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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52)화 (52/242)

혼술사 도로테아 52화

“너는 누구냐. 누구의 명을 듣고 이곳에 왔지?”

필사적으로 엉금엉금 기어가는 남자의 등을 발로 짓밟은 황자가 물었다.

남자는 추궁에 답하는 대신 빈 허공으로 손을 뻗어 휘저으며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 내 정령……! 내 정령을……!”

그 눈에 가득 찬 소유욕을 들여다보며 도로테아가 나직이 알려 주었다.

진정 그는 ‘정령’을 이식받으면서도 제가 무엇을 받는지 몰랐을까.

불에 덧씌워진 그 가엾은 혼을, 스스로가 무엇인지조차 잃고서 만들어 낸 불 속에 갇힌 그녀를.

제 손에 움켜쥔 것이 한때 살아 숨 쉬던 사람이었음을 알면서도 눈을 감은 걸까.

“그녀는 정령이 아니야.”

역겨운 수작에 제 모습을 잃은 ‘거짓된 망령’에 불과하다.

감히 누가, 죽은 자의 평온을 방해하는 것일까.

생의 기억을 잃고서 해방될 수 없는 감옥에 갇혀 도구가 되어 버린 처참함을 직접 목격한 기분은 끔찍하고도 구역질이 났다.

“이건 내 정령이야! 내가 이것을 받기 위해 무슨 짓을 했는…….”

“무슨 짓을 했는데?”

서늘한 말이 날아드는 것과 동시에 남자가 제 옆구리를 움켜쥐고서 비명을 질렀다.

불에 닿은 듯 쪼그라든 옷감 사이로 보인 피부에서 몹시 붉은 수포가 올라오며 뜨거운 물에 덴 것처럼 진물이 나기 시작했다.

불에 탄 상흔이 그의 온몸을 뒤덮었다.

“네가 그녀의 혼에 새긴 상흔이야.”

가슴으로 바닥을 밀며 어떻게든 통증을 덜어 보려는 애석한 움직임을 물끄러미 바라본 그녀가 물었다.

“산 채로 열기 속에 갇혀 천천히 자신을 잃어 가는 기분이 어때?”

바닥에 비벼 댄 얼굴은 이미 진작 피투성이가 되었다.

남자의 입안에 고인 침이 입가로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본 루크의 미간이 좁아졌다.

“왜 이러는 거지?”

도로테아는 그 무엇도 명확하게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녀는 업보를 돌려받는 남자가 저지른 끔찍한 죄에 대해 입을 여는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어.”

엉금엉금 기어 루크의 발을 붙잡은 남자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도로테아는 무심한 눈으로 그런 남자를 내려다보며 조언했다.

“파티마의 시신이 있는 곳을 이 남자가 알고 있을 거야. 이자의 입이 닫히면, 우리는 영원히 그녀를 찾지 못하겠지.”

도로테아가 엿본 파티마의 수많은 기억 중 일부는 마치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감쪽같이 지워져 있었다.

특히 사랑하던 남자의 죽음 이후 그녀가 접촉한 사람들에 대한 것과,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모두가.

분명 누군가를 향한 두려움의 감정은 생생히 느껴지는데도 그것이 누구인지 볼 수가 없었다.

그러니 못다 한 말을 두고 끝끝내 흩어진 혼을 대신해, 조금이라도 지껄일 수 있는 자에게 물어야겠지.

한참 남자를 들여다본 도로테아가 뒤로 몇 걸음 물러서서 물끄러미 루크를 바라봤다.

“무슨 뜻이냐.”

“알아내야지. 시신이 묻힌 곳.”

제 옷을 가볍게 털어 내는 것을 보니 이제 그녀가 할 일은 다 끝났으니 험한 고문은 네가 하라는 눈치였다.

“…….”

맞는 말이지만, 왜 꼭 험한 일을 떠맡게 된 듯한 찜찜한 기분이 드는 걸까.

말없이 도로테아를 응시하던 황자가 느릿하게 남자를 향해 몸을 굽혔다.

