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사 도로테아 51화
“성의, 성의라.”
도로테아의 말을 되뇌던 정체불명의 남자가 손가락으로 톡톡 주변의 테이블을 두드렸다.
이윽고 생각을 마친 그가 그녀를 보며 입꼬리가 찢어지도록 위로 올렸다.
“참으로 재밌는 영애로군. 좋아, 성의를 원한다니 최선을 다해, 아주 성의껏 저세상으로 보내 드려야겠어.”
희열에 물든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기대로 가득 찬 눈동자가 그녀를 연신 위아래로 훑었다.
주변에 있는 루크나 레번은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이쯤 되니 레번도 거금을 받고 준비하던 ‘공연’이 실은 생의 마지막 공연이 될 뻔했음을 눈치챘다. 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이미 출구조차 막힌 상황에서, 어떻게든 달아날 구석이 없을까 궁리하는 눈치였다.
줄곧 상황을 지켜보던 루크가 불쑥 입을 열었다.
“어째서 홀로 왔지?”
“음?”
“이곳에 있는 이들의 입을 막으려 온 것이 아닌가. 홀로 이 모든 이들을 처리할 생각이었나? 우리처럼 식사를 하지 않은 이가 있다면 어쩌려고.”
묘하게 여유로운 남자의 태도가 거슬린다는 듯한 루크의 말에 남자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지적이야.”
그가 천천히 팔을 뻗었다.
순간 공기의 흐름이 바뀌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불이라도 난 것처럼 후덥지근한 열기가 주변을 가득 채웠다.
“아직까지는 상태가 불안정해서 굳이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 했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그의 손가락에서 어른거리던 주홍빛의 흐릿한 형체가 점점 더 선명해지더니 이내 어떠한 ‘형태’가 되어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도로테아의 시선이, 익숙하지만 낯선 동물 형상을 한 주홍빛 영체를 향해 고정되었다.
“정령사.”
“그래, 너희 같은 것들이 인생을 살며 정령을 볼 일이 있을까. 이참에 실컷 구경해 두는 것도 좋겠지.”
놀란 시선이 남자를 향해 모여들었다.
피부로부터 전해지는 열기에 압도된 듯, 레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만 있었다.
갑작스레 등장한 불의 정령을 보는 루크의 눈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가늘어졌다.
제국의 황제조차도 쉽게 보기 힘든 정령사를, 고작 살인 사건을 쫓다 보게 될 줄이야.
황자의 시선이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서 정령의 앞에 서 있는 소녀를 향했다.
도로테아는 일렁이는 불꽃을 휘감은 여우의 형상을 담담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이 불의 정령인가.’
이미 자신도 물의 정령이 있으니 정령의 존재를 보고 놀랄 일은 없었다.
다만 정령을 가진 자를 만나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
처음에 볼 수 없었던 것이 조금 더 선명하게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겪어 보지 않아 놓쳤던 사소한 사실이 모여 진실을 만들어 내는 법이었다.
그녀의 눈은 눈앞의 존재에 대해 그 무엇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타오르는 불꽃을 샅샅이 훑었다.
‘익숙한 기운이야.’
전생에서는 자아를 가진 ‘자연계의 영’을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곳의 정령들을 마주할 때마다,묘한 익숙함과 위화감을 느꼈다.
‘이건 분명 불의 기운이지.’
직접 정령계로 향하는 ‘문’을 본 적 있으니, 그 존재를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뜨거운 열기를 허공에 흩뿌리고 있는 정령을 바라보던 그녀가 이윽고 의기양양한 얼굴의 남자를 향해 입을 뗐다.
“‘당신도’ 그들에게서 정령을 이식받았어?”
남자의 눈이 커졌다.
그는 여전히 도로테아의 신원은 파악하지 못한 눈치였지만, 그녀의 말에 웃음기를 지워 냈다.
마치 들켜서는 안 되는 비밀이라도 들킨 사람처럼.
“귀여워서 데리고 놀아 줄까 했더니 안 되겠군. 너, 뭐 하는 계집이냐?”
“나도 마침 데리고 있는 정령이 하나 있거든.”
도로테아의 소매에서 후덥지근한 공기를 식힐 청량한 느낌의 정령이 튀어나왔다.
익숙한 형태의 정령을 본 남자가 눈을 부릅떴다.
“너!”
“눈을 보아하니 내가 찾던 이들이 맞는 모양이구나.”
“어떻게 그 정령을, 네가!”
“도대체 그런 사술과 금제를 자유자재로 쓰는 이들이 누굴까 궁금했는데. 참 뜻밖의 일에서 단서를 찾게 되네.”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뒷걸음질 치던 남자는 출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루크를 보자 빠득 이를 갈았다.
“제아무리 물과 불의 상성이 있더라도, 내 정령이 훨씬 상급의 존재다.”
