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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54)화 (54/242)

혼술사 도로테아 54화

메릴린 레어는 창백한 얼굴로 마차에서 내려 낯선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정문을 통과하자, 마치 아름다운 숲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그녀를 압도했다.

비록 하이클레어 후작이 최근 저택에 칩거 아닌 칩거를 하고 있다 하더라도, 제국에서 하이클레어 가문을 무시할 수 있는 귀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날 지나칠 정도로 흥분하지만 않았더라도.’

제 아비가 미천한 출신의 여인과 바람이 난 이후, 그녀는 교류하는 상대의 출신과 그 신분에 몹시 민감하게 반응했다.

도로테아 하이클레어가 발레리 제르망의 티 파티에 참석한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초대에 응한 뒤였기에 함부로 불참할 수도 없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런 치명적인 말실수를 할 만큼 이성을 잃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내키지 않은 걸음이나마 참석했던 것인데.

한순간 정신이 나갔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날을 회상한 그녀의 눈이 흐려졌다.

황자의 사나운 눈빛에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는 추태를 보인 것뿐만이 아니었다.

아랫입술을 물어뜯은 그녀의 귓가에 발레리 제르망의 경고가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내가 영애라면, 적어도 앞으로는 처신을 어떻게 하고 다녀야 할지 여러 번 생각해 보고 입을 열겠어요.’

‘…….’

‘비록 7황자 전하의 출신이 여러 이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다고는 하나.’

연민과 조소가 깃든 눈이 마지막 일격을 메릴린의 폐부 깊숙한 곳으로 찔러 넣었다.

‘설사 출신이 그분의 약점이라고 한들 영애는 일개 귀족 가문의 자제시지만, 그분은 황자이시니까요.’

침묵하는 이들의 눈 또한 그리 다르지 않았다.

연민조차도 수치를 더할 뿐이다.

그런데도 그녀가 꾸역꾸역 하이클레어 저택의 문을 두드린 까닭은 몹시도 명확했다.

‘어떻게든 이 일을 내 선에서 수습하지 않았다가는, 가문 간의 문제로 번지게 된다.’

자칫 잘못하여 이것이 폐하의 귀에라도 들어가게 된다면.

그런 상상을 하자 눈앞이 아찔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아가씨께 기별을 넣겠습니다.”

그녀를 응접실로 안내한 시녀의 친절한 목소리에 가까스로 자리에 앉은 메릴린은 두 눈을 감고 초조하게 상대를 기다렸다.

“…….”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을까…… 저택의 아가씨는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메릴린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졌다.

아무래도 도로테아 하이클레어는 그녀를 쉽사리 용서하거나 이 일을 관대하게 넘길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나는 여기서 버텨야 해.’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그녀에게 사죄를 한 뒤 황자와의 일까지 무마할 수 있도록…….

“실례하겠습니다.”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거대한 트레이를 끌고 온 하녀가 메릴린의 앞에 섰다.

멍하니 고개를 들어 각 접시마다 화려하고 먹음직스런 음식들이 가득 차 있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 많은 접시들을 테이블 위로 겹치지 않게 쌓아 올리는 하녀의 솜씨가 몹시 능수능란했다.

“이것이 다 뭐죠?”

“티타임용 간식들입니다.”

“이걸, 전부 다?”

“네.”

생긋 웃어 보인 하녀가 빈 트레이를 끌며 밖으로 나간 뒤, 응접실로 들어선 사람은 이번에도 도로테아 하이클레어가 아니었다.

“실례합니다. 하이클레어 가문의 데인이라고 합니다. 테아의 친구분께서 방문했다는 말에 잠시 들렀습니다만.”

정중한 목소리와 함께 다가온 청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메릴린이 허둥지둥 인사했다.

“레어 가문의 메릴린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연이틀 테아와 친분을 쌓은 영애분들이 방문하는 것을 보니 티타임이 제법 화기애애했던 모양입니다. 첫 사교 활동인지라 온 식구들이 모두 신경을 쓰던 차였거든요.”

“…….”

티파티의 분위기는 얼음장 같았고, 메릴린은 황자가 떠난 뒤 넋을 놓고 있었기에 다른 것을 느낄 새도 없었다.

발레리 제르망은 메릴린에게 엄중한 경고를 날렸으며, 메릴린은 지금 이 자리에 사죄를 하려고 와 있건만.

‘그날 있었던 일은 모두 함구된 모양이로구나.’

그러고 보니 발레리는 티파티에서 있었던 그 어떤 사소한 일도 결코 문서로 남기거나 다른 이에게 발설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아니, 협박이었지.