*   *   *

“뜻밖에도 예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군.”

마찬가지로 헤르티아와 비슷한 금제가 걸려 있던 남자는 몇 마디 정도만 내뱉은 채 그대로 죽음을 맞이했다.

파티마의 시신은 술집과 그리 멀지 않은 담벼락 아래에서 나왔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처럼 생생한 극단 동료의 시신에 레번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는 살아 있을 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상처 하나 없이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수습한 시신은 조사 후 공동묘지로 옮기지.”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루크가 건넨 말에 그녀는 답 대신 붉게 물들어 가는 창밖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게르만 백작가에서 이 사실을 인정할까?”

남자가 실종된 지 며칠이 지났음에도 치안대로 들어온 실종 신고는 전무했다.

설령 게르만 백작가가 영식의 죽음을 눈치채진 못했더라도, 지금까지 파티마의 존재를 줄곧 반대해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여 실종이 알려지면 일의 전말이 드러날까 두려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지도.

하지만 그리하여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싸늘한 시신조차 아닌, 한 줌의 잿더미뿐이었다.

“글쎄, 그들이 선택하겠지.”

끝끝내 죽은 남자가 백작가의 실종된 영식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잿더미마저도 허공에 흩날리리라.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평판하니 생각난 건데, 나는 어떻게 돼?”

영애들이 모여 있는 티 파티에 난입한 황자가 그녀를 데려갔다는 사실은 훗날 꽤 큰 추문으로 번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대개 신분이 낮은 쪽이 높은 쪽보다 손해를 보기 마련이고.

아직 약혼조차 하지 않은 영애가 미혼의 황자와 단둘이 자리를 떴다는 것이 알려지는 순간 사교계가 들썩일 터.

“제르망 자작 영애가 해결할 거다.”

“그녀와 친해?”

“친분은 없지.”

“그런데 그녀를 믿어?”

“그녀를 믿을 필요는 없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을 내가 쥐고 있으면 될 뿐.”

거래하는 것을 몹시도 좋아하는구나.

5년 전, 우드의 신분을 약점으로 잡아 자신에게 ‘약속’을 받아 냈던 것처럼 이번에도 황자는 발레리와 모종의 거래를 한 모양이었다.

‘그것이 어쩌면 감정을 나누는 것보다 덜 손해 입는 방법일지도 모르지.’

고개를 주억거린 도로테아는 어느새 제 옆구리를 파고들며 장난을 치는 정령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파티마는 몹시도 운이 좋았다.

그녀는 ‘덧씌워진 지’ 오래 지나지 않았던 데다, 도로테아가 그녀의 지워진 ‘이름’을 되돌려 줌으로써 갇혀 있던 자아가 다시 깨어날 수 있었으니까.

덕분에 절반의 타작이긴 해도 사건에 관여된 인물들의 전말도 알 수 있었고 그녀의 죽음과 시신도, 혼의 존엄도 지켜 줄 수 있었다.

“네 진짜 이름은 뭘까?”

나직이 중얼거렸지만 물의 정령은 도로테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더욱 장난에 열중했다.

신이 난 어린아이 같은 행동에 옅은 미소를 띤 도로테아가 정령을 쓰다듬었다.

황자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 무기물처럼 숨소리를 죽인 채 그녀의 곁에 자리하고 있는 기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약속했던 5년이 다가왔다.

그건 그녀의 곁에 두었던 인형을 이제 그만 회수해야 할 때가 왔다는 의미였다.

조만간 그를 궁으로 불러들여야 할 텐데.

“…….”

도로테아의 앞에 서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뽑아 들던 기사의 모습을 떠올리자 루크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쩌면 정말로, 아껴 두고 있던 것을 저 소녀에게 내준 꼴이 된 것일지도 몰랐다.

*   *   *

발레리 제르망이라고 했던가.

그녀의 수완이 좋은 것일까, 황자의 이름값일까.

