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사 도로테아 53화
도로테아에게 눈을 찡긋해 보인 다이애나가 할 일을 모두 끝낸 듯 후련한 얼굴로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늦잠을 잔 만큼 아침을 놓친 도로테아가 재빠르게 자리에 앉아 눈앞에 놓여 있는 샌드위치로 손을 뻗었다.
발레리가 웃으며 물었다.
“어제의 볼일은 잘 해결되었나요?”
“덕분에요.”
“후작가를 방문하는 것은 처음이라 기념으로 간단한 선물을 가져왔어요.”
그녀의 뒤에 서 있던 하녀가 물건을 도로테아의 발치에 내려놓았다.
“그리 특별한 물건은 아니에요. 직접 만든 향초인데, 잠드시기 전 한두 시간 정도 피워 두시면 훨씬 깊게 주무실 수 있어요. 아침에도 개운하게 일어나실 수 있게 해 주고요.”
“선물은 고맙게 받을게요. 마침 밤잠을 자주 설치는 편이라 유용할 것 같아요.”
“다행이네요.”
활짝 웃음을 보인 발레리가 수줍게 흘러나온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는 데다 다정하고 나긋한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함께 있는 사람의 기분까지 나른해지는 듯했다.
“어제 영애들이 제가 중간에 자리를 비운 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던가요?”
“황자 전하의 미움을 사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요. 게다가 제가 적당한 말로 잘 둘러댔답니다. 누군가 두 분의 사이를 오해하는 일도 없을 거예요.”
연신 호의 가득한 시선을 담뿍 담은 소녀가 건네는 부드러운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도로테아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저와 황자 전하가 만날 수 있도록 도우려고 초대장을 보낸 거였나요?”
황제에게서 경고를 받은 이상, 황자는 도로테아를 공식적으로 초대할 수 없었다. 후작가로 찾아오는 것도 삼엄한 경계 탓에 어려웠을 테고.
도로테아에게도 ‘정당하게’ 외출할 수 있는 핑계가 필요했다.
발레리의 초대는 그 모든 조건을 충족해 주었다.
다소 직설적인 물음에도 발레리는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순순히 긍정했다.
“네, 두 분의 만남을 도우려는 저의 오지랖이었죠.”
“잘은 모르겠지만, 황자 전하께서 발레리 영애에게 꽤 중요한 것을 쥐고 있나 보네요.”
어제의 티 파티는 급조한 것치고 몹시 신경 쓴 티가 났다.
갖은 준비를 해서 도로테아를 초대하고, 또 티 파티에 참석한 영애들의 입막음까지.
고려해야 하는 성가신 일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는데.
그 모든 것들을 감수하고서라도 황자의 환심을 사야 할 까닭이 무엇일까.
흥미가 일었다.
그녀의 말에 줄곧 여유로웠던 발레리가 처음으로 멈칫하고는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황자 전하께 빚을 지긴 했죠. 확실히.”
그녀의 눈이 반짝, 도로테아를 향했다.
“다만 이번 일은 꼭 그 때문에 자처한 것은 아니에요.”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이어 곱고 새하얀 소녀의 손가락이 도로테아의 서늘한 손 위로 살짝 얹어졌다.
미적지근한 온기가 손등을 데웠다.
“저는 영애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도로테아는 제 손등을 덮은 낯선 이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나직이 중얼거렸다.
“저와 친하게 지내고 싶으시다니.”
콩고물을 얻고자 기웃거리는 이들을 많이 보긴 했지만, 손해를 봐 가며 이렇게까지 손을 내미는 인물은 처음이었다.
사람이란 원체 잇속에 밝은 동물이라, 한쪽으로 기우는 관계를 자처하는 법이 없건만.
“친구가 되고 싶어요.”
친구.
몹시도 낯선 단어였다.
도로테아는 몹시 생소하고 막연하게만 들리는 말을 입안으로 곱씹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반짝이는 눈은 마치 사슴처럼 무해했다.
비록 황자는 발레리의 수고가 일종의 교환 거래에 가까우니 별반 신경 쓸 까닭이 없다고 선을 긋긴 했지만, 이는엄연히 도로테아의 일이기도 했다.
영애가 수고해 준 것을 생각하면 딱히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할 까닭도 없었고.
다만…….
“영애가 원하는 ‘친하게 지낸다.’라는 과정을 저는 잘 몰라요.”
도로테아는 자신이 누군가와 교류하는 일에 서툴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습관은 쉽사리 고쳐지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전생의 기억이 남아 있는 그녀로서는, 자신에게 누가 다가오든 간에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영애도 알겠지만 제가 교류하고 지내는 또래가 없어서요. 사촌이 있긴 하지만 남자아이들뿐이라.”