“아, 그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도로테아가 여유롭게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상성 같은 건 상관없거든.”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몸집을 크게 부풀린 ‘리리’가 솥뚜껑만 한 아가미로 여우의 형태를 한 불의 정령을 후려쳤다.
뒤이어 나가떨어진 정령을 꼬리로 다시 한번 두들긴 뒤에 몸통으로 짓누르며 불길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저, 저게 뭐야!”
남자는 물론이고 레번도 입을 벌렸다.
루크조차도 정령이 선보이는 ‘격투 기술’에 눈썹을 위로 올렸다.
“정령이라고! 정령에게 뭘 가르친 거냐!”
“뭐. 쓸데없이 상성이니 뭐니, 그런 걸 써 놓은 서적이 있긴 하던데.”
도로테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리리는 그동안 갈고닦아 온 실력을 내보인다는 사실에 몹시 들떴는지, 따로 지시한 적 없는 기술들까지 현란하게 선보였다.
‘물의 정령’이기 전에 이 아이는 도로테아의 ‘권속’이다.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하게 만들지는 모두, 도로테아 그녀의 의사에 따라 결정되는 법.
“우리 애는 남들이 정령 기술 배울 때 연무장에서 굴렀거든.”
게다가 콜린에게 종종 강탈해 온 혼력을 먹여, ‘실체화’를 더욱 강화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영체에게는 육체가 없지만, 그와는 별개로 혼 그 자체를 단단하고 튼튼하게 만드는 것은 가능했다.
거기에 전장의 미친개라는 에이든을 흘끔거리며 익힌 격투 기술 또한 최상이었다.
“정령이, 내 정령이……!”
격투는 물론 낙법 한 번 배운 적 없던 불의 정령은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어느새 몹시 집중해서 정령들의 ‘격투’를 보고 있던 레번이 신기한 듯 중얼거렸다.
“정령사들 간의 대결이란, 어마어마하군.”
“…….”
흔한 정령사들의 대결과는 전혀 다른 모양새였지만 그걸 알려 줄 만한 이가 있을 리 만무했다.
무언가 몹시 잘못된 편견을 탑재하게 된 레번을 힐끔 바라본 루크가 이내 바닥에 드러누운 정령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이윽고 무언가 단서를 잡아낸 것인지 정령을 살피던 도로테아의 남색 눈이 이채를 띠었다.
“프리드, 미네를 데려가.”
“…….”
뒤에 조용히 시립해 있던 기사가 품속의 아이를 데려가 눈을 가렸다.
길고 곧은 도로테아의 손이 천천히 눈앞의 정령을 향했다.
일렁이는 불꽃은 그녀의 손을 태우기는커녕 간질이지조차 못 했다.
정령을 부리던 남자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도대체 어떻게 내 정령을…….”
하얀 손이 소중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불꽃을 어루만졌다.
“여기 있었군요.”
처음에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영체를 통해 열린 문 안에서 본 ‘정령’들과, 이곳에서 만난 정령사라 칭하는 이들이 계약을 맺은 정령들은 묘하게도 가진 분위기와 결이 달랐다.
결정적인 차이점을 깨달은 것은 그녀가 데리고 있는 물의 정령 ‘리리’ 덕분이었다.
진정 그 정령이 자연에서 탄생한 순수한 영체라면, 인위적인 과정을 거친 사람의 혼력을 먹고 성장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지나치게 소환자와의 연결이 약했던 것도.
혼력을 집어삼키고도 멀쩡할 수 있는 괴상한 식성도.
꼭 무엇인가 억지로 ‘정령’의 형태로 잡아 둔 것처럼.
그리고 이 정령도 마찬가지였다.
“애석하네요. 미네가 많이 슬퍼할 텐데.”
매만지는 손길에도 꿈쩍하지 않던 정령은 ‘미네’라는 이름에 동요한 듯 일렁였다.
마치 그 이름의 주인을 아는 듯이.
조용히 정령을 내려다보던 도로테아의 손이 그대로 여우의 형체를 한 ‘정령’의 몸통을 꿰뚫고 들어갔다.
“저, 게 무슨…….”
자신을 정령사라 칭하던 남자가 기겁한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마치 전생의 그녀를 숭배하면서도 두려워하던 이들이 그랬듯이, 꺼림칙하고 기괴한 괴물을 보는 눈을 하고서.
“어쩌면 살아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어.”
…….
“왜냐하면 내겐 당신의 기척이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으니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했던가.
그와 마찬가지로, 가끔은 그녀가 ‘볼 수 없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 여겨질 때도 있었다.
혼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아직 세상을 떠나지 않았거나, 한을 품은 ‘귀’가 되어 이 땅에 남아 있지 않고 무사히 다음 생을 위해 성불했다는 뜻이니까.
그러니 어딘가 아주 멀리 달아나,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겼건만.