소문이야 시간이 지나 봐야 알게 될 일이지만, 적어도 오늘 일을 철저히 불문에 부친 것은 분명한 듯 가문으로 돌아간 도로테아를 의심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제르망 자작 영애가 직접 양해의 서신을 보내 주었단다.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낸 모양이로구나.”

흐뭇해하는 숙모의 얼굴을 보며 도로테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이 남는 즐거운 일이라도 있었니?”

“…….”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흐뭇하게 웃고 있는 가족들은 그녀가 오늘 있었던 이들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해 주길 기대하는 눈초리였다.

적당히 머리를 굴려 오늘 있었던 일들을 섞던 그녀가 첫마디를 꺼냈다.

“티 테이블에 차려진 음식들이 몹시 훌륭했어요.”

“어머, 그래?”

“티 파티가 열린 온실의 온도에 맞춰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차에 따라 단 것뿐만 아니라 고소하거나 씁쓰름하고 짭조름한 다과들이 종류별로 마련되어 있었어요.”

첫 번째 접시에서 시작해 세 번째 접시까지의 감상을 이어 갈 동안 도로테아의 감상을 조용히 듣고 있던 데인이 불쑥 끼어들었다.

“거기서 먹기만 했어? 사람도 만났을 것 아냐.”

“응, 만났어.”

“어땠는데?”

영애들의 인상은 대부분 평이했다.

개중 눈에 띄는 사람이라면 역시 호스트인 발레리와 자신에게 적대감을 불태우던 이름을 알 수 없던 영애 정도일까.

“발레리 영애는 분위기를 잘 띄우고 대화를 이끌 줄 아는 사람이었어.”

“나는 네가 그 초대를 받아들일 줄은 몰랐는데. 그 전에 무도회에서 발레리 영애를 알았다고 했지?”

“응.”

“인상이 좋았나 보구나.”

미소를 지은 에드윈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와 함께 먹었던 체리 케이크의 맛이 너무 훌륭했던 덕에 발레리 영애를 떠올릴 때마다 그 맛이 다시 떠올랐으니까.

“그리고 또?”

“되게 재밌는 영애도 있었어.”

“그래?”

“신전과 황족을 싸잡아서 욕하는 영애.”

“…….”

거기에 더불어 자신을 향한 모욕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굳이 그런 것까지 이야기해서 가족들을 가슴 아프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되게 용감하다고 생각해.”

루크의 눈빛을 받고 울음을 터뜨리긴 했지만, 살기 가득한 눈빛에도 혼절하지 않았으니 그 정도면 훌륭하게 잘 버틴 셈이다.

“그, 랬구나.”

잠시 어색해진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후작 부인이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티 파티에서 영애들과 나누는 이야기들 중에는 제법 쓸 만한 정보들도 많단다. 그녀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유용하게 여기렴. 이를 테면 최근 유행하는 것이나 흥미로운 사건 같은 것들.”

대화에 거의 참여하지 못한 채 나왔으니 딱히 들은 것이 없었던 도로테아가 눈을 깜빡였다.

알아낼 수 있는 정보라.

오늘 하루 동동거리며 돌아다닌 끝에 그녀가 알아냈던 것들을 굳이 말하자면…….

“거리에서 공연을 하는 유랑 극단이 있어요. 공연이 조잡해서 보는 이들이 거의 없대요. 대개 거리를 떠돌던 어린 고아들이 모여들어 만든 극단인데 하루 한 끼, 검고 딱딱한 빵을 배식받아 먹어요.”

“그런 사람들이 있대?”

“겉은 바스라지듯 가루가 나고, 안은 퍽퍽해서 물 없이 삼키기 힘들어 침을 조금씩 적셔 가며 갉아 먹어야 하지만, 하루에 한 번 받을 수 있는 식사라 다들 감지덕지해해요.”

마치 그곳에 가서 직접 경험이라도 한 것처럼 생생한 묘사였다.