“그렇군요. 생각을 미처 못 했네요. 성급히 말씀드린 탓에 부담스러우셨겠어요.”
발레리가 민망한 듯 슬쩍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붉혔다.
“부담스럽다는 게 아니라, 잘 모른다는 거예요.”
도로테아의 담담한 답을 듣고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발레리가 이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우선 제가 영애에 대해 조금 더 알아 가도 될까요?”
“저에 대해서요?”
“영애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부터 시작하죠. 우선은, 평소 어떤 것들을 하고 지내는지부터.”
소녀를 빤히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딱히 내외하며 보여 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럼 먼저 서재로 갈까요?”
그녀의 뒤를 따르는 발레리의 눈이 기대로 가득 차 반짝이기 시작했다.
* * *
그 시각, 데인은 몹시 심각한 얼굴로 에드윈의 침대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 어제 늦게까지 서재에 있다 와서 피곤해. 이만 가 줄래, 원수 같은 동생 놈아?”
웃는 얼굴과 상냥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냉정한 축객령에 데인이 심각한 얼굴을 들이밀었다.
“형은 걱정되지도 않아?”
“뭐가?”
“테아 그 녀석 말이야. 지금쯤 제르망 자작 영애랑 한참 대화 중일 텐데.”
“응, 나도 들었어. 어제 티 파티에서도 늦게까지 남아 있다 돌아왔고, 오늘도 직접 방문한 걸 보니 꽤 친해진 모양이지. 좋은 일이잖아.”
태평한 에드윈의 말에 데인이 혀를 찼다.
그는 자신의 사촌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그리고 데인이 아는 도로테아 하이클레어는 결코 한 번에 귀족 영애의 환심을 살 수 있을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안절부절못하는 동생을 보던 에드윈이 결국 한숨을 쉬며 일어나 앉았다.
“제르망 자작 영애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이 있어. 내 친우의 평가로는 원체 성격이 차분하고 상냥한 데다, 예민한 영애들과도 곧잘 어울릴 만큼 수더분하다던데.”
그 정도면 별난 테아와도 잘 어울릴 수 있을 거라는 점을 전달하고 싶었던 에드윈의 의도와는 달리, 데인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깊어졌다.
“차분하고 상냥한 성격의 영애가 허구한 날 괴기한 글자들로 가득한 책만 들여다보는 테아를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어.”
데인이 제 유별난 사촌에 대한 염려로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사이, 문을 두드린 하녀가 늦은 아침 식사와 함께 들어섰다.
“고마워. 거기 두면 돼.”
“네, 도련님.”
울상이 되어 있던 데인이 제 형의 식사에 손을 뻗으며 막 밖으로 나서려는 하녀를 향해 물음을 던졌다.
“테아와 제르망 자작 영애는?”
“두 분은 함께 서재로 가셨어요.”
“서재?”
“네, 듣기로는 서로 친분을 쌓기 위해 서로의 관심사부터 알아보기로 하셨다고…….”
하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데인이 화살보다도 더 빠르게 문턱을 넘어 서재가 있는 방향으로 사라졌다.
덕분에 아침 식사를 동생에게 빼앗기지 않을 수 있게 된 에드윈이 여유롭게 스푼을 들었다.
데인이 사라진 방향을 물끄러미 보던 하녀가 제 뺨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언제 봐도 데인 도련님이 가장 유난이시죠.”
“나름대로 테아를 아끼는 거지.”
걸쭉한 수프 위로 잘게 찢은 빵을 올린 에드윈이 한 스푼 크게 떠 입에 넣었다.
“음, 맛있다.”
테아의 방식으로 먹으니 역시 맛이 두 배는 더 좋은 것 같아.
* * *
도로테아는 미친 듯이 헐떡이며 서재로 들어선 제 외사촌을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막 발레리에게 자신의 애장 도서들을 보여 줄 참에 들이닥친 그는, 도로테아의 손에 들려 있는 서적들을 보고 두 눈을 부릅뜬 채 제 가슴을 쥐어뜯었다.
‘드디어 정신을 내어놓은 모양이로구나.’
어릴 때부터 위태하다 했더니 이제 영영 가 버린 모양이었다.
그러나저러나 손님을 세워 두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법이지.
도로테아가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소년을 가볍게 밀어냈다.
“비켜.”
도로테아가 쌓아 올린 책 더미를 본 그가 재빠르게 그녀의 어깨를 쥐었다.
“테아야, 들어 봐. 이건 진짜 아니라서 그래. 너 이러다 갓 생긴 친구까지 다 잃을 거다.”
그녀는 외사촌의 간절한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발레리를 향해 책을 내밀었다.
