 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에이든이 기쁘게 흔드는 ‘부적’은 손수건과는 상당히 다른 형태였다.

‘회화나무로 만든 괴황지가 있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버드나무로 만든 종이도 질이 나쁘진 않았다. 게다가 기도를 올리는 정성이 더 중요한 거니까.

“저건 대체 무슨 문양이죠?”

부적에 정성 들여 아로새긴 빨간 문양을 보는 영애들이 침묵했다.

아무것도 장식하고 있지 않은 데인과 필립, 벤을 보는 그녀들의 눈에 이해의 빛이 떠올랐다.

‘저런 걸 받았다고 자랑하고 싶진 않겠지.’

‘심지어 붉은색. 그것도 조그맣게 자수를 놓은 것도 아니고 꽉꽉 채워 넣었네.’

‘에이든 경, 조카 사랑이 정말 대단하구나.’

심지어 그녀의 아버지인 벤조차도, 부적을 받아 고맙다는 말을 건네긴 했지만 결국 꼭꼭 접어 품에 고이 숨겨 뒀는데.

에이든은 몹시 행복한 얼굴로 그것을 활짝 펴서 자랑하고 있었다.

곁에 있는 데인이 창피하다는 듯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과 달리, 필립은 우스운 듯 쿡쿡거리다 도로테아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7황자께서는 여전히 아무것도 받지 않으시는군요.”

칙칙한 검은 망토를 두른 루크는 오늘따라 유독 날이 선 눈을 하고 있었다.

“3황자님은 잘 받아 주시는데.”

“황태자 전하께서도 비전하께 손수건을 받으신 것 같죠?”

손수건을 주제로 시시콜콜한 대화가 이어지던 것도 잠시, 선두에 서 있던 병사가 뿔피리를 길게 불었다.

“자, 시작하시오!”

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외침에 저마다 말을 타고 쏜살같이 숲으로 사라졌다.

***

호기롭게 시작한 사냥 대회가 중반 즈음에 다다르자, 다들 흥미가 조금 가신 듯 테이블 위의 요깃거리로 시선을 보냈다.

오늘도 도로테아는 가장 먼저 접시에 손을 대어 깔끔하게 식사를 마친 뒤였다.

“음식이 입에 맞으시나 봅니다.”

중년 부인이 호의 어린 말을 건네자 도로테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야외에서 식사를 해서 그런가, 오늘따라 더 입맛이 돋네요.”

그때 저 멀리서 사냥감을 내려놓는 듯 털썩, 하는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3황자 전하의 전리품입니다.”

“훌륭하군.”

수레 가득 싣고 온 ‘사냥물’들은 죄다 급소를 맞고 단칼에 죽어 있었다.

그 옆으로는 7황자나 5황자, 다른 기사들의 사냥물들도 무더기로 쌓여 있었지만 사냥한 숫자로만 따지면 3황자가 단연 앞서가는 모양새였다.

“7황자께서는 사냥에 큰 흥미가 없으신 모양입니다.”

“그분이 마음만 먹으면 사실…….”

황제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으니 황자들을 언급하는 데에도 조심스러운 티가 났다.

“테아?”

발레리의 의아한 부름에도 도로테아는 방금 막 잡아 온 3황자의 전리품에 시선을 고정한 채 침묵했다.

긴 속눈썹 아래 짙은 남색 눈이 무엇인가를 포착한 듯 가늘어졌지만, 이내 고개를 돌렸다.

“괜찮아?”

“응.”

“힘든 거라면, 사냥감 쪽으로는 보지 않는 게 좋겠어.”

죽은 사냥감들이 쌓이면서 피비린내가 짙어졌다.

쌓인 사체들도 사체들이지만, 사체들을 노리고 모여들지도 모르는 다른 육식 동물들 또한 경계해야 했다.

도로테아는 조용히 주변을 훑었다.

가장 방비하기 좋은 곳에 자리 잡은 건 당연하게도 황실 일가.