지나치게 생생한 묘사에 펠릭스의 눈매가 깊어졌지만 그는 조카의 말을 파고드는 대신 귀 기울여 듣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공동묘지에 시신을 안장하는 법을 들었어요.”

“…….”

사실은 눈으로 본 것이지만, 귀로 들은 이야기를 하라 했으니 그리 말할 수밖에.

그녀의 말에 다들 조금씩 묘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티 파티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을 들으며 도로테아의 첫 사교계 활동을 축하해 줄 생각이었는데.

“그리고 범죄와 관련되어 검시소로 가게 된 시신은 해부한 뒤에 불에 태워 재로 만든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그러니까 도로테아는 발레리 제르망 영애가 연 티 파티에 가서 신전과 황족을 욕하는 영애를 만나 용감하다고 감탄하고, 그 뒤에는 유랑 극단의 배우들이 딱딱한 빵을 갉아 먹는 방법을 들은 뒤에, 공동묘지에 시신을 안장하고 해부된 시체를 화장하는 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단 말인가.

“발레리 제르망이라.”

“제르망 자작의 평판이 어땠었죠?”

“그 친구 그렇게 안 봤는데.”

“아니면 요즘 젊은 영애들 티 파티의 대화 주제가 그런 쪽일…… 리는 없겠죠?”

대화에 두서도 없고, 주제도 명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쓸데없는 정보들로만 가득하지 않은가.

애써 웃음을 짓고 있던 펠릭스의 아내이자, 데인과 에드윈의 어머니인 다이애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서 즐거웠니?”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래, 그럼 된 거지.”

첫 사교계 활동에 너무 많은 것을 바랐는지도 몰라.

다들 그렇게 상황을 정리하고 좋은 방향으로 마무리하면서도 찜찜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그 찜찜함은, 다음 날 저택을 방문한 발레리 제르망을 향한 집요한 시선으로 이어졌다.

*   *   *

발레리 제르망의 방문에 가장 먼저 응접실로 향한 다이애나는 그녀에게 차를 내주며 조심스럽게 현숙해 보이는 영애를 살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제르망 영애.”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부인. 이렇게 후작가에 방문하게 되어 기뻐요. 실은 오래전 할아버님께 작고하신 전대 후작님께서 저희 삼촌을 구해 주신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속으로나마 홀로 호감을 품고 있었답니다.”

나긋하고 호의가 가득한 목소리에 다이애나의 경계심이 조금 내려갔다.

어딘가 골몰히 살피던 시선에 부드러운 기운이 감돌자 발레리가 웃었다.

“어제도 정신없이 대화에 열중하다 보니 시간이 그리 늦어지는 것도 몰랐지 뭐예요.”

“아, 그 대화…….”

그 가감 없던 대화들 말하는 거구나.

막 낮아지려던 다이애나의 경계심 수위가 도로 높아졌다.

그녀는 귀부인답게 우아한 손놀림으로 눈앞의 어린 영애에게 찻잔을 건네주며 다정한 미소와 함께 당부했다.

“아직 어린 영애들이니 다양한 주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만은 아니지요.”

“네?”

“물론 그건 나쁜 일이 아니에요. 그 또한 언젠가 유용할 수도 있겠지요.”

물론 시신을 화장하는 법이 유용하게 쓰일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지만 사소한 것들에 관심을 가져 보는 것도 괜찮아요. 이를테면 집에서 키울 수 있는 작은 동물이라든가, 예쁜 브로치 같은 액세서리라든가.”

공동묘지나 시체를 화장하는 법을 배우거나, 신전과 황족을 욕하지 말고.

다이애나의 말에 잠시 눈을 끔뻑이던 발레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부인의 말씀이 옳아요.”

어안이 벙벙한 그녀를 앞에 두고 만족스럽게 차를 한 모금 머금은 다이애나의 뒤로 느지막하게 일어난 도로테아가 들어섰다.

영문도 모른 채 귀부인의 집요한 견제를 받고 있던 발레리는 뒤늦게 등장한 도로테아를 향해 몹시 반가운 얼굴을 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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