찰나의 순간 ‘그 방’에서 봤던 울음 가득하던 얼굴이 기억에 스쳤다.
그 얼굴에 비치던 고단한 삶의 흔적들까지.
“줄곧 그곳에 있었구나.”
그녀의 손이 불길 속의 무언가를 움켜쥐었다.
비록 연약해지긴 했으나 아직 온전하게 ‘융합’되지 않은 혼이 쉽사리 그녀의 손에 끌려 나왔다.
도로테아는 불꽃처럼 일렁이는 혼을 향해 나직이 진명(眞名)을 돌려주었다.
“파티마.”
…….
형체도 갖추지 못한 불길이 여기저기 뻗어 나가다 이내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마지막까지 그녀를 삼킬 듯 일렁이는 정령의 몸부림은 몹시도 위협적이었다.
“파티마.”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도로테아의 ‘부름’에 혼은 점차 자신을 되찾기 시작했다.
이윽고 불길과는 완연하게 분리된 희끄무레한 영체가, 어느 여인의 형태를 갖추었다.
살아생전의 모습과 별 다를 바 없는 아름다운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파티마.”
비로소 다시금 불린 이름에 한때 ‘파티마’라 불리던 그녀가 서글픈 미소를 띤 채 도로테아를 굽어 내려다보았다.
* * *
흔한 이야기였다.
찢어지게 가난한 극장에서 길거리 공연으로 벌어먹으며 가끔 부업을 통해 주머니를 채우는, 앞이 보이지 않는 몹시도 캄캄하고 어두운 삶.
한여름에도 냉기가 떠나지 않는 바닥에서 잠을 청하고, 오래되어 딱딱한 빵을 갉아 먹는 것에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현실보다 더 암담한 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의 위치였다.
자신을 물건처럼 취급하는 데에 익숙해진 사람들.
그저 지나고 스치기만 해도, 연이 닿는 것만으로도 꺼리는 사람들.
입으로, 손으로, 때로는 눈으로도. 사람들은 직접 손을 대지 않고도 매일매일 조금씩 그녀를 죽여 갔다.
그런 지옥 속에서 그를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마차가 고장 난 그가 마침 거리의 건달들에게 주머니를 털리지 않았더라면, 그리하여 가진 옷을 빼앗겨 골목으로 숨어들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은 평생 단 한 번도 만날 수 없었으리라.
사랑은 불같이 타올랐지만 늘 불안정했다.
귀족 가문의 자제와 거리를 배회하는 극단 배우의 끝이 좋지 않으리라는 것은 너무나도 뻔하니까.
그것을 알면서도 그는 그녀를 놓지 못했고, 파티마는 그의 집착에 휘둘렸다.
만약 그가 우연하게 그녀의 ‘비밀’을 알게 되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살 수 있었을까.
* * *
흘러드는 그녀의 기억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도로테아의 눈이 깜빡였다.
“루크.”
금방이라도 흩어질 듯 위태로운 혼을 바라보던 그녀가 물었다.
“죽은 남자의 신원은 아직도 못 밝혀냈어?”
“두 사람 다 얼굴이 망가져 있었다. 젊은 쪽은 신분을 알아챌 수 있을 만한 것들이 전부 사라졌더군. 입고 있는 의복을 보면 확실히 웬만한 가문은 아닌 것 같았지만.”
“게르만 백작의 영식이야.”
“…….”
“젊은 남자 말야.”
그가 그런 곳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세간에 추문이 돌게 된다.
그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건, 그가 어떤 마음으로 그곳을 찾았건 간에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었다.
무수히 많은 자극적인 상상들이 남자를 몇 번이고 갈기갈기 찢어 놓겠지.
파티마가 남자의 얼굴을 망가뜨린 까닭은 분명했다.
그녀는 그저 망자를 경멸 어린 시선 속에 내던지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다.
“게르만 백작은 황태후의 신임을 받는 인사다. 함부로 건드릴 수 없어. 명확한 증거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미네가 알고 있을 거야. 파티마와 그가 주고받은 서신들이 있는 곳을.”
나지막한 말에 루크의 시선이 프리드의 품에 안겨 입을 꾹 다문 아이에게로 향했다.
아이는 여전히 두 눈을 가린 채 버둥대고 있었다.
“남은 사람의 신원 또한 알고 있나?”
“…….”
“더 일찍 죽은 남자는?”
“몰라.”
짧은 답과 함께 도로테아가 눈을 깜빡였다.
위태롭게 흔들리던 혼은 축원조차 듣지 못한 채 끝끝내 흩어졌다.
“이제 정말 모르게 됐어.”
언제나 그렇듯 불친절한 도로테아의 말에 루크가 침묵했다.
그러고는 이내 알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며 바닥을 뒹굴고 있는 남자에게로 다가섰다.
“그렇다면 나머지 질문은 이자에게 해야겠군.”
멍하니 황자를 올려다보는 남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