적어도 제 추태를 아는 이가 그 티파티의 참석자들뿐이라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되어 주었다.

“안색이 창백합니다, 영애.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습니다.”

“테아라면 아마 곧 내려올 겁니다. 아무래도 영애가 오셨다니 좀 더 신경을 쓰고 있는 모양입니다.”

‘나를 망신 주기 위해서겠지.’

이토록 오랜 시간 응접실에 방치당하는 수모 정도는 견뎌야 했다.

그녀는 의연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괜찮습니다. 조금 늦어져도 상관없으니 영애를 만나야겠어요.”

“양해에 감사드립니다, 영애.”

감탄 어린 눈빛이 그녀를 향했다.

“요깃거리라도 드시면서 기다리시지요.”

“괜찮습니다. 주인도 계시지 않는데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는 실례를 저지르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이미 실례를 저질러 잘못을 빌러 온 차에 또 꼬투리를 잡힐 순 없지.

그녀의 정중한 거절에 데인의 눈빛에 한층 더 신뢰와 감탄이 쌓였다.

‘이 남자는 왜 자꾸만 얼쩡거리고 있는 거지.’

안 그래도 신경이 예민하게 날이 서 있는 터라 앞에 있는 남자가 몹시 거슬렸다.

이만 가 주실 수 없냐는 정중한 부탁을 건넬지 망설이며 입술을 달싹이던 그때였다.

“기다리셨다고요.”

특유의 느릿하고 단조로운 목소리가 그녀의 귀로 흘러들어 왔다.

목소리의 주인을 단박에 알아차린 메릴린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   *   *

“아가씨께서 이렇게 친구분들을 많이 사귀고 돌아오실 줄은 몰랐어요.”

제인이 기쁜 듯 조잘거렸다.

“제가 뵙고 왔는데, 어제 오셨던 영애보다 좀 더 차분하고 얌전한 분위기시더라고요.”

“그래?”

심드렁하니 말을 뒤로 흘린 도로테아가 느릿하게 옷을 갈아입었다.

발레리가 다녀가고, 이곳을 찾을 만한 영애라면 한 사람뿐이었다.

‘어지간히도 황자가 무서웠던 건가.’

거침없는 언사를 선보이던 당당한 면모는 당사자의 등장과 직접적인 살기를 맞는 순간 마치 공기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시시해.’

신경 쓸 가치조차 없는 인간이었다.

그렇지만 적어도 저택의 사용인들은 들뜨고 기쁜 눈치였다.

도로테아는 굳이 그 분위기에 재를 뿌리는 대신 순순히 응접실로 향했다.

메릴린 홀로 있을 것이라 여긴 공간에는 뜻밖에도 덜떨어진 사촌이 함께하고 있었다.

“아, 테아.”

“네가 왜 여기 있어?”

“네가 너무 늦어서. 늦잠 잤냐? 아무리 그래도 손님을 기다리게 하면 안 되지.”

“…….”

도로테아는 모처럼 충고하는 데인의 말을 흘려들으며 메릴린을 훑었다.

몹시 긴장한 듯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벌떡 일어난 그녀가 입술을 사리물었다.

‘입을 걸게 놀려 댄 거야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건만.’

벌벌 떨면서 이곳으로 들어온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굳이 배려할 까닭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미 충분히 죗값을 치른 듯 보이는 면전에 대고 더한 모욕을 줄 필요는 없겠지.

“넌 이제 그만 나가.”

“알았어.”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을 한 채 응접실을 빠져나간 데인이 모습을 감추자마자, 메릴린은 재빠르게 의자에서 내려와 도로테아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영애께 사죄드리겠습니다. 그날의 일은 어리석고 무지하며 부족한 제 잘못입니다.”

“일어나요.”

도로테아는 벌벌 떨고 있는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저택에 보는 눈도 많은데 쓸데없이 의문을 살 까닭은 없었다.

“발레리 양에게서 전해 들었을 거예요.”

메릴린이 흠칫했다.

“그날 있었던 일은 그 누구에게도 알려져서는 안 돼요. 어떤 말이 오고 갔든, 누가 그 자리에 있었든 간에 상관없어요. 전부 다 머릿속에서 지워요.”

“…….”

“이렇게 찾아와서 사죄할 필요도 없었어요. 그날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무심한 눈이 메릴린을 훑었다.

마치 이곳에 찾아온 사실조차 못마땅해하는 듯한 눈초리에 메릴린이 움츠러들었다.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보던 그녀가 마른 입술을 축이며 다시 한번 확답이라도 받듯 물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요?”