그다음이 공작, 후작 같은 이른바 ‘명가’로 불리는 유서 깊은 세도가들.

그리고 마지막이 대단히 이름 높진 않아도 그럭저럭 대회를 참관하고 지켜볼 자격은 갖춘 귀족들.

그들의 사이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이름이 메릴린 레어였던가.

레어 가문은 분명 컴바인 백작가와 교분이 깊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희한하게도 메릴린은 다른 테이블 가장 구석진 곳, 하필이면 사냥감들과 그리 멀지 않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창백한 안색을 한참 들여다보던 도로테아가 입을 뗐다.

“프리드.”

마치 조각상처럼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기사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옆 테이블에서 슬쩍 훔쳐보던 몇몇 영애들이 재빠르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리는 소리가 났지만, 도로테아는 그런 것에 신경 쓰는 대신 프리드에게 지시했다.

“전에 내가 알려 준 적이 있었지. 초피나무라는 것.”

아름다운 기사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눈을 끔뻑인 그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둔덕에 있는 초피나무를 베어다 사냥감들 위로 놓아 줘.”

“아가씨의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내 안전을 지키는 게 네 일이잖아. 사냥감들의 피 냄새가 너무 짙어. 이러다간 엉뚱한 영이 꼬이게 될 거야.”

다행히도 마침 초피나무의 향이 가장 짙은 시기라 그 정도면 충분히 임시방편이 될 터였다.

도로테아의 말에 잠시 침묵하던 기사가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발레리가 나지막이 물었다.

“네가 메릴린을 신경 쓸 줄 몰랐는데.”

도로테아의 시선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 뻔히 보이니 목적도 좀 더 쉽게 파악한 모양이었다.

어느새 식어 버린 차를 내려다보며 찻잔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던 도로테아가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이 사람의 피를 볼 필요는 없으니까.”

동물들은 대개 죽은 뒤에도 별다른 원한이나 미련이 남아 이 땅에 머무르는 대신, 곧바로 저승으로 넘어가 다음 생을 준비하기 마련이다.

인간과는 다르게 사신이 직접 인도하지 않아도, 제가 알아서 저승으로 가는 길을 찾을 만큼 굳이 ‘삶’이라는 것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짐승들에게도 예외는 있는 법.

지독한 한의 원념이 등이 따가울 정도로 강렬하게 느껴졌다.

“사냥에도 지켜야 할 예의가 있는 법이지.”

어느 덜떨어진 인간이 그 예의조차도 잊고 살생에만 열중하는 마(魔)가 든 것인지는 몰라도.

짐승의 처절한 단말마가 몇 번이고 제 귀를 따갑도록 때리고 있었다.

조만간 누군가가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는 확신 속에 도로테아의 손톱이 톡, 테이블을 두드렸다.

“꺄아아!”

프리드가 초피나무를 사냥감 위에 덮으려던 그 순간, 몹시도 성난 멧돼지가 메릴린이 있는 테이블을 덮치는 것이 보였다.

기사는 재빠르게 검을 뽑아, 제 덩치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멧돼지를 단번에 갈랐다.

검붉은 액체가 바로 그의 등 뒤에서 얼어붙은 채 움직이지 못하던 메릴린 레어에게로 한가득 튀었다.

“세상에.”

웅성이는 소리가 가득한 가운데 뒤늦게 반응한 사냥터를 지키던 기사들이 메릴린에게로 다가섰다.

그녀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 그대로 굳어 있었다.

“천만다행이네요.”

“다친 사람들이 없군요.”

“사냥감들을 너무 쌓아 둔다 했어요.”

멧돼지가 사라지자 다들 한마디씩 얹었지만,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메릴린에게 다가서는 이는 없었다.

“그나저나 저 기사는…….”

“분명 하이클레어가의 아가씨가 데려온 기사 아닌가요?”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도로테아에게로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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