[괴물 백과] [죽음 그 이후] [사신과 인간] [이 세상의 모든 인외 존재] [저주 총서]
그 외에도 기본 격투와 무예에 관한 책 몇 권이 발레리의 앞에 쌓였다.
발레리는 짙은 속눈썹이 깊게 드리운 눈으로 건네받은 책을 하나하나 유심히 살폈다.
데인은 차마 그녀의 손에서 책을 뺏어 오지 못한 채 불안한 눈으로 연신 발레리의 표정을 확인했다.
꼼꼼히 페이지를 넘긴 발레리는 다음 책도, 그다음 책도 아무 말 없이 정독했다.
오랜 시간을 도로테아의 ‘관심사’를 살피는 데에 집중했던 그녀가 이윽고 마지막 책을 덮었다.
“독특하고 희귀한 책들이네요.”
빙긋 웃으며 꺼낸 말은 지극히 사실이었다.
그 누구도 일부러 찾아볼 만한 물건이 아니니 서점에서조차 취급이 드물었다.
“알아보기 쉽도록 상세한 그림이 함께 있어 좋은 것 같아요.”
그건 도로테아가 설명뿐만 아니라 그림으로 묘사된 책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아, 저주 총서. 저도 이 책은 소장하고 있어요.”
하필이면 그걸 소장하고 있다니.
하나하나 감상을 듣고 있던 데인은 그제야 깨달았다.
‘얘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구나.’
하긴, 제 발로 직접 도로테아와 친구가 되고 싶다며 적극적으로 다가온 영애가 평범할 리 없었다.
최근 독서 목록을 공유하고 난 도로테아는 무언가를 기다리듯 고개를 들고 서재 바깥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그런 그녀를 보던 데인은 속으로 시간을 가늠해 보다 이내 도로테아가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새하얗게 질렸다.
만류할 새도 없이, 복도 너머로 쿵쿵 거친 발걸음이 들려왔다.
쿵쿵 소리가 울릴 때마다 복도뿐만 아니라 서재까지 조금씩 울려 퍼진 진동이 그녀들에게 닿았다.
발레리가 눈을 끔뻑이며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리기가 무섭게,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튼튼했던 문이 뜯겨 나갔다.
“이런 제기…….”
거친 욕설이 귀에 때려 박혔다.
한 손으로 제가 부숴 먹은 문을 저 멀리 날린 거인이 서재의 문턱을 넘어 들어오며 투덜거렸다.
“그러니까 좀 튼튼한 것으로 박아 두라 했건만. 영 못 쓰겠군.”
에이든 하이클레어는 제 잘못은 하나도 없다는 듯 반성 한 점 없는 얼굴로 서재에 들어서서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조카를 향해 활짝 웃었다.
“테아야, 오늘 나와 약속한 훈련 시간을 잊지는 않았겠지?”
“숙부.”
도로테아는 처음 후작가에 발을 들였을 때보다 거의 두 배 가까이 자라났다.
이제는 또래와 엇비슷해 보일 만큼 자랐지만, 커다란 덩치를 가진 에이든 앞에서만큼은 여전히 자그마해 보였다.
그녀가 고개를 바짝 들어 에이든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손님이 방문해 있어요.”
도로테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옆에 있던 발레리가 무릎을 살짝 굽히며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에이든 하이클레어 경. 전장에서의 눈부신 활약에 대해서는 익히 들었습니다. 제르망 자작가의 발레리라 합니다.”
“제르망 자작이라면 나도 뵌 적이 있지. 괜찮은 분이시고.”
마지못해 화답하는 에이든의 목소리에 실망감이 서렸다. 모처럼 기다린 조카와의 오붓한 시간이 사라지리라는 불안한 예감이 그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반면 옆에서 조마조마하게 이를 지켜보던 데인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안 그래도 가뜩이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숙부가, 발레리 같은 귀족 영애를 상대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그래, 테아가 아무리 유별나도 상식이 없는 건 아니니까.’
마음을 놓으려던 데인은 다음 순간 도로테아의 입에서 나온 말에 제 귀를 의심했다.
“그러니 발레리 영애와 함께 훈련에 참여할까 해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서재를 나가려던 에이든의 눈에 환희가 샘솟았다.
그와 달리 데인의 눈에는 경악이 서렸다.
전장의 미친개라 불리는 에이든은 자신의 앞에 나란히 선 토끼 같은 두 소녀를 바라보며 들뜬 마음으로 굳게 다짐했다.
‘오늘 내 살아오며 배운 모든 것들을 이 아이들에게 전수해 주어야겠다.’
어린 나이부터 전장에서 구르며 경험한 모든 생존법과, 상대를 철저하게 제압하고 복종시키는 법까지.
그는 스스로가 전장에서 살아남으려고 행했던 모든 것들을 기꺼이, 아낌없이 전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