“그래요, 아무 일도. 그 어떤 것도.”

웃는 듯 마는 듯 모호한 얼굴을 한 도로테아가 자리에 앉아 테이블 위에 놓인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신중하게 접시 위의 음식들을 하나하나 살피고 이내 가장 가까이 있는 고기 파이를 집어 들더니, 아직도 서 있는 메릴린을 향해 입을 뗐다.

“앉아서 차라도 마시고 가요. 이대로 그냥 가면 아무래도 모양새가 이상할 테니까요.”

굳이 다른 이들에게 의심을 사서 좋을 것은 없었다.

도로테아의 말도 일리가 있다 여겼는지 눈치를 보던 메릴린이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테이블을 가득 채우다 못해 쌓인 음식 접시들을 바라보았다.

“참고로 가장 가까이, 되도록이면 제일 위에 있는 접시부터 공략하는 게 좋을 거예요. 넘어뜨리고 싶지 않다면.”

어느새 첫 번째 접시를 해치운 도로테아가 두 번째 접시를 집어 드는 사이, 머뭇거리던 메릴린 또한 눈을 딱 감고 예쁜 조각 케이크를 골라 제 앞으로 가져갔다.

달콤한 케이크와 씁쓰레한 차가 잘 어울렸다.

그나마 따뜻한 차가 몸을 데우고 먹을 것이 빈속을 달래어 주자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었던 몸에도 서서히 피가 돌기 시작했다.

이제까지는 인식하지 못했던 저릿함을 느끼며 그녀가 한숨처럼 말했다.

“감사합니다, 영애.”

“이제 굳이 이 저택을 찾아오실 필요는 없어요. 되도록이면 엮이지 않는 게 서로에게도 편할 테고.”

“네.”

짧은 답에 도로테아는 다음 접시를, 이윽고 다다음 접시를 집어 들었다.

겨우 한 접시를 비운 메릴린이 조심스럽게 눈치를 봤다.

기껏 찾아왔으니 사람들의 눈에 의아하게 보이지 않도록 차를 마시라는 건 이해했다.

문제는 언제쯤 일어설 수 있느냐는 건데.

“안 먹어요?”

“네?”

“아직 한 접시밖에 안 비웠는데.”

“…….”

더 먹어야 하는 거였나.

눈을 끔뻑이던 메릴린이 조심스럽게 두 번째 접시를 집어 들자 도로테아는 다섯 번째 접시에 손을 가져다 댔다.

빠르고 신속하면서도 깔끔하게 접시를 비워 내는 솜씨를 놀라운 듯 바라보는 메릴린의 손이 멈출 때마다, 도로테아는 느릿하게 물었다.

“더 안 먹어요?”

“…….”

안 그래도 백지장처럼 하얗던 그녀의 얼굴이, 마치 제 몸에 공기를 들이마실 공간도 없이 음식으로 채워 넣은 것처럼 새파랗게 질리게 되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모처럼 제 사촌이 ‘정상적인’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은 데인은 에드윈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어제 왔던 제르망 자작 영애보다 레어 남작 영애가 훨씬 더 괜찮아 보였어.”

“어떤 면에서?”

“일단 몹시 예의에 엄격한 건지, 말 한마디를 꺼낼 때마다 신중하다는 느낌이 들었고.”

얼마나 신중하게 말을 뱉던지 입술이 열리기까지 꽤 시간이 걸릴 지경이었다.

몇 번을 더 머릿속에서 생각을 곱씹은 후에야 겨우 말을 꺼내는 모습에서 데인은 신선함을 느꼈다.

“게다가 멋대로 늦잠을 잔 테아가 그녀를 꽤 오랜 시간 기다리게 만들었는데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더라. 오히려 괜찮다며 날 다독이기까지 하던데.”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네.”

발레리 제르망에게 부족한 면이 있다던가, 딱히 거북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데인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메릴린이 훨씬 더 ‘귀족 영애’다워 보였다.

“그녀가 앞으로도 테아와 ‘각별한 친분’을 유지해 줬으면 해.”

데인의 말을 들으며 창밖을 내려다보던 에드윈은, 드레스를 입은 누군가가 체통도 잊고 밑단을 종아리까지 걷은 채 정원을 뛰어 가로지르는 것을 목격했다.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마차에 허겁지겁 올라타는, 머리가 산발이 된 귀족 영애를 본 에드윈은 기분 좋아 보이는 동생을 힐끔거리다 침묵했다.

데인의 뜻과는 달리, 메릴린이 두 번 다시 이 저택으로 돌아올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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